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8)
한총련은 자주민주통일의 선봉 역할과 함께 대학생 계층의 이해와 요구를 모아 관철하는 조합적 성격도 가지고 있다. ‘강력한 학생권력’으로 독특한 대학문화를 만들어 냈던 한총련의 학원자주화 투쟁을 돌아본다.
자주적인 대학운영,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학문, 함께하는 공동체 문화, 이 3가지가 한총련이 추구했던 ‘민족대학’의 핵심 방향이다.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제2부, 90년대 한총련 운동의 특징
특징3. 강력한 학생권력-학원자주와 민족대학
특징 4. 저항의 공동체, 민족문화와 민중문화
특징 5. 민중운동과 강력하게 연대
특징3. 강력한 학생권력 - 학원자주와 민족대학
교문을 지나면 색다른 세상
90년대에는 대학 교내로 들어서면 색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바깥 세상은 국가보안법이 판치고, 공권력에 주눅들어 있으며, 직급에 따른 군대식 서열 문화로 억눌려 지내고, 금전적 이익으로 서로 다투고 있었다. 하지만, 교문만 넘어서면, 대학 내에서는 북한의 영화가 상영되고, 북한 노래가 울려퍼지며 국가보안법을 조롱했고, 북한 원전 책자가 강의 교재로도 쓰였다. 학생 대표가 총장 또는 학장과 만나 학교 운영과 관련된 담판을 짓고, 교과과정 중 진보적인 교양 과목을 추가하도록 했다. 대학 사회는 건강한 공동체 문화를 지향하며, 자본주의적 가치보다 함께 하는 삶을 더 소중히 여기며 생활했다. 또한, 노조 연대활동, 농촌 활동, 철거민 지원 활동 등 민중과 함께하는 삶을 지향했다. 경찰력은 가끔 학교에 수천의 전투 병력을 끌고 들어와 잠시 머물다갈 뿐, 학생들의 자치권을 빼앗지 못했다.

공권력이 미치지 못한 진공지대. 학생권력
21세기에 대학에 다닌 후배들은 믿겨지지 않겠지만, 90년대 대학은 독립된 세계였다. 그리고, 학과수업 보다는 집회, 가투, 소모임, 세미나, 단체 술자리로 지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당시에는 학생권력이 막강하여 교수들도 인정 또는 묵인할 수 밖에 없었고, 공권력도 통제할 수 없었다. 대략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후반까지 10여년간 대학사회는 강력한 학생권력이 존재했다. 동학혁명 이후 농민자치 기구인 집강소가 만들어져 이중권력이 만들어졌던 것처럼, 대학사회도 이중권력 체제였다고 할만하다.
다음 사례들은 [당당한 주인으로]란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읽어보시라.
조국과청춘 1집 중, [당당한 주인으로], 자주적 학생회를 노래하라
[사례 1] 시험 답안 대신 제출했던 ‘애국의 길’
1991년 봄. 중간고사 기간. 아마도 419 정신계승 집회였던 것 같은데, 교양과목 시험과 겹쳤다. 교문 앞 싸움이 벌어질 시간, 선배들이 시험은 보고 오라고 성화를 부려, 시험지를 받고 이름과 학번을 적고 있었는데… 페퍼포그 지져대는 소리가 진동을 했다. 현장에서 듣는 것보다 건물안에서 들으니 소리가 더 울렸다. 바로, 답안지를 갈겨쓰고 뛰어나갔다. “교수님, 지금 학우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페퍼포그 소리가 저를 부릅니다. 죄송합니다만, 시험 보다 투쟁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식민지 조국의 품안에 태어나~’ 로 시작하는 ‘애국의 길’ 가사 1절부터 3절까지 갈겨쓰고 나왔다. 며칠 후, 91년 4월29일 박승희 분신 이후부터는 모든 수업 전면거부, 철야농성으로 이어졌고, 기말고사는 레포트로 대체됐다. 애국의 길로 중간고사 대체한 그 교양과목 D+ 받았다.
[사례 2] 예비역들의 패싸움, 112로 신고X, 총학생회로 신고O
1995년 봄, 공대 예비역들이 막걸리 마시며, 군화 신고 족구대회를 열다가 패싸움이 났다. 두세명이 머리가 깨지고, 서로 흥분하여 상대편 과학생회실로 몰려가 엎어버리겠다며 사람들이 모여들고 분위기가 살벌하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하나? 만약, 112 신고를 한다면? 경찰관 아저씨가 친절하게 이야기해 줄 것이다. “학교 안에서 일어난 일은 우린 모르는 일이니까, 총학생회로 연락해. 우린 학교안에 들어가지도 못한다니까.” 이러면서, 총학생회 전화번호를 알려줄 것이다.
학내에서 예비역 아저씨들이 사고를 친다. 어디로 연락? 112 절대 아니고, 총학생회로 연락하라. 총학생회에서 수습할 것이다. 만약, 총학생회에서 수습책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진단서 떼서 경찰에 고소한다면? 고소한 당사자는 아마 학교에서 두고두고 왕따를 당하다가 경찰관에게도 비웃음 받으며 고소 취하했을 것이다.
[사례 3] 1992년 봄. ‘북한사회론’ 교양과목 조별 발표
1992년 1학기, 새로운 교양과목으로 ‘북한사회론’이라는 과목이 추가됐다. 2학년 시절 나는 동기들과 함께 수강신청 했고, 강의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당시 총학생회에서 여성학, 북한학, 한국현대사 관련 교양과목을 제안하여 채택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강의내용은 당시 도덕이나 국민윤리 교과서보다는 조금 더 열려있었지만, 특별히 진보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예를들어, ‘김주석이 항일무장투장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에서 이야기하는 것 처럼 대단한 것은 아니다. 실증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수준.
강의는 별로 들을 건 없었고, 학생들의 조별발표가 재미있었다. 나와 우리 과 동기들도 조별발표를 맡았는데, 발표주제는 ‘북한의 국가’ 로 잡았다. 사실 당시까지도 북한의 애국가를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남총련에서 ‘국가보안법 어기기 운동’의 하나로 북한 노래 공연 및 악보 보급이 막 이루어진 시점이었다. 우리 발표조는 기타를 들고 앞에 나가고 복사한 악보를 배포한 후, 이야기를 꺼냈다. “북한사회론 강의를 들었는데, 막상 북한 국가도 모르고 끝내면 허무하죠. 다 같이 배워봅시다.” 강사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바뀌며, 화를 버럭 냈다. “자네들은 강의 시간에 정치투쟁을 하러 나온건가. 난 듣지않겠네” 하고는 강의실 밖으로 쌩~ 하고 나가버렸다. 강사가 나간 후, 강의실에서 화기애애하게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난 아직도, 그 강사가 왜 그리 화를 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참고로 학기말에 점수는 B+ 받았다.
[사례 4] 불량 고딩(?)이 자치방범대의 참교육을 받고 오월대로~
오월대는 집회 및 시위에서 선봉대 역할을 할 뿐 아니라, 학교 내 자치방범대 활동도 했다. 특히, 여름에는 해가 길어지고 날씨가 따뜻하여, 밤늦은 시간까지 학교내 잔디밭 등지에서 술먹고 쓰러져 있거나, 시비를 거는 사람이 가끔 나타났다. 대학생들인 경우에는 대부분 통제에 따라, 큰 문제가 없었지만, 가끔 술 취한 고딩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고딩들이 사고를 치면, 현장에서 잡아 기합을 주고 반성문을 받은 후 풀어줬다.
그런데, 96년인가, 오월대 신입대원으로 들어온 후배, 자기가 고딩시절 오월대에게 개기다가 참교육을 받은 후, 정신차리고 공부하여 전남대에 들어왔다는 것. 당시에는 분해서 대학가면 오월대에게 복수하겠다고 공부했으나, 입학 후 선배들에 감동받아 오월대원으로 가입했다는 훈훈한 미담(?)이 전해온다. 당시 광주지역 고딩들은 경찰에게 잡히면 별 것 아니지만, 오월대에게 잡히면 영혼까지 탈탈 털리기 때문에, 무조건 도망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사례 5]불법집회라고? 한총련이 결정하면 그대로 진행
그 시절에는 불법집회도 참 많았다. 불법집회로 규정되면, 정권에서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대회장을 원천봉쇄 하는 것과 동시에 장소 책임자에게 압력이 들어갔다. 집회 장소로 결정된 대학 본부에서는 법에 따라 집회를 허가하지 않는다고 공고를 했다. 요즈음은 불법집회로 통보받으면, 법원에 행정소송 등을 제기하던데, 한총련은 그런 것 필요 없었다. 꼭 해야할 집회가 있으면, 그냥 하는 거다.
대통령이 뭐라 하던, 경찰이 뭐라 하던, 본부에서 뭐라 하던, 한총련이 결정하면 진행했다. 한총련이나 지역 총련에서 주최한 집회도 그렇고, 노조나 사회단체에서 대학으로 장소를 옮겨 진행한 집회라도 장소를 지켜주었다. 한총련은 국가보안법이던, 집시법이던 상관없이 해야할 일이라면 행동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법적인 책임을 졌다. 근데, 당시에는 낭만이 남아있던 시대라 그런가, 집회 관련해서 학생들에게 손해배상 청구 등 돈으로 보복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등록금 인상 반대로부터 시작하여 ‘학원자주화’ 개념으로 확장
대학 내에서 학교운영과 관련된 활동은 80년대 후반부터 등록금 인상 저지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보통, 등록금 투쟁(등투)이라고 불렀는데, 초기에는 등록금 인상폭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그러다가, 등록금 투쟁의 경혐이 쌓이고 체계화되면서, 다음 단계로 등록금 및 예산 책정 관련 대학생과 대학 본부간 협의기구를 만드는 것으로 방향이 모아졌다. 한단계 더 나아가, 대학운영의 전반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협의하고 의결하는 교수,학생,교직원의 학교 운영 협의기구도 신설되었다. (전남대의 경우 대학운영협의회)
‘등록금 인상 반대’라는 낮은 단계의 요구에서 시작하여, 대학운영에 직접 참여하는 학원자주화 개념으로 확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남대는 자주민주통일 투쟁에서는 선두로 꼽히지만, 학원자주화투쟁에서는 좀 뒤처졌다. 일단, 등록금이 사립대에 비해 저렴했고, 국립대학교라 공무원 신분의 교직원들이 결정할 수 있는 관할권도 크지 않아 협의를 통해 바꿀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었다.
학원자주화 투쟁의 신화는 조선대학교다. 조선대학교는 원래 해방 직후,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갈 인재를 키우자는 열망으로 지역민들의 모금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민립대학이었다. 광주에 있지만, 학교 이름에 조선을 붙일 정도니, 사립대학 중 가장 먼저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전남 도청의 고위 관료였던 박철웅이 민립대학을 어영구영 사유화시켜버리고 시간이 지나버렸다. 87년 6월항쟁 이후 조선대학교의 교수, 학생, 교직원들이 힘을 합쳐 학내 민주화와 박철웅 퇴진을 요구하며 반년간 치열하게 싸워, 재단구성을 완전히 바꿔버리고 제대로 된 학교를 만들었다. 조선대학교의 사례는 이후 비리재단과 싸우는 여타 학교들에게도 하나의 목표점이 되었다.

대학운영 및 교과과정까지 참여, ‘민족대학’ 개념으로 구체화
개별 대학의 운영에 참여하는 것과 함께, 전체 대학교육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과 실천도 이어졌다. 먼저 진보적이고 민족적인 교과과정을 만드는 것과 함께 대학 강의에 학생들의 평가와 참여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했다. 자주적인 대학운영,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학문, 함께하는 공동체 문화, 이 3가지가 한총련에서 추구했던 민족대학의 핵심 방향이다.
등록금 투쟁도 전체 대학생의 요구로 집중시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정부를 상대로 교육재정 확보 및 사립학교법 개정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학생운동 쇠퇴기에는 활동가들에게 실무 부담으로 남아
학원자주화투쟁은 활동가들에게 조합주의적 활동으로 보여, 상대적으로 낮은 단계 투쟁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전남대 같은 경우에는 지원자가 많지 않았다. 여기에 학교 본부측과 세세한 부분까지 맞닥뜨려 합의를 이끌어내 구체적인 성과를 만들어야 했기에 업무가 까다로웠다. 그래서, 다양한 협상 경험과 구체적인 지식이 풍부한 활동가가 배치되어 지속적으로 달라붙어야 했다.
그런데, 학생 활동가가 오랜 기간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월급쟁이 교직원들을 넘어서기는 힘들었다. 여기에, 학생회 공약사업으로 제시한 다양한 복지사업을 처리하는 것 만으로도 실무적인 부담이 컸다. 학원자주화 부서에서 일하던 일꾼들은 많이 지치고 조그만 성과 하나라도 얻기 위해 청춘을 갈아넣어야 했다. 한총련과 함께 자주학원, 민족대학을 만들기 위해 함께 했던 벗들, 참으로 고생 많았다.
특징 4. 저항의 공동체, 민족문화와 민중문화
군부독재와 분단체제에 저항하는 공동체 문화
한총련 세대는 70년대 초반, 출생아 수가 정점을 찍던 시기에 태어났다. 베이비붐 세대를 대표하는 58년 개띠가 75.8만명 출생, 역사상 최고로 많았던 71년 돼지띠가 102.5만명 출생이다. 어렸을 때부터 골목길에 아이들이 드글드글했고, 국민학교, 중고등학교 교실은 한반에 70명에 육박했다. 어쩔 수 없이 집단 속에서 부대끼며 살았다. 대학입시 때는 전체 정원이 20만명 수준이었으니, 엄밀히 말해 한총련 백만학도는 우리세대 중 20%만 포괄하고 있다. 대학에 가지 않은 수많은 벗들도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는 것 명심하고 있으니 섭섭해하지 않기를…

우리 세대는 10대 시절 6월항쟁을 거치며, 군부독재가 해체되는 시기를 경험했고, 해체하는데 직접 참가했다. 고등학생 교련수업이 1997년 폐지되었으니, 우리 세대는 고딩때 학교에서 남학생은 총검술을, 여학생은 붕대묶기를 강제로 교육받고 내신성적에 반영될 정도로 억압적이었다. 군대식 집단주의 문화가 군부독재 교육을 통해 이식된 점도 있지만, 억압된 시스템을 집단의 힘으로 깨뜨릴 수 있다는 것도 체득하였다.
대학의 문화를 저항의 공동체로 만들기 위한 한총련의 강령은 이러한 고민 속에서 나온 것이다.
1. 제국주의 문화와 소비향락적인 문화를 척결하고 학원과 생활속에서 건강한 민족 민중적 문화를 일구어 나간다.
1. 외세와 지배집단이 조장하는 학원 내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단호히 배척하고 집단주의를 함양하여 개개인이 주인주체로 서는 학원공동체를 건설한다.
민족문화와 민중문화를 지향한 다양한 창작활동
한총련 시기는 학우들에게 감동을 주는 다양한 문화예술 창작이 이어졌다. 또한, 다양한 문학예술 동아리 또는 소모임을 조직하여, 학우들이 직접 문화예술의 주인으로 참여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우리 학교는 90년대 중후반까지 수십 개의 풍물패, 노래패, 율동패가 단과대 또는 과학생회 별로 활동했다. 서총련 노래단 ‘조국과 청춘’, 경기남부총련 노래단 ‘천리마’ 등 프로급(?) 노래패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단과대 학생회나 과 과학생회 노래패에서 활동하면 학내 공연이나 통일노래한마당에 출전할 수 있었다. 출범식이나 대동제, 518 집회 등 대규모 집회 때, 전체 풍물패를 소집하면, 수백명이 모여 장관을 이루었다.
당시의 민중가요 이야기만 해도 끝없이 이어진다. 자세한 내용은 팟캐스트 청춘들의 민중가요 참고하길.
청춘들의 민중가요 http://www.podbbang.com/ch/13450
그렇다면, 당시 한총련 문예일꾼들의 수준은 어떠했을까. 김영삼 정권 때 정부 발표문을 보자.

먼저 오자 수정부터 하면, ‘공사주의->공산주의’, ‘노래다->노래단’. 천리마의 노래에 대한 평가를 보면, ‘노래를 부르는 사이에 그 내용에 세뇌가 되어 버림’, 정말 최고의 찬사가 아닌가. 노래를 부르기만 해도 세뇌가 되어버리다니, 어마어마하다. 그나저나, 이 내용 브리핑했던 공무원 아저씨, 큰일났다. 이 내용 쓸 때 천리마 노래 들어보았을 것이니, 아저씨도 세뇌가 되어버렸을 것 같은데…
천리마 1집 중, [장마비처럼], 따라 불러 보라. 세뇌가 되어버렸는가?
천리마 1집 중, [조국은 알아주리라], 조금 더 센 노래다. 따라 불러 보라. 세뇌가 완성됐는가?
특징 5. 민중운동과 강력하게 연대
현장투신을 넘어 동등한 관계에서 연대
전두환 정권 시기 선배들은 학생운동을 하다가 노동운동으로 투신했다. 전태일 열사가 이야기했던 ‘대학생 친구’ 부름에 화답하듯, 당시 선택받은 계층이었던 대학생 신분을 버리고 노동현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한총련 시기에는 사실상 현장으로 투신은 의미가 없어졌다. 이미 전노협, 민주노총의 조직력이 성장하여, 굳이 대학생들이 현장에서 의식화, 조직화에 나설 단계는 아니었다. 노동자와 학생은 서로 동등한 관계에서 연대하며, 오히려 학생들이 더 배우고 성장하는 관계였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IMF 체제 이후에는 대학생이 선택받은 계층도 아니었다. 대학생은 ‘노동자로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취업난에 허덕이며 겨우겨우 노동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계급 계층운동을 사회 전체적인 이슈로 확장
그렇다면, 민중운동에 대하여 학생운동은 어떻게 기여했을까. 첫째로,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에 대하여 수구언론에서는 특정 계층의 경제적 이익에 따른 분쟁이라는 프레임으로 갈라치기에 들어간다. 예를들어, 지하철 파업이 일어나면, ‘귀족노조 파업에 서민 불편…’, ‘고액연봉에 묶인 서민의 발’ 등으로 매도한다. 대학생은 상대적으로 특정 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중립적으로 보이기에, 계급-계층운동의 요구들을 사회 전체적인 이슈로 확장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학생운동을 통해 성장하고 배출된 활동가들은 사회운동의 다음 세대 실무자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지금은 학생운동이 너무 쪼그라들어 전반적인 사회운동의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는데 걱정이다.
민중연대 활동의 꽃, 농촌활동
한총련 시기 민중연대 활동의 꽃은 뭐니뭐니 해도 농활이었다. 우리 학교는 여름농활에 대략 1500명 정도 참여했으니, 전체 학우중 10% 정도 매년 참여한 것이고, 연인원으로 치면 대략 30% 정도는 한번쯤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입학했던 91년, 우리 단과대가 보성지역으로 새로 배치 받았는데, 처음 마을에 들어갈 때는 ‘빨갱이들 나가라’고 낫들고 와서 항의하던 마을 어르신들이, 우리가 나올 때는 눈물 지으며 배웅해 주셨다.
농활은 봉사활동이 아니다. 농민들의 작업을 돕는 것을 넘어 철저하게 현장 농민회 강화를 지향했고, 학생대오는 노동의 가치를 배우고 공동체적 삶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농활과 관련된 이야기만 모아도, 감동적인 사연들 차고 넘칠 것이다.
2020년 tvN 채널에서 방영된 [화양연화]란 드라마가 있다. 90년대 학생운동도 배경에 깔리는데, 농촌활동 부분 첨부해 보았다. 농민가로 시작되는 농활 평가회 장면을 보면, 추억 돋는 부분 많다. 사실 이 드라마 전개에 농활 에피소드는 별 필요가 없었다. 작가가 90년대를 살아오며 농활에 참여했던 우리 세대에게 헌정한 것이라 본다. 4분 정도되는 분량이니 여유있을 때 감상해 보길...
농활 중 에피소드. tvN.드라마 [화양연화](2020년 작) 중
미흡하지만, [제2부 90년대 한총련 운동의 특징]을 마칩니다. 단행본으로 정리될 기회가 오면, 부족한 부분 채워넣겠습니다. 90년대 한총련 운동의 특징으로 꼽은 5가지 주제 모두 연구하고 이야기할 내용이 차고 넘칩니다. 벗들이나 연구자들이 계속 이어가길 바랍니다.
3부에서는 91년부터 97년까지 학생운동 관련 주요 사건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 3부로 계속 >
응답이 없으면, 필자의 전투력이 떨어집니다. 전투력이 떨어지면 속도가 늘어지겠죠. 댓글, 메일, 공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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