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2)

필자의 변

분단체제와 양극화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국식 양당제를 모델로 하는 자유주의 개혁세력은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의 단일패권이 붕괴되고 있는 전환기에 우리의 전망은 어디서 찾아야할까. 나는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의 패권이 전 세계를 휩쓸고,  세계화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는 속에서도 굽힘없이 싸웠던 90년대 학생운동의 경험을 되돌아보자고 주장한다. 
지금은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고 있고, 한총련 핵심 간부 출신도 아니지만, 91년 오월 강경대, 박승희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벗의 자격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더 많은 논의와 활발한 토론이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제1부,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을 소환한다
제1장. 90년대 학생운동은 왜 묻혀졌나?
-  의도적인 외면과 강요된 침묵. ‘민주화 운동’이란 틀을 뛰어넘어야

제2장. 주사파? 친북? 종북? 그래서 어쩌라고…
-  주사파의 경계는 어디까지? 대한민국 검사가 브리핑한 20대 당시 나의 사상
제3장. 반수구세력 콘크리트, 70년대생(현 40대)
-  한총련 세대, X세대, 신세대 벗들이 기어이 만들어낼 자주통일시대
제4장. 한총련,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기자.
- 당대에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기록은 남기자

제1부,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을 소환한다

제1장. 90년대 학생운동은 왜 묻혀졌나?
-  의도적인 외면과 강요된 침묵. ‘민주화 운동’이란 틀을 뛰어넘어야

1.1. 91년 오월투쟁과 96년 연세대항쟁, 왜 기록되지 않나?

91년 오월투쟁, 추모만 있고, 역사적 평가는 없어  

▲ 박승희 열사 영정
▲ 박승희 열사 영정

91년 오월투쟁. 벌써 30주년이다. 
당시 강경대와 같은 91학번들이 대학생 자녀를 둔 세월이지만, 당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만 이어져 왔을 뿐, 역사적인 평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 외에 왜 싸웠는지, 투쟁의 의의는 무엇인지,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 체계적인 분석은 없다. 그저 당시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는지, 얼마나 슬펐는지 정도만 되씹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승리하지 못한 투쟁, 아픔의 기억이라 그런 걸까? 필자는 더 이상 ‘열사들을 기억해주세요, 우리의 투쟁을 잊지 마세요’ 하는 식으로 징징거리지 않았으면 한다. 또한 사회주의권 붕괴와 함께 마지막 저항의 추억처럼 소비되는 것도 결단코 반대한다. 91년 5월 광주의 시민 학생들은 운암대첩과 박승희 열사 도청 노제를 통해 정권의 물리력을 괴멸시켰고, 민중의 힘을 분출하였다. 

‘91년 오월투쟁은 노태우 정권의 강경대 학생 폭력살인 만행을 계기로, 6월항쟁에 대한 반동 체제인 민자당을 거부한 투쟁이다. 이를 통해, 수구세력의 내각제 개헌 음모는 파탄나고, 지배세력의 후퇴 속에 문민정부 출범으로 이어졌다. 91년 오월투쟁은 당대에 승리하지는 못했으나, 90년대 학생운동과 민족민주운동의 원동력이 되었고, 한총련은 91년 열사들의 정신을 계승하여 만들어진 조직이다’라는 평가가 자리잡기를 바란다. 그리고, 91년 오월투쟁이 제대로 기록되고 평가받으려면, 91년 투쟁만 따로 떼어놓는 것이 아니라, 90년대 학생운동 전반에 대한 재평가가 따라와야 할 것이다.    

관련기사 잊힌 열사들의 시대 응답하라 1991(한겨레21. 2017.12.15)

91년 5월투쟁 – 강경대, 박승희, 운암대첩

91년 당시 전남대 영상패의 기록

96년 연세대항쟁, 북미평화협정 체결을 외쳤으나, 이적단체 낙인만 남아

96년 연세대항쟁, 한총련 학생운동의 몰락(?)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소비되는 이 사건에서 대학생들이 내세웠던 구호가 무엇인지 우리 사회는 기억하나? 96년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의 정치적 구호는 ‘한반도 평화체체 구축’ 그리고, 이를 위해 ‘북미평화협정 체결과 남북 합의서 이행’을 촉구했다. 하지만, 당시 한총련의 구호는 수구 언론들에 의하여 철저히 왜곡되어 사회적으로 고립되었고, 공권력의 폭력에 의하여 수천명이 연행, 구속되었다.

연대항쟁, 다큐창작소, 2006년 제작

연대항쟁

시간은 흘러, 25년이 지난 지금, 북미평화협정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현실적인 과제로 떠올랐다. 하지만, 25년 앞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외쳤던 한총련은 아직도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명예회복은 커녕 제대로 된 기록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25년이나 지났지만, 어찌하여 한총련은 누구도 입에 담기 힘들어하는 것일까? 필자는 90년대 학생운동에 대한 ‘의도적인 외면’과 ‘강요된(또는 전략적인) 침묵’이 있었다고 본다. 당시 운동을 이끌었던 주체들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고, 주변부에 있었던 구경꾼이나 평론가들의 인상비평만 남아있다.

그래서 늦었지만, 내가 먼저 한총련을 소환한다. 조국이 맺어준 아름다운 인연으로 함께 했던 벗들이여, 이제 응답하라.

1.2. 의도적인 외면 - 자주통일운동을 불편해 하는 주류 세력

‘민주화 운동’ 이라는 틀로 축소

우리 사회 주류들은 80년 이후 민족민주운동을 ‘민주화 운동’이라는 틀로 묶어버린 후, 87년 6월항쟁을 민주화 운동의 절정으로 기록하고, 노태우 정권이라는 과도기를 거쳐 93년 문민정부 탄생과 함께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 약간 더 진보(?)적인 세력은 문민정부는 3당합당이라는 원죄가 있기 때문에, 97년 수평적 정권교체가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주장한다.

‘87년까지의 민주화 운동이 핵심이고, 93년 민주화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90년대 운동은 민주화 이후 ‘밥그릇 싸움’이나 ‘수상한 사상에 물든 철없는 학생들의 일탈’이라는 분석틀로 접근한다. 이들에게 90년대 한총련 운동은 기록으로 남길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한총련과 민족민주운동 진영은 단순한 절차적 민주주의 완성이 아니라, 자주, 민주, 통일을 지향했다. 그리고, 91년 소련 붕괴 이후 마지막 남은 냉전지대 한반도에서 핵심 과제는 평화정착과 통일이었다.

제도 정치권에 먼저 진출한 86세대 운동권의 외면

87년 6월항쟁 이후, 재야에 있던 운동권 인사들이 제도권 정당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연고에 따라 당시 야당이었던 YS나 DJ를 통해 정치권에 입문하였는데, YS와 함께했던 일부 운동권(김문수, 이재오 등)은 YS가 갑자기 여당과 합당하면서 여당인사로 변신하였다.

90년대 이후에도 제도 정치권은 새로운 정치신인들을 재야에서 수급하였는데, 운동권 출신 들은 386-486세대라 불리며, 정치권의 젊은 피로 환영 받았다. 제도정치권에 먼저 진출한 86세대들은 한총련 후배들에 대하여 적대적이진 않았지만, 불편해하고 외면했다. 이들은 제도권 진출 이후 색깔공세에 휩쓸릴까 몸을 사렸고, 젊은 시절 자신들의 운동은 민주화 운동이라는 말로 묻어갔다.

86세대들이 민주당 계열을 통해 제도권으로 진출하였다면, 한총련 세대들은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 등 진보정당 활동을 통한 진출이 더 활발하였다. 하지만, 이 또한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 사태를 거치며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전대협은 민주투사, 한총련은 종북? ‘민주화 운동’이란 틀 뛰어넘어야... 

도대체 90년을 경계로 하여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기라도 한건가? 하긴,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배우고 있는 세대들에게 ‘6월항쟁’과 ‘전대협 결성’ 중 무엇이 시기적으로 앞선 것이냐고 묻는다면, ‘전대협 결성’에 동그라미 칠 젊은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90년대에는 신세대, X세대 대학생들이 놀러다니기 바빴지, 무슨 데모를 했냐’고 진지하게 묻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전대협은 민주투사, 한총련은 종북’ 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전대협이 민주화를 위해서만 싸웠나? 전대협진군가의 첫 소절 “일어섰다~ 우리 청년학생들~ 민족의 해방을 위해~” 자… ‘민족의 해방을 위해~’ 밑줄 쫙~

전대협진군가 노래듣기

전대협진군가

90년에 바뀐 것이라면, 당시 노태우와 김영삼 김종필이 3당합당을 한 것뿐이다. 그런데, 80년대까지 민주화 투쟁을 했다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김영삼을 따라갔다. 당시, 김영삼을 따라갔던 사람들은 현 수구정당 뿐 아니라 민주당에도 일부 포진되어 있다. 

김영삼 정부 출범의 토대는 90년 민자당 창당이니, 자신들도 민주투사라고 자부하는 민자당 수구세력이 90년대 투쟁을 두고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고 달려드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전대협과 함께 자주민주통일 투쟁을 했던 86세대 선배들이 ‘청춘시절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회고하는 것을 보면 개인적으로 불편하다. 

민주화 운동이라는 틀로 분석하면 김영삼과 민자당에 엮이게 된다. 여기에, 시간의 갭이 너무 커서 요즘 세대에게는 감동도 없다. 또한, 민주화라는 틀에 엮이게 되면, ‘수구꼴통’ 또는 ‘토착왜구’라고 불러야 마땅한 냉전수구세력이 ‘우파’ 또는 ‘보수’라고 허위의 이름을 붙이고 위장하는 명분이 된다. 국힘당이나 태극기 부대도 문재인 독재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한다고 주장하지 않나.       

이제 90년대 학생운동 및 민족민주운동이 제대로 평가된다면, ‘진보vs보수’, ‘좌파vs우파’ 라는 허위의 대립구도는 깨지고, ‘자주통일vs냉전수구’라는 전선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1.3. 강요된(또는 전략적인) 침묵

이념논쟁의 빌미를 주기보다 자발적인 침묵을 선택

한총련 운동 주체들은 당시 활동에 대하여 사회적인 발언을 하기보다는 침묵을 선택했다. 북미핵대결이 첨예하게 벌어지는 와중에 이념논쟁의 빌미를 주기보다는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전략적인 침묵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 한총련 운동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면 반성과 회개를 요구하는 시선이 강했고, 주체들의 문제의식을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는 없었다. 물론 지난 역사에 대한 성찰은 필요하다. 하지만,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전략적인 침묵은 자존을 지키기 위한 소극적인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자주통일운동 진영 내에서 만들어진 괴물 – 김영환 일당, 뉴라이트

민주당 계열 86세대가 한총련을 불편한 존재로 외면했다면, 운동권 출신 중 적대적인 그룹도 나타났다. 90년대 중반 김영환을 중심으로 <시대정신>이란 잡지로 정체를 드러낸 분파(그들은 스스로를 ‘진정한 주체사상가’로 자처했다. 각 지역별로 다양한 이름으로 존재했는데, ‘김영환 일당’ 이라 통칭하겠다)들은 이후 북한민주화네트워크와 뉴라이트로 이어지며, 한때의 동지였던 한총련과 자주통일운동 진영에 저주와 독설을 쏟아냈다.

전남대와 남총련 내에도 김영환 일당이 침투하여 학생운동 조직의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다가, 97년 ‘청년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수면 위로 부상한 후에는 함께했던 동지들을 앞장서서 공격했다. 이들의 저주와 독설에 충격을 받은 많은 활동가들이 아픔을 안고 운동판을 떠났다. 그리고, 96년, 97년 한총련 의장을 배출한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97년 12월 역사상 처음으로 주류 운동세력이 낙선하고, 청년공동체로 학생회 권력이 교체되었다.

아픔의 기억 – 이석, 이종권, 학생운동을 망쳤다는 원죄의식

97년 한양대에서 발생했던 이석 씨 치사 사건과 전남대에서 발생했던 이종권 씨 치사 사건은 한총련과 남총련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히며 대중적 지지기반을 상실시켰고, 많은 활동가들을 범죄자로 만들었다. 이는 당시 20대 중반의 젊은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남겼다.
97년 이석-이종권 치사사건을 거친 후, 많은 활동가들은 학생운동을 망쳤다는 원죄의식을 품고 있고, 당시의 아픈 기억들을 애써 피하고 있다.

내부 분열과 날카로운 대립 – 내부 붕괴 및 소멸

97년 IMF체제로 들어가고, 98년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였다. 전남대는 최초로 학생회 권력이 교체되었다. 정치 사회적 조건은 크게 바뀌었고, 한총련은 대학생들의 힘으로 사회적인 요구를 관철하는 힘 있는 조직이 아닌 학생회 권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에도 벅찬 상황이 되었다.

한총련 내부적으로는 김영환 일당이 남긴 불신의 씨앗으로 인하여, 이념적인 배타성이 심해졌고, 내부 분열과 대립은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IMF 체제 이후 펼쳐진 사회 변화와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열린 공간에서 한총련은 학생운동의 새로운 역할을 정립하지 못하고 사실상 소멸의 길로 들어갔다.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남아있는 현실이 황당하지만, 외면과 침묵을 걷어내고 한총련을 소환해 보자. 2021년 91년 오월투쟁 30주기, 2022년 범청학련 30주기, 2023년 한총련 30주기… 줄줄이 이어질 30주기를 맞이하며 돌아볼 일들이 많다.     <계속>

신희주 컨텐츠기획자
91년 전남대에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했다.
91년 오월투쟁부터 96년 연세대항쟁까지 학생운동 현장에서, 전남대 투쟁국, 조통위, 선전국 일꾼으로 활동했다.
94년 연행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재판정에 섰으나, 자기변론문 등을 제출하며 2년간 싸운 끝에, 국보법 무죄판결을 받았다.
30대 이후에는 중국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사드(THAAD)배치로 한중관계가 험악해져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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