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14)

93년, 문민정부의 출범이라는 변화된 환경은 학생운동과 민족민주운동 진영에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흐트러진 전선 속에서도 남총련은 김정권을 친미 반민중 정권으로 규정하고 투쟁을 준비하였다. 김영삼의 망월동 참배저지를 시작으로 전노체포결사대까지 이어지는 투쟁 속에 한총련이 공식 출범하였다. 

그리고, 12월 김정권의 쌀수입개방 선언으로, 문민의 가면은 벗겨지고 전선은 복구되었다.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93년, 흐트러진 전선 복구, 문민의 가면을 벗기다

 

92년 대선 후 추웠던 겨울, 조직 복구와 장기전 준비

92년 대선에서 민자당 김영삼이 당선되었다. 관권선거, 금권선거 등 문제가 많았지만, 선거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김영삼이 당선된 결정적인 힘은 영남의 인구 숫자와 색깔론, 반공반북 이데올로기 였다. 92년 대선 후, 518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당시 우리 학교 총학 부회장의 “자주민주통일 투쟁의 총체화 없이, 투표를 통해 정권을 바꾼다는 것은 환상이다.”는 연설이 인상적이었다.

대선 이후 겨울은 정말 썰렁했다. 93년도 학생회에서 일하기로 했던 친구들이 잠수를 타거나 군대로 떠나버린 경우가 많았다. 92년까지 끊임없이 확장되었던 학생운동 조직 곳곳에 구멍이 뚫렸다. 전남대의 경우 92년에는 활동가들이 넘쳐나 적절한 직책을 주지 못해 삐져있던(?) 일꾼들도 많았는데, 93년도에는 투쟁국, 오월대 등 가장 중요한 부문에도 공석이 나왔다. 나는 당시 오월대 임시 소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중대장과 소대장을 맡기로 한 친구들이 군대를 가버리는 바람에 한동안 진달래 선임 소대장(땜빵 중대장)을 맡았다. (아마 오월대 역사상 가장 달리기 못하는 저질 체력 소대장으로 기록될 것이다)

겨울방학 동안 할 일은 장기전을 준비하고, 조직을 복구하는 일이었다. 노태우 정권 시기 NL계열 학생운동 진영에 막연하게 퍼져있던, ‘92년 정권교체-민주연합정부 수립, 95년 통일원년-낮은 단계 연방제 수립, 97년 민중주도의 민족자주정부 수립’이라는 낭만적인 꿈들은 시작부터 무너졌다. 맑스-레닌주의 영향을 받았던 PD계열 친구들은 더 심난한 겨울을 보냈다. ‘1917년 러시아처럼 우리나라도 87년 부르주아 혁명 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도래할 것이다’ 라고 노래하던 혁명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긴 80년대를 대표하던 걸출한 혁명가(?) 김문수가 ‘혁명은 끝났다’고 선언하며 민자당에 들어가는 세상인데, 갓 스무살의 새끼 혁명가들이 버틸 수 있었겠나.

당시 나 또한 도망가고 싶었지만, 오기로 버텼던 것 같다. 단번에 세상을 바꾸겠다고 들떠있던 나를 반성하며, 살아가는 동안 혁명은 볼 수 없을지라도, ‘학살자를 처단하고, 조국통일 완수하자’는 구호는  끝까지 외치겠다고 다짐했다. 결론은 대학이라는 공간을 자주민주통일의 근거지로 튼튼하게 만들며,  장기전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 겨울에 나는 처음으로 PC 조작법을 익혔고, 천리안과 하이텔 PC통신도 시작했다. 그전까지 완전한 아날로그형 인간이었는데, 장기전을 준비하면서 짱돌과 꽃병 외에 새로운 무기에도 익숙해지고 싶었다. 

93년 발표된 [조국과청춘2] , 대선 패배 후 헛헛한 마음을 달래줬던 노래다. 

 

문민정부는 기만 – 친미 반민중 정권으로 규정

93년 2월, 개강과 김영삼 정부 취임식을 앞두고, 전남대 투쟁국 세로모임이 열렸다. 총학생회 투쟁국, 오월대 간부, 각 단과대 투쟁국장들이 모이는 자리. 91년 열사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우리 학교와 남총련은 민자당과 김영삼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었다. ‘문민정부는 사기다, 친미 반민중 정권이다’ 라고 내부적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무엇으로 투쟁의 계기를 잡을지 막막했다. 

죽창 중대장 곰팽이 동지가 이야기한다. ‘일주일에 한번은 지랄탄을 먹어줘야 속이 뚫린디, 답답허니 병 나불 것당께…’,  옆에 있던 비호 중대장 달봉이 동지가 거든다. ‘금남로 길바닥에 누워 대가리 깨져도 좋은디, 데모할 껀덕지가 있어야 데모를 하제… ‘ 투쟁국 세로모임에서 데모할 명분이 없어서 고민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김정권 출범을 앞두고, 대학생들은 민자당 정권을 반대하는 정서가 남아 있었으나, 재야운동권의 상층 지도부는 흔들리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YS의 활약을 직접 보고 기억하던 세대들은 YS에 대한 정서와 기대감이 우리와는 달랐던 것 같다. 이재오, 김문수, 손학규 등 70년대 투쟁을 시작한  반유신투쟁 세대들은 김정권으로 대거 진입(전향 또는 투항)했다. 

특히, 전두환 정권 때 해직교수 출신이었던 한완상 씨가 통일부 장관을 맡아, 당시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씨를 북에 송환했고, 김영삼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느 우방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고 연설하며 남북관계에서도 진전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94년 이후 나타난 통일운동의 분열은, 사실상 이때부터, 미국과 김정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남총련이 ‘김영삼 정권은 친미 반민중 정권이며, 문민개혁은 기만이다’ 라고 규정지었다고, 이것이 바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이론과 주장은 실천을 통해 검증하는 것, 우리는 ‘문민개혁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 몸으로 직접 부딪히며 검증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광주항쟁 학살자 처벌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요구하는 것을 핵심고리로 잡았다. 군부독재를 청산하는 진정한 개혁의 시작은 광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임을 알리고, 학살자와 야합한 민자당 정권의 본질을 드러내는 투쟁이었다. 

다음으로, 우르과이라운드 협상에 따른 쌀수입 개방 문제는 시한폭탄 이었다. 92년 대선 당시, 김영삼은 ‘대통령 직을 걸고 쌀수입 개방을 막겠다’고 공약을 했다. 하지만, 우리는 ‘김정권은 UR협상에 따른 쌀수입 개방을 막을 의지도 능력도 없다’고 판단했다. 쌀수입 개방 문제는 문민정부의 본질을 드러냄과 동시에 미국의 경제침략도 부각시킬 수 있는 중요한 이슈였다. 우리는 학생조직을 복구하고 기다리면, 다시 투쟁의 시기가 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대략 강경대, 박승희 2주기였던 4월말부터 본격적인 투쟁을 시작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김정권과 맞붙는 계기는 생각보다 빨리왔다. 93년 3월 18일 김영삼의 망월동 참배를 남총련이 저지하면서부터, 김정권에 대한 남총련의 전면 투쟁은 시작되었다. 

 

김영삼 망월묘지 참배 저지, 전국 선전단 및 단식농성단  

3월 18일 김영삼의 광주방문과 망월동 묘역 참배 및 5월단체들과 면담이 잡혔다. 3월17일, 오월대원들은 학교에 대기하며, 남총련 중앙의 결정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다. 후에 듣기로, 김영삼 망월동 참배를 앞두고 광주전남지역 재야단체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남총련은 저지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많은 단체들은 광주전남지역의 고립을 우려하며 주저했다. 토론을 통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광주전남연합 의장단에 결정을 위임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정광훈, 오종렬 의장님이 ‘망월동 참배를 저지하자’고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3월17일 저녁, 학교에 대기하고 있던 오월대원 모두 1학생회관으로 모였다. 일단, 김영삼의 망월동 묘역 참배를 저지하기로 결정했지만, 바로 당일 늦은 시간에 결정난 상황이라 어떻게 할 지는 막연했다. 지도부의 지침은 단순 무식했다. 그리고, 참으로 비장했다. “김영삼 정권이 정치쇼를 통해 오월정신을 깔아뭉개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대통령이 방문하는 모든 동선은 청와대 경호실에서 깨끗하게 정리한다. 아마도 망월동으로 가는 길은 겹겹히 막혀있을 것이고, 총 맞을 지도 모른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망월동에 먼저 도착하라.” 

3월18일 새벽 2시, 남총련 전투조 대원들이 2시간 행군하여 망월동 묘역에 먼저 도착했다. 다행히, 격렬한 충돌은 없었다. 하지만, 당시 김영삼 지지율이 70~80%에 육박하던 상황에서 남총련은 여기저기서 엄청나게 욕 먹었다. 당시 한겨레 신문 1면 톱기사로 대문짝만하게 나왔고, KBS와 MBC 방송뉴스에도 톱뉴스로 잡혔다. 

3월18일 망월동 참배 저지 투쟁 이후, 남총련은 오월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선전단과 광주 도청앞 단식농성단을 조직했다. 우리가 왜 김영삼의 망월동 참배를 막았는지를 알리고, 광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 필요하다는 여론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새로 들어선 문민정부에게 전두환, 노태우를 처벌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지, 명확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당시 남총련의 결정과 실천은 탁월했다. 93년 3월 18일 김영삼의 망월동 참배를 저지한 남총련의 새벽 행군이 없었다면, 95년 전두환, 노태우를 감옥에 보냈던 학살자 처벌 투쟁의 동력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다만, 남총련은 김영삼 정권에게 미운털이 박혀, 두고두고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93년3월19일 한겨레 1면, 말 그대로 1면톱 대문짝만한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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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NPT 탈퇴 선언, 응큼동산에서의 결의 

망월동에서 격돌이 벌어질 즈음,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도 태풍이 불었다. 93년 3월12일, 북에서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겠다’고 선언했고, 한미양국이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자, 북에서는 준전시상태를 선포했다. 1차 북핵위기(또는 1차 북미대결전)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는 소련이 붕괴된 후, 미국의 패권이 뻗어나가던 시기로, 1차 이라크전쟁 후 다음 전쟁은 한반도에서 벌어질 지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더군다나,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쟁연습인 팀스피리트 훈련이 재개되면서 당장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긴강이 고조됐다.

망월동 참배 저지 후 2~3일이 지난 후, 오월대 비상소집이 열렸다. 장소는 ‘응큼동산’. 참고로, 응큼동산은 전남대 1학생회관 뒤쪽에 있는 동산인데, 지형상 밖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이라 응큼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해서, 응큼동산이라 불리는 곳이다.   

응큼동산에서는 북이 NPT탈퇴를 선언하고 팀스피리트 훈련이 재개되면서, 전쟁위기가 고조된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미국의 긴장고조와 전쟁책동을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폭격으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자리에 모인 오월대원들은 모두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동징집 대상이었다. 우리는 모두 강제 징집을 거부하고 미국에 맞서 싸우자고 결의했다.   

당시 학생운동 진영은 핵공방을 통해 북미관계가 어떻게 변화해 갈 지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상당한 기간 동안 정세를 읽지 못했던 것 같다. 수구언론에서는 날마다 북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해야 한다며 불안심리를 부추겼지만, 정세 변화의 핵심은 새로운 북미관계로 바뀌는 것이었다. 93년 북의 NPT탈퇴 선언으로 북-미 핵공방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했고, 이에 따라 자주통일운동의 방향도 새롭게 정립되어야 했다.

1993년 3월 13일 한겨레 1면. 이것도 당시 1면 톱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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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역사에 맡기자’는 김정권과 전-노체포결사대, 한총련 출범식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남총련은 318 망월동 참배 저지 이후, 광주항쟁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전면에 내걸고 전국 각지에서 사진전, 선전전, 서명운동을 벌였다. 4월부터는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과 함께 대중투쟁을 시작했다. 이윽고, 기다리던 김영삼 정권의 공식적인 입장표명이 나왔다. 

5월13일, 김영삼의 특별 담화가 있었는데, 예상대로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은 역사에 맡기자’는 기만적인 내용이었다. 망월동 묘역 성역화, 5월기념공원 조성 등으로 명예회복 시늉을 내며 대충 퉁치고 넘어가자는 것이었기에, 우리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93년 5월 14일, 한겨레 1면 톱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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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권이 처벌하지 않겠다면, 우리가 직접 잡으러 가자’ 남총련이 제안하고 한총련이 받아들여,  전노체포결사대 소집과 연희동 진격투쟁이 결정되었다. 5월18일 한총련 깃발과 함께 연세대에서 벌어진 전노체포결사대의 투쟁은 문민정부 이후 최초로 서울에서 최루탄이 대량 발사된 강력한 투쟁이었다. 93년 4월, 대의원대회를 통해 한총련이 결성되었고, 투쟁하는 조직, 애국하는 조직 한총련의 역사는 전노 학살자 처벌 투쟁부터 시작되었다.     

남총련은 5월말 고려대에서 열린 한총련 출범식에 참가하면서도, 연세대에 모여 어두워질때까지 전-노 처벌을 외치며 싸우다가 출범식에 가장 늦게 입장했다. 한총련은 출범식에서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로 진보적인 대학사회를 만들고, 자주민주통일의 길로 힘차게 전진’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출범식 행사 중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을 통해 조선학생위원회와 공개적인 통화를 하며 남북해외 3자연대를 통한 자주통일운동을 발전시켜나가기로 했다.

한총련은 문민정부 출범이라는 변화된 환경 속에서도, 우리에게는 자주민주통일 이라는 과제가 남아 있으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계속 싸워야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1993년 5월 19일 한겨레 15면. 전노체포결사대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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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5월 18일, KBS9시 뉴스.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http://mn.kbs.co.kr/news/view.do?ncd=3728667 - 뉴스 내용 확인하기

 

조직 정비, 쌀 수입 개방 저지 투쟁 준비   

93년 상반기는 김영삼의 망월동 참배 저지부터 시작하여 전노체포결사대까지 학생운동의 기본 동력을  지켰다. 한총련 출범식 이후에는 대학 내에서 대중적 기반을 넓히고 조직을 정비하는데 집중했다. 93년에는 김정권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 정권과 직접 싸우기보다는 광주항쟁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국가보안법 철폐 등 사안별로 대응하고, 쌀수입 개방 이후 벌어질 본격적인 싸움을 준비했다.   

김정권의 개혁정책은 군부 내 하나회 전면 숙청부터 시작하여, 대통령 긴급명령까지 발동하여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하는 것까지 이어졌다. 돌아보면, 개혁은 YS처럼 단번에 밀고 나가는게 답인 것 같다. 옆에서 아무리 짖어대더라도 인사권을 가지고 쓸어버리는 것이다. 30년 전, 국민이 부여한 권한에 따라 물리력을 가진 군부집단도 단체로 모가지를 날렸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행정부 권력은 물론이고 180석에 이르는 의회권력까지 쥐어줘도 힘을 쓰지 못하는 민주당 정권을 보면 답답하다.

93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무렵, 나는 전남대 활동가 조직의 차기 인선팀에 들어갔다. 보통 3학년에서 4학년 올라갈 무렵, 다음 해 학생회와 조직을 이끌어갈 활동가들이 모여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총학 선거에 나갈 대표자를 뽑는 모임에 들어간 것이다. 93년 당시, 4팀의 후보가 격돌하여,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나오지 않아 결선투표까지 진행, 52표차로 겨우겨우 자주적 학생회를 지켜냈던 93년 전남대 선거 이야기는 다음편에 올리겠다.

 

12월, 쌀수입 개방 발표. 전선이 만들어지다

12월 9일 예상대로 김정권은 쌀 수입 개방을 발표했다. 김영삼은 직접 발표한 사과담화에서 병자호란 때 주화파와 척사파까지 등장시키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구차하게 변명했다. 

1993년 12월 10일, 한겨레 1면 톱기사.
1993년 12월 10일, 한겨레 1면 톱기사.

하지만, 우리 국민 모두는 불과 1년전, 92년 대선 과정에서, 김영삼이 '대통령직을 걸고 쌀수입을 막겠다'고 장담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통령 직을 걸었으니, 쌀을 수입하려면 대통령 직을 내놓는 것이 당연했다. 영화 ‘타짜’에서 고니가 한 명언이 있지않나. ‘쫄리면 뒈지시던지.’ 

93년 12월, 김정권의 쌀수입 개방 선언으로 전선은 복구되었다. 바야흐로, 데모의 시절이 돌아온 것이다. (‘응답하라 1994’ 1편을 보면, 94년 2월 삼천포에서 올라온 신입생이 신촌에서 ‘UR반대 비준거부’ 외치는 대학생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외치는 구호가 바로 쌀수입 개방을 저지하자는 구호다)

고니가 이야기한다. 대통령직을 걸었는데, 쌀수입을 막지 못했으니, 도박판 원칙대로...
고니가 이야기한다. 대통령직을 걸었는데, 쌀수입을 막지 못했으니, 도박판 원칙대로...

<계속>
게으름 부리다가, 이번 글 많이 늦었습니다. 기다시린 분들께 사과드리며, 열심히 올리겠습니다. 댓글, 메일, 무차별 공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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