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19)

조문파동과 공안정국을 견뎌낸 후, 95년 학생운동은 중흥기를 맞이했다. 95년은 518 학살자들의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 처벌하기 위한 투쟁으로 전두환 노태우를 감옥에 보냈다. 통일운동 진영은 민족사의 대전환기를 선포했으나, 민족공동행사와 범민족대회를 따로 개최하는 분열된 모습을 보였다. 노동운동 진영은 민주노총을 공식 출범시키며 한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제네바 합의로 북미간의 긴장이 풀어진 속에, 대중운동은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나, 조직-사상운동은 위기속으로 들어갔던 95년을 돌아본다. 95년 815대회까지와 학살자 처벌 투쟁 특집, 95년 등장한 사람사랑 학생회 등 총 세편으로 나눠서 올리겠다.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95년, 학생운동의 중흥기, 전-노 학살자 처벌, 민족사의 대전환기 

 

95년, 학생운동의 중흥기, 대중운동의 폭발, 한총련 내부 이견 표출  

전-노학살자 처벌 투쟁으로 대중운동이 폭발했던 95년을 보통 한총련의 ‘중흥기’로 기억한다. 대략, 조선시대 역사로 비유하자면, 정조시대라고 할까. 95년은 전두환-노태우의 내란 및 광주학살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는 해였다. 그래서, ‘특별법을 제정하여 학살자를 처벌하자’는 구호를 들고, 대중들의 지지와 참여 속에 투쟁하여,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감옥에 보내는 성과까지 남겼으니, 중흥기라 부를만 하다. 

다음으로, 통일정세도 ‘위기 후 기회’가 찾아왔다. 94년 조문파동과 공안정국이라는 고난을 거쳤으나, 북미간 제네바 합의를 통해 한반도에 봄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졌다. 당시 운동진영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보수 지식인들도 미국이 북미관계 개선에 나서는데, 김영삼 정권이 이러한 흐름을 뒤집지는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공안당국의 탄압도 94년에 비하면 확연히 부드러워졌다. 이를 두고, 당시 학생운동 진영은 ‘민족사의 대전환기’라 부르며, 실질적인 통일원년을 만들어 가자는 낙관적인 전망이 차올랐다. 

사회적인 분위기도 좋았다. 북미합의에 따라 긴장국면이 풀어졌으며, 해방50년-분단50년을 맞이하여 민족해방운동과 분단 역사를 돌아보는 다양한 기획과 행사들이 펼쳐졌다. 심지어, 김영삼 정부는 통일운동 진영까지 끌어들여 남북이 함께 참여하는 대규모 이벤트까지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을 놓고, 조문파동 당사자인 김영삼을 북측에서 거부하여 남북 정부간 이벤트는 성사되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가 개입하면서 통일운동 내부의 분열은 더 심각해졌다. 94년 통일운동 진영은 조직적으로 분열되었고, 95년에는 815대회가 민족공동행사(민족회의 주최)와 범민족대회(범민련 주최)로 따로 열리면서, 많은 이들에게 혼란과 실망을 주었다. 94년부터 나타난 통일운동의 분열은 결국 학생운동에도 영향을 미쳐, 한총련 내부에서도 다른 의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드라마 ‘모래시계’, 신입생 기본 의식화에 도움 

95년은 SBS의 드라마 ‘모래시계’와 함께 시작되었다. 당시 광주지역은 SBS가 송출되지 않아, 방송을 볼 수는 없었지만(본방사수 불가), 광주항쟁이 나오는 7부와 8부는 비디오 테이프로 먼저 퍼져나갔고, 전체 내용도 녹화되어 비디오테이프로 볼 수 있었다. 사실, ‘모래시계’는 제작 단계에서도 남총련과 인연이 깊다. 시위장면에 나오는 플랭카드, 피켓 등 각종 소품을 제작하여 납품(?)했고(기계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선전국 전문 인력들이 한땀 한땀 정성껏 제작했다), 엑스트라에도 집단 출연했다. 

‘모래시계’가 방영된 95년은 공교롭게도 80년 광주항쟁 관련 공소시효 15년이 끝나는 해였다. 12-12사태 공소시효 만료를 앞둔 94년 10월 검찰은 군사반란 혐의에 대하여 기소유예 처분을 내려, 전두환-노태우를 법정에 세우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검찰과 정권을 믿을 수 없었기에, 95년 큰 싸움은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드라마 주인공들이 시민군과 공수부대로 등장한 ‘모래시계’의 영향력은 꽤 컸다. ‘모래시계’ 이전 518관련 다큐는 몇차례 방영되었지만, 다큐보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더 깊은 인상은 준 것 같다.

‘모래시계’ 덕분에, 95년 신입생들에게 518 관련 교양은 아주 수월했다. 물론, 광주지역은 기본적으로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518을 겪지않은 다른 지역 신입생 교양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드라마 ‘모래시계’ 봤제? 시민군 출신 태수는 사형을 받았는디, 전두환-노태우는 어째야쓰까?”  

통일학번이라 불린 95학번 새내기들은 대학에 들어오기 전, 조문파동과 공안정국 속에서 한총련에 대한 온갖 괴담을 들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모래시계’의 영향이었는지, 학생운동에 호의적이고 학살자 처벌을 위해 함께 싸웠다.

SBS 드라마 모래시계 8부 (1995년 2월 방영)

전대신문, 1995-02-24,  8면

 

남총련과 한총련의 시각 차이- 한총련은 낙관적 전망 속 합법노선 추구 

전남대와 남총련에서는 95년 초반부터 정세 전망 및 사업 계획을 세울때, ‘민족사의 대전환기’라는 말을 키워드로 잡았다. 북미 대결국면이 제네바 합의를 통해 마무리되고, 냉전체제와 분단체제가 해체되는 단계로 나아갈 것이라는 기대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94년 단과대 학생회에서 일할 때는 한총련 중앙의 문건과 지침이 너무 많이 내려와서 고민이었는데, 95년 총학생회에서 일할 때는 한총련 문건을 거의 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95년 한총련 집행부가 각 지역별, 대학별 독자적인 사업을 중요하게 보고, 중앙의 지침을 내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95년 남총련 집행부와 한총련 집행부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고, 남총련은 사실상 한총련 중앙, 특히 정책위원회의 말은 듣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대신문에 실린 남총련 대의원대회 기사 중 주요 내용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자주의 횃불 남총련이 내놓은 자주민주통일 투쟁의 모범답안(?) 이다.(95년 남총련 사업계획 / 1995-03-04 남총련 대의원대회 의결)   

“학우들의 이해와 요구를 전면적으로 구현하여 자주적 학생회 강화, 학생운동의 대중화를 실현하며, 문민독재정권에 총체적 파산선고를 내리고 전민족적인 통일대행진으로 분단50년 원한의 철조망을 걷어내자.”

“통일운동의 일상화 전면화를 실현, 각계각층 대중운동 단체와의 일상적인 연대운동을 전개”

“평화협정 체결투쟁, 조미합의서 완전이행, 전쟁 군사훈련 반대투쟁과 연방제 통일방안 합의, 확산 투쟁 등을 확정” “95년 지자제 선거 특별결의문 채택”, “5월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사업 진행”  

전대신문, 1995-03-07, 5면

다음으로, 한총련 정책위의 입장을 보자. 95년 5월5일부터 7일까지 경북대에서 열린 한총련 출범식 관련 전대기련(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의 해설기사를 보자. 기사 내용 중 자주 인용되는 한총련 정책위원장의 의견은 남총련과 결이 약간 다른 것 같다. 여기에 94년 한총련 집행부의 시각과도 달라 보인다. 

94년 한총련 출범선언문을 보자. “자주의 시대, 그 길에 빛나는 백만의 영광, 미국반대 김영삼 타도의 자랑찬 성전에서, 통일조국건설로 내달리는 청춘은 승리한다.  (94년 제2기 한총련 출범선언문 중)” 

다음으로, 95년 한총련 출범식 해설 기사를 보자. 

“95년, 한총련은 바쁘다. 518 관련 책임자 처벌을 위한 기소관철 촉구와 진상조사, 6월 지자체 선거를 계기로 민주세력의 정치진출을 위한 사업, 그리고 통일원년을 맞이하여 통일운동의 대중화를 이루어 내고자 하는 사업을 행동으로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한총련 출범선언문은 제3기 한총련의 의지를 한껏 드러내고 있다. “올바른 가치관과 참개혁을 위해 4천만 민중과 함께 518투쟁, 자자체 선거, 통일운동의 실천으로 사고공화국인 현 정부를 심판할 것”이 그것이다. - 중략 -“

(정확한 분석을 위해서는 95년 한총련 대의원대회 자료집과 출범선언문이 필요한데, 혹시 소장하신 분 있다면 스캔본이라도 보내주시라. 그리고, 기사에 등장하는 95년 한총련 정책위원장님 누구신가. 뵙고싶다. 연락주시라) 

전대신문 1995-05-09, 5면, 전대기련 공동기자단

대략, 95년 한총련 정책위는 북미관계, 남북관계, 국내정세 모두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분석하여 합법적인 노선으로 기울었다고 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사람사랑 학생회 노선 분석하며 추가하겠다)    

남총련과 한총련은 95년 당시 시각 차이는 있었지만, 518학살자 처벌과 815대회 사수 등 전국 집중 투쟁에서 남총련은 한총련 백만학도의 선봉에서 싸웠다. 당시 우리는 활발한 대중운동 속에서 조그만 차이는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리고, 당시 청춘들을 조직 상층부의 의견 차이와는 상관없이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하는 모든 학우들을 동지로 존중하였다. 

 

627 지방선거, 자민련과 갈라진 민자당의 참패 

1995년 6월 27일, 지방의회 의원부터 자치단체장까지 뽑는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열렸다. 김영삼 정권 3년차에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 중요한 선거였다. 결과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민자당의 참패, 민주당의 선전, 자민련의 돌풍’ 이라고 할 수 있다. 자민련은 민자당에서 YS에게 구박받던 JP가 독립하여 만든 정당인데, 95년 지방선거에서 충청권을 전부 석권하고, 강원도지사까지 4명의 광역자치단체장을 당선시키며 제3당으로 올라섰다. 민주당은 호남 지역을 석권하고, 서울시장과 서울시 구청장을 싹쓸이 했다. 김영삼의 민자당은 자민련과 갈라지면서 제1당의 위치도 위태로워졌다.

95년 지방선거 다음해인 96년에는 총선이 있고, 97년에는 대통령선거가 잡혀 있었다. 94년 성수대교 붕괴, 95년 4월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까지 대형참사가 이어지며 김영삼 정권의 지지도는 추락했다.       

[참고 자료]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995-06-27) - 나무위키

1995년, 첫 동시지방선거에서 지역 분할 구도 완성되다

 

민족회의와 범민련의 대립 속 따로 열린 815 대회 

95년 갈라진 815대회는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짜증난다. 통일선봉대 깃발을 내리고, ‘삼천리대행진단’ 이라고 이름을 바꿔달아, 통일운동이 대중화됐나? 95년은 김영삼 정권이 북미관계 개선 흐름에 올라타고 통일운동을 이용하려 했기에 겉으로는 큰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96년 김정권이 제네바 합의 체제를 깨뜨리고 민족대결 국면으로 몰아갔을 때, 민족회의 지도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한총련 청춘들은 연세대에서 고립되어 싸워야했다.    

할 말은 많지만, 96년 연세대 항쟁 이야기에서 다루기로 하고, 95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에서 작성했던 815대회 보고문을 원문 그대로 싣는다. 전남대 총학 선전물은 마음대로 퍼가는 것을 장려할 뿐 아니라, 내가 직접 쓰고 편집하여 뿌렸던 내용이니 저작권 문제는 없다.

[815대회 보고] 통일의 주인은 7천만 겨레임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해방 50년! 분단 50년!

올해 광복절에는 분열의 역사를 끝내고, 통일의 새날을 맞이하기 위한 각계각층의 요구와 열망이 드높았습니다.

그래선지, 이전까지는 광복절에 간단한 기념식(?)만 하던 정권에서도 총독부 첨탑을 허물고, 한강에서의 수상레이져 쇼, 광화문 축제 등 수백억의 돈을 쏟아부으며 여러 행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통일이란 남북 7천만 겨레가 함께 했을때만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이러한 정권 주도의 행사들은 반쪽만의 형식적인 축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815를 맞이한 획기적인 대북제의가 있을 거라는 예상이 많았으나, 그마저도 후퇴하고 의례적인 말로 끝나고 말았구요

김정권의 공허한 통일행사가 떠들썩하게 벌어지고 있던 그 시간, 언론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지만 90년대 통일을 이루기 위한 남북해외 7천만 겨레의 염원을 모으는 8.15민족공동행사와 제6차 범민족대회가 보라매공원, 서울대, 한양대, 판문점 등지에서 열렸습니다. 외세와 분열세력을 물리치고 통일을 이루는 힘은 바로 민중들에게 있으며, 통일조국의 앞날을 이끌어갈 사람도 바로 민중들임을 눈으로 확인하는 시간이었죠.

우리 학교에서는 계속되는 전·노처벌 투쟁과 방학이라는 힘든 상황속에서도, 8월13일에 450여명의 학우들이 상경하여 3만여명의 각계각층 민중들과 함께 815대회를 성사시켰습니다.

올해에는 통일운동을 전개하면서 범민련의 위상이나 정치적 과제에 대한 이견이 존재하여 많은 논쟁이 있어 분열적인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남총련을 중심으로 민족공동행사와 범민족대회를 모두 성사시켜, 통일운동을 각계각층으로 확대시킴과 동시에 앞으로 통일운동의 방향을 대중들의 실천을 통하여 검증하였습니다.

특히, 민주노총 준비위가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노동자들도 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고, 민족공동행사를 준비할때 대부분의 여성·사회·종교단체를 포괄하며 다양한 형식의 행사를 진행하여 통일운동의 폭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판문점에서 815대회를 성사시키지는 못했지만, 남북해외 3자연대 기구인 범민련이 주최하는 범민족대회를 대중적으로 성사시키고 범청학련 대표를 파견하여 실질적인 3자연대를 실현하여 이후 통일운동의 방향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하지만, 올해에는 통일운동세력간의 적지 않은 분열상도 나타나, 한총련까지도 지역별로 차이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자주와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의 3대원칙에 입각한 대중들의 투쟁을 통하여 극복될 것이고, 범민족대회를 대중적으로 성사시키면서 차츰 극복되고 있습니다. .

이후 우리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북의 김책공대, 일본의 조선대 벗들을 용봉대동풀이에 초청하여 3자연대운동을 발전시키고 통일의 길을 개척해 나갈 것입니다.

올해 815대회 진행과정을 우리학교를 중심으로 간단히 보고드립니다.

 

8월 13일

오전 11시20분 우리학교 대강당 앞에서 전세버스로 출발

오후 6시 통일음악회, 보라매 공원, 3만여명 참여. 민중가수, 성악가, Rock Group 「천지인」등이 조국통일 을 열망하는 노래로 서울시민들과 함께함.

오후 11시 한양대로 이동.

 

8월 14일

0시-오전6시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및 통일노래한마당. 한양대, 15000명 참여.

한총련 의장이 범청학련 대표로 정민주, 이혜정 학형 을 파견했음을 선언.

광주대 공대 노래패 [소낙비]의 ‘뛴다’. 통일노래한마당 청년상(2위) 수상.

오전 7시 서울대로 이동 휴식.

오후 6시 815민족공동행사 전야제. 보라매공원, 20000여명 참여.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민족의 화해를 위하여 국가보안법 철폐, 평화협정 체결을 결의

오후 11시 범민족대회 사수를 위하여 서울대로 이동.

 

8월 15일

0시-오전 5시 범민족대회, 서울대, 1만여명 참여

민족자주와 민족대단결 정신에 기반하여 90년대 연방 통일 조국 건설을 결의

오전 10시 1만여명의 판문점 진격투쟁. 4차 저지선까지 뚫고 경기도 고양까지 진출

오후 6시 한양대. 범청학련 통일축전 폐막식.

 

1995-08-15 한총련(남총련) 판문점 진격투쟁 (2분52초부터)

95년 광복절 여러가지 풍경을 AP통신에서 찍어놓은 영상이다. 한총련의 판문점 진격투쟁은 2분52초부터. 경기지역 의경들 처음 맞이하는 남총련 전투력에 멘붕이다. 여담으로, 다음날인 8월16일 장충공원에서 전-노 학살자 처벌 집회가 있었는데, 허가된 집회였지만 경찰이 난입하여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아마도, 김영삼이 준비한 잔치판에 재를 뿌렸던 판문점 진격투쟁에 대한 보복인 것 같다. 

8월16일 전노처벌 국민대회 관련 기사. 한겨레, 1995-08-17 23면
8월16일 전노처벌 국민대회 관련 기사. 한겨레, 1995-08-17 23면

1995-08-16 장충공원 집회 관련 기사보기 

815 대회를 마친 후에는 2학기 개강과 함께 학살자 처벌 투쟁으로 수많은 청춘들이 자신들의 피와 땀을 갈아넣었다. 삭발, 단식, 동맹휴업 총투표, 동맹휴업-총궐기, 민자당사 점거, 2차 총궐기, 전노체포결사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다음 편은 95년 학살자 처벌 투쟁 특집으로 올립니다. 여태까지 모았던 당시 투쟁 관련 다양한 영상자료, 그리고 민플러스 독자들의 취향에 딱 맞는 무용담 많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총련 명예회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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