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15)
93년은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학계와 언론계를 중심으로 ‘투쟁의 시대,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났다’며 신세대와 포스트모더니즘(민주화 이후) 이야기로 가득찼다.
이러한 개량적 사상에 맞서 자주의 원칙을 세우고자했던 당시 전남대 학생운동 진영의 고민과 52표차로 아슬아슬하게 승부가 갈렸던 93년 총학생회 선거를 돌아본다.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91년 오월투쟁, 87년항쟁에 대한 반혁명을 막아낸 투쟁
나의 기억1 - 강경대, 박승희, 운암대첩, 91년5월투쟁
나의 기억2-운암대첩부터 박승희 장례식, 혁명적 일주일
92년, 학생운동의 정점- 전총련, 범청학련, 대선투쟁
남총련 전투력의 비밀-경찰서 습격, 남대문 돌파 등
93년, 흐트러진 전선 복구, 문민의 가면을 벗기다
개량적 흐름 속 혁신의 과제, 52표차 아슬아슬했던 총학선거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개량적 흐름 속 혁신의 과제, 52표차 아슬아슬했던 총학선거
김영삼 정부 시기를 기억하는 두가지 틀, 포스트모더니즘과 자주의 시각
90년대는 여러가지 모습이 중첩되어 있어, 하나의 역사 용어로 규정하기 힘들다. 92년까지는 노태우 정권에 맞서 치열한 반독재 투쟁이 벌어져 80년대 모습과 겹쳐진다. 김영삼 정권이 출범한 93년 이후에는 절차적 민주주의는 진척되었으나, 94년 조문파동 이후 김영삼 정권의 공안탄압과 대북적대정책에 맞선 자주통일운동이 펼쳐졌다. 98년 IMF체제와 수평적 정권교체 이후에는 전혀 다른 사회적 경제적 환경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90년대는 다양한 모습이 있지만, 대략 김영삼 정권 시기를 부르는 경우가 많다. 92년까지는 80년대 군부독재와 겹치고, 98년 이후는 IMF 이후 시대와 겹쳐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90년대 김영삼 정권 시기는 어떠한 틀로 기억되고 있을까. 학계와 언론계의 주류는 김영삼 정권 시기를 민주화 이후의 시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틀로 분석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지금은 철지난 유행어지만, 93년 즈음에는 여기저기 갖다붙이는 이론가나 평론가들 참 많았다)
다른 하나의 틀은 자주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가 만들어지는 시기에 자주와 통일의 길을 개척했던 고민과 실천을 중심으로 돌아보는 것이다. 특히, 90년대 이후 한반도 정세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북미간의 핵공방을 염두에 둔다면, 자주의 시각으로 돌아보는 것이 꼭 필요하다.
신세대, X세대, 오렌지족,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맑스주의
93년 김정권 출범 후, 언론과 광고를 통해 ‘신세대’와 ‘X세대’란 단어가 유행했다. 그리고, 여기에 ‘오렌지족’과 ‘낑깡족’이란 말까지 파생되었다. 신세대 또는 X세대는 ‘미국에 나타난 정해진 규범에 따르지 않는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인 세대’를 지칭하는 마케팅 용어다. 그리고, 오렌지족은 90년대 초중반 강남 및 압구정동에 출몰하여 돈 많이 쓰며 놀던 젊은이들을 지칭하던 말이다.
그런데, 당시 미국이야 자본주의적 풍요와 물질문명 속에서 자란 세대가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왜 갑자기 우리나라에 나타났다는 것일까. 우리 70년대 생들이 자본주의 풍요속에서 자라났다고? 쌩구라다. 보릿고개 세대에 비하면 밥은 굶지 않고 살았지만, 자본주의 풍요는 TV 속에만 있었다. 나는 94년 범민족대회 이후 서울대를 빠져나오며 마주쳤던, 관악산 뒷편의 산동네 풍경을 잊을 수 없다. 움막 같은 판잣집들 사이에서 놀고 있던 꾀죄죄한 아이들을 보며 열심히 데모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우리 사회에 신세대, X세대라는 개념은 마케팅 용어로 들여온 것이지만,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이다. ‘80년대 학번처럼 데모하지 말고, 개인으로 흩어져 즐기면서 살아라’는 메시지다. 다음으로, ‘신세대’, ‘X세대’라는 용어와 함께 문화비평이론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맑스주의’가 유행했다. 이는 유럽의 신좌파 이론을 수입한 것인데, 기본 바탕에는 ‘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완수했고, 투쟁의 시대는 끝났다’는 의미가 깔려있다. 기존의 모든 가치와 의미들을 해체하자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맑스주의는 현대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나온 이론이지만, 결국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이념에 포획됐다.
이 시기 기존의 민족민주운동을 비판하고, 문화운동과 젠더정치, 페미니즘 등이 등장하였다. 유럽 신좌파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들 주장은 일정한 유행을 만들어 내기도 했으나 유럽을 선망하고 조선을 혐오하는 반북진보적 성향을 띠기도 하였다. 때문에 신선한 문제제기를 시도하기는 하였으나 대안진보이념으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문민정부 출범이 민주화 완성일까?
우리 사회 학계와 언론계는 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시작되고, 93년 문민정부 출범으로 민주화가 완성됐다는 왜곡된 신화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신화가 맞다면, 90년 3당합당 및 민자당 창당은 김영삼의 말 대로 ‘구국의 결단’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민자당은 수구세력의 내각제 개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김영삼은 집권 기간 중, 스스로도 쪽팔렸는지 민자당을 해체하고 신한국당으로 간판을 바뀌달았다.
문민정부 출범이 민주화 완성이라면, 86년 시민혁명으로 독재자 마르코스를 몰아내고 정권을 갈아치운 필리핀은 우리보다 7년 앞서 민주화를 완성한 것인가? 필리핀은 정권교체 후에도 군부 쿠데타 시도가 이어졌고, 현재는 몇몇 가문이 권력을 분점하는 과두제 정치 시스템이라 비판받고 있다. 우리가 문민정부에 만족하고 투쟁을 멈췄다면, 한총련과 민주노총의 계속된 투쟁이 없었다면, 우리 역시 필리핀 수준의 정치 시스템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문민정부 출범은 당시 집권세력 중 육사 출신들을 몰아냈다는 의미만 있을 뿐, 우리 사회의 변화는 민중들의 투쟁으로 하나씩 이루어졌다..
문민정부 출범이 민주화의 완성이라는 왜곡된 인식 때문에, 민자당에 맞서 싸웠던 91년 열사투쟁, 문민정부 출범 후 벌어진 94년 쌀수입개방 저지 투쟁, 95년 학살자 처벌 투쟁, 96년 연세대 항쟁, 97년 노동법 개악 저지투쟁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최소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98년까지 벌어진 투쟁들은 민주화 투쟁으로 국가 차원의 기록과 예우가 있어야 하며, 자주통일운동의 역사도 제대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전남대 활동가 조직의 고민 - 자주의 원칙과 혁신의 과제
지난 글에서 밝힌 대로 93년 필자는 전남대 활동가 조직의 차기 대표를 뽑는 인선팀에 들어갔다. 90년대 대학을 다녔던 벗들은 당시 총학생회장 후보를 어떻게 뽑았는지 궁금할 것이다. 우리 학교 사례이긴 하지만, 다른 대학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 것으로 알고 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 4학년 및 5학년으로 진급하는 활동가 또는 군대를 마친 활동가 중, 각 단과대학별로 대표자를 두명 정도 선출하여 인선팀이 소집된다. 인선팀은 집중적인 강의와 토론을 통해 사상이론의 수준을 높이고, 서로의 시각을 하나로 모아가는 과정을 거친다. 집중 학습과 토론을 거친 후에는 합숙을 하며 차기 대표자를 선출하였다.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추천권이 있고 후보가 될 수 있었는데, 모두의 의견이 만장일치로 모아질 때까지 자기비판, 상호비판, 질의응답 등 무기한으로 토론했다. 그리고, 만장일치로 의견이 모아지면, 차기 대표를 추대하고 선거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전남대 활동가 조직은 개량적인 사상이 팽배한 상황에서 ‘자주의 원칙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와 ‘대중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운동방식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이 집중되었다. 주어진 현실을 단번에 바꿀 수 있는 묘책은 없었다. 뻔한 결론이라고 하겠지만, 결국은 사람의 문제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간부 혁신이 핵심과제로 떠올라, 주체들의 사상적 결의를 높이고, 학우들 사이에 뿌리박고 사랑받는 대중간부로 자리잡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기로 했다.
그 시절 우리의 마음이 잘 담겨, 벗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문구 하나를 소개한다.
폭풍시절에 폭풍같은 의지를 키우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오,
돌격선에 나서는 전사치고 돌격구령을 받고 일어서지 못하는 전사를 나는 보지 못했소.
하지만, 햇볕 넘치는 시절에
폭풍 같은 의지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오,
준엄한 시절의 영웅도 그 시절의 신념을 잃고 살아간다면,
시대에 역행하는 쓰레기가 될 수 있소.
시대의 낙엽으로 내려갈 수 있소.
[조선의 소설작품 ‘대학시절’ 중 ] (92년 가을 출간)

전남대 총학선거, 경실련-학술연구-자주총학-PD연합, 4팀의 격돌
93년 11월 전남대 총학선거에는 4팀이 출마하여 각축을 벌였다. 한총련 운동을 돌아보는데, 단위 학교의 선거 이야기를 넣는 것이 조금 뻘쭘하지만, 당시 학생운동을 둘러싼 논쟁과 흐름이 잘 나타나 집어 넣었다. 관심 없으면 그냥 넘어가시라...
1번 후보는 통상 경실련팀이라 불렸는데, 경실련대학생회와 기독교 단체, 학내 체육 동아리가 강력한 지지기반 이었다. 학생운동권과 마주칠 일이 거의 없는 영역에서 나온 팀이라 초반에는 주목을 하지 않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놀라운 득표력을 가지고 있었다.
![93년 당시 [전대신문] 기사 캡쳐](https://cdn.minplusnews.com/news/photo/202103/11493_24205_814.jpg)
2번 후보는 학생포럼이라는 신생그룹이었는데, 합법적인 시민운동과 학술연구를 지향하는 단체로 별다른 존재감을 주지 못했다.
3번 후보는 조국통일과 민족대학 건설을 앞세운 자주적 학생회 후보. 선거전 초반만 해도, 조직된 운동원만 천여명에 이르는 우리 학교에서 무난히 당선될 것이라고 방심하고 있었다. 많은 학우들이 ‘이번에 운동권들 정신 좀 차려야 한다’고 벼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원칙을 세운다는 의미로, 선전물은 자주색으로 통일하고, 두루마기를 입고 선거운동에 나섰다가 표 많이 까먹었다.
![93년 당시 [전대신문] 기사 캡쳐](https://cdn.minplusnews.com/news/photo/202103/11493_24206_951.jpg)
4번 후보는 PD정파 연합 후보. 우리 학교 특성상, 조직력은 떨어졌지만, 후보의 연설이나 이미지, 기획력, 선전 능력 등이 돋보여 강팀으로 불릴만한 후보였다.
![93년 당시 [전대신문] 기사 캡쳐](https://cdn.minplusnews.com/news/photo/202103/11493_24207_1046.jpg)
11월, 남총련의 광주 미문화원 기습 타격과 공안탄압
그런데, 선거운동이 시작될 무렵, 돌발 변수가 생겼다. 93년 학생의 날(11월3일)을 앞둔 11월2일, 남총련이 광주아메리칸센터 (구 미문화원)를 기습 타격했고, 김정권은 시위 참가자 전원 검거령을 내려, 많은 학우들이 잡혀가고 쫓겨다녔다.
당시 광주 미문화원은 양림동 여성회관에 있었는데, 지형상 공략하기 힘든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좁고 구불구불한 오르막길로 20분 정도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건물 앞까지 진입하는 것도 아주 힘들고, 퇴로를 만들어 빠져나오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90년 미문화원이 문을 연 후, 여러번 항의시위, 기습시위를 나갔지만, 아래쪽 진입로에서 더 올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의 기습 타격은 전술적으로는 완벽했다. 당일 새벽, 정해진 위치에 매복해 있던 남총련 전투조들이 미문화원 경비병력을 포위하여 밀어낸 후, 건물에 부착된 현판까지 헤머로 뜯어냈다. 그리고,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지원병력은 길목에서 차단하고 닭장차도 태워 버렸다.
당일과 다음날 언론매체에서는 남총련의 폭력성과 반미시위의 이적성을 문제삼았고, 당시 내무부(경찰 담당) 장관, 법무부 (검찰 담당) 장관, 교육부(대학 담당) 장관이 공동으로 TV뉴스에 나와 전원 사법처리 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장관 3명이 담화문을 발표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와 돌이켜보니, 김영삼 정권 시절, 이런 저런 투쟁으로 장관, 국무총리까지 여러번 불러낸 남총련, 참 대단했다.

신문 기사 읽기
노태우 정권 때까지만 해도, 총학 선거 시기에 정권과 학생운동 진영이 부딪히면, 학우들 사이에 지지율이 올라갔다.(동정표의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93년 당시에는 미문화원 타격 투쟁 후에 반응이 썰렁했다. 어쩌면, 12월 김영삼의 쌀수입개방 선언 이후에 투쟁이 있었다면 지지를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11월 미문화원 타격은 투쟁의 형식도, 투쟁의 시기도, 투쟁의 구호도 모두 비판을 받았다.
52표차, 깻잎 한장 차이로 자주 총학을 지키다
미문화원 타격투쟁으로 인하여, 자주총학 진영은 선거운동원들이 잡혀가거나 쫓겨다녀 활동이 위축되었을 뿐 아니라, 학교도 압수수색이 예고된 상황이라, 한동안 밤마다 이곳저곳 피해다녔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문선대 등 조직적인 선거운동을 하면 할수록 학우들의 거부감이 더 커진 것이다. 당시, 학우들은 ‘문민정부라는 변화된 환경에서 학생운동의 방향은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우리는 ‘미문화원 타격 투쟁은 정당했다. 문민정부는 친미사대정권으로 본질은 바뀐 것이 없다. 남총련을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만 계속 한 것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참 짜증났을 것이다. 여기에, 1차투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경실련 후보의 조직력과 득표력을 오판하고, 1차투표에서 승리할 것으로 예측했었다.
1차 투표 총유권자 167124명, 투표율 70.72%
기호 3번 / 자주총학 / 4620표 / 39.1%
기호1번 / 경실련 / 3517표 / 29.8%
기호4번 / PD연합 / 3062표 / 25.9%
기호2번 / 학술연구 / 451표 / 3.8%
자주총학 후보가 2위 경실련 후보보다 1000표 이상 득표했지만, 문제는 결선투표 였다. 전남대는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경우 결선투표를 진행하는 회칙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전까지는 운동권 주류 후보가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어 결선투표는 처음으로 진행됐다. 일단, 자주총학 진영은 결선투표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에 멘붕이 왔다. 여기에, 결선투표를 하더라도 PD연합 후보와 다툴 것을 예상했는데, 결과는 딴판이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던, 기독교와 체육동아리들의 조직적 몰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기독교 단체와 체육 동아리, 학내에서 운동조직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구멍을 정확히 치고 들어왔기에 속수무책이었다.
자주총학과 경실련의 결선투표. 52표차로 자주총학 간신히 당선.
결선투표 투표율 66.91% (1차투표 대비 -3.81%)
기호 3번 / 자주총학 / 5532표 / 1차투표 대비 +912표
기호 1번 / 경실련 / 5480표 / 1차 투표 대비 +1963표
사실상, 자주총학 팀의 선거운동은 압도적인 조직력에도 불구하고, ‘말귀 못 알아 듣는 운동권 총학을 바꾸자’는 당시 흐름에 무기력했다. 그나마, 결선투표에서 깨지지 않은 것은 3위였던 PD연합 후보측에서 ‘경실련 후보측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PD연합팀이 조직적으로 총학생회 권력 교체쪽으로 결합했다면, 94년 전남대 총학생회 권력이 바뀌었을 것이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당시 운동의 대의에 따라 입장표명을 해준 PD연합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11월 총학생회 선거는 전남대 학생운동 조직의 취약점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2월 김영삼의 쌀수입개방 선언과 함께 학우들의 지지를 받으며 제대로 싸울 준비를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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