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26)

연세대항쟁이 트라우마로 남은 것은 끔찍했던 국가폭력과 함께, 한총련 조직이 연세대항쟁 때문에 분열되고 무너졌다는 세간의 평가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투쟁의 현장에 있었던 주체들은 한총련 내부의 문제를 꺼내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라는 생각에 묻어두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이야기 해 보자. 연세대항쟁 때문에 한총련이 분열된 것인가? 아니면, ‘내부의 적’이 한총련을 분열시키고, 대규모 탄압에 동조한 것인가? 수사권이 없는 필자가 정확한 답을 찾을 순 없지만, 기본적인 문제제기는 기록으로 남겨놓는다. 연세대항쟁 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지길 기다리며.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연세대항쟁 04, ‘내부의 적’은 존재했나?

 

연세대항쟁 당시 ‘내부의 적’은 존재했나? 

이제 연세대항쟁과 관련되어 가장 논란이 많은 주제를 꺼내놓는다. 지난 글들을 통해, 94년 통일운동의 분열, 95년 사람사랑 노선의 등장 등 한총련 내부에 있었던 개량주의 분파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96년 연세대 항쟁 당시 내부의 적이 존재했는지’의 여부를 살펴보자.

일단, 96년 연세대항쟁을 계기로 억제되어 있던, 자주 노선과 사람사랑 노선 사이의 갈등이 폭발했음은 모두가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꽤 많은 벗들이 ‘연세대항쟁 때문에 한총련이 분열되고 무너졌다’고 여기는 것 같다. 특히, 사람사랑 노선 세력들은 연세대항쟁에 대한 한총련 지도부 책임론, 무능론 등을 조직적으로 유포했으며, 수구언론들은 친북적인 구호와 폭력성으로 한총련에 대한 지지가 사라졌다고 연일 기사를 쏟아냈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연세대항쟁 이전에는 학생들과 국민들의 지지가 높았다는 이야기인데, 당시 수구언론 어디를 찾아봐도 96년 이전 한총련이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이야기는 없다. 93년에도, 94년에도, 95년에도 한총련은 수구언론에게 언제나 이적단체, 폭력단체 였을 뿐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 냉정하게 따져보자. 연세대항쟁 때문에 한총련이 분열된 것인가? 아니면, ‘내부의 적’이 한총련을 분열시키고, 대규모 탄압에 동조한 것인가? 필자는 개인적으로 96년 당시에  내부의 적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면, ‘우리 조직을 모욕하지 말자’고 앞장서서 비판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돌아보면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남총련이 진입한 후, 연세대 정문은 불도우저에 뜯겨 나갔다.  사진출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남총련이 진입한 후, 연세대 정문은 불도우저에 뜯겨 나갔다.  사진출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남총련은 96년 범민족대회 구경도 못했다 

남총련은 96년 8월 13일 새벽 서울에 도착한 후, 13일에는 선봉대와 본대열 모두 무악재에서 연세대로 진입하려 치열한 싸움을 했지만, 돌파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남총련 선봉대만 움직인다면, 뚫고 들어가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여학생 대열과 함께 움직이는 것은 답이 나오지 않았다. 

13일 오후에는 선봉대만 신촌 인근에서 싸우고 본 대열은 건국대와 한양대에서 쉬고 있었다. 남총련 전체로 움직이는 것보다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전남대, 조선대 등 학교별로 분산되었던 것 같다. 나는 94년처럼 범민족대회 장소가 바뀌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했었지만, 연세대에서 본행사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14일은 한총련 선봉대와 별도로 본 대열만 신촌 인근에서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낯선 서울에서 선봉대 호위도 없이 이화여대, 서강대, 홍익대 등지를 뛰어다녔는데, 정말로 힘들었다. 해질녘에 다시 한양대로 들어가서 대기했는데, 14일밤에서 15일 새벽 사이에 범민족대회의 대부분 행사가 집중되기 때문에, 14일 밤을 다른 대학에서 보냈으니 본 행사는 거의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5일. 이날도 선봉대는 먼저 싸우러가고, 나는 한양대에 남아 이번 범민족대회에서 가극단 ‘희망새’도 못보고, 노래패 ‘천리마’도 못보고 허무하게 끝나려나보다 툴툴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 때쯤 연세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지침이 왔다. 전체 대열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20명씩 조를 지어 시내버스를 타고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난, 15일 연세대 진입 지침을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이미 모든 행사가 끝난 상황에서 왜 진입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는지, 그리고, 왜 그 시간대에만 정문 앞에 시내버스가 다녔는지,  그리고 우리가 연세대로 들어가자마자 대규모 병력이 밀고 들어왔는지… 이 모든 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다.

연세대 과학관 위로 경찰 헬기가 최루액을 뿌리고 있다. 옥상에 붙은 구호는 '우리는 집에 가고 싶다'

 

8월 15일,16일 탈출 계획은 계속 틀어졌다 

남총련 대열은 15일 연세대로 들어온 후, 본 행사장인 노천극장은 구경도 못하고 과학관에 갇혀 지냈다. 15일 밤에는 바깥에서 선봉대가 퇴로를 뚫고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며 분위기가 들뜨기도 했으나, 여학생 대열까지 안전하게 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16일 낮에 총집중하여 북문으로 길을 뚫으려고 했으나, 경찰들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에,  뚫지 못하고 다시 과학관으로 돌아와야했다. 이날부터 나는 외부에서 탄압하는 공권력 외에, 내부에서도 뭔가 이상한 흐름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팽팽하게 긴장했던 것 같다. 이것은 단순하게 동향파악하는 프락치 수준이 아니라, 우리의 눈과 귀는 막혀있는데, 공안기관은 우리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는 더러운 느낌이었다. 

20일 아침 과학관의 대탈출이 절반이나마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정명기 한총련 의장이 현장에서 단독으로 결정하고 바로 실행했기 때문이었다’는 의견이 많은데, 나도 동의한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는데, 정명기 의장 개인적인 의견은 연세대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외곽에서 지원하며 병력을 분산시키고 봉쇄를 풀 생각이었는데, 집행위원회 의견에 따라 연세대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 부분은 나도 참 조심스럽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고, 간접적으로 들었던 내용만으로 결론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꼭 짚고 넘어가고 명쾌하게 정리했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내가 총대를 멘다. 

일단, 확인된 팩트부터 공개힌다. 1996년 연세대항쟁 당시 한총련 집행실무를 총괄했던 집행위원장은 ‘허현준’ 이다. 낯이 익은 이름이지 않나? 바로,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사건의 공범으로 처벌받은 청와대 행정관, 바로 그 사람이다.

허현준 전 행정관, 지금은 석방됐나?
허현준 전 행정관, 지금은 석방됐나?

 

‘한총련 지도부 무능론’은 조작된 것이다 

‘한총련 집행위원장’은 한총련 실무 집행의 총책임자다. 한총련 의장이 대외적으로 조직을 대표하고 정치적 책임을 진다면, 실무 집행은 집행위원장이 맡는 것이다. 그래서, 각 학교별 선거를 통해 선출된 직선 간부인 의장단보다 중앙 집행부를 관할하는 집행위원장에게 실질적인 힘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96년 연세대항쟁에 대한 책임은 집행위원회에 따지는 것이 당연하다. (8월 통일투쟁을 기획한  조국통일위원회와 전술 단위인 투쟁국도 책임을 져야하는데, 조통위와 투쟁국도 집행위원장 산하에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96년 하반기부터 ‘한총련 지도부 무능론’이 조직적으로 유포되었는데, 그 뿌리를 이번에 찾아냈다. 당시, 남총련은 한총련 집행위원회가 개량적이라며 비판적인 입장이었는데, 연세대항쟁 후 유포된 한총련 지도부 무능론은 전혀 다른 맥락으로 만들어진 메시지였다. 주도권을 상실한 김영환 일당이 수구언론의 지원을 받으며, ‘연세대항쟁에서 강경파의 모험주의와 무능으로 많은 학우들이 잡혀갔다’는 이미지 조작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만의 反美…‘연대사태’ 그리고 10년 / 데일리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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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사태 당시 한총련 중앙간부 출신 K씨는 “당시 연대사태는 정명기 의장을 중심으로 강경파가 결사항전을 통해 김영삼 정부 타도를 주장할 정도로 정세인식이 수준 이하였다”면서 “종합관이 경찰에 진압되고 나서야 탈출을 시도할 정도로 판단력이 없었고, 폭력투쟁을 적극 주도한 책임도 지도부에게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연대사태 이후 학생운동이 몰락의 길을 갔음에도, 마치 그 사건이 대단한 ‘항쟁’이었던 것처럼 미화하려는 것은 여전히 한총련이 변화할 여지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는 데일리NK에 등장한 한총련 중앙간부 출신 K씨에게 묻는다. 

“8월 15일, 16일 북문으로 탈출하려던 계획을 꼰지른 것이 당신인가? 당신이 꼰질러 놓고, 탈출을 시도할 판단력이 없었다고 말하는 거 아닌가? 김영삼 정권의 국가폭력은 정당하고, 우리들의 처절한 저항은 책임져야하나? 그래, 한총련의 수많은 청춘들이 감옥에서 몸뚱이 하나로 책임졌다. 그런데, 김영삼 정권은 무슨 책임을 졌나? 한총련 중앙간부였다는 당신은 집행위원장 허현준과 함께 백도어로 안전하게 탈출했었나? 당신과 상의도 없이 과학관에서 탈출한 대열을 보며 원통했던 것은 아닌가?”

 

봉인된 기억을 떠올리게 해 준 통합진보당 사태 

한총련 지도부에 있었던 허현준 등이 96년 당시에는 투사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것 아니냐고? 뭐… 그럴 가능성도 있다. 나도 당시에는 너무나 순진했기에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어쩌면 애써 기억을 꺼내지 않으려고 봉인시켜 놓았던 것 같다. 한총련 지도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연세대에서 싸웠던 벗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 같기도 해서 애써 묻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고, 종북논란으로 모든 언론매체가 도배되었던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며 봉인된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2012년 당시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국내에서 너무나도 황당하게 흘러가는 논란을 보며 96년 연세대가 떠올랐던 것이다.

2012년 당시 유시민과 심상정은 수구언론을 등에 업고 부정경선 혐의를 통합진보당 지도부에 뒤집어씌운 후, 1차로 당권을 탈취하려고 했고, 당권탈취가 여의치 않으니 통합진보당 조직을 파괴하고 대중적 기반을 흐트려놓았다. 통합진보당을 파괴하면서, 비례대표 의원직을 가져가기 위해 ‘셀프제명’이라는 꼼수를 동원했고, 통합진보당의 이름으로 땡겨 쓴 유시민계의 빚은 그대로 남겨놓고 몸만 빠져나갔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수구 언론의 전폭적인 지원과 반북이데올로기 였다.

나는 지난 2012년 당시 중국에서 이런저런 사업을 하며 세상물 좀 먹어본 상태에서, 이러한 꼬라지를 보니, 정신이 확 들었다. 통합진보당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을 보며, 96년의 나와 동지들은 너무도 순진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96년 당시 우리 내부에 숨어있던 변절자들을 제대로 정리하고 평가하지 못했기에,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이란 결론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한총련을 흔들어댔던 변절자들의 정체를 기록으로 남겨놓겠다고 마음 먹었다.

 

NK데일리에 글을 쓴 자, ‘누구냐? 너’ 

나는 구글 검색을 통해, 연세대항쟁 당시 한총련 내에 숨어있던 변절자의 자술서(?)를 찾아냈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에서 운영하는 ‘데일리NK’라는 매체에 연세대항쟁 10주년에 실린 기사이다. 아쉬운 점은 필자의 이름을 숨긴 것인데, 문장을 분석해 보면, 수구꼴통이 쓴 것은 아니고, 최소한 6년차 이상의 활동가 출신이 쓴 것으로 보인다.  

연세대항쟁 10주년, 데일리NK라는 매체에 변절자의 자술서(?가 실렸다
1996년 ‘연대사태’ 그 진실을 밝힌다 / 데일리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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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총련 지도부의 의견은 둘로 갈렸다. 한총련 집행위원회의 다수는 봉쇄를 뚫고 지역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봉쇄를 뚫고 진입했으니 봉쇄를 뚫고 진출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연세대에 남아 투쟁을 계속한다고 해서 전민항쟁이 일어나고 김영삼 정권이 타도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정명기 한총련 의장과 서총련(서울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 일부 간부들은 연세대에 남아 저항을 계속하자고 주장했다. 김영삼 정권의 통일운동 탄압은 현 정세가 친미세력과 통일세력의 대격돌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만큼, 연세대에 남아 김영삼 정권의 폭력성을 국민들에게 폭로하고 전민항쟁의 불씨를 당겨보자는 것이었다.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 때 수 없이 보았던 전형적인 뒤집어 씌우기다. 정명기 의장이 연세대에서 전민항쟁의 불씨를 당기려했다고? 건물에 갇혀 무슨 전민항쟁을 하나? 내가 앞글에서 밝혔다시피, 난 과학관에 가장 먼저 붙인 구호가 ‘우리는 집에 가고 싶다!’였다. 

이는 97년 한총련의 노선이었던 전민항쟁을 96년 연세대항쟁에 연결시킨 이미지 조작이다. 여기에 동지들을 끝까지 책임져야했던 집행위원회의 무능과 무책임까지 뻔뻔스럽게 뒤집어씌우고 있다. 자기들은 무사히 빠져나갈 백도어가 따로 있었나?

당시 한총련은 김정일 정권의 방패막이였고, 지금도 여전히 김정일 장군의 충직한 전사라는 것, 진정으로 규명돼야 할 진실은 이것이 아닐까? 잘못된 신념과 전술적 무능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을 폭력과 좌절 속으로 몰아넣었던 당시 한총련 지도부의 용기 있는 양심선언을 기대해본다.

내용 자체가 더러워 소개하고 싶지 않지만, 한총련 집행부 내에 숨어있던 변절자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인용한다. 

나는 96년 연세대에서 북미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싸웠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짓밟는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싸웠다. 나는 얼마전 올린 글에서 96년 당시 김영삼 정권의 잔인한 만행은 ‘북한 붕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예비검속’ 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변절자의 너절한 자술서를 읽다보니, 이들이 김영삼의 만행에 적극적으로 동조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더 굳히게 되었다.        

그나저나, 용기있는 양심선언을 기다린다니, 한마디 덧붙여주겠다. 97년 이후 한총련 지도부가 좌편향이라고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한가지는 인정해 줘야겠다. 이런 더러운 놈들을 한총련에서 축출하고, ‘북한민주화네트워크’와 ‘뉴라이트’로 쓰레기 분리수거에 성공한 것은 정말 두고두고 잘한 일이다.

연세대항쟁 당시 각 지역별 연행자 및 구속자 통계. (96년 8월 20일 현장 숫자로 보임)

 

연세대항쟁은 ‘김영환 일당’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준 계기 

연세대항쟁 때문에 한총련이 갈라지고 쇠퇴한 것이라는 세간의 평가와 기억은 재검토해야 한다. 연세대항쟁은 개량주의에서 뉴라이트로 넘어가던 김영환 일당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준 계기였을 뿐, 이것 때문에 한총련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처참했던 국가폭력을 보고도, 김영삼 정권보다 한총련 의장에게 책임을 묻자고 떠들었던 황당한 집단을 몰아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97년 한총련 출범식 이전까지 한총련의 단결력과 실천력은 살아있었다.    

김영환 일당은 94년과 95년을 거치며 개량주의-합법노선으로 기울었고, 96년 연세대항쟁을 거치며 뉴라이트의 길로 들어섰다. 전북총련을 중심으로 한 이들 세력은 96년~97년 한총련을 내부에서 흔들며 조직 주도권을 빼앗으려 했다. 96년 한총련 집행위원회를 장악했으나, 유화국면을 예상한 것과는 달리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연세대항쟁 이후에는 책임과 반성 운운하며, 수구언론의 화려한 지원 속에 한총련을 고립시키고, 내외부에서 흔들어 대며 조직을 다시 장악하려고 했다.

하지만, 연세대항쟁을 겪은 학우들은 97년 김영삼 정권에 대한 복수전을 다짐하고 있었고, 사람사랑 노선 세력이 한총련을 주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에, 이들은 방향을 바꿔 한총련 조직을 파괴하는데 집중했다. 97년 전북총련은 한총련에서 집단적으로 탈퇴했고, 다른 지역 대학들까지 탈퇴를 독려하며, 한총련에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 그리고, 이들은 정권교체 후, 햇볕정책을 펼치는 국민의 정부에 맞서 98~99년 뜬금없이 북한민주화를 주장하는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만들었고, 참여정부 시기 뉴라이트 그룹을 이끌며 이명박 정권 탄생의 주역이 된다. (김영환 일당에 대한 분석은 4부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연세대항쟁 당시 ‘내부의 적’은 존재했나? 필자 개인의 힘으로 정확한 물증을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전후 과정을 살펴보면, 정황과 심증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일단, 한총련을 내부에서 흔들어댔던 김영환 일당에 대하여 기록을 남긴다. 이들이 ‘한총련 내부의 소극적인 비판자’였는지, ‘수구냉전세력에 적극적으로 결탁했던 내부의 적’이었는지 정확히 판별하려면, 당시 공안기관 비밀자료에 접근해야 한다. ‘연세대항쟁 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져 그날의 진실이 온전히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한총련 명예회복의 핵심은 뭐니뭐니해도 '연세대항쟁 재평가', 벗들의 많은 관심과 공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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