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31)

1부에서 3부까지 90년대 학생운동 관련 구체적인 모습들을 돌아보았고, 4부와 5부는 핵심적인 내용만 짚고 마무리 하겠다. 90년대 한총련 학생운동은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40대, 한총련 세대를 남긴 성과와 함께 반북 이데올로기를 돌파하지 못하고 발목 잡힌 한계를 가지고 있다.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제1부.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을 소환한다
제2부. 90년대 한총련 운동의 특징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제4부.  90년대를 관통한 두가지 문제의식과 실천
제5부 90년대 학생운동, 무엇을 남겼나? 성과와 한계

* 4부와 5부는 필자가 지난 2019년 ‘전남대518연구소’와 ‘전남대민주동우회’에서 주최한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사 기록정리사업의 현황과 과제’라는 학술발표회에서 발제했던  ‘1990년대 학생자치 경험과 자주통일운동’ 내용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제5부 90년대 학생운동, 무엇을 남겼나? 성과와 한계

 

한총련의 성과와 한계, 현재적 의미로 핵심만 짚어보자 

90년대 한총련 학생운동이 무엇을 남겼는지 성과와 한계를 짚어보자. 시기별로, 지역별로, 대학별로 진행되었던 수많은 활동들을 필자의 능력으로 모두 담을 수는 없다. 간략하게 현재적 의미에서 핵심만 짚어보자. 이번 작업은 한총련의 진짜 기록을 남기는 장기 프로젝트의 시작점이 되길 바란다. 

90년대 학생운동을 통해 당대에 남긴 성과라면, ‘95년 학살자 처벌투쟁과 전두환-노태우 구속’ 정도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치열했던 투쟁과 수많은 구속자들을 감안하면, 큰 성과를 남겼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96년~97년 뼈아픈 패배의 기억이 더 크게 남아있다. 

하지만, 현재적 의미에서 역사적 평가를 내리면 다르게 접근할 수 있다. 한총련은 90년대 미국과 맞서 싸운 세계적으로도 찾기 힘든 대중조직이다. 90년대에 바로 승리하지 못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당대에는 패배하였으나, 분단체제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저항했던 기억은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힘이 되고 있다. 한총련의 투혼은 면면히 이어져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40대를 만들어 냈고, 이것이 가장 큰 성과이다.        

지금 학술계 또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후배들에게 당부한다. 유럽의 68혁명 연구하는 비용과 시간의 절반만 한총련 연구에 투입해 보라.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정면으로 맞서 싸운 전투적이고, 대중적이며, 혁명적인 학생운동 사례들이 쏟아져나온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연구 과제들이  쌓이고 쌓였다.

 

자주통일운동 - 동포들이 가장 힘들 때, 함께 싸웠다 

90년대 한총련의 자주통일운동이 어떠한 성과를 남겼는지 돌아보자. 이 부분 역시 필자가 구체적으로 평가할 역량은 없다. 자주통일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규명하는 것은 당시 운동주체들의 기록과 정부기록, 수사기록 등을 모은 후 깊이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일단, 필자가 투박하게라도 90년대 한총련의 자주통일운동 성과 두가지를 꼽아보겠다. (구체적인 자료가 부족하니 정서적으로 접근한다)   

먼저 94년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 후 북녘 동포들이 슬픔에 잠겼을 때, 저주와 혐오를 내뱉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북녘 동포들과 슬픔을 나누었던 한총련이 있었다. 다음으로, 90년대 중후반, 자연재해 및 외세의 고립과 압박으로 수많은 북녘 동포들이 굶주렸던 고난의 행군 시기, 대북 적대정책 철회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외치며 함께 싸웠던 청춘들이 있었다. 90년대 중후반 북녘의 고난의 행군 시기와 남녘에서 벌어진 한총련 대탄압 시기는 겹쳐진다. 같은 시간대에 북녘 동포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미국과 김영삼 정권에 맞섰던 한총련 청춘들이 있었다.      

이 두 가지 기록을 남긴다면, 훗날 북녘의 동포들이 ‘우리가 가장 힘들었을 때 당신들은 무엇을 했느냐?’ 물었을 떄, 쪽팔리지는 않을 것 같다.

1992년 범민족대회 중 범청학련 결성식 장면. 사진 출처는 범민련
1992년 범민족대회 중 범청학련 결성식 장면. 사진 출처는 범민련

 

혁명적 학생자치 경험 -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한국 40대 

90년대 대학사회의 혁명적 학생자치 경험이 어떠한 결과를 남겼는지도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규명해야 할 과제다. 

2016년 촛불항쟁 시기에 발표됐던 통계를 보면, 70년대 초반 출생자들이 가장 진보적인 세대로 꼽혔다. 70년대생들은 이후 2017 대통령선거와 2018 지방선거, 2020년 총선에서도 일관되게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다. 이들이 누구인가? 대략 90~94년 대학에 입학했던 세대들로 전대협-한총련 학생운동의 절정기를 함께 보냈던 세대이다.

1894년 동학혁명 이후 농민들이 집강소를 만들어 지역에서 자치권력을 행사했던 것처럼, 1945년 815 이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민중자치를 실현했던 것처럼, 87년 6월항쟁 이후 각 대학은 학생회를 조직하여 독재정권의 힘이 미치지 않는 해방구를 만들었다. 1987년부터 1997년까지 전대협-한총련 10년간 대학사회에는 공권력이 통제하지 못하는 강력한 학생권력이 존재했고, 당시 대학생들은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더라도 공동체와 연대의 정신이 살아있는 혁명적 자치를 경험하였다.

20대 초반에 혁명적 자치를 경험했기에, 40대 중반을 넘어서도 진보적이며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지지하는 강력한 세대로 남게 된 것은 아닐까. 

한총련 세대에 대한 중앙일보의 도발. 제목만 쭉 훑어봐도 구역질이 난다. 
한총련 세대에 대한 중앙일보의 도발. 제목만 쭉 훑어봐도 구역질이 난다. 

2021년 9월 중앙일보에서 ‘2040 세대 성향 리포트’라는 기획기사를 연재로 내놓으며, 20대와 40대를 가르고, 한총련 세대를 고립시키기 위한 작전을 시작했다. 여기에, X세대인지 MZ세대인지 판별해 준다는 엽기적인 [2040세대 성향 테스트] 라는 것도 만들었다. (힌트를 준다면, 통일 및 증세에 반대하면 MZ세대라고 판별해 준다. 필자가 보기에는 ‘일베성향 판별기’인데, 중앙일보측에서는 ‘세대성향 판별기’라고 우기고 있다. https://www.joongang.co.kr/digitalspecial/453 

중앙일보사, 2022년 대선을 앞두고 눈물겹게 일하는데, 당신들의 희망은 절망으로 이어질 것이다. 40대가 인구 숫자에서 압도적으로 많다. 많이 급했나보다. 인구통계학적으로 분석하고 이 따위 기획을 했어야지. 수구냉전세력을 극혐하는 한총련 세대의 몰표가 얼마나 무서운지 두고두고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반북 혐오 정서를 돌파하지 못하고 발목잡혀... 

이제 90년대 한총련 운동의 한계를 살펴보자. 자주 민주 통일을 강령으로 한 대중조직 한총련이 한단계 더 도약하지 못한 것은 반북 혐오 정서를 돌파하지 못하고 발목 잡혔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한총련의 한계라기보다 9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

96년 연세대에 고립된 것도 반북 이데올로기 때문이었고, 한총련 조직 내부에 개량주의가 침투했던 것도 반북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필자는 94년을 돌아보며, 조문파동 당시 전남대 분향소 사건에 대한 남총련의 대응은 역사적 실책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경찰의 압수수색으로 김주석 분향소가 발견된 후, 남총련은 ‘정상회담을 합의했던 당사자인 김주석에 대한 조문과 분향은 당연하며, 남북정상회담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했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남총련은 ‘분향소는 조작이다’라는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며, 반북이데올로기 뒤로 숨어버렸다. 반북 이데올로기를 돌파하지 못하는 약한 모습은 민족민주운동 내부에 개량주의가 자리잡도록 만들었다.

반북 이데올로기에 발목 잡힌 후, 96년 연세대항쟁과 97년 김영삼 타도 투쟁은 고립되었고,이후에도 한총련과 민족민주운동은 두고두고 친북(또는 종북) 이라고 공격받았다. 

언제까지 반북 혐오 정서에 발목 잡혀 있을건가. ‘국가보안법 때문에 힘들다’는 말 그만하고, 반북 혐오 정서를 정면으로 맞받아칠 자주의 스피커를 발굴하고 키우자.

 

김영환 일당의 정체는 무엇일까  

90년대 한총련과 자주통일운동의 한계 속에, 독버섯처럼 자라난 김영환 일당이 있다. 김영환 일당의 정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필자는 3부에서 통일운동 진영의 분열, 사람사랑 학생회, 96년 연세대항쟁 당시 내부의 적 등을 이야기하며, 김영환 일당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한총련 조직을 갉아먹었는지 살펴본 바 있다.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김영환 일당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떤 이는 사상적인 측면에서 분석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소련 붕괴와 김주석 사후 조선에서 벌어진 고난의 행군과 황장엽 망명 때문에 만들어진 시대적 산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의 결론은 간단하다. 김영환 일당은 그저 관심종자 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착각에 빠진 관심종자이며, 거창하게 그들의 사상이나 주장을 분석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우리는 민중의 요구보다 자신을 돋보이고자 하는 관심종자를 경계해야 한다. 이것이 김영환 일당을 돌아보며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관종을 이야기하니, 걸출한 진보인사(?) 진모씨를 떠올렸다면 필자의 의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ㅎㅎ)

 

이제 마무리 단계입니다.

한총련 명예회복을 위해 벗들의 많은 관심과 공유 바라고, 

단행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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