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1) 강경대, 박승희의 벗이 90년대 학생운동을 돌아본다
신희주님의 <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을 새로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가 90년대를 기억하는 또 하나의 방식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제1부.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을 소환한다.
제2부. 90년대 한총련 운동의 특징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제4부. 90년대를 관통한 핵심적인 문제 2가지
제5부. 한총련 학생운동, 무엇을 남겼나? 성과와 한계
마치며. 강경대, 박승희가 떠난지 30년,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까
필자 신희주
컨텐츠기획자
91년 전남대에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했다.
91년 오월투쟁부터 96년 연세대항쟁까지 학생운동 현장에서,
전남대 투쟁국, 조통위, 선전국 일꾼으로 활동했다.
94년 연행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재판정에 섰으나,
자기변론문 등을 제출하며 2년간 싸운 끝에, 국보법 무죄판결을 받았다
30대 이후에는 중국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사드(THAAD)배치로 한중관계가 험악해져 귀국했다.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 미국의 단일패권이 해체되는 전환기, 90년대 운동 경험은 역사적 자산
분단체제와 양극화를 극복할 동력이 필요
2017년 촛불항쟁을 통해 우리는 변화와 개혁을 선택하였고, 2018년 남북대화와 북미대화가 이어져 분단체제를 극복할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2020년 총선에서는 민주당에 180석을 몰아주어, 수구냉전세력과의 지리한 줄다리기를 끝내고, 새로운 사회로 도약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현실은 지지부진하다.
정치는 87년 체제에 기반한 미국식 양당체제에 발목 잡혀있고, 경제는 97년 iMF체제로 만들어진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스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남북관계는 53년 만들어진 정전협정 체제에 막혀있다. 정치는 87년 체제, 경제는 97년 체제, 53년부터 이어진 정전체제까지 3중으로 얽힌 장애물을 놓고 자유주의 개혁세력은 한계를 보이는 듯 하다. 국회의원 180석에도 지지부진한 모습에 스트레스만 쌓여간다.
그렇다면, 분단 체제와 양극화된 경제시스템을 극복하는 동력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필자는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의 단일패권이 전 세계를 휩쓸고, 세계화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는 속에서도 굽힘없이 싸웠던 90년대 학생운동의 경험을 되돌아보자고 주장한다.
미국이 그어놓은 선을 뛰어넘을 깡다구
전 세계가 미국 앞에 엎드리던 90년대에도 한총련 청춘들은 일관되고 우직하게, 어쩌면 무모하리만큼 반미자주를 외쳤다. 한총련은 94년 쌀수입 개방 반대 및 우르과이라운드 비준저지를 외치며 전투적으로 싸웠다. 90년대 초중반 북-미간 핵공방 과정에서는 일관되게 전쟁반대 및 내정간섭 중단을 외쳤다. 하지만, 미국의 패권이 가장 강력했던 90년대에 우리가 승리할 수는 없었다.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세상이 바뀌고 있다. 90년대 미국 패권 강화로 폭주하던 세계질서가 이제는 후진기어를 넣고 역방향으로 진행중이다. 미국의 단일패권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후 해체되고 있으며,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가 진정되면 다극화된 세계질서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조선은 당당한 주체로 부상할 것으로 본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여당이나 야당이나 ‘숭고한(?) 한미동맹’을 놓고 경쟁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그나마 국회에서 숨통을 틔워주던 통합진보당도 박근혜-최순실에게 테러당해 해체되었고...
지금 우리에게는 미국이 그어놓은 선을 뛰어넘을 깡다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깡다구를 어디서 충전할건가.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을 돌아보면 빵빵하게 충전된다.
한총련진군가 노래듣기 / 깡다구 충전
한총련진군가 노래듣기 / 깡다구 충전
90년대 학생운동, 제대로 된 기록을 시작하자
필자의 대학시절 애창곡 중 ‘통일진군가’란 노래가 있다.
가사 중 ‘양키와 매국노 너희를 살찌운 분단도, 46년의 착취도 이제는 끝났다~’란 부분이 있다. 아마도 91년 만들어진 노래인 것 같은데, 범민족대회에 참가하는 연차가 길어질 수록 가사에 일년이 늘어나는 식으로 업데이트 되었다. 2021년 올해 부른다면, 아마 ‘76년의 착취도~(정말로 징글징글한 세월이다)’
통일진군가 노래듣기
통일진군가
90년대 학생운동. 이미 한 세대의 시간이 지났다.
80년대 학생운동은 86세대와 함께 민주화투쟁의 신화로 받들어지지만, 90년대 학생운동은 제대로 된 평가와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93년 출범한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아직도 이적단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으며,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한총련의 90년대 학생운동을 놓고 승리와 영광의 역사라고 규정하긴 힘들다. 한총련은 대중적 학생운동이 정점을 찍은 후 쇠퇴하는 시기의 모습이라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한총련은 518 학살자 처벌, 쌀 수입개방 반대, 노동법 개악 반대 등 시대와 민중의 요구에 화답했고, 96년 연세대에서 북미평화협정 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외치며 새로운 한반도를 만들고자 고민하고 실천했다.
이제 한총련 세대들도 40대 중후반에 접어들었다. 국가보안법이 아직 남아있고, 당대를 살아온 활동가 개개인들의 아픔과 상처가 베어있지만,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제대로 된 기록을 남겨보자.
강경대, 박승희의 벗, 개인 자격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91년 전남대에 입학했던, 동시대 대학생 중 한명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왔고, 당시 한총련의 핵심 간부도 아니기에 우리 세대 학생운동을 대표할 자격은 없다. 역사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2점대의 우스운 학점으로 9학기만에 겨우 졸업했기에 전문연구자도 아니다.
하지만, 91년 오월투쟁 30주기를 앞두고, 강경대, 박승희 벗이라는 개인 자격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일단 1991년 오월투쟁부터 1996년 연세대항쟁, 1997년 한총련 탄압 및 IMF와 수평적 정권교체까지 이야기를 남기려 한다. 나부터 기록을 시작하면, 함께 했던 벗들의 이야기도 이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한총련은 93년에 출범했는데, 91년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잇겠다. 우연치않게 내가 91학번이라 91년 오월투쟁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점도 있지만, 90년대 한총련의 동력은 91년 오월투쟁이라 보기에 91년부터 시작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개인자격으로 올리는 글이기에, 특정한 단체의 공식 기록이나 학술적인 논문은 아니다. 개인 블로그에 가깝다. 그래서, 다른 의견이 있으면 그냥 편하게 댓글 달거나 메일 보내주시면 된다.
다음으로,이번 연재는 90년대 한총련 주류(NL, 민족해방 또는 자주계열)들의 문제의식과 실천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활동공간이었던 전남대와 남총련 활동이 많이 들어갈 것이다. 당시 학생운동의 한 갈래였던 PD계열(민중민주, 평등계열)의 활동은 다루지 못했다. PD계열 학생운동은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이기에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해 주길 바란다.
90년대 청년학생들의 고민과 실천, 성과와 한계를 기록하며, 분단체제를 해체하는 역사적 상상력을 키워보자. 90년대 한총련 세대의 경험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갈 역사적 자산이다.
※ 기사 업로드 과정에서 약간의 착오가 있었습니다. 독자여러분의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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