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22)
96년은 전-노 처벌이라는 성과를 안고 희망차게 출발했지만, 3월 29일 노수석의 죽음과 함께 예상치 못한 국면으로 흘러갔다.
한총련 역사에서 가장 치열했지만, 왜곡되고 묻혀있는, 96년~97년 이야기를 시작한다.
일단 96년 상반기, 연세대 항쟁 이전까지 흐름을 살펴보고, 연세대 항쟁 이야기는 다음편부터 자세히 들어가겠다.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95년, 학생운동의 중흥기, 전-노 학살자 처벌, 민족사의 대전환기
학살자를 법정으로! - 95년 518 특별법 제정 투쟁
95년 가을 ‘사람사랑 학생회’의 등장, 사상-조직운동의 위기
96년, 노수석과 벗들의 죽음, DMZ 불인정 선언, 계속되는 연행,구속,공안정국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96년, 노수석과 벗들의 죽음, DMZ 불인정 선언, 계속되는 연행,구속,공안정국
96년 순진했던 정세 전망 - 유화국면 지속 예상
96년에 들어설 때, 학생운동권의 정세전망은 전반적으로 희망찼다. 북미간의 긴장관계는 제네바 합의의 틀 속에서 풀려갈 것이라 보았고, 95년 전-노 학살자 처벌 투쟁으로 학생운동에 대한 지지도는 많이 올랐다. 또한, 96년 2학년에 올라가는 95학번들은 승리의 경험을 안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당시 나는 일단 북미관계는 대화국면이라 판단했고, 국내정세는 96년 4월 총선과 97년 12월 대선까지 반김영삼 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여나가면 될 것이라 보았다.
지난 글에서 사람사랑 노선 이야기를 보며, 96년 곧바로 치열한 노선투쟁에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노수석 싸움 이전까지는 크게 대립하지 않았다. 세상사가 원래 일이 잘 풀릴 때에는 갈등이 잠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자주적 학생회 노선(이하 자주 노선)과 사람사랑 노선은 한총련 내에 공존하며, 긴장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남총련도 합법 공간으로 진출하는 고민과 실천을 많이 했다. 광주전남 지역은 91년 광역의회선거에서 재야후보로 지금은 고인인 오종렬 의원을 당선시켰고, 92년 총선에서도 시민후보를 지원하며 당시 민주당과 선거판에서 직접 맞붙었던 경험이 있다. 사람사랑 노선과 남총련의 생각이 달랐던 부분은 ‘합법공간으로 진출하느냐/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진출하느냐’의 문제였다.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 자주의 깃발을 내린 합법정당은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자주와 통일의 담론으로 정치력을 가지고 집권할 수 있는 정당을 만드는 것은 자주노선 진영의 꿈이었다. 다만, 국가보안법과 수구언론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정당보다는 대중운동과 전선운동의 힘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보았다.
96년에 들어서며 한총련 내에 유행했던 고민은 ‘전대협-한총련 10년을 총화하고, 새로운 10년을 만들자’ 였다. 대략, 95년 학살자 처벌 투쟁 이후, 거리에서 직접 맞부딪히는 대규모 싸움의 시대는 지나고 학생운동의 새로운 모델을 정립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퍼져 있던 것이다. 김영삼 정권도 학살자 처벌 요구를 받아들인만큼 유화국면이 지속되리라고 보았다.
한총련 내부의 노선 차이도 전남대 정명기 회장을 의장으로 뽑았으니, 무난히 헤쳐나갈 것이라 기대했다. 96년 3월 한총련 대의원 대회를 보면 학생운동 내부의 조직을 정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97년 대선 시기 큰 싸움을 앞두고 96년에는 전열을 정비하는 기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96년 3월, 미국의 광주학살 개입 비밀문서 공개
96년 3월 전두환, 노태우 및 졸개들의 재판이 진행되는 와중에, 미국의 광주학살 개입의 물증인 비밀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탐사기자 팀 셔록 씨가 [시사저널] 잡지에 특종으로 기사를 연재한 것이다. 80년 당시 군사 통제권을 가진 미국이 광주학살에 개입 또는 방조했을 것이란 것은 이미 예상한 일이었지만, 공식적인 문서를 통해, 미국이 학살의 공범이란 사실을 확인했다.


미국의 광주학살 관련 비밀문서 전체 공개 및 진상규명, 미국 정부의 공개 사죄를 요구하는 투쟁이 광주에서부터 일어났다. 남총련 벗들 96년 광주 양림동에 있는 아메리칸센터(미문화원)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러번 찾아갔다. 또한, 96년 5월 전국적으로 미국의 공개사죄를 요구하는 투쟁이 이어졌다. 결국, 96년을 넘기지 못하고, 96년 12월 20일 광주 아메리칸 센터는 문을 닫았다. (그런데, 아메리칸센터가 폐쇠된 후, 남총련 후배들은 반미시위를 어디서 할 지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남총련의 선전물 제목은 이러했다. “전두환 노태우는 살인청부업자. 배후에서 돈과 무기를 쥐어준 자는 미국”, 원래 살인자보다 살인 청부한 자의 죄질이 더 불량하며 주범으로 처벌한다. 전두환-노태우는 학살을 자행한 공범이고, 전-노에게 병력과 무기를 내려준 미국이 광주학살의 주범이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주한미대사는 감옥에 집어넣고, 미국 정부의 공식 사죄를 받아야한다. 미국의 학살만행 개입에 대한 진상은 끝까지 추적해야 하며,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미국이 광주학살의 주범이란 사실을 꼭 기록해야 한다.
그런데, 2020년에는 미국의 광주학살 개입에 대한 보도가 조금 있었는데, 2021년에는 아무것도 없다. 절대로 잊지말자. 광주학살의 주범 미국의 죄는 끝까지 추적하고 기록하고 처벌해야 한다.
팀 셔록 "한국 언론, 공격적으로 5.18 당시 미국 역할 질문해야 " / 2020-05-19 TBS뉴스
미국 기밀문서 공개..진실 규명 자료 / 2020-05-15 광주MBC
"미국이 5.18 무력진압 용인했다"..미 국무부 비밀문건 첫 확인 / 2018-05-16, SBS
대학별 '등록금 인상 반대'를 '교육재정 확보 투쟁'으로 집중
96년 3월, 개강과 함께 한총련은 각 대학별로 분산되어 벌어지고 있던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을 교육재정 확보 투쟁으로 집중시켰다. 김영삼의 대선공약이었던 교육재정 5%를 당장 실현하라는 요구였다.
사실, 전대협-한총련 10년 역사에서 정치투쟁이 아닌 대학생들의 조합적 요구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96년 3월 27~29일까지의 한총련 총궐기 투쟁이 처음이다. 대학생 조직이 정치 투쟁에만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생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활동에도 힘을 모으며 대중성을 높이고 조직력도 정비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장기적으로 한총련을 대략 학생조합 형태의 조직으로 바꾸어나가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등록금 투쟁을 뜨겁게 진행하던 서울지역 14개 대학은 3월 29일~30일 동맹휴업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대학들도 김영삼의 대선공약인 교육재정확보를 전면에 내걸고 투쟁을 준비했다. 이와 함께, 4-11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 정권에 맞서는 ‘대선자금 공개’도 핵심 구호로 내세웠다. 노태우의 비자금이 흘러간 김영삼의 대선자금을 밝히고 그 돈을 회수하면, 교육재정이 확보되어 각 대학의 등록금을 인상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당시 한총련이 전면에 내세운 ‘교육재정 확보’와 ‘대선자금 공개’는 정권타도 보다는 낮은 수위의 구호다. 교육재정 확보는 대선공약을 실행하라는 기본 요구이고, 대선자금 공개도 민감한 구호였지만, 이미 야당에서 요구하던 수준이었다. 그래서, 3월 29일 서울에서 가두투쟁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일, 서총련 대오는 진압 병력에 맨몸으로 맞섰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김영삼 정권은 백골단을 동원하여 토끼몰이로 잔인하게 짓밟았다. 당시, 한총련은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방심한 것이다.
노수석과 후배들의 잇따른 죽음, 무기력했던 한총련 집행부
96년 3월 29일 서울에서 교육재정확보와 대선자금공개를 요구하던 가투투쟁을 하던 중, 연세대 2학년 노수석이 경찰의 토끼몰이 폭력진압으로 사망했다. 당일 짱돌 하나 던지지 않았던 우리 벗들을 김영삼 정권은 잔인하게 짓밟았다.
1996-03-29 노수석이 죽었던 날 시위 진압 모습과 국립의료원에서 대치상황
3월31일 경찰측은 부검 이후, 노수석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심근증이나 심근염에 의한 급성 심장마비’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20년간 건강하게 살아오던 청년이 왜 갑자기 쓰러졌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람이 죽는 것은 의학적으로 심장이 멈추거나 뇌가 멈추는 것이다. 노수석이 심장 계통에 작은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하더라도, 3월 29일 최루탄과 진압봉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에서 받은 극한의 스트레스로 사망한 것이다. 시위에 참가한 당일까지도 건강한 모습으로 투쟁하던 스무살 청년은 정권의 폭력에 사망한 것이다. 이는 마치 물에서 발견된 사체를 부검한 후, ‘익사했다’란 한마디로 끝내고, 물에 빠지기까지의 과정은 지워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시의 수구언론들은 ‘심장마비로 죽었다’ 한마디로 묻어버리고, 당시 청춘들의 투쟁과 분노는 철저히 무시했다. 전국의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분노하고 투쟁하였으나, 책임자 처벌은 고사하고 변변한 사과조차 받지 못한채 4월10일(당시 총선 전날) 장례를 치루었다.


노수석 열사 10주기 추모 영상 - 너는 먼저 강이 되었으니, (2006년 제작)
노수석, 그 후 20년: 끝나지 않은 등록금 투쟁 [한겨레 다큐, 2016년 제작]
3월29일 노수석이 세상을 떠난 후, 96년 4월 성신여대에서 학원자주화투쟁을 주도하던 권희정이 과로와 단식후유증으로 사망했고, 수석이의 죽음을 보며 분노했던 95학번 후배들이 투쟁을 호소하며 잇따라 분신했다.
1996-03-29 연세대 95학번 노수석, 백골단의 토끼몰이 폭력진압 와중에 사망 / 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
1996.04.06 경원대 95학번 진철원 분신, 사망
1996.04.07 성신여대 92학번 권희정 과로와 단식후유증으로 사망
1996.04.16 성균관대 95학번 황혜인 분신, 사망
1996.04.19 여수수산대 95학번 오영권 분신, 사망
1996.05.08 대구공전 92학번 박동학 학원자주화투쟁 중 사망
96년 봄에 노수석을 포함하여 6명의 학우들이 목숨을 잃었고, 학우들의 분노가 곳곳에서 터져나왔으나, 한총련 집행부의 대응은 무기력했다. 전남대나 남총련이라고 당장 정권을 뒤집어엎을 딱히 좋은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총련 중앙의 지침은 투쟁의 수위를 조절하라는 것으로 보였다. 차라리 ‘절대로 분신 하지 말고 살아서 싸우자’라는 호소문 형태의 지침을 내리는 것보다 더 의미없는 이야기로 느껴졌다. 한총련은 당시 학우들 사이에 팽배했던 분노와 절망의 정서를 돌파할 수 있는 투쟁 방안을 만들어야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91년 5월투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을, 당시 한총련 집행부의 고민을 이해는 하나, 조금 이상했다. 우리 학교 정명기 회장이 한총련 의장으로 올라갔는데, 왜 이러지… 당시 한총련 의장단과 학우들은 김영삼 정권과 싸우자는 의지가 차올랐으나, 한총련 집행부는 합법공간 진입을 염두에 두고 부문계열 조직으로 전환하는 것에 관심이 쏠려있었다. 만약 유화국면이 지속되었다면, 학생조합 형태의 조직으로 전환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고 본다. 하지만, 96~97년 정세는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96년 봄, 투쟁을 요구하는 정세 속에, 한총련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자주 노선과 사람사랑 노선 사이의 갈등은 날카로워졌다.
북의 DMZ불인정 선언과 긴장국면 속 치뤄진 총선
노수석 사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투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남북관계가 갑자기 초긴장상태로 들어갔다. 북측에서 ‘정전협정에 따른 규정을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판문점 일대에서 군사훈련에 들어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대규모 군사행동은 아니고, 200명 정도의 병력이 판문점 북측구역에서 삽질도 하고, 박격포 등을 배치하는 등 무력시위를 한 것이다.
쉽게 말해, 너덜너덜해진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새로운 계약서를 작성하자는 말이었다. 북측에서 제네바 합의에 따라 평화협정 체제로 전환하자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총선을 앞둔 김영삼 정권은 대대적인 반북이데올로기 공세를 통해 남북 긴장관계를 끌어올리며 총선에 이용했다. 96년 연세대항쟁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북미평화협정 체결’을 외쳤던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휴전선에서의 정전협정 불인정 선언에 대하여, 전남대 총학생회는 이렇게 분석했다.
지난 4월 4일 북한이 비무장지대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DMZ에 200여명의 인민군을 투입하자, 남한에서는 한바탕 폭풍이 몰아쳤다. 연일 언론에서는 ‘체제붕괴를 눈앞에 둔 북한이 무모한 도발을 감행했다’는 보도가 넘쳐났고, 9시 뉴스에는 실탄을 지급받았다는 새파란 장교가 등장하여 “국민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은 북한 괴뢰집단을 때려잡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습니다.”라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쳐댔지만, 국민들을 안심시키기는 커녕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 속에 치뤄진 4-11 총선에서 김정권은 예상보다 많은 국회의원을 당선시켰다. - 중략 -
전남대총학생회, 96년 통일운동자료집 중
그렇다면, 총선 이후는 어떻게 전망하고 있었을까. 총선 이후 전대기련이 진행했던 민족민주진영, 4-11총선 분석 진단 및 대응방향 위한 간담회 기사를 보자. 중요한 내용만 발췌한 것이다.

사회: 그렇다면, 노군 관련 투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정명기(한총련 의장): 당시의 분노와 슬픔을 뛰어넘는 ‘교육재정확보와 대선자금 공개’라는 내용을 선전했어야 했는데, 추모와 애도의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진철원군, 권희정양의 문제도 교육개혁의 문제와 맞물려 있는 것이었는데 현정권의 허구적인 교육정책에 대한 설명을 바탕으로 반신한국당 정서를 모아내지 못했다.
… 중략 ...
사회: 총선 이후의 과제로서 치열한 대중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선거라는 합법공간을 통한 심판의 가능성은 회의적으로 보는가
정명기: 원칙적으로 범민주대연합의 구도 속에서 전민항쟁이라는 방법을 통해 승리해야 한다. … 중략… 합법적 공간도 물론 중요하지만 합법을 바라다 보면 사람이 연약해지는 것 같다. 대중활동 속에서 조직을 키워가고 의식화해 온 사람들은 올해 투쟁을 통해서도 자기역량을 축적했다. 합법이든 비합법이든 치열성과 헌신성이 중요하다. 청년학생들은 이러한 두가지 원칙을 통해 비합법의 공간을 합법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본다.
전북대에서 열린 출범식, 단결과 투쟁을 호소하며 한총련 의장 삭발
96년 한총련 출범식은 내 머리속에 아무런 기억이 없어서 자료를 찾는데 고생했다. 일단, 96년 5월말 한총련 출범식을 전북대학교에서 열기로 했는데, 내부적으로 논란이 많았다. 투쟁이 필요한 시기인데, 정치적 의미를 찾기 힘든 전주로 모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이었다. 물론, 유화국면 속에서 조직을 정비하는 시기였다면, 전주에서 축제를 여는 것도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96년 상반기에 6명의 학우들이 목숨을 바쳤는데, 전주에서 출범식은 어이없는 결정으로 보였기에 나는 불참했다.
전대신문을 쭉 봐도 96년 출범식 기사는 없어, 다른 대학신문들을 뒤지다가 겨우겨우 충남대학교 신문에서 찾아냈다. (전대신문에는 출범식 보도 기사는 없고, 10년간 학생운동 평가와 전망에 대한 해설기사만 실렸다)
충대신문 766호 1996-05-27
제4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의장 정명기 전남대 총학생회장) 출범식이 지난 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간 전북대에서 열렸다.
시민, 학생 등 5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번 출범식에서는 전대협, 한총련 10년의 학생운동 역사를 총화하고 앞으로 진로를 모색하는 한편 대선자금 공개, 광주 군 투입 미국규탄, 5월 학살자 전원처벌 등의 기치를 세우고 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 중략 …
새벽 3시. 한총련 의장 옹립식이 진행되었다. 새내기 문예단의 인도로 배모양을 형상화한 차를 타고 의장이 무대로 들어섰다. 이 자리에서 정명기 의장은 “너의 조국이 나의 심장을 분노케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투쟁하는 조직으로 이끌어내지 못함을 죄스러워한다”며 각 지역총련 의장들은 혈서를 썼고 정명기 의장은 삭발을 했다.
한총련 정명기 의장은 “노수석 학우 등의 열사 정신을 계승하여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인 김영삼정권 타도를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밝히고 “전대협, 한총련 10년을 맞이하는 96년. 자주, 민주, 통일을 쟁취하기 위해 백만학도의 단결, 백만의 투쟁으로 승리의 역사를 창출해 나아가자”고 말했다.
마지막날인 25일에는 ‘대선자금 공개와 5월 학살자 전원처벌, 교육재정확보’를 위한 한총련 산하 투쟁본부 발족식을 갖고 오후 1시부터 전주시내를 돌며 거리행진 및 시민학생 한마당을 개최했다.
한편 출범식에 참가한 학생들은 5월 학살자 전원처벌과 미국규탄을 위해 상경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기사를 쭉 읽어본 후, ‘정명기 의장이 참으로 외로웠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총련 출범식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해도 한총련 의장이다. 그런데, 출범식에서 의장이 혈서를 쓰고 삭발을 하다니… 그리고, 별도의 투쟁본부를 만들고, 전주에 모였다가, 서울로 상경투쟁을 했다니… (오래전 일이지만, 돌이켜보니, 아~ 술 땡긴다. 막말로 이런 상황이라면, 집행부 전체 머리박고 총사퇴해야 하는거 아닌가?)
계속되는 연행, 구속 및 조직사건. 다시 찾아온 공안정국
96년 한총련 출범식을 놓고, ‘전라북도 지사가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적으로 진행하는 등 변화와 혁신의 모습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는 식의 황당한 평가서가 돌아다니는 속에, 출범식이 끝나자마자 공안당국은 전쟁을 선포했다.
출범식 이후 계속되는 연행과 구속, 조직사건이 이어지며 살벌한 공안정국이 찾아왔다. 94년 조문파동과 공안정국은 언론보도를 통해 요란하게 진행됐지만, 96년에는 조용히 소리없이 끌려갔다.
96년 5월부터 6월까지, 잠정집계한 숫자가 1601명 연행, 150여명 구속이다. 그래서, 당시 선전물의 제목을 “영삼이의 미친 탄압, 감옥이 부족하다”라고 뽑고, 당시 한총련 통신망에 올랐던 연행 및 구속 관련 속보들을 날짜별로 쭉 나열한 것 만으로도 훌륭한 선전물이 되었다.

그리고, 6월 28일 전남대 졸업생 12명이 구속되고, 자주대오 조직사건이 발표되면서, 96년 8월 연세대 항쟁 이전, 전쟁은 시작되었다.
백명이든 천명이든 잡아가라!
우리는 민족전대 2만명 중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투쟁할 것이다.
너희의 더러운 탄압으로 우리의 투쟁이 꺾일 것 같은가?
우리의 벗 수백 명을 잡아다 감옥을 가득 채우고, 백골단과 직격탄의 가공할 폭력에 맞선 최소한의 몸부림을 폭력이라 매도하며, 조국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을 빨간색으로 덧칠하여 「빨갱이」라 낙인찍으면, 우리의 투쟁이 꺾일 것 같은가?
어림없다. 너희는 우리를 출세의 발판으로,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잡아가지만, 민족전대 2만의 가슴에는 애국의 열정이 넘쳐나고 있다. 수백을 잡아가든 수천을 잡아가든, 우리는 먼저 잡혀간 벗들의 빈자리를 채우며, 투쟁의 깃발을 더 높이 올릴 것이다.
... 중략 ...
전남대 총학생회에서 96년 6월 29일 배포했던 전단 내용 중

이제 다음 글부터 96년 연세대항쟁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한총련 명예회복의 핵심은 뭐니뭐니해도 '연세대항쟁 재평가', 벗들의 많은 관심과 공유 바랍니다.
관련기사
- 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을 소환한다
- 주사파? 친북? 종북? 그래서 어쩌라고…
- 반수구세력 콘크리트, 70년대생 한총련세대(현 40대)
- 한총련 명예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 선도투쟁에서 대중운동으로, 이론에서 실천중심으로
- 분단체제 및 미국에 맞선 대중조직, 범청학련에서 과학생회까지
- 강력한 학생권력, 저항의 공동체, 민중 연대
- 91년 오월투쟁, 87년항쟁에 대한 반혁명을 막아낸 투쟁
- 나의 기억1 - 강경대, 박승희, 운암대첩, 91년5월투쟁
- 나의 기억2-운암대첩부터 박승희 장례식, 혁명적 일주일
- 92년, 학생운동의 정점-전총련, 범청학련, 대선투쟁
- 남총련 전투력의 비밀-경찰서 습격, 남대문 돌파 등
- 93년, 흐트러진 전선 복구, 문민의 가면을 벗기다
- 개량적 흐름 속 혁신의 과제, 52표차 아슬아슬했던 총학선거
- 94년 상반기, 쌀수입 반대, 전쟁위기, 정상회담 합의, 618 홍익대 투쟁
- 남총련, 618 홍익대 상경투쟁 보고 - 94년 당시 자료
- 94년 조문파동과 공안정국, 전남대 분향소, 제네바 합의
- 통일운동의 분열, 보안수사대vs한총련, 전남대 총학 선거
- 95년, 학생운동의 중흥기, 전-노 학살자 처벌, 민족사의 대전환기
- 학살자를 법정으로! - 95년 518 특별법 제정 투쟁
- 95년 가을, ‘사람사랑 학생회’의 등장, 사상-조직운동의 위기
- 연세대항쟁 01. 침묵과 트라우마를 딛고, 통일시대를 여는 힘으로~~
- 연세대항쟁 02, 사건 경과 및 핵심 구호, 생활수칙과 초코파이 등
- 연세대항쟁 03, 북한 붕괴 망상 속에 자행된 예비검속 만행
- 연세대항쟁 04, ‘내부의 적’은 존재했나?
- 연세대항쟁 05, 재평가와 명예회복, ‘연세대항쟁동지회’를 만들자
- 연세대항쟁 이후 조직을 복구하며, 97년 복수전을 준비
- 97년, 오직 한총련만 싸웠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졌다
- 90년대를 관통한 두가지 문제의식과 실천
- 90년대 학생운동, 무엇을 남겼나? 성과와 한계
- 강경대 박승희가 떠난지 30년, 무엇을 할까
- ‘응답하라, 한총련’ 출판에 뜨거운 반응 - 4일만에 후원금 4백만원 돌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