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23)

반년간 열심히 달려, 드디어 연세대항쟁 이야기로 들어간다. 사실 한총련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과제는 바로 96년 연세대항쟁에 대한 재평가와 명예회복이다. 당시 참가했던 학우들 모두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겠지만, 트라우마를 벗어나는 방법은 상처를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꺼내고 직시하고 객관화시키는 것이다.

먼저, 지난 25년간 우리 사회에 연세대항쟁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연세대항쟁 관련 내용은 필자가 2019년 겨울 블로그에 올렸던 내용을 보강하여 5차례에 걸쳐 올리겠다.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연세대항쟁 01. 침묵과 트라우마를 딛고, 통일시대를 여는 힘으로~~ 

연세대항쟁, 난 아직도 아프다 

96년 8월을 생각하면,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프다. 트라우마는 그냥 묻어두기만 하면,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아물더라도 치유되는 것은 아니고,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91년 오월투쟁도 아픈 기억이 많지만, 당시 투쟁은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였기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      

하지만, 연세대항쟁에 대한 기억은 김영삼 정권 때에는 분노와 복수심으로, 98년 정권교체 이후에는 억울함과 답답함으로 이어졌다. 2000년 615선언 이후 남북관계가 좋아질 때는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통일에 힘을 주었다고 위로하며 역사 속에서 재평가되리라 생각했었다. 어쩌면, 연세대항쟁에 대한 기억은 스스로 봉인시키고 잊기 위해 애썼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억울함은 사라지지 않고, ‘왜 그랬을까’ 라는 물음이 불쑥불쑥 튀어 올랐다. 겉으로는 의연한 척하지만, 20여년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자존감을 갉아먹는 ‘트라우마’에 나도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그런데, 2018년 남북대화와 북미대화가 이어지면서, 기회가 왔음을 느꼈다. 96년 연세대항쟁 당시 우리의 핵심 구호가 무엇이었나? 바로, ‘한반도평화체제 구축’과 ‘북미평화협정 체결’이었다. 북미평화협정이 공론화되는 시기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2019년 연세대항쟁에 대한 자료들을 모으고, 개인 블로그인 ‘한총련과 민족전대(hcyncy.com)’를 개설하고 글과 자료를 공유했다. 

96년의 기억을 돌아보는 것이 어쩌면 애써 잊고 있는 벗들의 상처를 헤집는 것은 아닐지 걱정도 했다. 그렇지만, 트라우마는 피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직시하고 벗어날 때 치유되는 것이라고 본다. 아프더라도 우리의 싸움을 되돌아보자. 적어도, ‘항쟁’인지 ‘사태’인지 이름표는 제대로 달아줘야 할 것 아닌가.

연대항쟁 (다큐창작소, 2006년작, 6분45초) / 연세대항쟁 10주년에 만들어진 짧은 영상. 이런 영상을 보면서 흔들리지 않아야, 트라우마를 극복한 것이다.  

 

왜 기본적인 사실 확인마저 이루지 못했나 

96년 8월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및 범민족대회’는, 이름부터 통일되지 못했는데, 대략 연대사태(연세대사태), 한총련 사태, 연대항쟁(연세대항쟁) 등으로 불리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약칭으로 ‘연세대항쟁’, 정확하게는 ‘96년 연세대항쟁’이라고 통일시켜 부르자고 제안한다. 당시에는 연대항쟁 이라고 하면 연세대를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전달됐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 요즘 젊은이들에게 ‘연대항쟁’ 이라고 하면 의미가 불분명해진다. ‘연대항쟁의 정신을 알아보자’고 하면 당장, ‘누구랑 연대한다는 말이죠? 미얀마? 팔레스타인?’ 이런 물음이 돌아올 수도 있다. 그래서, 필자는 ‘연세대항쟁’ 이라는 이름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연세대항쟁에 대한 가장 큰 왜곡은 ‘한총련이 점거농성 했다’는 가짜뉴스다. 한총련은 진압 병력의 폭력에 밀려 건물에 갇혀 포위된 것이지, 점거농성을 한 적이 없다. 여러번 자진해산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김영삼 정권은 포위망을 조이고, 생존을 위한 물과 음식물, 의료용품, 위생용품의 반입을 차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인식은 왜 기본적인 사실확인마저 이루어지지 못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다.

96년 가을에 한총련은 연세대항쟁에 대한 김영삼 정권의 폭력과 언론의 왜곡에 대항하는 선전을 준비했다. 당연히 학우들과 먼저 합의하고, 사회적으로 확산시킬 준비를 했던 것이다. 96년 9월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연대항쟁 자료집을 보면 내용이 충실하다.(당시, 선전일꾼들 몇일 밤을 지세우고 만들었을 것이다)  

연대항쟁 자료집 (승리를 향한 길잡이, 1996년 4기 한총련 제작) 

https://drive.google.com/open?id=1fKWGwoi_cGYCIhdJa5IlqsNi6rAtM6Fd

하지만, 9월에 만들어진 자료집은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을 것이다. 96년 가을은  9월 18일 좌초된 잠수함 발견부터 11월 전투까지, 강릉 잠수함 사건으로 사실상 준전시상태가 이어졌다. 날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남북간 전투상황에서 통일운동을 재평가하자는 목소리는 감히 꺼낼 수 없었다.

1996-09-19, 한겨레,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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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잠수함 사건이 마무리된 후에는 96년 12월부터는 김영삼 정권과 민족민주운동세력의 격돌이 벌어졌다. 96년 12월 신한국당이 노동법 개악안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 시킨 후,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총파업, 총궐기 투쟁이 시작됐다. 연세대항쟁을 복수하겠다고 이를 갈고 있던 한총련 입장에서는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 이었다. 한총련은 ‘노동악법 철폐, 김영삼 타도’의 깃발을 들고 치열에서 싸웠다. 하지만, 97년 5월 한총련 출범식 투쟁의 와중에서 이석, 이종권 씨 치사사건이 벌어지면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꺽였다. 

1996-12-27, 한겨레,,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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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정권교체 이후 또는 2000년 615선언 이후 재평가를 시도할 기회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한총련 조직 내부적으로 논란이 많아 연세대항쟁에 대한 기본적인 사회적 합의도 이루지 못한 채,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지난 25년간의 흐름 4단계 - 침묵, 계승, 극복, 도약  

연세대항쟁과 관련된 지난 25년간의 흐름은 침묵, 계승, 극복, 도약의 4단계를 거쳤다고 볼 수 있다.

1단계 - 침묵

사회적인 기억이 만들어지는 5년간의 골든타임을 놓친 후,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연재글의 첫머리에 썼던대로,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주체들의 전략적인 침묵이라고 볼 수 있다.

2단계 - 계승

연세대항쟁 10주년이던 2006년 공식적으로 ‘계승’ 이야기가 나왔다. 2006년은 노무현 정부가 수구냉전세력에게 공격당하며 정치적으로 밀리던 시기이다. 당시 한총련은 연대항쟁의 정신을 계승하고 자주통일 운동의 선봉에 서겠다고 선언했다. 연세대항쟁의 정신을 뜨겁게 계승하겠다는 후배들이 참 고맙지만, 10주년에 사회적인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주체들의 아픔도 보듬지 못했다. 연세대항쟁 10주년에 나왔던 기사 두가지를 보자.

한총련, 연대항쟁 10주년 기념대회 개최

 

1500여명 참가 속에 '연대항쟁 정신'으로 '제2의 6·15시대' 개척 결의 / 오마이뉴스, 1996-08-1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52633

정명기 전 의장은 "96년 연대항쟁은 4천만 민중과 7천만 겨레에게 감동을 안겨준 투쟁"이라며 "10년이 지난 지금, 연대항쟁은, 한총련은, 국민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한총련이 후배들의 가슴 깊숙이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중략 ....

장송회 14기 한총련 의장은 "연대항쟁을 잊지 말고, 남은 2006년을 3대 애국운동의 기수가 되어 조국통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한총련이 되자"고 호소했다.

 

'연대항쟁 재평가는 천천히, 하지만 촘촘히'

[인터뷰] 연대항쟁 당시 연세대 부총학생회장이었던 이도윤씨 / 민중의소리, 2006-08-31

http://www.vop.co.kr/A00000050024.html

그는 연대항쟁 10주년 기념대회를 지켜보며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당시 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한총련을 지켜냈다’는 얘기만 나오다보니 편히 얘기할 수 없는 자리가 됐다”는 것.

도윤씨는 “우리가 옳았다는 얘기를 항변하는 것은 수세적인 것 같다”며 “재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당시의 영상 등 자료들을 가지고 다수의 대중과 차분하게 이야기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 하략 -

 

3단계 - 극복

연세대항쟁 20주년인 2016년을 전후하여,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당시는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 개성공단 폐쇄 등 최순실-박근혜 정권의 퇴행이 극에 달하던 시기다. 하지만, 2016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을 심판하고, 촛불항쟁이 폭발하려던 때다. 연세대에서 처절하게 짓밟힌 청춘들이 20년이 지나, 자신들의 힘으로 연세대항쟁을 객관화시키고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던 움직임을 보자.

연세대 국문과 김영희 교수-연세대항쟁 20주기 전시

노수석추모사업회 2016. 9. 21   

https://nosooseok.tistory.com/24

저는 개인적으로 96년 8월에 연대에서 있었던 일이 굉장히 큰 사건이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이후 대학 사회의 분위기라든지 학생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달라졌거든요. 이 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들만 해도 그 수가 매우 많죠. 연세대 안에 있었던 학생들도 몇천명인데다 전경은 그보다 몇 배의 숫자가 있었죠. 학생, 전경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학교를 오가는 연세대학교 학생, 강사, 조교, 교수, 주변 시민.. 

그런데도 20년이 흐르도록 이 일은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된 적도, 조명된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 사건을 겪었던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자기의 경험이나 기억들을 굉장히 개인적인 일로만 끌어안고 살고 있다는 거예요.

… 중략 ...

어떤 사건이 사회적이거나 역사적 의미를 가지려면 많은 논의가 축적되어야 하는데요, 96년 8월은 한 번도 논의가 축적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서로 부르는 호칭도 다릅니다. 연대 항쟁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연대 사태라 하는 사람도 있죠.

… 중략 ...

많은 사람들이 이 시기 경험들을 전혀 떠올리지 않고 묻고 살았어요. 여전히 쉽게 얘기하긴 어렵지만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부분이 있죠. 그리고 모두가 연세대 항쟁에 대해 어떤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부분들이 있는 거예요.

 

‘1996년 연세대’에서…20년 만의 편지 [한겨레TV] / 2016- 10-13.

 

4단계 - 도약

촛불항쟁을 통해 최순실-박근혜 정권을 몰아낸 후, 2017년 무렵부터 연세대항쟁에 대한 객관화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단계를 거쳐, 2018년 남북회담, 북미회담이 열리면서, ‘북미평화협정’이 공식화되어 도약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연세대항쟁은 우리 한총련 세대의 발목을 잡는 트라우마가 아니라, 북미평화협정을 20년 먼저 외쳐, 자주와 통일의 시대를 여는 힘이 되고 있다.      

 

96년 연대항쟁 / 바다 님의 블로그 중 / 2017-02-13

https://blog.naver.com/dlwjdgns999/220934136790  

개인적으로는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한총련을 덮어놓고 괴물로 취급하던 쓰레기 글들에 비하면, 나름 객관적으로 접근하려 노력했다.  이 정도 시각이 당시 진보진영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 정도 글도 그나마 촛불항쟁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96년 전국에서 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통일선봉대로 모였다 /붉은칼 님 블로그 중/ 2018-06-10

https://blog.naver.com/redkal/221295792440/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걸린 블로그. 96년 통일선봉대 활동을 회고해 놓은 글이다. 서울대에도 이런 ‘남총련식 감수성(?)’을 가진 벗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고 반갑다. 참고로, 통일선봉대 관련 포스팅이 5개 계속 연결된다. 이런 글이 나올 수 있었던 힘은 2018년 남북대화와 북미대화라고 본다. 

96년 통일선봉대 경험담은 '통일선봉대 찬가 / 천리마'를 BGM으로 깔고 읽어보라. 느낌이 확 살아난다.

 

한총련과 민족전대 / https://hcyncy.com/ 2019년 12월 

2019년 12월, 필자가 90년대 학생운동 기록과 재평가를 위해 만든 블로그. 초기에 열심히 올렸다가 방전되어 지금은 방치된 상태.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 연세대항쟁에 대한 가장 충실한 내용이라고 자부한다. 블로그 작업은 연재중인 한총련 소환 프로젝트 마무리하고 진행하겠다. 연세대항쟁 이야기 5부작 궁금하면, 블로그에 접속하여 쭉 훑어 보며 예습(?)해도 좋다. 

 

우리 한총련 세대는 지난 2016년 총선부터 촛불항쟁, 2017년 대선, 2020년 총선까지 한국사회 변화를 이끌고 있다. 연세대항쟁의 정신은 누가 뭐라해도 자주와 통일이다. 벗들이여,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도약하자. 우리 한총련 세대가 선두에서 자주와 통일의 시대로 나아가자. 

연세대항쟁의 재평가와 명예회복을 위해 필자가 모아놓은 자료부터 공유하겠다. 이번 글들은 빠르게 올릴 것이니, 진도 뽑는데 쳐지지 않기를 바란다.  

한총련 명예회복의 핵심은 뭐니뭐니해도 '연세대항쟁 재평가', 벗들의 많은 관심과 공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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