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9)
91년 오월투쟁 30주년, 이제 기억투쟁 한다면서 ‘열사여!’ 를 외치며 눈물짓거나 추모사만 낭독하는 행사는 집어치우길 바란다. 91년 오월투쟁은 87년 항쟁의 성과를 되돌리려는 지배집단의 반혁명을 분쇄한 역사적 투쟁이며, 91년 열사들은 노예적 삶을 거부하고 역사의 주인으로 우뚝 서 영원한 청춘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있다.
30주기를 맞이하여, 전남대를 시작으로 91년 오월투쟁에 대한 토론회를 준비하고 있다. 필자가 준비한 발제문을 올린다. 많은 토론이 이어지길 바라며...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토론회 발표자료의 특성상, 연재했던 기사들과 형식이 약간 다르고, 글이 꽤 깁니다. 그래도, 꼭 정독하시길 바랍니다. 의견도 보내주시구요.
91년 오월투쟁, 87년항쟁에 대한 반혁명을 막아낸 투쟁
정당한 역사적 평가와 기록이 절실. 내각제 저지와 전국연합 결성이 커다란 성과
들어가며 - 단순한 추모와 트라우마를 넘어서자
1. 91년 오월투쟁, 패배로 기억하는 이유 - 가해자 중심주의
1.1. ‘죽음을 전술로 사용했다’는 비난 속에 쌓인 트라우마
1.2. 치열한 투쟁으로도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허무주의, 패배주의
1.3. 오월투쟁 후 이어진 소련의 붕괴와 운동권 일부의 청산주의
2. 91년 오월투쟁의 배경 - 민중들의 혁명적 진출과 지배집단의 대응
2.1. 87년항쟁 이후 민중들의 혁명적 진출
2.2. 공안정국- 검,경,안기부를 총동원한 폭압
2.3. 3당합당 및 내각제 개헌 추진 - 지배집단의 반혁명 시도
3. 3당합당과 내각제라는 반혁명에 맞선 투쟁
3.1. 1991년은 내각제 개헌의 마지막 기회, 대규모 격돌은 필연적
3.2. 노태우 정권의 강경대 폭력살인을 계기로 촉발
3.3. 민족민주운동의 조직 역량을 총동원한 전면 투쟁
4. 91년 오월투쟁의 절정은 운암대첩과 박승희 장례식
4.1. 운암대첩과 박승희 도청 노제는 민중의 승리
4.2. 운암동에서 보여준 광주시민의 힘이 내각제 음모를 박살낸 것
4.3. 광주와 다른 지역 평가는 다르다
5. 당시 야당의 한계와 중산층의 외면 -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분화
5.1. 김귀정 폭력 살인에 대한 무기력한 대응
5.2. 검찰 및 수구언론을 통한 총공세 - 유서대필 조작 사건
5.3. 6월 20일 광역의회 선거로 매몰 - 야당의 한계
6. 내각제 저지와 전국연합 결성이 성과
6.1. 내각제 개헌 저지, 군부독재 연장 음모 분쇄
6.2.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결성 - 한국전쟁 후 최대의 연합조직
6.3. 한총련과 민주노총 등 자주민주통일로 넓고 깊게
마치며 - 30년, 언제까지 징징거릴 것인가
들어가며 - 단순한 추모와 트라우마를 넘어서자
필자는 전남대학교에 91년 입학했다. 고등학생 시절도 전교조 투쟁으로 평탄하진 않았지만, 대학 입학 후 새내기 시절 1학기는 처절한 투쟁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흘러 동기들의 자녀들이 대학생이 되었고, 필자의 딸도 올해 수험생 나이가 되었다. 30년의 세월 동안, 대통령은 7번 바뀌고, 유서대필 조작사건으로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던 강기훈 씨는 2015년 무죄로 확정판결을 받았다. 2018년에는 권경원 감독이 연출한 [1991, 봄]이라는 다큐 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30년의 세월이면 이미 객관적인 평가가 끝나고 역사적인 기록이 남을만한 시간이지만, 91년 오월투쟁은 아직도 아픔과 슬픔, 트라우마로 남아있거나 군부독재에서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 쯤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91년 투쟁의 현장에 직접 참여했던 세대들은 ‘무엇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고 싸웠는지’, ‘싸움으로 얻은 것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다음으로, 91년 투쟁에 대한 기억은 지역별로도 차이가 있는데, 운암대첩이라는 승리의 기억을 지닌 광주전남지역은 트라우마에서 어느정도 빠져나와 있지만, 광주를 제외한 지역은 깊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91, 봄] 영화가 상영될 때도, 동시대를 살아온 세대는 트라우마 속에서 힘들어하는 반면, 젊은 세대는 오히려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외에, 맑스-레닌주의에 영향받은 일부 그룹은 ‘실패한 민중혁명 시도’ 또는 ‘씁쓸했던 마지막 투쟁’ 쯤으로 기억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91년 여름 소련 붕괴 이후, 민중운동을 청산하고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맑스주의 또는 시민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후일담 문학을 쏟아냈다. 필자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머리 속으로 운동하고 입으로 혁명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비평가일 뿐이며, 세상을 바꿔 온 것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실천하는 사람들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30주년을 맞이한 2021년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나? 가장 먼저, ‘정당한 역사적 평가와 기록’이 절실하다. 필자는 91년 오월투쟁에 대하여, 87년 항쟁 이후 혁명적으로 진출하는 민중들의 요구와 이를 되돌리기 위한 지배집단의 ‘반혁명’이라는 구도로 해석하려고 한다. 항쟁의 촉발점이었던 91년 4월26일에서 역사 해석을 넓히면 우리가 왜 싸웠는지 조금 더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고, 투쟁의 성과와 한계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30주년을 맞이하여, 91년 당시 투쟁에 참여했던 세대들에게 아직 남아있는 트라우마를 완전히 벗어버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참고로, 전남대에서 91년 투쟁에 참여한 세대들이 주축이 된 ‘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는 ‘박승희추모사업회’라는 조직을 재편한 것이다. 강경대의 모교인 명지대에서는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를 조직하여 활동중이다. 조직의 정체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조직의 이름을 눈여겨 보시라. ‘정신계승사업회’와 ‘추모사업회’, 이 둘의 차이가 느껴진다면, 오늘 필자의 문제의식은 전달된 것이다.
1. 91년 오월투쟁, 패배로 기억하는 이유 - 가해자 중심주의
1.1. ‘죽음을 전술로 사용했다’는 비난 속에 쌓인 트라우마
91년 오월투쟁의 가장 큰 트라우마는 ‘동지의 죽음을 전술로 사용하는 괴물 운동권’이라는 더러운 주장이 김지하, 박홍 등 유명인을 통해 나오고, 수구 언론을 통해 확대되었으며, 검찰과 법원을 통해 사실처럼 굳어진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이 모두는 유서대필 조작사건 재심 결과에서 보이듯, 거대한 사기극이다)
투쟁에 참여했던 주체들은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황당한 이야기라고 부정하지만,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어느 순간 포기하고 침묵하거나 가해자의 논리에 길들여지게 된다. 이는 지속적인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피해자의 심리상태나 지속적인 왕따와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피해자의 심리와 비슷하다. 어서 빨리 멘탈 부여잡고, 당장 빠져나오라. 스스로 가해자의 논리에 길들여진 것을 발견하면 깜짝 놀랄 것이다.
지배집단의 정신적 폭력은 91년 오월투쟁에 대하여, ‘분신정국’이라고 당시 수구언론이 붙인 해괴한 용어에도 잘 나타난다. 분신정국이라는 용어 자체가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주권자의 의지를 빼버린 ‘2차 가해’이며, 이들의 논리에 따라 ‘운동권이 분신을 이용한다’라고 떠드는 작자들은 세월호 진상규명 단식 농성장 앞에서 폭식투쟁을 벌이던 이들의 의식구조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91년 열사들은 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바친 것일까? 목숨을 버릴 만큼 절실한 바램은 무엇이었나? 지금 시점으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당시 열사들은 87년항쟁 이후 만들어진 소중한 성과들을 되돌리려는 집단에 온몸으로 맞선 것이다. 사람은 아무것도 없을 때보다, 자기가 얻어낸 것을 다시 빼앗길 때 더 격렬하게 저항한다. 91년 열사들은 군부독재를 연장시키려는 지배집단의 반혁명 공세를 먼저 느끼고 자주적인 결단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1.2. 치열한 투쟁으로도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허무주의, 패배주의
91년 오월투쟁을 패배로 기억하는 두번째 이유는 ‘승리하지 못한 투쟁’이라는 기억 때문이다.
그렇다면, 91년 오월투쟁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나? 성과 달성 여부는 목표를 어디에 두었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91년 오월 당시 필자의 개인적인 목표는 ‘노태우 처단(정권타도 정도로는 양에 안찼다. 처단을 절실히 원했다)’ 이었다. 정말로, 단 하루도 노태우 지배 밑에서는 살 수 없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대학 신입생 수준에서도 꽃병과 철근으로 정권을 타도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당시 현실적으로 가능한 전술 목표는 공안통치 분쇄, 내각 총사퇴, 내각제 음모 분쇄 등이었는데 모두 달성했다. 노태우를 바로 끌어내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분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는 분석은 지나치게 패배적인 기억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직까지도 ‘정원식 외대 사건’ 때문에 오월투쟁이 사그러들었다고 주장하는 운동권 인사(?)들을 가끔 보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수구언론이 하는 말은 믿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양반들이 꼭 결정적일 때 삑사리를 낸다. 이 또한 앞에서 언급한 가해자 중심주의다. 오월투쟁이 사그러든 것은 정원식 외대 사건 때문이 아니라, 당시 민족민주운동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91년 오월투쟁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운동진영의 실력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안타까운 일이다.
1.3. 오월투쟁 후 이어진 소련의 붕괴와 운동권 일부의 청산주의
91년 오월투쟁 과정에서 운동권 일부 분파는 투쟁을 이끌고 있던 범국민대책회의를 타협적이라고 비판하며, 민중혁명을 주장했다. 광주에서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지만, 당시 서울 지역 영상을 보면 ‘임시정부 수립’ ‘민중권력 쟁취’ 등의 구호와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깃발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들 정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권의 경찰력도 돌파하지 못하는 수준의 조직력과 물리력으로 무슨 혁명을 한다는 걸까. 광주는 운암대첩에서 공권력을 괴멸시킨 경험이라도 있지만, 광주보다도 못한 힘으로 임시정부 수립을 외치는 그들이 무모해보였다.
오월투쟁이 가라앉은 후,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사이도 없이, 세계사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8월 소련 연방에서 벌어진 3일 천하 군부 쿠테타 이후, 소련은 갈가리 찢겨지며 붕괴했다. 소련 연방 곳곳에서 민중들의 손으로 끌어내려지는 레닌의 동상을 TV로 지켜보며 씁쓸했다. 소련이 사라졌다해도, 조국은 갈라져있고 학살자가 권좌에 앉아있는 상황이었기에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많았다.
하지만, 소련의 붕괴 이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외치던 운동권 분파중 많은 사람들이 운동의 깃발을 내렸다. 91년 오월투쟁이 패배의 기억으로 남는 이유 중 하나는 우연하게 시기가 겹친 소련의 붕괴와 운동권 일부 진영의 청산주의 때문이다.
2. 91년 오월투쟁의 배경 - 민중들의 혁명적 진출과 지배집단의 대응
2.1. 87년항쟁 이후 민중들의 혁명적 진출
91년 오월투쟁의 배경을 알아보려면, 먼저 87년항쟁 이후 민중들의 진출을 살펴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87년 6월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을 구분해서 보는데, 필자는 ‘87년항쟁’으로 이 두 흐름을 모아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87년 6월 대학생 이한열 뿐 아니라, 87년 8월 거제에서는 같은 또래의 노동자 이석규도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우리 사회는 이한열만 기억하고 이석규는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87년 항쟁 이후 주요 흐름을 정리해 보자. 시대를 뒤흔든 굵직한 사건들로만 뽑아도 이렇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쟁취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전국적인 민주노조 건설 투쟁
1987년 8월 19일 전대협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결성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당선.
1988년 4월 26일 총선에서 최초로 여소야대 국회 구성. 5공비리 청문회, 광주항쟁 청문회 실시
1988년 6월 10일 전대협, 남북학생회담 추진
19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 울산 지역 민중 항쟁 수준으로 격렬한 투쟁
1989년 문익환 방북. 임수경 전대협 대표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파견. 자주통일운동 전면화
1989년 5월10일 조선대 교지편집장 이철규 의문사. 사인 진상규명 투쟁 치열하게 펼침
1989년 5월 28일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교사 1600 여명 해직. 광주 고교생 전면투쟁
1989년 하반기, 공안정국. 재야, 대학생, 노동계 대대적인 탄압, 구속
1990년 1월 22일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
1990년 1월 22일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당합당 선언. 민자당 결성
1990년 4월 24일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 결성
1990년 5월 9일 민자당 창당대회. 전대협 총궐기 투쟁
1990년 8월 15일 제1차 범민족대회
1990년 10월 13일 노태우 ‘범죄와의 전쟁’ 선포.민족민주운동 진영에 선전포고
1990년 11월 범민련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결성
87년항쟁 이후 민족민주운동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군부독재 치하에서 수십년간 억눌린 흐름이 일시에 터져 나오며, 말 그대로 혁명적으로 진출했다. 전대협, 전교조, 전노협, 전농으로 이어지는 자주적 대중조직이 만들어지고, 문익환 목사 방북과 임수경 대표 파견으로 자주통일운동이 본격화되어 범민련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 모든 것이 대략 3~4년간의 시간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89년 공안정국, 그리고 이어진 90년 범죄와의 전쟁 선포로 민족민주운동 진영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2.2. 공안정국- 검,경,안기부를 총동원한 폭압
노태우는 1989년 5월 9일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지난 1년여 동안 체제전복 세력의 선동으로 안정이 흔들려도 인내와 자제로 대처했지만, 이젠 두고 볼 수가 없다"라고 선언하며, 안기부와 검찰, 경찰을 총동원하여 민족민주운동을 탄압했다.
치안본부-안기부-검찰은 3자 합동으로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조직하고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삼아 운동진영 뿐 아니라, 야당 정치인까지 수사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감옥에는 양심수로 넘쳐나게 되었다.
"1989년 하루 평균 체포자 수는 1988년의 2배였고, 전두환 시절의 3배였다. 일부 목격자들은 노태우의 탄압을 1920년대 일본 식민지 총독부나 1945년에서 1948년까지의 미국에 비교했다. 노태우 임기 3년 동안 약 4,300명이 정치적 이유로 구속됐고, 이에 비해 전두환 임기 8년 동안에는 4,700명이 구속됐다. (한국의 민중봉기 P525,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 원영수 옮김, 2015, 오월의 봄 출판)"
2.3. 3당합당 및 내각제 개헌 추진 - 지배집단의 반혁명 시도
89년 공안정국을 통해 운동진영을 잡아들이고, 당시 야당까지 협박했던 지배집단의 다음 수순은 인위적인 정계개편 이었다. 노태우는 김영삼과 김종필까지 끌어들여 민자당을 창당하고, 내각제 개헌을 추진한다. 사실상 87년항쟁 이전으로 역사를 되돌리려는 반혁명 시도이다.
당시 추진했던 내각제 개헌은 일본의 자민당 시스템을 참고하여, 국민들의 대통령 선출 권한을 사실상 빼앗은 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권력 분점을 통해 군부독재 집단의 영구집권을 획책한 것이다. 수많은 민중들의 피와 땀으로 겨우 만들어진 대통령직선제가 없어지고, 다시 과거로 돌아갈 것이라는 위기감에 전대협을 중심으로 한 민족민주운동 진영은 반민자당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1990년 10월13일에 노태우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공식적인 발표는 각종 조직폭력배와 범죄조직을 소탕한다는 내용이었지만, 경찰력과 공권력으로 정국을 돌파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후, 경찰의 시위진압 방식은 공격형으로 전환되었고, 집회와 시위 과정에서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3. 3당합당과 내각제라는 반혁명에 맞선 투쟁
3.1. 1991년은 내각제 개헌의 마지막 기회, 대규모 격돌은 필연적
1991년 오월투쟁 배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91년이 내각제 개헌을 추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는 점이다. 90년 3당합당을 통해 민자당은 독자 개헌을 추진할 수 있는 압도적인 의석을 만들었다. 그리고, 민자당 창당 과정에서 ‘내각제 합의 각서’라는 것을 작성한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합의 각서에 따르면, 91년 5월까지 내각제 개헌을 완성하기로 했었다) 다만, 김영삼이 내각제를 통한 권력 나눠갖기 보다는 대통령을 꿈꾸며 합의각서 이행을 뭉개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1992년 3월에는 총선 일정이 잡혀 있었다. 총선을 다시 치르면 민자당이 200석 이상을 얻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어떻게든 92년 총선 전까지 지배집단 입장에서는 내각제를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91년에는 3당합당과 내각제를 통해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노태우 정권과 민중들 사이에 정면 충돌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3.2. 노태우 정권의 강경대 폭력살인을 계기로 촉발
91년 오월투쟁은 4월26일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를 백골단이 살인한 것을 계기로 촉발되었다. ‘강경대’라는 학생이 그날 그 자리에서 희생된 것은 우연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91년 오월 상황에서는강경대가 아닌 그 누구라도 정권에 반대하는 청년학생, 노동자라면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다. 91년 3월 필자가 입학하자 마자 전남대학교로 경찰병력이 두차례나 진입했고, 4월 시내로 가두투쟁을 나가면, 싸움 잘하는 남총련이라도 10분을 버티기 힘들었다. 시내에 나가면 대열의 앞-뒤-옆구리로 동시에 치고들어오는 백골단의 기세가 참으로 살벌했다.
경대의 죽음을 보며 많은 학우들이 분노했던 것은 경대가 아닌 나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3. 민족민주운동의 조직 역량을 총동원한 전면 투쟁
대학 신입생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정권을 보며, 노태우 밑에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전남대학교 박승희, 안동대학교 김영균, 경원대학교 천세용은 분신항거로 전국민이 노태우 정권을 몰아내야 한다고 호소했다. 3명 모두 대학 2학년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87년항쟁 이후 조금이나마 숨통이 틔인 상황에서 군부독재로 되돌리려는 정권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보여준 것으로 보인다.
대학생 외에도 재야단체 활동가 김기설, 노동자 윤용하, 노동자 이정순, 노동자 정상순도 분신으로 항거하였으며, 고교생 김철수도 분신 산화했다. 여기에 감옥에 잡혀있던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은 안양병원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87년항쟁은 자주적인 대중조직들이 만들어지기 이전이라, 거리에서 자발적인 참여가 많았다. 이에 비해, 91년 오월투쟁에는 전대협, 전노협, 전교조, 전농 등 대중조직의 깃발을 들고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대열이 많았다. 전노협은 역사상 최초로 정치적인 총파업을 선언하며 노태우 정권 타도 투쟁에 동참했다. 5월 18일을 기점으로 민족민주운동의 조직 역량을 총동원한 전면 투쟁이 벌어졌다.
"4월 26일부터 6월 29일(시위조직가들이 명동성당의 본부를 떠난)까지 100만 명 이상이 전국적으로 2361건의 집회와 시위에 참여했다. 공식 통계는 5주 동안 75개 도시에서 70만명 이상이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집계했다. (한국의 민중봉기 P537,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 원영수 옮김, 2015, 오월의 봄 출판)"
4. 91년 오월투쟁의 절정은 운암대첩과 박승희 장례식
4.1. 운암대첩과 박승희 도청 노제는 민중의 승리
91년 오월투쟁의 절정은 5월 19일 운암대첩 부터 일주일 후 열린 박승희 노청 노제라고 본다. 광주의 시민, 학생들은 운암동에서 민중의 힘을 분출하며 정권의 공권력을 괴멸시키고 승리하였다. 광주시민들과 학생들이 뭉쳐 싸우자, 현장의 경찰 병력들은 전의를 상실하였고,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다. 고속도로를 틀어막겠다는 황당한 결정을 누가 했는지 모르지만, 광주 시민 학생들의 투쟁은 노태우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 것이다. 당시 정권의 핵심 담당자들 잠이나 잘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일주일 후인 5월25일 박승희 장례식. 노태우 정권은 장례식 당일까지도 도청 노제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허세를 부렸지만, 그들은 감히 광주시민의 앞길을 막지 못했다. 5월25일 박승희 도청노제는 민중승리를 확인하는 하나의 축제로 끝났다. (운암대첩 당시 상황과 박승희 열사 도청 노제 경험은 별도의 글로 정리하겠다.)
그리고, 운암동과 오월투쟁의 인연은 6월 20일 지방선거로 이어진다. 광주광역시 의원 선거에서 광주전남대책위 오종렬 의장이 운암동 지역에 무소속(재야 대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4.2. 운암동에서 보여준 광주시민의 힘이 내각제 음모를 박살낸 것
5월20일 새벽, 강경대를 망월동 묘지에 안장한 후, 5월 22일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 선봉장 노재봉 국무총리가 사표를 냈다. 야당과 대책회의에서 계속 요구했던 공안탄압 중지, 내각 총사퇴 요구를 마지못해 받아들이며 간보기에 들어간 것이다.

운암동에서 보여준 광주시민의 힘이 먼저 국무총리를 날려버리고, 노태우 정권을 벌벌 떨며 고심하게 만들었다. 운암동에서도 저리 깨졌는데, 5월25일 박승희 장례식을 과연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섣불리 막았다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리면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결국, 노태우 정권은 박승희 도청 노제를 전면 개방하고, 마지막까지 미련을 가지고 있었던 내각제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노태우가 5월28일 발표한 민심수습 대책의 제1번이 바로 ‘내각제 추진 포기’이다.


4.3. 광주와 다른 지역 평가는 다르다
91년 5월에서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다른 지역에서 운동했던 동년배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다른 지역도 물론 열심히 싸웠지만, 패배와 아픔의 기억만 이야기하는데… 필자는 운암대첩을 이야기하며 승리의 기억이 더 크다고 말했다. 그리고, 서울지역 투쟁열기는 유서대필 조작 언론 공세와 외국어대 정원식 사건 등으로 꺾였다고 말하지만, 광주지역은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광주는 진정으로 시민들까지 혁명을 원하고 직접 실천했지만, 다른 지역 중산층들은 급격한 변화를 바라지 않아 학생들이 고립되었던 것 같다.
유서대필 조작 사건은 당시 비겁한 중산층들이 투쟁을 외면할 핑계로 삼은 것이라고 본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여기저기 헛점이 훤히 보이는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진짜로 믿었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당시 검사나 판사 모두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속은 척 넘어간 것으로 보이는데…
5. 당시 야당의 한계와 중산층의 외면 -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분화
5.1. 김귀정 폭력 살인에 대한 무기력한 대응
5월18일 강경대 장례식부터 5월25일 박승희 장례식까지 투쟁의 절정을 이룬 후, 투쟁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가 중요했다. DJ가 이끌던 야당은 5월말부터 6월20일 광역의회선거 체제로 들어가려 했기에, 5월25일 벌어진 김귀정 폭력살인에도 투쟁은 사실상 하강국면으로 들어갔다. 당시 범국민대책회의는 DJ 야당을 투쟁으로 견인할 힘이 없었다. 그렇다고, 투쟁을 정리하자고 할 수도 없었다. 정권은 거리시위의 열기가 조금이라도 꺾이면 전면적인 탄압으로 들어올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6월3일 외국어대에서 돌발적으로 벌어진 ‘정원식 밀가루 사건’으로 수구언론이 총공세에 나서며 투쟁의 열기는 식은 듯 보였다. 그리고, 6월 20일 지방의회 선거에서 민자당이 압승을 하면서, 91년 오월투쟁의 열기는 사그러들었다.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며 오월투쟁을 이끌던 범국민대책회의는 정권에 의해 유서를 대필했다고 지목된 강기훈 개인도 지켜주지 못할 정도로 쪼그라들어 6월 24일 검찰에 자진출두 시켰고, 6월 29일 명동성당 농성을 해체하며 사실상 91년 오월투쟁의 깃발을 내렸다.
5.2. 검찰 및 수구언론을 통한 총공세 - 유서대필 조작 사건
5월28일 내각제 포기 등 민심수습책이란 당근을 제시하고, 6월 들어 거리투쟁의 열기가 조금 가라앉자, 정권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검찰 및 수구언론을 총동원 하여, 유서대필 조작 사건이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희대의 사기극을 펼쳤다.
2021년 현재 주권자들이 제어할 수 없는 검찰 권력을 놓고 이야기들이 많은데, 검찰이 정권의 칼잡이로 본격적으로 나선 계기가 바로 91년 유서대필 조작사건이다. 사실 검찰 공안부는 91년 이전까지만 해도 안기부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권력이었다.
그리고, 유서대필 조작 사건에는 당시의 수구언론들이 총동원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기레기는 치워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그리고, 기자와 언론사에 대한 집단소송을 도입하여 기레기들에 대하여 끝까지 추적하여 응징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5.3. 6월 20일 광역의회 선거로 매몰 - 야당의 한계
87년항쟁 시기, 야당과 운동세력은 연합하여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다. 하지만, 91년에는 야당과 운동세력이 갈라졌다. 6월 20일 지방의회 선거가 잡히면서, 당시 야당은 선거에 매몰되어, 정권의 유서대필 조작사건 사기극과 이데올로기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야당도 당시 선거에서 참패하고, 운동세력도 극심한 탄압에 흔들리게 된다.
물론, 김귀정이 살해당했다고, 당시 야당이 광역의회 선거를 거부하고 즉각적인 정권타도 투쟁에 나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광주시민들은 노태우 정권과 끝장을 보자는 의지가 폭발했으나, 다른 지역 중산층들은 적당한 수준에서 정리하기를 바랬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야당은 선거체제로 넘어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91년 오월투쟁은 선거 중심의 야당 개혁세력과 대중운동 중심의 운동세력이 갈라져,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분화되는 역사적 계기점이라고 이야기 한다. 또한, 언론과 학계에서는 흔히 80년대를 민주화운동의 시대이고, 90년대는 시민운동의 시대라고 이야기한다. 91년 오월투쟁으로 민중운동이 몰락하고, 민주화된 사회 속에서 다양한 시민들의 요구를 담아내는 시민운동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부 운동권 이론가들은 헤게모니론을 들먹이며 시민사회론, 시민운동론을 이야기하던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유서대필 사기극에 소극적으로 동조했던 사람들을 시민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난 회의감이 든다.
90년대에도 기층 민중들의 대중운동은 꾸준하게 폭과 깊이를 넓혔고, 한총련과 민주노총 등 자주민주통일을 위한 길에서 세상을 바꿔왔다. 시민운동은 민중운동의 토대 위에서 전문적인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뿌리는 민족민주운동이고 시민운동은 뿌리에서 돋아난 가지라고 본다.
6. 내각제 저지와 전국연합 결성이 성과
6.1. 내각제 개헌 저지, 군부독재 연장 음모 분쇄
여태까지 살펴본 대로, 91년 오월투쟁의 가장 큰 성과는 내각제 개헌을 저지하여, 군부독재 연장 음모를 막은 것이다. 내각제 개헌 포기 발언 이후, 김영삼은 민자당 내에서 툭하면 탈당하겠다는 협박과 자해공갈을 벌이면서 민자당 대선 후보 자리를 차지하였다. 당시 운동진영의 의도와 상관없이, 91년 오월투쟁의 가장 큰 수혜자는 결과적으로 김영삼이 되었다.
91년 오월투쟁이 없었다면, 김영삼 정부가 순탄하게 출범할 수 있었을까. 90년 3당합당 당시 김영삼은 당내 소수파였고, 민자당은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고 만들어진 것이었다. 김영삼이 민자당 내에서 대통령 후보가 되기에는 아주 힘든 상황이었던 것. 하지만, 김영삼은 91년 오월투쟁으로 폭발한 군부독재에 대한 거부감을 자산으로 삼아 탈당협박 등을 통해 민자당 내에서 노태우계를 누르고 대통령 후보에 올라 당선되었다.
91년 오월투쟁은 예방혁명의 의미가 크지만, 군부독재를 실질적으로 종식시킨 항쟁이라고 본다.
6.2.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결성 - 한국전쟁 후 최대의 연합조직
91년 오월투쟁의 조직적 성과는 91년 12월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연합조직이라고 평가받는 전국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을 결성한 것이다.
이전까지 재야 연합운동은, 저명인사 중심의 상층연대로 이루어졌던데 반하여, 91년 전국연합은 전노협(노동자), 전대협(대학생), 전농(농민), 전빈협(도시 빈민과 노점상), 전청협(청년) 등 광범위한 대중조직과 지역조직을 기반으로 하여 실질적인 연합, 연대운동을 만들어 냈다.
다음으로, 특정한 사안에 대한 ‘OOO 대책위원회’ ‘OOO 투쟁위원회’, ‘OOO 투쟁본부’ 등의 사안별 임시조직이 아니라, 자주민주통일을 위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연대 조직의 틀을 만들었다.

6.3. 한총련과 민주노총 등 자주민주통일로 넓고 깊게
91년 오월투쟁의 과정에서 청년학생들과 노동자들은 거리에서 만나 함께 싸웠다. 그리고, 싸움이 끝난 후에는 자신들의 학교와 일터에서 자주민주통일의 길을 개척했다. 수많은 청년학생 및 노동자의 땀과 노력을 바탕으로, 전대협은 93년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으로 업그레이드 되었고, 전노협은 95년 민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마치며 - 30년, 언제까지 징징거릴 것인가
필자는 운동 현장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대학 졸업 후에는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왔다. 91년 오월투쟁 30주년에 중요한 발제를 맡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 하지만, 강경대 박승희의 벗이라는 자격으로, 용기를 내어 91년 오월투쟁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여 발표한다.
가장 큰 동기는 이것이다. 이제 곧 대학에 입학할 나의 딸과 함께 망월동 묘역에 가서 박승희 열사를 만난다면 뭐라고 설명해 줄 것인가? 나는 이렇게 나이 들어 가는데, 박승희는 영원한 청춘으로 남아있고, 나의 딸이 박승희와 비슷한 나이로 자랐다. 그리고, 나에게 물어볼 것이 참 많을 것이다. ‘박승희는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나요?’, ‘아빠는 그렇게 싸워서 무엇을 얻었나요?’ ‘박승희 정신 계승하여 무엇을 해야 하나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노력했던 결과물이다.
이제 우리는 추모행사가 아니라 유서대필 조작사건으로 5천만 국민 모두에게 사기를 쳤던 범죄자들을 추적하고 응징하는데 힘을 모으자. 91년 거대한 사기극을 기획하고 실행한 검찰, 법원, 수구언론 개개인의 범죄사실을 낱낱이 기록하고 폭로하여 사회적으로 응징을 하자. 이것이 여론재판-인민재판 이라고? 맞다. 인민재판이다. 현행 법체계에서는 검사, 재판관 개인의 잘못된 기소나 판결에 대하여 개인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 그냥, 국가의 이름으로 대신 손해배상을 할 뿐이다. 김기춘이나 곽상도가 잘못한 일을 가지고, 왜 내 세금까지 집어넣어 배상을 해야하나. 인민재판이 싫다면, 특별법이라도 만들어서 범죄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하자.
91년 오월투쟁 30주년, 이제 기억투쟁 한다면서 ‘열사여!’ 를 외치며 눈물짓거나 추모사만 낭독하는 행사는 집어치우길 바란다. 91년 오월투쟁은 87년 항쟁의 성과를 되돌리려는 지배집단의 반혁명을 분쇄한 역사적 투쟁이며, 91년 열사들은 노예적 삶을 거부하고 역사의 주인으로 우뚝 서 영원한 청춘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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