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21)
95년 학살자 처벌 투쟁을 통해 한총련의 대중운동은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나 ‘사람사랑 학생회’라는 흐름이 나타나면서 사상-조직 운동은 위기로 빠져들었다. 장사꾼들 말을 빌려쓰자면, ‘앞으로 벌고 뒤로 까졌다’ 또는 ‘사상 최고의 매출 기록 후, 회사가 쪼개지는 모습’으로 비유할 수 있으려나.
통일운동의 분열이 한총련 조직 내부에 스며들어, 한총련 조직을 분열로 몰아넣었던 ‘사람사랑 학생회’를 분석해보자.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94년 조문파동과 공안정국, 전남대 분향소, 제네바 합의
통일운동의 분열, 보안수사대vs한총련, 전남대 총학 선거
95년, 학생운동의 중흥기, 전-노 학살자 처벌, 민족사의 대전환기
학살자를 법정으로! - 95년 518 특별법 제정 투쟁
95년 가을 ‘사람사랑 학생회’의 등장, 사상-조직운동의 위기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95년 가을 ‘사람사랑 학생회’의 등장, 사상-조직운동의 위기
등장부터 소멸까지 2~3년, 하지만 상처는 오래간 ‘사람사랑 학생회’
‘사람사랑 학생회 노선(이하 사람사랑 노선)’이 무엇이라고 속 시원하게 규정내리는 사람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96년 연세대 항쟁 이후 학생운동 일선에서 졸업(?)한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특히나, 광주토박이로 살면서 전남대에서 활동했기에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문서들이나 기억들을 조합하여 이야기를 시작한다. (정확한 기록을 남겨야 하기에, 나의 기억이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의견 주시라)
아마도, 80년대나 9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선배들은 사람사랑 노선이라니 듣보잡일 것이다. 여기에, 사람사랑 노선은 95년 반짝 등장했다가 98년 사실상 소멸했다고 보기에, 한총련 운동에서 극히 작은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사랑 노선에 따른 한총련의 내부 분열을 알지 못하면, 96년 연세대 항쟁과 97년 김영삼 타도 총궐기 투쟁으로 이어졌던 흐름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95년 전두환, 노태우를 감옥에 보냈던 자랑스러운 역사와 함께 찾아온 한총련 내부의 분열, 가슴 아픈 기억이지만, 이 또한 객관화시키고 기록을 남겨야한다.

구경꾼, 평론가들이 이야기하는 ‘사람사랑 학생회’
90년대 중후반 학생운동 주변의 구경꾼, 평론가들은 보통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에, 투쟁의 현장에 있었던 주체들은 침묵하고 있다보니, 이런 식의 뇌피셜 서사구조가 정설로 굳어진 듯하다.
“94년 통일운동의 분열-분화를 거치며 NL진영 학생운동도 온건파(?)인 사람사랑 학생회와 강경파(?)인 자주적 학생회로 나뉜다. 95년 학살자 처벌 투쟁으로 탄력을 받은 NL강경파가 주도권을 잡고 96년 연세대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을 강행한다. 온건NL은 나름 합리적이었으나, 전남대와 남총련이라는 과격파(?)에 밀려 힘을 쓰지 못했다. 시대착오적인 강경NL이 주도한 96년 8월 연세대 통일대축전에서 폭력이 난무하였고, 국민의 지지를 받지못한 투쟁으로 김영삼 정권에게 탄압의 빌미를 주게되어 학생운동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 구경꾼, 평론가들의 서사 구조는 다분히 악의적이며 사실관계도 다르다. 이들의 뇌피셜로는 남총련은 피에 굶주린 폭력세력이며,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패권주의로 무장하여 의장의 명령에 따라 돌격하는 집단이어야 한다. 그런데, 95년 당시 남총련은 가장 대중적이고 합리적인 운동으로 학우 대중의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는 ‘가해자 중심주의’다. 김영삼 정권에게 ‘맞을 짓을 해서 얻어 맞았다’라는 꼴통 마인드에 2차 가해까지 서슴치 않고 있다. 물론, 진중권 등 반북혐오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런데, 이러한 서사구조, 어딘가 익숙하지 않나? 2008년 민주노동당-진보신당 분당 사태 때 비슷하게 재현되었고, 4년이 지난 후 2012년 통합진보당 분당사태 때도 그대로 재현됐다)

남총련 출신들은 한총련 집행부로 뽑히는 것을 꺼려했다
남총련 출신 활동가들은 96년 정명기, 97년 강위원 의장이 선출되면서 한총련 집행부로 뽑히는 숫자가 늘었고, 그전까지는 한총련 중앙 집행부에서 일하는 것을 꺼려했다. 가장 큰 이유는 불편했다. 남총련은 실천 중심 조직이었는데, 서울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정파들의 대립은 순진한(?) 남총련 투사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가투는 잘하지만, 말싸움에는 젬병이었고, 동지들끼리 싸우는 것은 정말로 싫어했다. 스스로 먼저 결의하고, 스스로 손해보는 것이 남총련의 정서였다.
다음으로 학우들의 지지도가 광주와 서울은 달라 어떻게 움직여야할지 부담스러웠다. 전남대와 조선대는 당시까지 학생회 권력이 운동권 주류에서 바뀐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남총련은 다른 지역 학우들은 힘든 환경에서 싸우고 있다고 존중하며, 그들이 집행간부를 맡는 것에 불만이 없었다.
95년 전남대 총학생회는 가장 대중적이고 합리적으로 투쟁했다. 95년 통일운동 진영이 갈라졌을 때, 전남대는 민족회의와 범민련 모두 존중했고, 민족공동행사와 범민족대회에 모두 참가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 학살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 투쟁을 진행하면서, 학생들 뿐 아니라 교수, 교직원까지 포괄하는 대중투쟁을 만들었다. 가두투쟁에서도 진압경찰이 직격탄을 난사해도, 화염병을 쓰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였다.
남총련 출신 활동가들은 한총련 집행부를 맡기보다는 남총련이 실천적인 모범을 만들어 한총련의 중심을 잡기를 원했다. 96년 정명기, 97년 강위원 회장도 한총련 의장 요청을 계속 물리치다가, 어쩔 수 없이 맡았던 것으로 알고있다.

사람사랑 노선은 친미자강-북한붕괴-합법정당이 결합된 개량주의
그렇다면, 도대체 사람사랑 노선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지난 글에서 통일운동 진영의 분열은 첫번째로 미국의 단일패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에 따라 ‘친미자강론’과 ‘반미자주론’으로 갈린다고 이야기했다. 다음으로, 94년 김주석 서거 이후 북의 시스템이 붕괴 또는 변화할 것이라는 ‘북한붕괴론’ 또는 ‘북한변화론’이 횡행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95년에는 여기에 한가지가 더 덧붙여진다. 민족민주운동의 정치세력화(또는 제도권 진출) 방식을 놓고, 합법정당을 중심에 놓을 것인지 아니면 전선운동과 대중운동을 중심에 놓을 것인지에 따라 입장이 갈라졌다.
사람사랑 노선을 거칠게나마 규정내리면, 다음과 같다. (겉으로 내세우는 슬로건은 조금씩 달랐지만, 핵심은 동일하다)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새로운 현실로 인정하여 친미자강론을 받아들였고, 북한붕괴론을 염두에 두고 자본주의 체제로 흡수통일이 불가피하다고 보았으며, 합법적인 진보적 국민정당을 창당하여 정치 공간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합법정당으로 득표율을 올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대중이나 언론매체가 싫어하는 친북 반미 등 급진적인 주장이나 과격한 집회, 시위는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는 시대착오적인 행동으로 취급한다.”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아보겠지만, 바로 뉴라이트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라고 볼 수 있다)
95년 한총련 출범식 관련 전대신문 한면 전체를 가득 채운 전대기련의 기획기사 중, ‘자주’란 단어는 딱 한곳에 숨어있다. ‘반미’란 단어는 멸종했다. 한총련 출범식 기간, 한총련진군가 수십번은 불렀을텐데, 해설기사에는 자주와 반미가 사라진 것을 뭐라고 해야할까.

95년 유화국면에 잠시 스친 환상
그렇다면, 사람사랑 노선은 어쩌다가 95년 학생운동 내에 자리잡은 것일까.
첫번째, 개량주의 노선이 퍼진 것은 95년 유화국면 속에 잠시 스친 환상이다. 95년 상황을 보자. 북미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미간 긴장이 해소되고, 미국에게도 왕따 당한 김영삼 정권은 남북간 채널을 뚫기 위해 통일운동 진영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한총련은 학살자 처벌 투쟁을 통해 대중투쟁 동력과 자신감을 확보했고, 민주노총이 공식 출범하며, 95년 지자체선거, 96년 총선, 97년 대선으로 이어지는 정치일정 속에 합법공간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에 빠져있었다.
두번째, 94년 조문파동과 공안정국 속에서 학생운동 진영이 제대로 된 대응과 토론을 못해 기회주의가 자리잡고 우편향으로 쏠렸다. 94년 한총련은 93년 늘어져있던 학생운동 진영의 텐션을 바짝 조이면서 출범선언문 등이 좌편향이라 비판받았다. 그러다가, 조문파동 와중에 터진 전남대 분향소에 대한 구차하고 찌질한 대응은 명백한 우편향이었으며, 치열한 토론과 대응으로 이어져야 할 사안을 묻어버렸다. 수구냉전세력의 반북이데올로기 공세에 무력했던 94년 한총련을 놓고, 95년 한총련 집행부는 변화와 혁신이라는 명분으로 개량주의 및 합법노선으로 기울었다.
세번째, 사람사랑 노선은 김영환이 수장으로 있던 지하조직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이 주도했다. 그래서, 95년 당시 전북총련을 기반으로 경기남부와 서총련 일부에까지 세를 넓혔으며, 저학년보다 지역총련 간부급 이상 활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의 기억속에는 객관적 조건의 유리함에 취해 기회주의자들을 받아들였다가 뒷통수를 맞은 경험이 있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을 기반으로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파와 결합하여, 낮은 수준의 구호로 외연을 확장하면, 지지율이 오르고 의석이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합당했던 통합진보당,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96학년도 선거를 앞두고 수면 위로 부상, 노선투쟁 전면화
사람사랑 노선은 95년 가을, 96학년도 총학생회 선거 시기에 수면 위로 부상했다. 95년 유화국면 속에서 개량적 흐름이 많이 퍼졌다는 것은 알았지만, ‘자주적 학생회’ 깃발을 내리고 ‘사람사랑 학생회’ 로 공식화한 것은 95년 가을이 처음이다.
사람사랑 노선은 당시에는 나름 신선한 문제제기로 보이기도 했다. 당시,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2001년 발행됐던 ‘대학생신문’ 기사를 보자. (참고로, 대학생신문은 PD계열 활동가들이 참여하여 대학생 대상으로 발행했던 매체다)
사상적 분화 앞에 무력해진 ‘통큰단결’
“95년 민족해방계열 내 분열은 서로가 ‘적’으로까지 규정할 정도였다”(권유신) 통일행사에 분열이 인 것은 95년. 자주평화통일 민족회의(민족회의)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이 각각 통일행사를 분리 개최함에 따라 민족해방계열 내에서는 통일행사 참여를 둘러싸고 논란이 제기됐다. 그리고 그 갈등이 바야흐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 바로 96년 서총련 의장 경선이다.
민족해방계열 내 사상적 분화 가시화
3월 서총련 대의원대회에서 ‘사람사랑 학생회론’을 표방하는 ‘사람사랑’의 고려대 총학생회장 이종철 후보는 “사상의 차이를 덮어둔 채 ‘통큰단결’이라고 말하는 것이 단결인가”라며 한총련의 민주적 운영, 대중적 통일운동 모색, 전국연합 중심의 현대적 국민정당 건설을 주창했다. 그러나 한총련 주류인 ‘자주대오’에 대한 ‘사람사랑’의 도전은 67표 차이로 좌절, 연세대 총학생회장 박병언씨가 서총련 의장으로 당선됐다. 이처럼 사상적 분화를 확인시켜준 경선에 대해 ‘사람사랑’은 결코 분열이 아닌 조직 내의 이견을 수렴하는 절차임을 강조했다. “남들은 분열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학생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의 모색이었다”(이병희) 그러나 실상 둘 간의 골은 돌이킬 수 없이 깊어만 갔다. “‘사람사랑’이 제기한 것 중 받아들여야 하는 지점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편향은 또 다른 편향을 낳듯이 당시에는 정파적 싸움으로 돼 버렸다. 결국 극단적 배제로 가게 돼 분열의 양상을 초래했다”(설증호)
분열은 예견됐다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내세운 ‘사람사랑’이 처음 등장한 것은 95년 말 선거. 그러나 민족해방계열의 분열은 그 전부터 이미 내재돼 있었다. 93년 김영삼 문민정부 등장으로 민주/반민주 구도가 해체되면서 민족해방계열 내부에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입장이 갈리게 된 것이다. ‘자주대오’는 김영삼정권을 여전히 ‘미식민지 대리정권’으로 규정, 정권타도를 외치며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사람사랑’은 형식적이나마 대중적인 공간이 열리고 있음을 강조, 그것을 이용할 것을 주장했다. “사람사랑 학생회가 색다른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전선에 대한 인식이 명확치 않았다”(설증호) “군부독재시대에는 범민련 식의 통일운동이 유효했지만 문민정부 하에서는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통일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총련 주류는 여전히 관성적인 통일운동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이병희)
서총련 의장 경선으로 전면화된 민족해방계열 내 사상적 분화는 다가온 4·12 총선 국면 속에서 총선불개입/개입의 입장으로 나뉘었다. ‘자주대오’는 신한국당 후보 낙선 등 투쟁으로 정국을 돌파하려고 한 반면 ‘사람사랑’의 경우 선거를 하나의 장으로 사고하며 전국연합 후보 지원운동을 벌였다. 이후 8월 통일행사를 둘러싼 논쟁은 다시금 분열을 가속화, 8월 연대사태 이후 분화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8월 연세대는 한총련의 통일운동이 대중에 근거하지 못했음을 반증한 것이다”(이병희)
96년 서총련 의장 경선은 이전부터 존재했던 민족해방계열 내 사상적 분화를 전면적으로 드러냈으며 그것이 더이상 ‘통큰단결’이라는 이름으로 봉합될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도움주신 분들:
권유신(96년 서강대 총학생회장)
박병언(96년 서총련 의장, 연세대 총학생회장)
설증호(96년 충청총련 의장, 천안 단국대 총학생회장)
이병희(경희대 92학번, 96년 전국연합 자주통일위원회 부장)
여성오(96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취재/정리: 박순옥, 이경희 기자
2001년 9월 19일 23시 24분
ⓒ대학생신문
2001년 당시 기사를 보면, 사람사랑 노선도 학생운동의 범주에 넣어줘야 할 지 아리까리하다. 그래서, 96년 서총련 의장 경선에 나섰던 고려대 사람사랑 총학생회장 이종철, 요즘 뭐 하나 찾아보았다. 국힘당에서 유승민계로 열심히 뛰고있는 것 같다. 더 이상 설명은 필요없을 듯 하다.

96년 노수석 투쟁을 거치며 사람사랑 노선은 학우들이 거부
96년 한총련 의장으로 전남대 정명기 회장이 선출되었다. 한총련 내에 통일 단결된 기풍을 세우기 위해 남총련의 힘이 필요하다는 요청이었다. 하지만, 한총련 내 분열은 쉽게 극복되지 못했다. 지역총련 의장단이 모인 중앙상임위에서 결정된 내용과 한총련 집행위 문건의 내용이 달라 황당했던 경험이 있다. 심지어, 96년 봄, 한총련 총궐기 시위 중 경찰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연세대 노수석 사인 진상규명 투쟁 때에는 정명기 의장 개인 명의로 투쟁호소문을 보내기까지 했다. 노수석 이후에도, 4월과 5월 사이에 성신여대 권희정, 경원대 전철원, 성균관대 황혜인, 여수수산대 오영권이 스러졌다. 하지만, 한총련 집행부의 움직임은 많은 이들을 실망시켰다.
한총련 집행부 내에 자리잡혀 있던 개량주의-합법노선은 96년 봄 노수석 사인진상 규명투쟁을 거치며 학우들 사이에서 탄핵되었다. 여기에 김영삼 정권은 제네바 합의 체제를 노골적으로 깨뜨리며 공안정국과 남북대결국면으로 몰아갔다. 투쟁해야 할 때, 투쟁하지 않는 집행부의 사람사랑 노선은 학우들에 의하여 거부당했다.
96년 경기남부총련 노래단 ‘천리마’의 노래를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내 취향저격이다) 사람사랑 노선이 위세를 떨치던 경인총련에서 이런 노래들이 나오다니… 나는 사람사랑 노선이 곧 소멸될 것임을 직감했다.

경기동부가 이탈하며, 사람사랑 노선은 98년 소멸
96년 연세대항쟁과 97년 한총련 출범식 사태를 거친 후, 사람사랑 노선의 거점이었던 전북총련은 한총련을 탈퇴했다. 전북총련을 비롯한 김영환 일당은, 이후에 한총련 타도 운동(?)과 정체불명의 북한 민주화 운동을 열심히 했으니, 학생운동 그룹에서 제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민혁당 내부에서 김영환과 결별한 이석기 의원 계열의 경기동부 그룹은 사람사랑 노선을 폐기했다.
한총련 조직을 갉아먹었던 사람사랑 노선은 사실상 98년 소멸한 것이다. 하지만, 한번 뿌리박힌 불신과 대립의 씨앗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98년 이후 꽤 오랫동안 한총련은 싸움의 칼끝을 내부로 돌리며 스스로 상처받고 무너졌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사람사랑 학생회에 대한 보고서를 처음으로 올린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벗들의 날카로운 지적과 토론을 기대함과 동시에, 후배들은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한총련 명예회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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