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12)
92년을 기점으로 학생운동 진영은 범청학련에서부터 과학생회에까지 이르는 대중조직 체계를 완결했다.
지하써클에서 활동하던 선도투쟁 세대는 물러나고, 87년항쟁 이후 대중운동 시대에 성장한 간부들로 세대교체 물갈이를 끝냈다
그리고, 90년대 대중운동의 전형이 만들어졌고, 이러한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93년 한총련이 출범했다.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91년 오월투쟁, 87년항쟁에 대한 반혁명을 막아낸 투쟁
나의 기억1 - 강경대, 박승희, 운암대첩, 91년5월투쟁
나의 기억2-운암대첩부터 박승희 장례식, 혁명적 일주일
92년, 학생운동의 정점- 전총련, 범청학련, 대선투쟁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92년, 학생운동의 정점-전총련, 범청학련, 대선투쟁
학생운동의 최정점은 92년 - 자주민주통일 노선 및 집행조직 완결
우리 사회에서는 87년 6월항쟁 신화로 인하여, 한국 학생운동의 절정을 막연하게 87년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87년은 학생운동과 민족민주운동 ‘도약의 계기’라 보는 것이 맞고, 전성기는 아니다. 더군다나, 87년항쟁은 가장 기본적인 요구였던 군부독재 종식도 이루지 못하고, 노태우 당선이라는 황당한 결과로 이어졌다.
물론, 학생운동의 절정기를 정의내린다는 것은 논란이 있을 것이다. 지역이나 대학별로 다양한 조건과 환경에서 학생운동이 이루어졌기에,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조금씩 다를 수 밖에 없다. 또한, 개개인의 기억은 다르기에, 개인별로 학생운동의 정점은 다르게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3가지 근거로 가지고, 92년을 학생운동의 최정점으로 이야기 하겠다. 첫째, 92년은 총선과 대선이 열린 해, 87년 대선의 실패를 갚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며 힘을 모았다. 두번째로, 범민련과 범청학련, 전국연합까지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민족민주운동의 라인업이 완성됐다. 세번째, 2월 예비대학부터 11월 총학선거까지 90년대 대중운동의 전형이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러한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93년 한총련이 출범할 수 있었다.

5년간의 와신상담 끝에 맞이한 92-93년 대격돌기
운동진영 내에는 90년 전후부터 ‘92~93년 대격돌기’라는 말이 유행했다. 87년 대선은 양김씨의 분열로 실패했지만, 노태우의 지지율은 30% 중반 수준이었다. 그리고, 87년 대선 당시에는 민족민주운동 진영도 흩어져 힘을 모으지 못했다. 하지만, 92년 대선은 민자당 독재세력과 1:1로 맞붙고, 노동자, 청년학생, 농민 운동 세력이 뭉치면 무조건 이긴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노태우 치하 5년의 세월이 너무도 늦게 흘러가고 하루하루가 치욕이었지만, 92년에는 끝장낼 것이라는 낙관적인 정서가 넘처흘렀다.
특히, 남총련은 낙관의 수준을 넘어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에 쩔어있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광주에서는 노태우-민자당-김영삼을 지지하는 사람을 주위에서 한명도 보지 못했다. 의견이 다른 사람이 있어야 토론을 하든 설득을 하든 할 것인데, 그냥 페이스 유지 잘 하면서 투표일만 기다리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대선에서 민자당 일당이 부정선거 등 헛짓거리(?)를 할 경우를 대비한 체력단련(?)도 열심히 했다. 조용히 날을 벼리며 91년 5월에 끝내지 못한 승부를 마무리 짓고 싶어했다.
92년 전남대에서 있었던 남총련 출범식과 한양대에서 있었던 전대협 출범식, 그리고 8월 범민족대회 때 보여준 남총련의 전투력은 정말 대단했다. (다음편에 남총련의 전투력에 대한 글을 따로 올리겠다) 남총련 외에도 91년 5월투쟁을 거치며. 전국 각지 대학들에도 선봉대 조직이 만들어졌다. 서울지역 동총련이 나름 싸움 잘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91년 5월처럼 밀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92년 당시 낙관적인 정서가 담겨,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가 ‘복수가’와 ‘투쟁의 한길로’다. ‘투쟁의 한길로’는 강경대가 좋아했던 노래로 알려져, 91년 5월투쟁을 상징하는 노래로 꼽히기도 한다.
복수가 (1992년) 노래듣기
투쟁의 한길로(1990년) 노래듣기
전대협을 해체하고 전총련을 건설하자!
92년 5월 8일~9일에 남총련 출범식이 전남대에서, 5월29일~31일까지 서울 한양대에서 전대협 출범식이 열렸다. 91년 오월은 수많은 열사들과 함께 처절한 투쟁으로 이어졌지만, 92년 오월은 학생들의 힘을 비축하며 조직을 강화하고, 12월 대선을 준비하는 흐름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92년 출범식은 청춘의 축제처럼 즐겁고 희망찬 투쟁으로 이어졌다.

92년 전대협 출범식에서는 ‘전총련(전국대학총학생회연합) 건설’과 ‘민주정부 수립’으로 대학생들의 뜻을 모았고, 자주통일운동의 발전을 위해 범청학련(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을 결성하기로 했다. 92년은 마지막(?) 전대협 출범식인데, 한총련으로 도약할 조직적인 틀은 92년 모두 만들어졌다. 92년 출범식 중 핵심구호 중 하나가 ‘전대협을 해체하고, 전총련을 건설하자!’ 였고, 사진에서 보듯 중앙무대를 가득 채운 대형 구호가 ‘건설 전총련’이다. 당시 개인적으로 조직 이름에 한국이 들어가면, 약간 관변단체 느낌이 들어, 전총련이 더 정이 들었지만, 공식적인 이름은 한총련으로 확정되어 93년 출범했다.
92년을 기점으로 학생운동 진영은 범청학련에서부터 한총련, 지역총련, 총학생회, 단대학생회, 과학생회에까지 이르는 대중조직 체계를 완결했다. 그리고, 지하써클에서 활동하던 선도투쟁 세대는 물러나고, 87년항쟁 이후 대중운동 시대에 성장한 간부들로 세대교체 물갈이를 끝냈다.
대중운동으로 단련되고 성장한 학생회 간부들은 강력한 학생권력을 바탕으로, 90년대 대중사업의 전형을 만들었다. 지역이나 학교별로 약간씩 다르지만, 대략적으로 90년대 대학의 1년 싸이클은 이렇게 돌아갔다. 2월 예비대학, 3월 등록금투쟁, 4월 신입생 조직화 및 총학생회 출범, 5월 518투쟁 및 한총련 출범식, 6월 조직정비 및 기말고사, 7월 여름농활, 8월 통일선봉대 및 범민족대회, 9월 대동제, 10월 조직정비(차기 학생회 준비), 11월 각급 학생회 선거, 12월~1월 학생회 사업계획 수립 및 집중 학습.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대중사업을 놓고, ‘캘린더 투쟁이다’, ‘관료적이다’ 라며 전대협-한총련을 비판 했지만, 90년대 초중반 당대 수많은 청년학생들은 한총련 깃발과 함께했던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90년대 후반 이후 대중운동의 침체기에도 이러한 싸이클을 무모하게 고집하다가 지쳐가던 후배들은 안쓰러웠다)
관련기사. [현장르포] 학생운동의 현주소, 전대협출범식 2박 3일 / 오연호 / 월간 말, 1992년 7월
https://drive.google.com/file/d/15jbF9z7Ss6jwP3zHFKbwSj1v6ZVhLiCV/view?usp=sharing
지금은 오마이뉴스 대표인 오연호 기자님의 20대 시절 쓴 박력있는 기사. 92년 당시 전대협 출범식의 모습이 잘 담겨있다. 이것도 저작권은 말 잡지에 있으나 지금은 사라져 그냥 올린다. 저작권을 가지신 분 꼭 연락주시라.
92년 범민족대회. 범청학련 공식 출범, 베를린에 공동사무국
92년 범민족대회에서 범청학련이 공식 출범하고, 베를린에 공동사무국을 설치했다. 91년 전대협 대표로 평양에 파견됐던 박성희, 성용승 대표가 베를린에 머무르며 92년 범청학련 출범을 위한 실무를 담당했고, 공동사무국을 만들었다.
공동사무국이 만들어진 후에는 각 대학이나 지역총련별로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을 통해 팩스로 북의 대학들과 서신을 교환하고 자매결연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한총련 출범식 또는 지역총련 출범식 때에는 국제전화를 통해 베를린을 거쳐 북측의 대표와 직접 공개 통화하기도 했다. 참고로, 전남대학교는 북의 김책공대, 일본에 있는 조선대와 3자 연대 자매결연을 맺고 서신교환 등의 활동을 했다.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의 활동에 대하여 소개한 94년 당시 뉴스를 참고하시라. 이때는 북의 김일성 주석이 세상을 떠난 후, 박홍이 튀어나와 조문파동, 주사파 파동이 벌어지던 때다. 박홍이 바람잡이에 나서자, 당시 검찰과 언론이 ‘빨갱이 때려잡자’고 호응했던 내용이다. 당시 앵커들이 무서운 표정으로, 큰일난 것처럼 분위기 잡는데, 별 내용 아니다. 총학생회에서 북과 주고받았던 편지들은 원문 그대로 언론사들에 보도자료 보냈었다. 보도해 주라고 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정권이 거들면 거품물며 한총련을 빨갱이라고 욕했다. 그나저나, 학교 다닐 때는 9시 뉴스 볼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다시 찾아보니 참 재미있다. 90년대 우리 전남대가 스타였구만…
이렇게 한총련과 범청학련을 죽일 놈 취급하더니, 6년 후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후에는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범청학련을 통해 전남대 총학생회가 추진했던 자주교류를 발판으로 삼아, 전남대 대학본부 측에서 김책공대와 자매결연 공식화를 추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총련과 범청학련의 자주교류 운동의 정당성을 국립대가 인정했다는 말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90년대에 우리 학교랑 편지교환했던 김책공대 학생위원회 간부들 만나고 싶다.

92년 범민족대회, 중앙대 달마산 전투와 통일노래한마당
92년 범민족대회는 범청학련 결성이라는 성과도 있었지만, 범대회를 준비하다가 개최 예정지였던 중앙대가 털리면서 전대협 의장 등 중앙집행위원들이 무더기로 잡혀간 수난의 대회였다. 정확하게 8월 10일 새벽, 당시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황영조 씨가 금메달을 따던 순간 경찰병력이 진입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진 후, 8월10일 점심 때쯤, 우리 학교에서 진달래 중대 긴급 회의가 잡혔다. 오월대장의 발제. “지금 전대협 의장도 잡혀가고 중앙대에 3백여명의 학우들이 갇혀있다. 지금 당장 중앙대로 가서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과 오월대 깃발을 올려라. 선봉대가 올라가서 길을 뚫으면, 나머지 학우들도 뒤따라 갈 것이다”는 말과 함께 지원자를 받았다. 1학년 대원들도 결의를 밝히는데, 내가 빠질 수는 없어서 짐을 챙겨 서울로 올라갔다.
워낙 경황이 없는 상황이라 남총련 선봉대 모두 합쳐도 120명 정도 밖에 없었지만, 12일 새벽 중앙대 뒷산으로 진입했다. 싸움이 붙은 후, 서울지역 병력들 5겹 정도 뚫고 나갔는데, 중간에 길 안내 하던 서총련 친구는 사라져버리고… 돌격시간이 지체되면서 앞뒤로 병력이 증파되어 중앙대로는 못가고 빠져나왔다. 나는 당시에 부상을 입어 제대로 뛰지 못했는데, 마지막까지 도와준 경영대 사까이 동지 참 고마웠다. (당시 ‘여명의 눈동자’란 드라마가 유행했던 때라, 극중 인물을 딴 별명이 많았다. 사까이는 최재성의 극중 일본 이름) 본명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친구의 별명과 눈빛은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달마산에서 싸우다가 다친 흉터는 내 손에 아직 남아있다.
그렇다고, 내가 싸움만 하고 다닌 것은 아니다. 나는 부상당한 와중에도 전대협 통일노래한마당 본선 무대에서 노래 불렀다. 당시, 남사련(광주전남지역사학과학생연합) 소속 노래단으로 통일노래한마당에 출전하여 본선까지 올라간 것이다. 내 경력에 2만명 관중앞에서 공연한 가수란 사실도 올리고, 두고두고 자랑해야겠다.

범민련-범청학련, 전국연합, 자주민주통일 투쟁의 라인업 완성
92년에는 대학생들의 자주적 대중조직 전대협과 전총련, 자주민주통일을 지향하는 연합 연대조직인 전국연합, 그리고, 자주통일을 위한 범민련과 범청학련까지 NL진영이 만들고자 했던 자주민주통일 투쟁의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선수들이 입장했으니, 힘을 모아 싸우는 일만 남았다.
92년 대통령선거를 준비하며, 87년 이후 민족민주운동진영은 최선을 다해 조직을 확장하였으나,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12월 대선, 최선을 다했으나 쓰라린 패배
범민족대회 이후 가을부터는 대통령선거에 모든 관심과 활동이 집중되었다. 전국연합은 민자당과 김영삼은 반민주 반통일 집단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민주당과 정책연합을 통해 범민주단일후보로 김대중 후보를 지원하였다. 보수 야당이 아닌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는 세력은 백기완 민중후보 추대로 모였다.
광주에서는 대선국면에서 사실상 할 일이 없었다. 오월대는 민자당 김영삼이 광주공원에서 선거유세를 하는 도중, 지역감정 조장을 위한 자작테러가 우려된다며 김영삼 유세를 보호하러 나가기도 했다. 11월 이후에는 다른 지역에 연고가 있는 친구들은 파견을 나가기도 했다. 나는 김영삼의 본진인 부산에서 활동하고 싶어서, 부산에 연고가 있는 후배와 함께 부산대 친구들을 찾아가 공정선거감시단 활동을 했다.
92년 12월, 부산 서면에서 함께 숙식하며 민주정부수립을 위해 싸웠던 부산대 벗들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모두들 보고싶다. 수많은 청춘들이 대통령선거에서 배신자를 심판하자고 외쳤으나, 92년 대선결과는 쓰라렸다.
아! 민주정부(1992) 노래듣기 / 민주대연합-민주정부수립을 외쳤던 진영의 대표곡
민중권력쟁취가(1990) 노래듣기 / 92년 민중후보 백기완 선본 대표곡

92년 대선 후, 한동안 멘붕에 빠졌던 청년학생들은 그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김영삼 정권에 맞선 싸움의 시작은 역시 남총련이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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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은 그 때의 감동으로 뭉클
눈시울은 금새 뽀땃!
희주님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