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28)
연세대항쟁을 정리한 후, 한동안 번아웃 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최근 97년 한총련의 상처를 헤집는 사건을 보며 전투력을 충전했다.
연세대항쟁이 짓밟힌 날, 우리는 잡혀간 동지들의 자리를 채우며 선전하고 조직하여, 97년 대선 전에 김영삼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96년 가을 조직을 복구하고 복수전을 준비했던 한총련 청춘들 이야기를 돌아본다.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제1부,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을 소환한다
제2부, 90년대 한총련 운동의 특징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96년, 노수석과 벗들의 죽음, DMZ 불인정 선언, 계속되는 연행,구속,공안정국
연세대항쟁 01. 침묵과 트라우마를 딛고, 통일시대를 여는 힘으로~~
연세대항쟁 02, 사건 경과 및 핵심 구호, 생활수칙과 초코파이 등
연세대항쟁 03, 북한 붕괴 망상 속에 자행된 예비검속 만행
연세대항쟁 04, ‘내부의 적’은 존재했나?
연세대항쟁 05, 재평가와 명예회복, ‘연세대항쟁동지회’를 만들자
연세대항쟁 이후 조직을 복구하며, 97년 복수전을 준비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연세대항쟁 이후 조직을 복구하며, 97년 복수전을 준비
연재를 이어가며 - 97년의 아픔도 기록할 것…
지난 6월 29일 ‘연세대항쟁동지회를 만들자’ 는 글을 올린 이후, 조금 숨을 고르며 자료를 모아야겠다는 것이 개인적인 일까지 겹쳐 너무 늘어졌다. 여기에 97년 이야기는 너무 가슴 아프고, 당시를 살았던 벗들의 평가와 기억도 엇갈린 부분이 많아 시작하기가 힘들었다. 96년 연세대항쟁을 객관화시키는데도 26년이 걸렸는데, 97년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은 너무 힘들게 다가온다. 더군다나, 96년 연세대항쟁 당시에는 현장에 있었지만, 97년에는 학생운동을 떠나있었기에 애매하다. 그래서, 97년 현장에 있던 벗들을 취재하며 정리할 계획이었으나, 확인하고 정리할 내용이 너무 방대했다. 97년은 한총련의 처절한 투쟁과 아픔 뿐 아니라, 한국 사회 변혁운동이 결정적으로 쪼그라들고 IMF와 신자유주체제로 기울어진 ‘역사적 분기점’이다. 연세대항쟁을 정리하는 것만도 버거운데, ‘97년을 정리하는 것은 내 역량을 벗어난 과제고 새로운 프로젝트로 접근해야 한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97년 한총련의 아픔을 헤집는 일이 있었다. [관련 기사] 이재명 임명한 경기도 산하기관 임원, 알고 보니 '이종권 고문치사' 전과자
민주당 내부 경선에서도 이렇게 한총련을 공격하는데, 수구냉전세력과 맞붙는 대선 시기에는,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인 한총련 세대를 2030세대와 분리시키기 위한 더러운 공격이 더 거세질 것이다. 그래서, 97년 이야기를 정리하기가 너무 힘들지만, 개인적인 기록이라도 남기기로 했다. 필자는 지난 97년 남총련 선전국에서 일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학생운동 대열에서 도망쳤다. 내가 도망쳤던 전선에 남아 끝까지 싸웠던, 당시 남총련 의장을 걸고 넘어지니 정말로 화가 난다. 맥이 빠져 있다가, 전투력이 다시 살아난 기분이다. 이제 힘내서 진도 뽑고, 97년 이야기까지 마무리 후 단행본으로 만들겠다.
96년 연세대항쟁이 짓밟힌 날, 지하실에서 결의
96년 연세대항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96년 3월 정권의 폭력진압에 살해된 노수석을 보며 분노하고 투쟁했던 당시 청춘들을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97년 한총련 청춘들이 ‘김영삼 정권 타도’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이유는 처절하게 짓밟힌 연세대항쟁부터 시작된다.
96년 8월, 종합관이 잔인하게 짓밟히고 과학관의 벗들이 탈출하던 날, 나는 봉쇄망을 뚫지 못하고, 연희동 상가 건물 지하실에 숨어 있었다. 얼마 후, 여학생 후배 몇 명도 지하실에 들어와 같이 숨었다. 바짝 긴장한 후배들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학교인지는 잊어버렸는데, 당시 2학년(95학번)이라고 기억한다.
연세대 항쟁이 짓밟히던 날, 지하실에서 이야기들, 상황극 형식으로 재현해 본다.
연희동 시민들의 도움으로 지하실에 먼저 숨어있던 나는, 혼자서 숨죽이며, ‘빠져나갈 수 있을까’. ‘잡혀가면 어떻게 진술할까’를 고민하는 중.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하고 바라봤는데…
연세대에서 빠져나온 것으로 보이는 여학생 3명이 먼저 들어오고, 10여분 후 여학생 한명과 남학생 한명이 더 들어왔다. 경찰서와 보안수사대에 여러번 잡혀가고, 국가보안법 재판정에도 서보는 등 산전수전 다 겪은 나도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후배들은 정말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래서, 숨을 돌린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 나는 남총련 91학번이야. 너무 걱정하지마. 나는 구속되겠지만, 전과기록만 없다면 여학생 후배들은 금방 나올걸. 그전에 경찰서 가봤어?
후배1: 00총련 95학번 이예요. 잡혀가 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나: 최대한 버텨봐야지. 대열 앞쪽은 뚫고 나간 것 같던데.
후배2: 선배님, 잡혀가면 어쩌죠?
나: 경찰이 아무리 겁주고 윽박질러도 겁 먹지마. 연행 후, 48시간을 버티면 너희는 불구속으로 나올거야. 경찰관이 다그치면 ‘재미있는 공연이 있다고 구경갔다가 갇혀버렸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며, 엄마 보고 싶다고 펑펑 울어버려.
후배1: 저희 감옥에 갇히는 거 아니에요? 우린 그렇다치고, 사수대 친구들은 어떡해요?
나: 남자 후배들은 풀려나기 힘들 수도 있어. 그러니, 먼저 풀려날 후배들이 할 일이 많지.
후배2: 그럼 우리는 무얼 해야하죠?
나: 이번에 나를 비롯한 학생운동 지도 학번들이 무더기로 구속되고, 학생회 조직이 많이 무너질 거야. 그러니,후배들이 빈자리를 채워야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선전’과 ‘조직’, 그리고 ‘복수’를 준비하자고.
후배1,2: 선전과 조직이요?
나: 먼저 연세대항쟁의 진실을 학우들과 시민들에게 알려. 다음으로, 조직을 복구하고 큰 싸움을 준비해야지. 우리 선배들은 86년 10월 건국대에서 깨진 후, 87년 6월항쟁으로 군부독재를 무너뜨렸단다. 이제 건대항쟁 이후 87년 6월항쟁을 맞이했던 것처럼, 선전하고 조직하여 큰 싸움을 준비해야해
후배1.2: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나: 난 너희를 믿어. 나는 경대친구 91학번이고, 너희는 수석이친구 95학번 이잖아. 지난 10일을 생각해 봐. 처참한 폭력 속에서도 빛났던 우리 벗들이 있는데, 당연히 승리하지. 이제 길게 바라보며 큰 싸움을 준비하자고. 내년(97년) 대선 전에 한총련의 이름으로 김영삼에게 복수하자… 이제 3학년 올라가면 과학생회부터 튼튼하게 만들자고..
후배1,2: 네. 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 우리가 연세대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알릴 거예요.
연세대항쟁 이후 학생운동 진영의 정서는 ‘복수’
우리사회에서는 ‘연세대항쟁으로 인하여 학생운동이 몰락했다’고 쉽게 이야기한다. 항쟁에 참여했던 주체들의 입은 틀어막고, 주변부 구경꾼들의 이야기가 정설처럼 굳어진 것이다. 그래서그런지, 한겨레신문사에서 예전에 연재하고 단행본으로 나왔던 [NL현대사]란 책이나, 얼마전, 프레시안이라는 매체에 손호철 교수가 기고했던 글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필자는 손교수의 글은 사실관계가 다른 부분이 많고, 하나마나한 이야기와 결론으로 흘렀다고 본다. 진보 지식인이라는 꼰대들 공부 좀 하셔야겠다. 언제까지 20년전 이야기를 리플레이 할 건가…)
[관련기사] '연세대 사태'가 부른 학생운동의 추락 / [손호철의 발자국] 68. 서울 연세대 : '민주화의 주역' 학생운동은 어떻게 몰락했는가?
연세대항쟁 이후 97년 한총련 운동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연세대항쟁에 대한 ‘분노’와 ‘복수’다. 연희동 지하실에서 후배들과 나눴던 이야기를 가슴으로 읽어본다면, 당시 청춘들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연세대항쟁에서 보여진 학생운동의 폭력성과 이적성으로 대중들의 지지를 잃었다고? 이건 기레기들의 분석이고 가해자들의 일방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전남대에서 96년 8월31일부터 9월1일까지 실시했던 설문조사 결과를 보자.설문지 2300부를 배부하여, 1774부를 수거했는데, 교수교직원 58명, 학생 1716명이 응답했다고 하니, 교수 교직원 표본수는 부족하지만, 당시 대학생들 표본은 충분하다고 본다. 전남대 용봉캠퍼스에 대략 학생 수가 1만5천명 정도였으니, 10% 이상 학생들에게 응답을 받은 것이다. (요즈음 여론조사 표본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표본숫자와 응답률이다. 당연히 신뢰도가 높은 조사결과라고 본다)
연세대 통일투쟁에 대해서 한총련의 주장은 정당했지만 방법은 잘못됐다는 대답이 학생 63.9%, 주장과 방법이 모두 정당했다는 대답이 학생 22.3% 였다. 방법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정당했다는 의견이 86.2%다. 이게 대중들의 지지를 잃은 것인가? 여기에 김영삼 정권의 통일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대답이 70% 였다.

연세대항쟁에서 수천명이 연행, 구속되었지만, 학생운동의 현장은 시련을 딛고 더 단단해졌다. 연세대항쟁 이후에도 한총련의 조직력과 투쟁력은 건재했고, 핵심 활동가들의 투쟁의지는 불타올랐다. 다만, 민족민주운동 진영이 분열되어 학생운동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학생들만 분노로 뜨거웠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96년 가을, 강릉잠수함사건 와중에서 조직 복구
96년 가을은 강릉잠수함 사건 때문에 사회분위기가 얼어 붙었다. 강원도에서 군인 수만명이 군사작전에 들어가, 날마다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연세대항쟁에 대하여 사회적 발언을 하기는 너무나 힘들었다. 북미평화협정 체결 등 평화와 통일의 이야기는 감히 꺼내기 힘든 상황, 한총련 벗들은 연세대 항쟁의 진실을 학우들에게 알리며 조용히 학내 조직을 복구해 갔다.
이 시기 학생운동 조직의 특징은 연세대항쟁의 과정에서 학생회 조직의 실무를 담당하던 2~3학년 남학생들이 무더기로 구속되어, 군대를 다녀온 예비역이나 여학생들이 빈 자리를 채우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강경대, 박승희와 함께 싸우고, 군대를 다녀온 후에도 다시 싸움판에 뛰어든 90년대 초반 학번들. 그 시대를 함께한 벗들이 수구냉전세력을 극혐하며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운명인 듯 하다.
다음으로, 96년 가을 조직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사람사랑학생회 노선은 학우들 사이에서 거부되었다. 연세대항쟁을 통해 김영삼 정권과 공존할 수 없다고 뼈져리게 느낀 학우들은 다시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람사랑학생회 등 한총련 조직 내부의 투쟁은 이전에 올렸던 글을 참고하길...
96년 12월,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개악, 민주노총과 함께 전면 투쟁
96년 가을, 각 대학의 총학생회 선거를 앞두고 수구냉전세력은 한총련에 저주를 퍼부었다. 여기에 강릉잠수함사건 등으로 통일운동에 대한 여론이 험악해진 와중에, 수구언론들은 ‘아직도 정신 못차린 친북운동권을 척결해야 한다’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단순한 여론전 뿐 아니라, 보안수사대를 비롯한 모든 공안기관이 총동원되어 대학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과 활동가들을 잡아가고 수배하며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손호철 교수 등이 ‘연세대 항쟁으로 학생운동이 몰락했다’는 뇌피셜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시 기레기들의 가짜뉴스에 오염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처럼 지독한 탄압 속에서도 한총련은 건재했고 튼튼하게 복구되었다.
96년 12월 3일 전대신문에 오른 전국 대학 총학생회 선거 결과 분석 기사를 보자.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전대기련) 자체 집계에 따르면 선거가 끝난 1백13개의 대학(11월 29일 14시 현재) 중에서 학생운동 세력이 94개 대학에서 당선됐다. 80%를 넘는 대학의 학생들이 정부와 언론이 ‘사회혼란과 이적행위를 일삼는 폭력세력’이라 일컫는 이른바 ‘운동권’ 학생회를 선택한 것이다. 올해 학생회 선거는 민족해방(NL) 계열이 68개 대학, 민중민주(PD) 계열이 26개 대학, 비운동권 계열은 20개 대학에서 학생들의 선택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96년 가을 전국 대학 선거 결과를 보면, 어마어마한 탄압 속에서도 한총련의 핵심 역량과 지지기반은 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97년 한총련 의장은 전남대 강위원 총학생회장이 맡았다. 남총련의 실천적인 모범으로 한총련 운동이 다시 정립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모인 결과라고 본다.
한총련 조직 복구가 마무리되던 96년 연말에 김영삼 정권은 노동법,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시켰고, 민주노총의 총파업과 함께 한총련은 투쟁의 거리로 나섰다. 연세대항쟁 후 복수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던 청춘들은 힘찬 투쟁의 깃발을 올렸다. 97년은 민주노총과 함께하는 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으로 뜨겁게 시작되었다.
한총련의 노동악법 날치기 규탄 투쟁 영상기록. 1997년 1월 19일. 한양대로 보인다.
한총련 명예회복을 위해 벗들의 많은 관심과 공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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