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30)
90년대를 관통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총련의 핵심적인 문제의식 두가지를 뽑아 보았다. 첫번째는 북-미간의 핵 대결, 두번째는 민족민주운동의 제도권 진출(또는 정치세력화). 참으로 폭넓은 주제지만, 간략히 짚어보겠다. (앞에서도 계속 언급된 내용이지만, 핵심체크-요약정리 차원에서 짧고 굵게....)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제1부.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을 소환한다
제2부. 90년대 한총련 운동의 특징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제4부. 90년대를 관통한 두가지 문제의식과 실천
* 4부와 5부는 필자가 지난 2019년 ‘전남대518연구소’와 ‘전남대민주동우회’에서 주최한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사 기록정리사업의 현황과 과제’라는 학술발표회에서 발제했던 ‘1990년대 학생자치 경험과 자주통일운동’ 내용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제4부. 90년대를 관통한 두가지 문제의식과 실천
1.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유효한 문제의식
4부에서는 90년대 전체를 관통했던 한총련의 문제의식과 실천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겠다.
90년대는 노태우 정권부터 김영삼 정권,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별로 다양한 문제의식과 실천이 있었지만, 90년대를 관통하여 현재까지 이어지는 문제의식은 두가지로 귀결된다.
첫번째는 ‘북-미 핵공방의 본질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과 실천이다. 두번째는 87년항쟁 이후 급성장한 ‘민족민주운동의 제도권 진출(정치세력화)에 대한 문제의식과 실천’이다.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유효하다는 말은, 어쩌면 당시 청춘들이 4050의 나이에 이르도록 실현하지 못한 과제가 남아있고, 다르게 말하자면, 한총련은 시대를 30년 앞선 선각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북-미 핵대결을 보는 한총련의 문제의식과 실천
2.1. 1989년부터 30여년간 이어진 대결
조선과 미국의 핵 대결은 1989년 영변 핵시설에 대한 논란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30여년간 이어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1989년은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대표의 방북이 있었던 해로 자주통일운동이 시작된 때와 겹쳐진다)
30년의 시간 동안 미국의 핵사찰 요구, 조선의 NPT 탈퇴 선언(1993), 미국의 폭격 준비(1994), 김일성 주석의 정상회담 합의와 갑작스런 사망(1994), 제네바 합의(1994), 조선의 인공위성 발사, 조선의 핵실험, 6자회담 … 중간생략… 트럼프의 화염과 분노, 조선의 핵무장 완성 선언, 2차례의 조-미회담과 결렬, 조선의 강대강 선대선 원칙 천명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수많은 논쟁거리들을 낳았지만, 한총련의 문제의식은 ‘조선 핵무장의 성격’과 ‘한국의 대응’ 이라는 문제로 모아진다.
2.2. 조선 핵무장의 성격 – 전쟁광들의 도발인가, 전략적 선택인가
조선 핵무장의 성격을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 수구냉전세력들은 ‘대한민국을 침략하기 위한 전쟁광들의 도발’ 이라는 하나의 결론만을 강요했고, 이와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의견을 말하면 ‘북한 핵무장을 찬양하는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하지만, 조선의 핵무장은 91년 소련 붕괴 이후 미국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자 했던 조선의 전략적인 선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시 말해, 조선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핵폭탄이라는 무기가 아니라 미국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핵탄두와 ICBM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2.3. 한국의 대응 – 한미일 동맹인가. 민족공조인가
조선의 핵무장이 ‘남한을 침략하기 위한 도발’ 이라는 수구냉전세력의 시각을 따른다면 한국의 대응은 ‘전쟁’ 또는 ‘고립을 통한 붕괴 유도(말려 죽이기)’ 밖에 없다. 이는 사실상 조선의 항복을 요구하는 것으로 남과 북의 평화로운 공존은 불가능하다. 지난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굳건한 국제공조(사실상의 한미일 공조)로 조선의 비핵화를 유도한다’고 하며, 대북 적대정책, 고립정책을 펼쳐왔다.
한총련과 자주통일운동 진영의 시각은 일관되고 명쾌하다. 남과 북, 해외동포까지 굳건한 민족공조로 외세 개입의 고리를 끊고 화해와 협력으로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자주적인 통일을 이루자는 것이다. 미국의 파워를 무시한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시각이라는 비판이 따라 붙지만, 한총련의 시각을 무조건 배제해야 하나? 한반도 평화체제, 1996년 연세대에서 외쳤던 극히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이었던 외침이 지금 만들어지고 있지 않은가?
2.4. 한총련의 실천 – 반미자주와 민족공조
조-미핵대결 과정에서 한총련은 일관되게 반미자주와 민족공조를 주장하며 미국과 수구냉전세력에 맞섰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청춘들은 ‘빨갱이’, ‘종북’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감옥에 갇혔다. (이러한 비난과 낙인 찍기에는 진보라고 자처하는 일부 세력도 앞장섰다)
물론, 당대에는 한총련의 실천이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한 부분도 있다. 조금 더 세련된 내용 전달과 대중적인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한 부분이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반미자주와 민족공조라는 한총련의 주장은 냉전의식에 찌든 우리 사회에 신선한(또는 경악할 만한) 충격을 주고,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고 본다.

3. 민족민주운동의 제도권 진출에 대한 한총련의 문제의식과 실천
3.1. ‘전민항쟁’은 ‘폭력혁명’과 다르다
80년대 민족민주운동 진영은 ‘민중봉기에 의한 근본적인 혁명’을 염두에 두었다. (87년항쟁으로 인한 직선제 개헌 이전까지는 투표권이 없었기 때문에 민중봉기가 유일한 방법이었다) 87년 6월 제한적인 승리 후, 운동진영은 각 계급 계층별로 전투적인 대중조직을 조직하며, 연합조직을 만들었다. 하지만,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산화했던 91년 오월투쟁은 별다른 성과 없이 가라앉았고, 91년 여름 소련이 붕괴되면서, 혁명노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일어났다. 이후 운동진영 내에서는 그람시의 진지론 등을 참고하며, 대중운동 강화와 장기적인 전망을 만들고자 했다.
한총련이 지향했던 ‘전민항쟁’은 당시 공안기관이 발표했던 ‘폭력혁명 노선’과는 다른 개념이다. 오히려, 민중봉기나 폭력혁명이 너무 많은 희생을 가져오기 때문에, 압도적인 대중의 힘으로 권력집단을 포위-고립시킨 후, 저항의지를 꺾고 항복을 받는다’는 개념이다. (참고로, 남총련이 염두에 두었던 전민항쟁 모델은 ‘91년 운암대첩과 박승희 열사 도청노제’라고 본다)
덧붙이자면, 한총련이 꿈꿨던 전민항쟁은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2016년~17년 촛불항쟁에서 말 그대로 전민항쟁이 벌어졌는데, 40대에 접어든 한총련 세대들은 10대 자녀들의 손을 잡고 촛불항쟁의 주력군이 되었다.
3.2. 투표로 근본적인 변혁이 가능한가?
97년 대선에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우리 사회에 절차적 민주주의는 확립되었다. 이후, 한총련과 운동진영 내부에서는 투표를 통한 진보세력 집권과 사회변혁이 가능한지 여부를 놓고 논쟁이 이어졌는데, 한총련은 항상 전민항쟁에 의한 근본적인 변혁을 주장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가 진전되고 열린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자주통일운동 진영도 민주노동당으로 결합하고 제도권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물론, 진보정당의 기반은 강력한 대중운동과 대중조직일 수 밖에 없기에, 대중운동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진보정당이 집권했던 유럽이나 남미 사례를 보더라도 진보정당 집권은 투표와 함께 강력한 대중운동-대중조직이 있었다)
한총련은 투표를 통한 근본적인 변혁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제도권 진출 보다는 대중조직 강화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3.3. 학생들은 가장 먼저 돌격했고, 마지막까지 남아 싸웠다
80년 광주항쟁 이후, 대학생들은 학살자에 맞서 선두에서 싸우며, 치열한 모색과 실천을 통해, 전대협과 한총련이라는 강력한 대중조직을 만들었다. 새로운 것에 민감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학생들은 한국 사회의 변화를 추동한 것이다
91년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의 단일 패권이 전세계를 휩쓸 때, 한총련은 혁명적 자치를 실현하며, 대학 사회를 진보적인 공동체로 이끌었다. 90년대 중반 이후 운동 진영 내부에 개량주의가 판을 칠 때에도, 한총련은 자주민주통일의 깃발을 끝까지 지켰다.
96년 연세대항쟁과 97년 투쟁 속에, 한총련은 내부적인 문제와 외부적인 탄압이 겹쳐 대중적 기반은 무너졌지만, IMF와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이 몰려오는 길목에서 처절하게 싸웠다. 이러한 한총련의 투혼은 민족민주운동이 체제 내로 완전히 흡수되어 길들여지는 것을 막았다.
돌이켜보면, 한국사회에서 대학생들은 전선의 선두에서 돌격하며 피와 땀과 눈물을 바쳤고, 혁명의 깃발을 내리고 합법노선으로 전환할 때에는, 독자적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남아 싸웠다.

이야기할 거리가 많지만, 4부는 간략히 마무리 합니다.
이어질, 5부의 주제는 '한총련 학생운동 무엇을 남겼나' 입니다. 한총련 명예회복을 위해 벗들의 많은 관심과 공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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