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24)
연세대항쟁의 경과와 핵심구호 등 기본적인 팩트부터 정리해 보자.
당시의 기록과 기억들을 되짚어보면,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청춘들의 사랑과 의지를 찾을 수 있다.
필자가 보관하고 있던 당시 자료들을 공유하며 사실관계를 정리하고, 개인적인 기억들도 올린다.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95년 가을 ‘사람사랑 학생회’의 등장, 사상-조직운동의 위기
96년, 노수석과 벗들의 죽음, DMZ 불인정 선언, 계속되는 연행,구속,공안정국
연세대항쟁 01. 침묵과 트라우마를 딛고, 통일시대를 여는 힘으로~~
연세대항쟁 02, 사건 경과 및 핵심 구호, 생활수칙과 초코파이 등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연세대항쟁 02, 사건 경과 및 핵심 구호, 생활수칙과 초코파이 등
96년 통일운동 과제 - ‘한반도평화체제 구축’과 ‘통일운동 분열 극복’
먼저 96년 당시 한총련의 통일운동 관련 과제를 살펴보자. 96년 통일운동의 핵심구호는 ‘한반도평화체제 구축’과 ‘북미평화협정 체결’이었다. 당시는 96년 4월 북측에서 DMZ 불인정 선언과 판문점에서 군사훈련으로 인하여, 한동안 긴장국면이 펼쳐졌고, 정전협정 체제가 더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에 따라, 96년 4월16일, 한-미정상회담에서 김영삼과 클린턴은 공동선언을 통해, 한반도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 미, 중이 참여하는 4자회담을 제안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72년 남북공동성명이나 91년 남북합의서와는 달리, 미국까지 참여한 제안이었다. 한국과 미국 모두 ‘정전협정 체제를 폐기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5년전 시작된 이야기를 아직도 결론 내리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다)
통일운동 진영에서는 정전협정을 평화체제로 바꾸는 논의가 시작된 것을 환영하며, 정전협정의 당사자인 북-미간 평화협정 체결, 남북 사이는 91년 체결된 남북합의서 이행으로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만들자’는 요구에 집중했다. 역사적인 평가에서 ‘항쟁인가, 사태인가’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떠한 구호(목적)를 가지고 싸웠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학적인 접근으로 볼 때, 북미평화협정체결을 외치며 싸웠다는 사실만으로 ‘항쟁’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난 한총련이 시대를 20년 앞서갔다고 자부한다.
다음으로, 통일운동 내부의 조직적 과제는 94년부터 이어진 분열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94년 민족회의-범민련 분열, 95년 두개로 나뉘어진 815 행사, 사람사랑 학생회 노선 등장까지 이어지는 내부 분열은 정말로 지긋지긋했다. 96년에는 ‘하나의 대회로 치루자’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미묘한 대립은 계속되었다. 대회 이름을 ‘전민족대회’로 할 지, ‘범민족대회’로 할 지를 놓고 그렇게 싸울 일이었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첨부하는 96년 전남대통일운동 자료집을 참고하기 바란다. 당시, 자료집은 내가 정리했는데, 지금 읽어봐도 이해할 수 없다. 같은 말이 반복되는 무의미한 싸움으로 보인다. 그냥, 민족회의-전국연합 측의 ‘범민련 싫어’ 한마디로 끝날 내용을 빙빙 돌려가며 구차한 이유를 갖다붙인 것 같다.
https://drive.google.com/file/d/1bwOYwL1oWJw-iuLqnRdg1xw9TDHnnelp/view?usp=sharing
지긋지긋한 공안탄압과 내부 분열 극복을 위해 비타협적 투쟁
96년 연세대항쟁 당시, ‘왜 그리 치열하게 싸웠는지’, ‘범대회 장소를 왜 끝까지 연세대로 고집했는지’를 묻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에는 범민족대회 개최 장소가 원천봉쇄를 당하면, 대회장을 이동하여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96년 한총련은 봉쇄를 뚫고 연세대에서 꼭 진행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먼저 96년 상반기 노수석을 비롯한 학우들의 죽음에 대한 분노가 쌓여있었다. 기회만 있으면, 서울로 총집결하여 김영삼 정권에 복수하겠다고 이를 갈고 있던 노수석의 동기 95학번들이 많았다. 여기에 김영삼 정권의 공안탄압으로 날마다 학우들이 잡혀가면서, 6월 이후에는 교문박치기 투쟁이 계속 이어졌다. 지긋지긋한 공안탄압을 돌파하기 위해 김영삼 정권과 싸워야 한다는 의지가 넘쳤고, 한총련 청춘들은 백골단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음으로, 통일운동 진영의 내부분열, 학생운동 진영 내부의 개량주의를 뛰어넘기 위해 원칙을 지키는 투쟁, 비타협적 투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96년 당시, 연차가 높은 활동가들은 한총련 의장단과 집행부 사이의 갈등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으며, 8월 통일투쟁을 통해 개량적인 흐름을 걷어내고 싶어했다. 그래서, 무리수인 줄 알고 있었고, 학우들의 피해가 예상됐지만,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연세대로 집중했다.
연세대 항쟁 경과 (팩트 정리)
이제 96년 연세대항쟁의 사실관계, 단순한 팩트부터 정리해보자.
기자들이 스트레이트 기사 쓰는 형식으로 짧게 정리를 해 본다면,
연세대항쟁은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열리는 제9차 범민족대회와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을 김영삼 정권이 불법집회로 규정 원천봉쇄하면서, 집회에 참여하려는 한총련 학생들과 공권력이 정면 충돌하며 벌어진 사건이다. 8월 13일부터 연세대 주변에서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하였고, 15일 이후에는 경찰이 학생들을 종합관과 과학관에 몰아넣고 포위, 고립, 봉쇄하였다.
한총련측에서는 행사종료를 선언하고 해산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으나, 김영삼 정부는 봉쇄망을 더 강화하였고, 대부분의 언론매체에서는 ‘한총련이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점거농성을 하고 있다’며 공격하였다. 한편, 연세대 주변 홍익대, 서강대 등지에서는 봉쇄를 뚫고 학생들을 탈출시키기 위하여 시민, 학생들이 연일 공권력과 격돌했다.
건물 내에 고립된 대학생들은 음식물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단전, 단수까지 당하며 극한의 상황으로 몰렸고, 8월 20일 새벽 진압이 시작되어 종합관 건물에 남아있던 3천여명은 전원 연행, 과학관에 있던 2천여명은 연희동으로 탈출을 시도하여 이 중 절반은 탈출하였고, 천여명은 연행되었다.
총 5848명이 연행되었고 462명 구속, 종합관 진압과정 등에서 무수한 폭행과 성추행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충돌 과정에서 영남대학교 김하영 양과 진압과정에서 의경 한 사람이 사망하였다.
모든 언론매체들은 한총련을 친북폭력집단으로 맹렬히 비난하였고, 학생운동의 대중적 지지기반이 무너지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편, 야당 및 사회단체에서 과도한 공권력 사용과 비인도적 처사, 성추행 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묵살되었다.
이런저런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말 그대로 사실관계만 적는다면, 대략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당시 항쟁기간 중 보도기사는 너무 황당한 날조가 많아서 제외하고, 항쟁이 진압된 날 MBC 9시 뉴스 정도는 참고 봐줄만 하니 올려 놓겠다. 기자들의 리포트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고, 화면만 보시라.
96년 8월20일 진압 당일 MBC 9시뉴스
그리고, AP통신의 96년 연세대항쟁 당시 영상자료들을 모아놓은 것이 있어서 퍼 왔다.
의경 출신이 작업해 놓은 것으로 아는데, 2분~5분 정도되는 원본 소스자료 조각들을 쭉 연결시켜 놓아 시간과 장소가 불규칙하다. 연세대 외에도 연세대 주변에서 싸우는 장면이 많고, 언론사의 특성상 자극적인 장면을 선호하는지 격렬하게 맞붙는 장면이 많다.
AP통신 영상자료를 연결시켜 모아놓은 것. 폭력적인 장면 많음.
그리고, 한총련에서 정리한 연세대항쟁 자료집 중 항쟁의 경과와 현장에 남긴 학우들의 글모음 읽어보시라. 96년 당시 느낌 그대로 충실하게 정리되어 있다.
https://drive.google.com/open?id=1nuEjqFGiMS3XyEY37RcdwkmInIr5kyEW
https://drive.google.com/open?id=1_cUAZqXlrRxq20qoUi0SBKOLoXvtY9-w
기본적인 팩트 정리에 이어, 나의 개인적인 기억들을 공유한다.
기억1, 12명이 나눠먹은 초코파이
96년 연세대 현장에 있었던 벗들이라면, 헬기소리와 초코파이는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초코파이는 건물에 완전봉쇄 된 후 먹을 수 있었던 유일한 비상식량.
그런데, 그것마저도 양이 턱없이 부족해, 18일 쯤에는 12명이 분임토의 하는 중, 초코파이 하나가 지급되었다. 이미 이틀 넘게 쫄쫄 굶은 상황, 초코파이 하나로 뭘 어떻게 할 수 있었겠나. 그래도, 좁쌀만큼 조금씩 뜯어먹고, 서로 더 많이 먹으라고 권하며 다음 동지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좁쌀만큼 입에 넣었지만 거짓말처럼 달콤함이 온몸에 차올랐고, 따뜻한 동지애로 배가 불렀다.
그런데, 초코파이 하나가 두바퀴를 돌아도 그대로 남아 있고, 서로 먹지 않으려고 해, ‘누가 더 많이 먹어야 하나?’ 토론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신입생이 먹어야 한다’가 우세했는데, 항의가 들어왔다. ‘1학기가 지났으니 더 이상 새내기가 아니다. 신입생 취급하지 말고 동지로 존중해 달라 ’ 맞는 말이었다.
결국은 우리는 힘 쓸 일도 없고 아직은 쌩쌩하니, ‘사수대나 부상자에게 먹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2/3쯤 남아있던 초코파이는 옥상에 있는 사수대에게 전달되었다.

기억2, 남총련 생활수칙
과학관 곳곳을 도배했던 ‘남총련 생활수칙’은 우리 전남대 선전국에서 만든 것이다. ㅎㅎ
16일 북문을 뚫고 탈출하려던 계획이 틀어지고, 과학관으로 다시 돌아온 후, 우리 학교 선전일꾼들이 모여서 만들었다.
그리고, 북미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연방제 합의 4가지 구호는 모두 내리고, 2가지 핵심 구호를 정리하여, 건물 옥상과 창문에 붙였다.
“통일운동 탄압하는 김영삼정권 타도하자!” “우리는 집에 가고싶다!”
회의 도중 “엄마 배고파!” 구호는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는데… 이런 구호는 너무 쪽팔리니 붙이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 당시 사진을 보니, 누군가 붙여 놓았더군. 과학관 4층에 ‘엄마 배고파’라고 크게 붙인 사람 누군가? 정말 궁금하다.

기억3, 전경, 학생 노래자랑
8월 17일부터는 과학관 건물 바로 앞까지 병력이 배치되어, 교내에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날 밤 건물에 써치라이트를 비추고, 경찰에서 방송차를 대놓고 선무방송을 시작했다. 이에, 우리는 스피커와 앰프를 설치하고 맞대응 방송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정치연설 내용이 주로 들어가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전경-학생 노래자랑 형태로 진행이 되었다. 우리쪽에서 노래부르고, 전경쪽에서 트로트 노래 등을 부르면 반주도 맞춰줬다.
사방이 완전 포위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 청춘들은 노래하고 춤추고 싸웠다.
이날 밤부터 새벽까지 써치라이트 조명(?)아래 펼쳐진 전경-학생 노래자랑을 동아일보에서는 ‘학생-경찰 한밤 심리전’이라는 기사로 남겨놓았다. 한총련의 연대항쟁 자료집에도 당시의 기억이 남아있다.

기억4, 손으로 직접 써 만든 유인물
8월18일쯤으로 기억된다. 우리의 이야기를 직접 손으로 써서, 종이비행기로 날리자는 지침이 내려왔다. 그때는 SNS도 없었고, 휴대폰도 없었다. 경찰이 도청하는 전화로는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전화선을 이용한 PC통신 정도만 가능했다.
그러니, 직접 손으로 써서 날리자는 것이었는데… 내용을 전달하기 보다는 서로서로 자신을 돌아보며, 결의를 다지자는 의미가 더 강했을 것이다.
학우들에게 종이와 펜을 주고, 다시 취합했는데… 세상에나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고퀄 작품들이 쏟아져나왔다. 직접 그림도 그리고, 시도 쓰고… 난 비행기로 날려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 일단 보관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던가, 내가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이 기록이라도 전달하고 싶었다.
취재기자들을 통해 내보낼까 하다가, 당시 기자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전남대 총학생회실로 꼭 보내달라는 메모와 함께 과학관에 있는 교수 연구실에 숨겨놓았지만, 전달받지 못했다. ㅠ.ㅠ 이것들을 연세대 교수가 폐기했을지, 경찰로 넘어갔을지 아직도 궁금하다.
동아일보에 현장에 남겨진 학우들의 기록 관련 기사가 있다. 내용 꼭 읽어보시라. 편집진은 제목을 X같이 뽑았지만, 기사 내용은 절절하다.
우리 벗들의 기록을 가지고 나오지 못해 너무 아쉽다.

기억5, 패잔병(?)에 끊겨버린 탈출대열
20일 아침, 가장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모든 소지품을 버린 후, 대기하라는 지침이 왔다. 그리고, 과학관 뒷문을 통해 탈출했다. 전남대는 오월대가 맨 앞에 서고, 중간에는 부상자와 다른 학교 학생들이 뛰었으며, 전남대 본진은 대열 후미를 담당한 것 같다. 움직일 수 없는 부상자들은 건물 옥상에서 마지막까지 깃발을 흔들었다.
나는 당시, 집행유예 기간이었다. 잡히면 아주 곤란한 상황이라 열심히 뛰었다. 건물 지붕을 타고 넘고, 축대 3개를 뛰어내리고, 대열 앞쪽까지 다가갔었다. 대략 50M 전방에서 맞붙는 소리가 들렸다. 모퉁이를 돌면 연희초등학교 앞 대로변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는데…
앞을 보니, 방패, 투구가 널부러진 전경 대열이 보였다. 그런데, 사수대는 이미 저 앞으로 뚫고 지나가버린 상황. 그 앞으로도 끝없는 병력의 숲이 펼쳐져있고. 헐~.
내가 여학생 대열의 거의 맨앞에 있었는데, 거기 있는 전경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무기만 있었으면 나도 뚫을 수 있었을텐데, 무기가 없어서 멈칫멈칫 하고 있고, 여학생 대열만 있으니, 패잔병(?)들이 일어나 대열을 막아버렸다.
대열을 버리고, 지도부와 사수대만 빠져나갔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불가항력이었다고 본다. 거기에서 오월대가 돌파하지 않았다면, 모두가 잡힐 상황이었고, 오월대가 병력의 숲을 진짜로 뚫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연희초등학교 앞을 돌파한 오월대 대열에 정명기 한총련 의장이 같이 있었고, 대략 6겹의 봉쇄망을 뚫어버렸다고 한다. 당시 전경들은 오월대의 기세에 눌려 감히 앞길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맞붙기만 하면 바로 갈라져버렸다고한다.

기억 6, 대간첩작전 기준으로 가택수색 이뤄져
나는 돌파하지 못하고 패잔병에 막혀버린 후, 옆길을 돌아 담장 2개를 넘어 대로변까지는 나갔다. 하지만, 새까맣게 몰려드는 병력들을 보고 길가 옆 가게로 들어갔다. 주인 아저씨는 아무 것도 묻지않고, 지하실로 숨겨 주었다.
지하실에 있으니, 4~5명 정도 후배들이 더 숨어 들어왔다. 대략 두시간 정도 버텼는데… 문 앞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경찰이 와서 문을 열라고 하는데, 주인 아저씨가 수색영장을 가지고 오라며 항의했다. 그랬더니, 경찰측에서 ‘대간첩 작전에 준한 수색입니다. 방해하면 바로 연행하겠습니다’며 밀고 들어왔고, 나는 그 자리에서 후배 4~5명과 함께 연행되었다. 생각해보니, 그 자리에서 끝까지 걱정하시던 주인아저씨에게 감사했다는 인사도 전하지 못했다. 이 자리를 빌어, 그날 한총련 청춘들을 숨겨주셨던 수많은 시민들에게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다.
당일, 과학관 인원 2천여명 중, 500여명은 오월대, 녹두대와 함께 뚫고나갔고, 1500명 정도는 주택가에 숨어있다가 1000명 정도는 잡히고, 500명 정도는 시민들이 잘 숨겨줘서 살아나온 것 같다.
동아, 조선일보사는 불질러 버렸어야~
연세대항쟁의 경과를 돌아보며, 기레기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한다.
당시에는 ‘기레기’라는 용어가 없었지만, 요즈음 기레기를 능가하는 날조된 쓰레기 기사가 넘쳐났다. 쓰레기 기사 중 압권은 1996년 8월 20일자 동아일보 1면 톱 기사이다. 말 그대로 대문짝만하게 제목을 뽑았는데 “사수대 자수 막아” 정말 포르노 수준의 제목이다.
여학생들은 쫄쫄 굶긴 채 사수대만 먹이고, 사수대가 자수 못하게 감시했단다. 딱, 70년대 늑대가 총들고 주민들을 감시하던 반공만화 똘이장군 수준의 날조인데 버젓이 1면 톱으로 실었다. 그것도 당시까지는 야당지(?)라 불리던 동아일보에서.
동아일보는 ‘무릎은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며, 마지막 남은 몸뚱이와 생명을 걸고 정당함을 증명하려했던 우리들을 철저히 모욕했다.

자유언론실천재단에서 조선일보의 연세대항쟁 관련 기사 분석 내용 참고하시라.
한총련 사태 / 조선일보 대해부 4권 - 50장 / 자유언론실천재단
http://www.kopf.kr/news/articleView.html?idxno=187138
다음으로, 한총련이 만들었던 연세대항쟁 자료집 중 언론보도 분석 내용도 꼭 읽어보길 바란다.
https://drive.google.com/open?id=1QBfS8Y7St3sbhH7DzNHItyrB7BJMrfgt
우리 민족민주운동 역사에서 공공기관을 제외하고, 시위대에게 공격받아 불타버린 건물은, 518광주항쟁 당시, MBC와 KBS가 유일하다. 학살이 벌어지는 와중에,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언론사에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나는 96년 연세대항쟁 당시 기사들을 보면서,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는 불질러 버렸어야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도 정신을 못차리고, 쓰레기 기사들을 쏟아내는 그들을 보니, 그때 실천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지금까지,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쭉 확인하였다. 하지만,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권은 왜 그토록 잔인하게 짓밟았나?’ 이 문제에 대한 분석은 다음 글에 이어진다.
한총련 명예회복의 핵심은 뭐니뭐니해도 '연세대항쟁 재평가', 벗들의 많은 관심과 공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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