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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22일,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로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최소 6,000여 명이 희생되고, 2만3천여 명이 체포 구금됐다. 77년 전 오늘 여수와 순천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10.19 여순 봉기1948년 10월 이승만 정권과 미군은 제주4.3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초토화 작전’을 기획한다. 육지에서 군병력이 작전에 동원된다. 하지만, 동포에 대한 학살행위를 거부한 장병들이 생기기 시작한다.10월 중순, 군 통수권을 가진 전 군정장관 딘 소장은 여수 소재 제14연대에 제주 진압을 위해 출동을 명령한다. 아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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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석 기자
2025.10.22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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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친위 쿠데타를 감행했다. 박정희가 10.17쿠데타(10월 유신)를 일으킨 이유는 직전 선거 때문이다.1969년 박정희는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켜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야당 후보인 김대중에게 근소한 표 차이로 겨우 당선된다. 더구나 1달 후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1971.05.24)에서 야당이 204석 중 89석을 차지해 개헌 저지선을 훌쩍 넘겼다. 이제 정권 연장을 위한 헌법 개정이 불가능한 상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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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석 기자
2025.10.17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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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1일, 대구지역 400여 개 공장 노동자와 시민 1만여 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미군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시민 1명이 총에 맞아 희생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대구 시민 1만5천여 명이 밤새 항의 시위를 이어갔다.10월 2일 오전 10시, 대구경찰서 앞 광장에서 항의 집회가 이어졌다. 한 청년이 분노에 찬 연설을 하던 그 순간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다. 연설하던 그 청년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사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계속해서 5명의 연사가 연단에 올랐다. 그들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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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석 기자
2025.10.0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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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80년이 지났다. 그러나 “누가 조국을 해방시켰나?”라는 물음은 여전히 제대로 답하지 못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도 학교 교과서, 언론, 정치 담론 속에서는 ‘연합군의 승리’가 곧 해방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이는 해방의 실체를 절반만 보여주는 시선이다. 진정한 해방은 그 땅에서 살고 싸운 우리 민족의 손으로 쟁취된 것이었고, 이를 되묻는 일은 단지 과거의 해석이 아니라 현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다.해방을 ‘선물’로 보는 시각은 우리 민족을 수동적인 역사 객체로 전락시킨다. 이 시선은 의도했든 아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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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2025.08.1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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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9일, 김일성 사령관은 조선인민혁명군에 조국해방을 위한 총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이는 1930년대부터 준비된 조선인민혁명군의 항일무장투쟁 전략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자력해방전이었다.총공격은 다음 세 축으로 전개되었다. 첫째,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국경 돌파 작전. 둘째, 국내 소부대와 인민무장대의 배후타격. 셋째, 전민항쟁을 통한 해방지대의 구축이었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독립된 전투방식이자, 유기적으로 결합된 전략이기도 했다.경흥요새 돌파작전은 자력해방의 첫 포성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두만강을 건너 원정교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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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2025.08.14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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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9일, 항일유격대(조선인민혁명군)이 국경을 돌파하고 해방의 총공격을 개시했을 때, 이에 호응해 전민족이 들불처럼 봉기했다.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기도 전에, 이 땅의 민중은 무장을 들고 일본 통치기구를 분쇄하며 해방의 주체로 나섰다. 이는 우발적인 분노의 폭발이 아닌, 수년에 걸쳐 준비된 조직적 항쟁의 분출이었다.조국광복회, 반일회, 반제동맹, 청년회, 농민조합, 여성동맹 등 독립운동조직들은 이미 각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이들은 항일유격대와 손잡고 적 통치기구를 해체하는 실질적 무장항쟁을 전개했다. 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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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2025.08.14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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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 해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는 지금까지도 역사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많은 이들이 해방을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의 항복’이라는 국제정세의 부산물로 간주한다. 이는 이른바 ‘타율해방론’이다.반면, 조선인민혁명군의 무장투쟁과 전민항쟁, 그리고 소련의 대일 참전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해방을 쟁취했다는 ‘자력해방론’이다.타율해방론은 대체로 원자폭탄 투하를 해방의 결정적 계기로 삼는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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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2025.08.1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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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본 제국주의는 패망이 눈앞에 다가오자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며 전략의 무게중심을 한반도로 옮기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에 식민지로만 간주되던 한반도는 이 시기 들어 ‘일본 본토’의 연장선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방어 전략을 넘어 ‘조선사수론’이라는 이름의 결사항전론으로 나타났다.그 상징적 조치가 바로 17방면군 사령부의 한반도 설치였다. 1945년 4월, 일본은 이 부대를 조직하고 37만 병력을 한반도 전역에 배치했다. 평양에서 대전, 부산으로 이어지는 방어축이 형성되었고, 병참과 작전기지가 구축되었다.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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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2025.08.1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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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광복 80돌을 맞아 1945년 8월 15일 그때를 돌아본다. 문득 해답을 찾지 못한 오래된 질문과 마주한다. “과연 누가 조국을 해방시켰나?”대한민국 주류 역사관은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항복했고, 그 결과 우리 민족이 해방되었다는 구도를 유지해왔다. 즉, 해방은 미국의 선물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어떤 제국주의도 제 발로 물러나는 경우는 없다.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도 마찬가지다. 2차대전에서 연합군에 패한 일본이 한반도에서 순순히 물러났을 리 없다.해방은 항일무장투쟁과 전민항쟁을 전개한 우리 민족이 자력으로 쟁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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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2025.08.14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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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하면서 ‘12.12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과 하나회가 재조명된다. 그런데 국군의 군사작전지휘권을 쥔 주한미군 사령관은 당시 뭘 하고 있었는지에 관심을 두는 이는 많지 않다.영화에서는 노재현 국방부 장관(배우 김의성)이 한미연합군사령부에 숨어 있다 돌아와서 전두환 하나회의 쿠데타를 지지한 것으로 아주 짧게 묘사돼 있다.군대를 동원하려면 군 최고 지휘권자의 명령 또는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렇다면 전방에 있던 1공수여단과 5공수여단 병력이 육군본부를 점령하는 동안 군사작전지휘권을 가진 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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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석 기자
2023.12.11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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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플러스는 지난 7월 정전협정 특판을 제작한 바 있다. 특판에 실렸던 원고를 다섯 차례에 나누어 연재한다.정전70년, 대한민국한국전쟁 제대로 보기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정전협정과 전쟁체제☞또다시 엄습해 오는 전쟁의 시간한국전쟁이 고마웠던 미국, 한국전쟁이 선물이었던 일본미국에 한국전쟁은 고마운 것이었다. 미국은 전 지구적 범위를 커버할 수 있는 군사력 확보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국방비 증액은 필수였다. 미 국무부는 1950년 4월 국방비 증액을 담은 NSC-68 보고서를 작성했다. NSC-68은 1949년 당시 130억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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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2023.10.02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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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플러스는 지난 7월 정전협정 특판을 제작한 바 있다. 특판에 실렸던 원고를 다섯 차례에 나누어 연재한다.정전70년, 대한민국한국전쟁 제대로 보기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정전협정과 전쟁체제또다시 엄습해 오는 전쟁의 시간정전 담판의 주역, 남일과 해리슨정전협정 마지막 장에 서명 주체가 명기되어 있고 그 하단에 “참석자” 남일과 해리슨이라는 이름과 사인이 등장한다. 남일과 해리슨은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정전회담의 대표였다. 이들은 2년이 넘도록 765차례나 되는 긴 회담을 이어갔다.많은 이들은 전면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을 미국과 중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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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2023.10.01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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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플러스는 지난 7월 정전협정 특판을 제작한 바 있다. 특판에 실렸던 원고를 다섯 차례에 나누어 연재한다.정전70년, 대한민국한국전쟁 제대로 보기☞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정전협정과 전쟁체제또다시 엄습해 오는 전쟁의 시간한국전쟁의 기원 : 미군정의 실시해방과 동시에 우리 민족은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활동을 본격화했다. 여운형 선생을 중심으로 하여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가 결성되었으며, 전국적 범위에서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건준의 목적은 아래와 같았다.첫째, 우리는 완전한 독립 국가의 건설을 기한다.둘째, 우리는 전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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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2023.09.3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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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플러스는 지난 7월 정전협정 특판을 제작한 바 있다. 특판에 실렸던 원고를 다섯 차례에 나누어 연재한다.정전70년, 대한민국☞한국전쟁 제대로 보기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정전협정과 전쟁체제또다시 엄습해 오는 전쟁의 시간‘그 전쟁’을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한국전쟁처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전쟁도 없다. 혹자는 6.25 전쟁, 6.25 동란, 6.25 사변이라고 부른다. 전쟁, 동란, 사변이 갖는 의미는 각각 다르지만, 6.25라는 이름이 붙는 이유는 같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북한에서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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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2023.09.29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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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플러스는 지난 7월 정전협정 특판을 제작한 바 있다. 특판에 실렸던 원고를 다섯 차례에 나누어 연재한다.☞정전70년, 대한민국한국전쟁 제대로 보기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정전협정과 전쟁체제또다시 엄습해 오는 전쟁의 시간 2023년의 한반도, 흡사 6.25 전야북한 정권을 타도하자는 사람이 통일부 장관이 되었다. 보수 정권의 통일부 장관 중 제대로 된 대북정책을 추진한 경우는 물론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노골적으로’ 북 정권 타도를 외치는 사람이 통일부 장관이 된 적은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앉힌 김영호는 ‘북 정권 타도’를 주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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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2023.09.28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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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교전을 중단한 지 70년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정전체제는 아직 평화체제로 전환되지 않았다.‘끝나지 않은 전쟁’ 상태에 놓인 한반도. 윤석열 정권은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추진하고, 대북 선제공격을 공공연하게 떠든다.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면 ‘반국가세력’으로 몰아붙인다.7.27정전 70주년을 맞아 정전협정문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 본다. 최근 전쟁위기의 본질과 평화체제 모색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전쟁 당사자는 조선과 미국정전협정의 정식명칭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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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석 기자
2023.07.26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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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제주4.3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억울한 죽음에 항의해 3.10총파업으로 맞선 이들을 왜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3.1발포사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을 뿐인데, 미군정은 왜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빨갱이 섬)’로 규정하고 군경과 서북청년단을 동원해 폭압을 가했을까?반공주의 시범케이스반파시즘이 득세하던 해방정국에 미군정은 반공주의 설파를 위한 일종의 ‘시범케이스’가 필요했다.당시 유럽은 나치 척결이, 아시아는 일본 군국주의 척결이 시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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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석 기자
2023.04.03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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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했다. 그런데 그날의 해방은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연합군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덕택에 주어진 선물일까? 아니면 우리 민족의 힘으로 싸워 얻어낸 전취물일까? 전자를 ‘타력 해방론’, 후자를 ‘자력 해방론’이라 부른다.이남 사회는 타력 해방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이북은 자력 해방론이 절대적인 상식이다.물론 자력 해방이라고 해도 우리 민족 자체의 힘만으로 일제를 물리쳤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2차 세계대전은 전 세계 파쇼국가와 연합군 사이의 ‘판갈이’ 전쟁이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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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석 기자
2022.08.14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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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의 탄생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 8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을 보장받기 위해 파업 집회를 열었다. 당시는 하루 10시간, 주 7일 근무가 일반적이었다.그러나 미국은 시위대를 공산 폭도로 규정하고 경찰과 군대를 동원, 총기를 발포하며 유혈 진압했다.이 사건을 계기로 시위는 시카고에서 미국 전역으로 번져나갔고, 세계 노동자들이 함께 궐기하는 촉매가 되었다. 결국 자본가와 정부는 노동자의 단결투쟁에 무릎을 꿇고 8시간 노동을 보장할 수밖에 없었다.1889년에 제2인터내셔널이 5월 1일을 시카고 노동자 투쟁의 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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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석 기자
2022.05.0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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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100일도 되지 않아 이승만 정권은 좌익세력을 처벌하겠다며 국가보안법을 제정·공포했다.(1948.12.01.)친일청산과 국가보안법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해결할 최대 과제가 친일청산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제헌의회도 곧바로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반민족행위처벌법(1948.09.22.)'을 제정해 친일청산에 나섰다.하지만, 친일청산보다 좌익처벌을 더 시급한 과제로 설정한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이듬해 6월 6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습격해 명단을 불태웠다. 곧이어 국회에서 반민법을 개정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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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석 기자
2021.12.01 1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