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13)
남총련은 학생운동 진영의 ‘비대칭 전력(?)’ 이었다. 서울 지역의 전의경들은 사실상 진압 불가. 남총련 전투력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그리고, 지금 대학생들은 상상하기도 힘든, 당시 전투 이야기 3가지를 꼽아보았다.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고,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청년들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기억하기 위함이다.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91년 오월투쟁, 87년항쟁에 대한 반혁명을 막아낸 투쟁
나의 기억1 - 강경대, 박승희, 운암대첩, 91년5월투쟁
나의 기억2-운암대첩부터 박승희 장례식, 혁명적 일주일
92년, 학생운동의 정점- 전총련, 범청학련, 대선투쟁
남총련 전투력의 비밀-경찰서 습격, 남대문 돌파 등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남총련 전투력의 비밀-경찰서 습격, 남대문 돌파 등
남총련 전투력의 비밀, 광주 시민들이 더 과격(?)했다
남대협-남총련으로 이어지는 광주전남지역 학생운동은 특유의 전투력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다른 지역 학우들 사이에서는 ‘오월대, 녹두대는 특수훈련을 받는다’ , ‘전라도 조폭이 전국을 장악한 것처럼 전라도는 원래부터 깡이 다르다’, ‘체육학과나 특수부대 출신들이 소대장, 중대장을 맡는다더라’ 라는 등의 풍문이 많았다. 그런데, 이 모두 사실이 아니다. 남총련 전투조 대원들은 그냥 평범한 대학생들이었다.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전두환-노태우 학살자가 권좌에 앉아있고, 학살자와 야합했던 민자당이 집권했던 시대, 오월이면 광주 시내는 전쟁터였다. 대학생 뿐 아니라, 고등학생, 직장인, 중년, 노년층까지 시내에서 전투경찰과 맞서 싸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518 주간에는 시민들끼리 대열을 짓고 전두환, 노태우 처단을 외쳤고, 대학생들이 조직적으로 싸우면 박수쳐 줬다. 박수치고 응원하는 수준을 넘어, 대학생들이 제대로 못싸우고 밀려나면 ‘데모 똑바로 못한다’고 욕 먹었다. 시내에서 꽃병들고 싸울 때, 시민들이 뒤에서 딱 버티고 도망가지 못하게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으로, 학생들이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니, 진압 경찰의 폭력성은 어마어마했다. 학생대열이 시내로 진출하면, 시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시위 대열이 커지기 때문에, 당시 광주지역 진압경찰들은 초강경 수단을 동원했다. 광주에서는 경찰들의 직격탄 조준 사격, 쇠파이프 폭행, 투석이 일상이었다. 모두 불법인데, 경찰이 불법행위를 조직적으로 자행한 것이다.
이러한 진압 경찰의 폭력에 맞서며 대열을 지켜내야 했으니, 남총련의 전투력은 대단했다. 일단, 투쟁국에서 경찰들의 무전을 감청하는 것은 기본이고, 진압중대별 배치까지 고려하며 대열을 짜고 배치했다. 광주 지역의 백골단과 맞붙어 대열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전투력과 조직력을 가지고 서울 지역 전의경을 만나면 너무 순하게 싸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관련기사] 학생운동의 정당방위대 월간 [말],1992년10월호,P204~207 91년 오월투쟁을 거치며, 전국적으로 조직된 선봉대들 현황에 대하여 잘 정리된 기사. 저작권은 말지에 있음.
https://drive.google.com/file/d/1Ir4UZpoi9mvDHY4yenFMNkRNnK6LRQtm/view?usp=sharing
91년 강경대, 96년 노수석, 97년 류재을, 벗들의 죽음을 보며 분노
90년대에 가두 투쟁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는 91년 강경대, 96년 노수석, 97년 류재을 등 경찰 폭력에 의한 학우들의 죽음과 연결된다. 정권의 탄압 강도가 높을 때, 시위 도중 희생자가 나왔고, 이에 대한 분노로 투쟁의 강도는 더 높아졌다. 벗들의 죽음을 보며 분노와 함께 격렬한 투쟁으로 이어졌지만, 90년대 대학생들은 기본적으로 80년대 이후 항쟁의 역사를 직접 경험하며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91년 오월투쟁에 참가했던 세대들은 80년 광주항쟁과 87년항쟁의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초등(국민)학교 2학년때 시민군에게 빵을 얻어먹었고, 계엄군의 탱크가 금남로를 질주했던 장면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중3때 87년항쟁을 경험했고, 91년 대학에 입학하여 군부독재와 싸웠다. 92학번도 초등(국민)학교 입학 후 518을 겪었으니, 노태우 정권 시절 대학생들은 518의 기억을 지닌 세대였다. 직접적인 학살의 기억을 가진 당대 광주전남지역 청년학생들이 전두환-노태우를 어떻게 생각했을 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96년~97년 노수석, 류재을과 함께 투쟁했던 세대는 10대에 들어서며 87년항쟁을 경험했고, 청소년 시절에 91년투쟁을 경험했다. 민자당 김영삼 집권 시기에 95년 학살자 처벌 투쟁, 96년 연세대항쟁, 97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맞서 싸웠다.
당시 수구언론들은 한총련 청춘들을 마치 피에 굶주린 폭력세력처럼 모욕했다. 당시 기레기들 모두 모아놓고 지랄탄 먹여주면 정신 좀 차릴려나. 한총련 세대 청춘들은 폭력을 좋아해서 공권력과 맞서 싸운 것이 아니다. 그 독한 최루탄과 진압경찰의 폭력에 맞선 힘은 80년 이후 항쟁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며, 자신의 몸이 부서지더라도 함께 싸우는 벗들을 지키고자 하는 동지애 였다.
91년11월, 전남대 후문에서 토끼몰이로 백골단 무장해제
91년 11월 13일, 전남대 후문앞 투쟁에서 백골단의 토끼몰이 진압으로 많은 학우들이 부상을 당한 후, 다음날 오월대는 후문앞에 있는 중흥2동 파출소 병력을 무장해제 시켰다. 토끼몰이 진압에 대한 보복으로 토끼몰이 백골단 포위 작전에 들어간 것이다. 토끼몰이는 백골단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총련도 독한 맘 먹으면, 백골단을 토끼몰이로 몰아붙일 수 있는 조직력이 있었다.
중흥2동 파출소는 전남대 후문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당일 오월대는 파출소에 대한 일반적인 기습이 아니라, 파출소를 지키고 있는 사복중대를 유인-매복-포위-무장해제 시켰다. 당일, 백골단 1개중대 100여명이 지키고 있었고, 오월대는 대략 180 여명 정도 출전했다. 경찰 측에서 일반적인 수비대형을 잡고 막았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수비대형을 깨뜨리기 위해 먼저 학교방향에서 50여명이 나와 유인을 했다. 파출소앞 병력들은 우리측 숫자가 적은 것에 얕잡아보고 학교쪽으로 돌격하는 순간, 뒤쪽에 매복해 있던 나머지 대원들이 백골단을 쫓아가서 포위했다. 앞만 보고 달려가다가 포위된 백골단 들은 일시에 멘붕에 빠지며, 방독면, 하이바를 던져버리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15명 정도 잡아서 무장해제 시킨 후 풀어줬다. 100여명의 중대원 중 15명이 잡힌 것이라면, 지휘체계 무너지고 궤멸된 상황이다.
당연히, TV뉴스와 신문에 크게 보도됐다. 일반적으로 당시 언론에는 집회 참자가를 줄여서 보도했지만, 이날만큼은 두배넘게 많은 수로 보도했다. 경찰들이 쪽팔렸는지 보고서에 시위대 숫자를 부풀린 것이다. 광주 북부경찰서장 짤리고, 새로 부임한 서장은 ‘전원 검거 하겠다’고 한동안 분위기 살벌했다. 하지만, 반전은 그 후에 일어났는데, 92년에는 경찰측과 암묵적인 신사협정이 이루어져, 학생이나 경찰이나 서로 앞뒤를 공격하는 토끼몰이는 자제했다. 그리고, 92년 여름에는 전남대 대운동장에서 오월대와 북부서 전경들간에 친선 체육대회도 열렸다.
http://mn.kbs.co.kr/news/view.do?ncd=3709882

전남대생 파출소 화염병습격 / 경찰 쇠파이프에 학생 중태 항의 / 의경과 난투극… 진압장비 빼앗아 / 1991년11월15일, 23면
92년 5월, 목포대 지서-경찰서 동시 기습, 연행된 총학생회장 구출 시도
오월대의 백골단 토끼몰이도 믿기 힘들겠지만, 92년 5월 목포대의 경찰서 기습은 영화에나 나올 이야기다. 물론, 90년대 초반에는 대학 근처 파출소는 전국적으로 자주 기습을 받았다. 하지만, 파출소가 아닌 경찰서를 직접 공격한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르다.
그리고, 언론보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당시 기습에 참가했던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목포대 앞 지서를 습격한 것은 무안경찰서 병력을 빼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진짜 목표는 무안경찰서로 들어가서 총학생회장을 구출하는 것이었으니, ‘성동격서’ 전술을 이용한 것.
무안경찰서로 몰려간 본진은 단순히 건물에 화염병 던지고, 유리창을 깬 정도가 아니라, 학생회장을 빼내기 위해 무안경찰서 1층을 뒤지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 목포대 학생회장은 지하에서 조사받고 있었다고 하는데, 거의 구출할 뻔 했다는 말.
당시 MBC9시뉴스는 톱뉴스로 뽑았고, KBS에서도 주요 뉴스로 보도하였다. 조선일보 보도를 보면, 청계지서와 무안경찰서에서 수십여발의 실탄과 공포탄을 발사하면서도 진압(?)하지 못했는데, 주민들이 학생들을 타일러서 돌려보냈다고 한다. 역시, 남총련은 공권력에는 통제받지 않지만, 애국 시민들의 말은 잘 듣는다. 오월대, 녹두대의 외에 목포대의 애국대도 정말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2/nwdesk/article/1914977_30556.html

http://mn.kbs.co.kr/news/view.do?ncd=3716180

목포대생, 경찰서-지서 기습 경찰관 6명 납치-무기 탈취 / 조선일보, 1992-05-15, 31면
92년 전대협 출범식, 남대문에서 3개 중대 무장해제, 시청앞까지 뚫다
세번째 이야기는 92년 전대협 출범식 후, 시내 가투에서 벌어진 일이다. 92년 5월31일 한양대에서 전대협 출범식을 마치고, 대학로에서 시민학생 한마당을 열기로 하였다. 노태우 정권은 당연히 교문 앞부터 막았으나, 정문운 아마도 녹두대가 간단히 뚫은 것 같다. 오월대는 전철을 타고 남대문 근처에서 내렸는데… 서울 지리를 모르는 상태였으니,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다. 전철에서 내린 후, 남대문 시장 안을 냅다 뛰었다. 전력으로 10여분을 뛰어서 오월대 200명이 도로에 나섰는데, 아마 본대열을 막고 있는 전경대열의 뒷편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우리가 도로에 나서자, 전경들도 전열을 짰다. 멀리서 보는데, 방패, 투구, 군화, 진압복까지 말끔하고 광이 났다. 광주에서 만나는 전경들은 방패나 투구 전부 너덜너덜 했는데, 그날 본 서울 친구들은 방패에 흠집 하나 없었다. 우리들은 ‘와따 서울 온께 전경들도 깔끔하다야’ ‘째들은 뭔 군화까지 광내고 나왔다냐. 쌈 잘한데?’ 수군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200 명이 커다란 도로를 점거하며 앞으로 다가가자, 전경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10여미터 앞으로 접근하자, 최루탄을 쏘는데… ‘우아… 하늘에다 쏜다’ 하며 우리의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광주에서는 직격탄을 피해다녔는데, 하늘에다 최루탄을 쏘는 순둥이(?)들을 보며, 욕쟁이 대원이 먼저 기선을 제압했다. “야~ 이놈의 새끼들아, 우리가 서총련인줄 아냐. 오월대라고 들어나봤냐? 얻어 터지기 싫으면 언능 뒤로 빠져, 시끼들아, (표현을 아주 순화한 것임)’.
우리를 막은 깔끔했던 서울 전경들은 최루탄 두어번 쏘고, 세번째 장전 하다가 무너졌다. 5분도 버티지 못했던 것 같다. 대략 2~3개 중대를 뒤쪽에서 깨버리니 본대열을 막고 있던 병력들도 일부는 포위되고 쭉 밀려났다. 이후에는 서울 지역 선봉대 친구들이 무장해제된 전경 때리는 걸 말리고 다녔다. 남대문 앞까지 밀고 가서 본대와 만난 후, 앞쪽을 보니 시청앞 광장까지 뻥 뚫려있었다. 91년 강경대 장례식 때 20만명이 모였어도 뚫지 못했던 시청앞 광장을 간단히 열어버린 것이다. 서울 지역 친구들에게 들으니, 시청앞 광장이 열린 것은 87년 이한열 장례식 이후 처음이라고 했다.

관련기사, 전대협 시위 산발 충돌, 경향신문, 1992-06-01, 23면
폭력-비폭력 여부는 본질이 아니다
여태까지 전설적인 폭력 시위(?) 사례들을 꼽아보았다. 당시는 학생이나 공권력으로 동원된 전의경, 모두가 불행했던 시대였다.
우리 사회는 흔히 평화시위는 ‘선’이고, 폭력시위는 ‘악’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런데, 주권자인 국민을 짓밟는 공권력의 폭력이 만약 다시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지난 촛불항쟁 때, 박근혜가 진짜로 군대를 동원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상황에서도 비폭력, 비폭력 외치는 것이 답일까.
폭력-비폭력 논쟁은 본질적인 문제를 숨길 때가 많다. 중요한 것은 ‘폭력시위 인가, 평화시위 인가’의 문제가 아니고, 시대의 문제를 놓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찾아보는 것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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