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17)

94년 상반기 전쟁위기는 6월 남북정상회담 합의로 겨우 지날 수 있었다. 하지만, 7월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한반도 정세는 또다시 흔들렸다. 김영삼 정권은 수구냉전세력에 휘둘리며 조문파동과 공안정국이라는 꼴통 짓으로 남북관계를 파국으로 이끌었다. 남북관계는 파탄났지만,  북-미회담은 계속 이어져 94년 10월 제네바 합의가 발표되며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94년 김영삼 정권의 황당한 민족 대결 정책과 이에 맞섰던 한총련의 대응을 돌아본다.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94년 조문파동과 공안정국, 전남대 분향소, 제네바 합의

 

‘우리쌀 지키기 여름농활’ 조직하며, 남총련 탄압 돌파  

94년 618 홍익대 투쟁을 거치며, 남총련의 많은 벗들과 후배들이 감옥에 갇히고,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그렇지만, 남북정상회담 발표로 전쟁위기는 지나고 조금 숨 돌릴 수 있었다. 정권의 탄압에 맞서는 방법은 대중적 지지기반을 넓히는 것 밖에 없었다. 전남대는 618투쟁을 거치며 오히려 학우들의 학생운동에 대한 관심과 지지는 강해졌다. 핵심 활동가들이 서울에 묶여있던 6월18일 밤, 경찰병력이 전남대에 들어왔는데,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우들이 몰려나와 경찰병력을 몰아냈다. 이 일을 두고, 한동안 ‘전남대는 현역 없이 예비군(?)만으로도 학교를 지킬 수 있다’는 말이 돌았다.  

그리고, 94년 상반기 쌀 수입개방 저지 투쟁의 흐름을 이어, 농민회와 함께 ‘우리 쌀 지키기 여름농활’을 조직했다. 농활은 끈끈한 학생 공동체를 만들고, 농민회를 강화하는 농민-학생 연대활동의 꽃이였으며, 학생운동 활동가를 키워내는 중요한 대중사업이었다. 94년, 남총련은 핵심 간부들이 쫓겨다니는 힘든 상황이었지만, ‘우리쌀 지키기’라는 뚜렷한 기치를 들고 농활을 조직했고, 여기에 호응한 많은 학우들이 여름농활에 참여했다.

94년 남총련의 여름농활은, 618 투쟁 후 기말고사가 연기되었고, 조직을 정비할 시간이 필요해, 일반적으로 7월 첫째주에 진행하던 농활을 7월 두번째 주로 미루었다.  김일성 주석이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된 7월 9일, 우연히도 다른 지역 총련은 농활이 마무리되었지만, 남총련은 한참 농활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전남대 분향소 사건이  농활기간 중 일어났다는 점은 중요한 변수였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보충하겠다.  

 

7월 김주석 서거, 조문파동과 박홍의 주사파 사냥, 공안정국 

나는 94년 7월 김주석 서거 당시 전남대 인문대 학생회 집행부로 전남 보성군 농활 상황실에 있었다. 7월 9일 갑자기 발표된 김일성 주석 서거 소식을 듣고 한동안 멍해졌던 기억이 있다. 가장 먼저, 날짜까지 잡혔던 남북정상회담은 어떻게 될 지, 일괄타결로 가닥이 잡혀가던 북-미간 고위급회담도 어떻게 진행될지 갑갑했다. 농활기간이라 시골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부족하여 답답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언론보도를 통해 나오는 김영삼 정권의 대응은 황당했다. 김영삼 정권은 가장 먼저 군비상경계령을 발동하고 휴가 나간 장병들을 복귀시켰다. 정상회담을 준비하던 상대편 지도자가 죽었는데, 전쟁 또는 비상상황을 대비해야 한다는 발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이어서, 7월 12일 당시 야당의 이부영 국회의원 등이 ‘북에 조문사절단 파견을 검토할 생각은 없는가?’ 등의 대정부 질문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 수구냉전세력이 총궐기하여 남북대결 분위기로 몰아갔다. 소위 말하는 ‘조문파동’이 벌어졌는데, 김영삼 정권은 “어떤 형식의 조의 표현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간주해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한총련에서는 ‘김주석에 대한 추모 및 남북대결정책을 반대한다는 취지의 성명 또는 대자보, 현수막을 각급 학교 상황에 맞게 추진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농활을 먼저 끝낸 서울 지역 대학들에서 김주석 추모 대자보와 유인물이 발견됐다고, 수구언론에서  호들갑을 떨었는데, ‘김주석을 추모하고, 북의 인민들을 위로하며,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정상회담은 계속 추진되어야 한다’는 수준의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7월15일 새벽 전남대에 경찰병력이 투입되면서 김주석 분향소가 발견됐다는 사건이 터졌고,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은 더 거세졌다. 그리고, 7월18일 박홍 씨가 등판하여, 주사파 사냥과 공안정국을 이끌었다. 당시, 박홍 씨의 발언 중 유명한 것은 “주사파 뒤에 사노맹, 사노맹 뒤에 사로청, 사로청 뒤에 김정일이 있다’는 말인데, 이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었다. 주사파와 사노맹은 사상과 노선이 달라 별로 친하지 않다는 것은 상식이고, 94년 당시 사노맹은 사실상 괴멸되어 활동이 거의 없었다. 박홍 씨는 그냥 사노맹, 사로청 이름을 두고 라임(운율)이 맞아 입에 착 달라붙는 것 같으니, 랩 가사 쏟아내듯 뱉어낸 것이다. 발표를 하려면, 공부도 하고 근거를 가지고 해야지, 이런 황당한 발언을 놓고 온갖 찬양을 늘어놓았던 당시 언론사 기자들과 검찰, 부끄럽지도 않나? (최소한, ‘주사파 뒤에 한민전, 한민전 뒤에 조선로동당과 김정일이 있다’고 발언했다면, 덜 짜증났을까)

박홍의 주사파 사냥에 따라 94년 여름 펼쳐진 공안정국에서는 학생운동과 통일운동 뿐 아니라, 노동운동, 사회운동 진영까지 무차별적으로 잡혀갔고, 학계와 언론계, 문화예술계, 심지어는 고등학생까지 주사파 딱지를 붙였다. 당시, 벌어진 일들은 다음 영상을 보면서 확인해보길 바란다. 열 받더라도 기억할 것은 기억해야 한다.

1994년 그해 여름, 조문파동과 공안정국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83회

 

‘북한 붕괴’라는 망상에 따른 인지부조화와 확증편향 

김영삼과 수구냉전세력이 빨갱이 사냥에 총궐기하던 순간, 미국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당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미국 국민을 대신해 북한 주민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전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으로, 제네바에서 북-미고위급 회담을 진행하던 갈루치 차관보는 제네바 현지 북한 대사관으로 가서 조문하고, 북-미회담은 계속될 것임을 확인했다. 

이렇듯, 94년 당시 미국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대응을 했다. 그리고, 94년 조문파동이 뻘짓이었다는 것은 수구냉전세력도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다. 이는 이명박 정부에서 2011년 김정일 위원장 조문을 제한적으로나마 허용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오늘, 우리가 조문파동을 돌아보며 집중할 문제는 무엇일까. 첫째로는 ‘우리 사회 수구냉전세력은 왜 이렇듯 황당한 짓을 벌였는가’ 이고, 다음은 ‘이러한 황당한 짓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이다.

우리 사회에는 평소에는 나름 합리적으로 보이던 사람도, 조선과 관련된 문제라면 판단력을 상실해버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어느 사회에나 ‘일베충’같은 인지부조화에 빠진 집단은 소수 존재한다. 그런데, 94년 당시에는 일베충 같은 멘탈을 가진 자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공권력이라는 칼을 휘둘렀다는 점이 문제다. 

그렇다면, 수구냉전세력을 인지부조화와 확증편향에 빠지게 만는 핵심적인 믿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들 사이에 종교적 확신처럼 자리잡은 ‘북한 붕괴’라는 망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망상은  1978년 박통시절에 만들어진 만화영화 ‘똘이장군’ 수준의 세계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똘이장군이 날라차기로 붉은돼지를 무찌르니, 헐벗고 굶주린 북한 인민들이 봉기하여 여우와 늑대들을 때려잡고 자유의 깃발을 나부낀다는 눈물나는 스토리. ㅠ.ㅠ 

똘이장군이 무찌르는 붉은무리가 혹시 빨간 옷 입고 다니는 ‘국힘당’?
똘이장군이 무찌르는 붉은무리가 혹시 빨간 옷 입고 다니는 ‘국힘당’?

이 따위 만화를 제작하여 동심을 파괴하던 세대가 지금의 태극기 부대 나이가 되었고, 그들이 수구냉전세력의 핵심 지지층이다. 아직도 똘이장군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건 너무 한 것 아니냐고? 구글에서 똘이장군 이미지 검색하던 중, 2019년에 부산시 중구에서 유치원 아이들 데려다가 상영했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똘이장군, 아직 살아있다.

똘이장군, 아직도 살아있다. 2019-07-02 국제신문 기사
똘이장군, 아직도 살아있다. 2019-07-02 국제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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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국민학교 다닐 때, 학교 강당에서 ‘똘이장군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노래를 목이 터져라 따라 부르며 영화를 보던 흑역사가 있다.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전편을 감상할 수 있다.

94년 조문파동과 96년 연세대 항쟁은 ‘북한붕괴’라는 종교적 확신과 똘이장군적 감수성에 물든 수구냉전세력이 역사를 되돌린 만행이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최순실-박근혜 집권 시기 벌어진 2012년 ‘내란 음모 조작 사건’과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사태’도 비슷한 패턴으로 진행됐다. 

1994년~1996년, 2012~2014년, 공통점이 보이는가? 첫째로 북한의 권력이양기에, 두번째로 운동진영을 갈라친 후, 세번째로 자주통일 진영을 잔인하게 짓밟았다는 점이 동일하다. (96년 연세대항쟁을 분석하며, 자세한 내용 보충하겠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20대 초중반에 한총련 깃발을 지키며 김영삼 정권에 짓밟힌 한총련 세대는 통합진보당 핵심실무자로 성장한 후, 또다시 최순실-박근혜 정권에게 얻어맞는 불행을 겪었다. 이러니, 70년대생 한총련 세대는 수구냉전세력을  용서할 수 없다.

 

전남대 분향소 사건과 거짓말, 전남대 학생운동의 역사적 실책   

남총련 학우들이 농활에 들어갔던 기간 중, 김주석이 세상을 떠나고 조문파동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당시 남총련은 수배당한 활동가들과 파업 중이던 금호타이어 노조 간부들을 전남대로 집결시켜, 농촌활동이 끝날 때까지 공동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그런데, 7월 15일 새벽 경찰병력이 학교로 진입하여, 1학생회관 압수-수색 후, 김주석 분향소가 발견되었다고 발표되었다.  남총련은 급히 농활을 끝내고 전남대로 모여 집회를 열었고, ‘분향소는 존재하지 않았고, 공안탄압을 위한 조작극이다’라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답답했다. 남총련 발표문의 행간을 읽다보면, 뭔가 숨기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에 보성군에서 농활 중이었기 때문에, 경찰들이 전남대에 진입하던 당시 상황을  알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거짓말을 하려면 똑바로 하지, 너무 티 나게 한다’고 느끼며 짜증이 났다. 여기에, ‘남총련은 김주석 분향소를 설치할 의사가 없는 순수한 학생’이라는 식의 입장 표명은 화가 났다. 이는 ‘김주석 분향소 설치는 나쁜 짓’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고, 김영삼 정권의 조문파동과 이데올로기 공세가 정당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94년 북에 조문가겠다고 판문점으로 향하던 범민련 강희남 의장

당시 범민련 강희남 의장이  ‘북에 조문간다 길 비켜라’고 당당히 밝히며 구속되는 와중에, 자주의 횃불 남총련이 이런 구차하고 찌질한 대응을 했다는 것은 두고두고 비판받을 일이다. 물론, 618투쟁으로  수백명이 구속된 와중에, 공안탄압이 더해지는 것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총학 선거에서 52표차로 겨우 이긴 상황에서, 학우들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도 컸으리라. 농활기간을 피해 많은 학우들이 함께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대응하지 않았을 것이란 아쉬움도 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조직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이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94년 조문파동 와중에서 남총련은 용기를 내어 전진했어야 한다고 본다. 남총련은 전투력이 아니라 정치력을 키웠어야 한다.

89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대표가 방북한 것은 분단의 금기를 깬 선도적인 투쟁이었다. 당시 수구언론에서는 친북좌경세력이라 맹비난을 했고,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을 조성했지만, 통일운동은 한단계 도약할 수 있었다. 내가 만약, 94년 조문파동 와중에서, 비공개 분향소가 드러난 후, 여기에 대한 대응을 결정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범민련 강희남 목사님의 뜻을 이어받아, 공개 분향소를 설치하겠다고 선언했을 것이다. 어차피, 정권과의 전면전이 벌어진 상황에서, 분향소를 부정한다고  탄압의 강도가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분향소와 관련하여 프락치의 공작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돌았는데,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음으로, 94년 분향소 사건에 대한 무기력한 대응은 자주통일 진영에 패배주의를 심어줘, 반북혐오정서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하는 부작용을 남겼다. 왜 우리는 종북이라고 비난하는 꼴통들에게 우물쭈물 거리며 답답하게 대응하는가. 쿨하고 당당하게, 시원시원하게 받아칠 수 없나? 왜 아직도 김어준이나 유시민에 견줄만한 자주의 스피커를 키우지 못하고 있는가. 반북혐오정서를 효과적으로 분쇄할 자주의 스피커를 발굴하고 키워야 한다.

94년 당시 공안탄압 관련 기사. 1994-09-27 전대신문 5면
94년 당시 공안탄압 관련 기사. 1994-09-27 전대신문 5면

 

8월 범민족대회. 한밤중 진입병력 깨뜨리고 헬기와 싸우다 

94년 범민족대회는 역대급 폭염과 공안탄압 속에 진행되었다. 원래는 건국대학교에서 열기로 했으나, 경찰병력으로 겹겹이 봉쇄가 되어, 8월 14일 오후에 서울대로 진입하여 범대회를 시작했다. 

94년 범대회는 14일 2호선 전철을 이용한 집단적인 서울대 진입, 한밤중에 진입한 경찰병력을 깨뜨린 서울대 대격돌과 15일 해단식에 등장한 헬기의 최루액 살포가 유명하다. (어찌보면, 96년 연세대 항쟁의 예고편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조문파동과 공안정국 와중에 진행된 94년 범민족대회를 놓고, 김영삼 정권은 8월초부터 범민족대회 참가자를 전원 때려잡겠다고 공언을 했다. 하지만, 한총련 청춘들은 이런 협박을 들으면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며 산넘고 물건너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그리고, 전국에서 모인 벗들은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며 힘과 의지를 충전했다.       

8월14일 늦은 밤에 대규모 경찰병력이 서울대로 진입했는데, 이날 남총련 전투조가 선두에 서서 학교 깊숙히 진입한 경찰병력의 허리를 끊고 진압 대열을 깨버렸다. 이날 동원된 병력은 61개 중대, 7천3백여명으로, 경찰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총련 선봉대는 남총련 전투조 300명을 비롯해, 3000명 수준) 하지만, 한밤중에 방독면을 쓰고 진입한 전의경들은 허리가 끊긴 후  지휘계통이 꼬이자 방향구분도 못하고 엉망이 되어 버렸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7천여 병력은  드넓은 관악캠퍼스 곳곳에서 우왕좌왕 하다가 각개격파, 무장해제 당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 두번째 병력투입은 학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병력들의 퇴로를 뚫기 위해 진입한 것이었는데, 다시 진입한 지원병력마저 녹아버렸다. 결국 김영삼 정권은 전의경 병력 투입은 포기하고, 8월15일 범민족대회 정리집회에 경찰 헬기 5대를 동원하여 최루액을 뿌리며 화풀이했다.  

1994-08-16, 한겨레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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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08-15, KBS 9시뉴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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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08-15, MBC뉴스데스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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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범민족대회를 마친 후, 각 지역으로 돌아가던 학우들도 김영삼 정권은 괴롭혔다. 특히, 광주전남지역과 부산경남지역 톨게이트, 역과 터미널 등에서 대대적인 검문검색으로 수천명을 연행했다.(당연히, 범대회 참가자는 소수고, 영문도 모른채 잡혀간 젊은이들이 대부분) 그런데, 이 와중에 나는 영화 ‘택시운전사(2017)’의 한 장면 같은 경험을 했다. 

범대회를 마친 후 8월15일 밤 늦은 시각에 서울역 근처에서 해산하며 지침을 받았다. ‘광주 주변 검문검색이 심하니, 가능하면 서울 지역 친구나 친척 집에서 몇 일 상황을 지켜본 후 내려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서울역 근처에서 자가용 영업을 하는 전세버스를 타고 그냥 내려왔다.(당시에는 기차시간을 놓친 사람들을 모아서 돈을 받고 광주까지 내려가는 불법영업을 하는 버스들이 많았다) 고속버스나 기차 같은 대중교통수단이 아니니 안전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국문과 여학생 후배와 연인을 가장하고 버스에 나란히 앉아서 내려왔는데, 나는 너무 피곤해 바로 잠든 후 광주에 도착하여 눈을 떴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광주 톨게이트에서 검문이 있었는데, 옆자리 후배 가방에서 범민족대회 티셔츠와 뱃지가 딱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의경이 씩 웃으며, ‘열심히합시다’ 하며 그냥 지나갔다고... 나는 잠든 상태라 얼굴도 못 봤지만, 그날 그 의경친구에게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다. 더불어, 94년 그 뜨거운 여름날, 함께 싸웠던 모든 벗들 자랑스럽다.

94년 범민족대회 관련 전대기련 공동기사. 1994-08-30, 전대신문 5면

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와 유화국면 

범민족대회 후에도 공안탄압은 계속 되었다. 94년 가을 전남대에는 현상금 천만원에 1계급 특진이 걸린 특급 수배자 10명이 모여 있어 팽팽한 긴장감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과 수구냉전세력의 발목잡기에도 국제정세는 바뀌어, 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가 발표되면서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당시, 제네바 합의에서, 조선은 핵개발을 동결하고, 조선과 미국은 북-미관계를 정상화하며, 미국은 조선에 경수로 원전을 지원함과 동시에 경수로 공사기간 중 매년 중유 50만톤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김영삼 정권은 일괄타결을 끝까지 반대하다가, 미국에게도 왕따 당하고, 미국에게 경수로 건설 자금만 뜯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제네바 합의 발표 후, 한동안 유화국면이 펼쳐졌다.

북미관계의 분위기가 바뀌자, 95년 김영삼 정부는 민간통일운동 진영 일부를 메신저로 삼아 남북대화 채널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조문파동 와중에서 김주석과 조선 인민 전체를 모욕한 김영삼 정권을 북에서는 철저히 무시했다.

 

역사적 기회를 놓친 김영삼 정권은 민족사의 죄인 

그렇다면, 우리는 94년 조문파동과 공안정국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90년대 초반은 미소냉전 해체 후 새로운 국제질서가 만들어지던 순간으로 분단체제를 해체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였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김영삼 정권과 수구냉전세력의 황당한 대응으로 놓쳐버렸다. 그리고, 당시 해결할 수 있었던 북미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는 30년이 지난 오늘도 풀지 못하고 있다.

우리 현대사를 돌아볼 때,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던 기회는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열렸던 모스크바3상회의와 이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에 있었다. 하지만, 당시 동아일보는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는 역사에 길이 남을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이승만과 친일분단세력이 총궐기하여 나라를 갈라놓았다. 90년대 초반 국제질서의 변화는 분단 후 반세기만에 찾아온 짧은 기회였다. 하지만, 이 기회도 수구냉전세력의 난동으로 살리지 못했다.    

94년 조문파동과 공안정국으로 역사적 기회를 날려버린 김영삼 정권은, 조국을 분단시킨 이승만과 친일분단세력처럼, ‘민족사의 죄인’이라고 나는 기록하겠다.

필자의 게으름 때문에 연재가 너무 늦었습니다.

공유, 댓글, 메일 주시면 힘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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