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16)
94년의 한반도 정세는 극과 극을 오갔다. 전쟁의 코앞까지 갔다가. 카터 방북으로 남북정상회담이 합의되어 위기가 해결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7월 김주석의 서거로 남북관계는 평화냐 대결이냐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냉전수구세력과 김영삼 정권은 탈냉전 후 평화정책의 기회를 조문파동, 공안정국으로 날려버렸다. 참으로 변화무쌍했던 94년 정세 속 학생운동의 대응을 돌아본다. (94년은 이야기 거리가 너무 많아, 여러 편으로 나누어 올리겠다)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91년 오월투쟁, 87년항쟁에 대한 반혁명을 막아낸 투쟁
나의 기억1 - 강경대, 박승희, 운암대첩, 91년5월투쟁
나의 기억2-운암대첩부터 박승희 장례식, 혁명적 일주일
92년, 학생운동의 정점- 전총련, 범청학련, 대선투쟁
개량적 흐름 속 혁신의 과제, 52표차 아슬아슬했던 총학선거
94년 상반기, 쌀수입 반대, 전쟁위기, 정삼회담 합의, 618 홍익대 투쟁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94년 상반기, 쌀수입 반대, 전쟁위기, 정삼회담 합의, 618 홍익대 투쟁
너무도 다양한 94년의 모습, 무엇을 중심으로 기억할까?
1994년을 돌아보면, 너무나 많은 역대급 사건들이 이어진다. 한반도 정세는 3월 서울 불바다 발언 긴장고조, 6월 전쟁위기, 카터방북-남북정상회담합의, 7월 김주석 서거, 조문파동-공안정국,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라는 극과 극을 달리는 변화가 있었다.
한총련은 쌀수입 반대와 UR 국회비준 저지를 내걸고 치열한 대중운동을 통해 늘어져있던 학생운동 조직을 바짝 조였다. 5월 조선대에서 한총련 출범식이 열렸고, 6월 UR 국회비준 저지 투쟁 와중에서 남총련의 618 홍익대 투쟁이 일어났다. 7월 김주석 서거 이후, 조문파동으로 수많은 청춘들이 잡혀가고 쫓겨다니다가, 10월 제네바합의 이후 유화국면이 펼쳐졌다.
사회적으로는 성수대교 붕괴와 지존파 사건이 일어났고, 대중가요 분야는 서태지를 시작으로 김건모, 박진영, DJ DOC 등 새로운 음악들이 쏟아져나왔다. (94년을 배경으로한 드라마 ‘응답하라1994’, 독립영화 ‘벌새’ 등을 찾아본다면, 기억이 새록새록 날 것이다) 김영삼 정권은 쌀수입과 UR협상 반대에 대한 대응 논리로 세계화, 국제화 이데올로기를 대대적으로 유포했다.
그렇다면, 94년의 다양한 모습들은 무엇을 중심으로 기억해야할까. 보는 시각에 따라서 ‘응답하라1994’ 처럼 새로운 대중문화가 피어나고 디지털 문화가 태동하던 때로 회고할 수 있을 것이고, 미국의 단일 패권 속 국제화가 시작되며 해외 배낭여행이 대중화되었던 시기로도 기억될 수 있다. 한총련과 함께했던 청춘들은 UR비준 결사반대 구호와 지긋지긋했던 조문논쟁, 박홍의 주사파 파동으로 기억할 것이다.
필자는 94년에서 가장 중요한 흐름은, 한반도에서 펼쳐진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를 중심으로 기억하고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93년 시작된 북미협상은 수구냉전세력의 방해와 김주석의 서거라는 불운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냈다. 미소냉전 해체 후, 세계사적인 전환기에 조국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커다란 기회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의 황당한 대응으로 우리는 역사적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94년은 김영삼 정권의 민족대결정책, 그리고 여기에 대한 한총련과 민족민주운동진영의 대응을 중심으로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김정권의 대결정책과 전쟁 위기, 카터 방북과 남북정상 회담 합의
1994년 한반도 정세는 극과 극을 달리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수구냉전세력은 3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회담에서 나온 ‘서울 불바다 발언’을 부각시키며 남북대결 국면으로 몰아갔다. 북미간 일괄타결 움직임을 남한 정부가 나서서 발목잡은 것이다. 당시 북-미간에는 북은 NPT에 복귀하고 핵개발을 동결하며, 미국은 북에 원전을 제공하고 새로운 북미관계로 나아가는 ‘일괄타결’로 의견이 모아졌다. 하지만, 수구냉전 세력들은 북의 통미봉남(미국과 통하고 남한을 고립시킨다는 뜻인데, 요즈음 수구언론들은 비슷한 의미로 ‘코리아 패싱’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다)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로 북미간 합의를 방해하고 나섰다.
지난 2018년 남북회담과 북미회담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수구냉전 꼴통들은 남북대결 시대로 되돌려놓으려는 찌질한 짓들을 계속했다. 그런데, 2018년에는 수구냉전세력의 힘이 떨어진 상태라 무시할 수 있었지만, 1994년에는 수구냉전 꼴통들이 집권하고 있었다. 수구언론의 위세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강력했고, 현재 태극기 노인네들은 당시 힘이 넘쳐나던 중장년이었다.
권력을 가진 집단이 꼴통 짓을 했으니, 단순한 오기와 말싸움은 진짜 전쟁으로 이어질 뻔 했다. 94년 6월에는 미국이 북의 핵시설을 폭격하는 D-Day까지 잡아놓아, 우리 땅은 전면전에 휩싸일 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권은 북미관계 개선에 발목만 잡았을 뿐, 정작 미국이 폭격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이를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김정권과 수구냉전세력은 대책없는 꼴통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에게도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한반도에서 전면전 발생 위기를 앞두고, 마지막 협상을 위해 카터 미국 전대통령이 방북했다. 카터는 김일성 주석과 만났고, 김주석이 조건없는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고, 이를 남측에서 받아들이면서 전쟁위기에서 벗어났다. 94년 김영삼 정권의 대결정책과 전쟁위기 관련해서는 할 이야기가 참 많지만, 필자가 쓰고 있는 글의 중심 주제는 당시 한총련의 고민과 실천이기에 짧게 마무리한다. (관련된 기사와 영상자료 첨부하니 참고하길~)
[관련기사] 전쟁 문턱까지 갔던 94년 6월 / 김연철, 한겨레21 750호 (2009년 3월 첫째주)
한반도 전쟁위기 1994~2003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3년 1월 26일 방영
쌀수입 반대 투쟁, 대중적 동력 확보
지난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학생운동 진영은 ‘김영삼 정권은 쌀 수입을 막을 의지도 능력도 없으며, 시기의 문제일 뿐, 수입개방을 할 것이다’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93년 12월 이후 한총련은 쌀 투쟁을 중심으로 투쟁력을 복구해 나갔다. 쌀 투쟁은 기존의 민족민주운동 단체 뿐 아니라, 종교, 사회단체, 농민단체, 시민단체, 일부 관변단체까지 포괄하는 ‘우리농업지키기범국민운동본부’가 조직되어 대중적으로 전개되었다.
쌀 투쟁은 미국의 경제침략과 정권의 반민중성을 동시에 폭로하며, 반미 반김영삼 투쟁을 벌여나가는 핵심 고리였다. 또한, 학우들이나 일반 국민들의 동의와 지지가 높은 투쟁이었다. 한총련은 94년 상반기를 쌀투쟁으로 시작하여 일관되게 밀고 나갔다. 쌀 시장 개방 찬반을 묻는 전국 대학생 총투표, 동맹휴업, 단식농성, 삭발, 혈서, 총궐기 투쟁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싸웠다.
94년 당시 한총련의 대중운동 역량이 어느 정도 였는지, 당시 대학신문 기사를 통해 살펴보자.

“한총련은 94년 3월 29일,30일 ‘UR 4-12 의정서 채택 및 국회비준에 관한 입장을 묻는 한총련 백만학도 총투표(이하 총투표)를 실시했다. 한총련 소속 2백3개 대학 79만1천4백18명 중 1백45개 대학 38만2천6백35명이 투표에 참가(48.34%), 그 중 90.5%에 달하는 34만1천3백26명이 UR의정서채택과 국회비준 반대입장에 표를 던졌다.” (전대신문, 1994-04-12, 1면)

당시 총투표는 비공식적인 모의투표가 아니라, 공식적인 투표로 진행했다. 각 학교별 투표인명부에 따라 한총련에서 제작한 공식 투표용지를 배부하고, 단과대혁별 기표소에서 투표했다. 당시 한총련은 하나의 정치적 사안을 놓고, 같은 날짜에, 동일한 투표용지로, 전국 대학생 38만명이 참여하는 대중사업을 기획하고 집행할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오프라인으로 2일간 전국 대학생 38만명의 설문을 받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면, 어는 정도의 예산과 인력이 소요될까. 이틀간 38만명을 투표에 참가시키려면, 진행요원만 최소 5천명 이상, 기표장도 최소 2천여곳 정도 필요하다. 만약, 민간업체에 외주를 준다면, 대략 수십 억원대의 예산이 들어갈 것이다. 온라인으로 진행한다고 해도, 대학 재학생 여부를 인증하는 비용과, 참여를 독려하는 홍보비용 등으로 꽤 많은 돈이 들어갈 듯 하다. 한총련은 이처럼 대규모 사업들을 돈과 권력이 아니라, 청춘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이뤄냈다.
한총련, ‘김영삼 정권 타도’ ‘미국 반대’ 공식 선언
94년 봄, 쌀 투쟁을 통해 대중적 지지와 활동력을 회복한 한총련은 4월 대의원대회와 5월 출범식을 통해 ‘김영삼 정권 타도’와 ‘미국 반대’를 공식 선언하였다. 당시, ‘정권 타도 선언’은 학생운동 진영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93년 학생운동 진영의 무기력한 모습을 떨쳐내자는 강력한 의지를 담은 구호였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94년 시점에서 ‘김영삼 타도’ 구호는 조금 성급했지만 과감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94년 봄 전쟁위기로 몰아가는 김영삼 정권의 민족대결 책동에 대한 인식과 투쟁은 부족했다. 조선대에서 열린 출범식 후, 광주 도청앞 광장에서 열린 집회의 핵심 구호도, ‘쌀 수입개방 반대’ ‘광주학살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이었다. 그리고, 6월 투쟁의 핵심 목표는 UR협상안 국회비준을 결사저지 하는 것이었다.
물론, 한총련 핵심 활동가들은 94년 당시 한반도 정세를 분석하고 있었지만, 대중투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부족했다.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북미간 핵공방의 본질은 조선의 핵무기가 아니라, 냉전 해체 후 정전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북미관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북미관계와 평화체제를 만드는 것을 수구냉전세력은 방해하고 나섰다. 우리가 94년 6월에 김영삼의 민족대결책동을 반대하는 투쟁을 제대로 했다면, 7월 김주석 서거 이후 벌어진 조문파동과 공안정국에 제대로 대응했을텐데, 조금 아쉽다. ‘김영삼 정권 타도’ 구호는 동의하지만, 왜 타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은 고민과 합의가 부족했던 것 같다.

자주의 시대 그 길에 빛나는 백만의 영광
미국반대 김영삼 타도의 자랑찬 성전에서
통일조국건설로 내달리는 청춘은 승리한다. (94년 제2기 한총련 출범선언문 중)
[뉴스보기] 조선대에서 한총련 전야제 / 1994-05-27 MBC뉴스데스크
[기사보기] 광주 조선대에서 한총련 출범 / 1994-05-28 MBC뉴스데스크
쌀수입 UR협상 국회 비준 저지, 618 홍익대 투쟁
한총련 출범식에서 김영삼 정권 타도를 선언한 후, 남총련은 정권과 한판 붙어보겠다는 의지가 충만했다. 한총련에서는 6월 18일~19일 국회비준 저지를 위한 한총련 총집중, 총궐기 투쟁을 제안했고, 남총련은 적극적으로 결합하기로 했다.
하지만, 6월 초순 정세와 언론보도는 우리 기대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언론보도는 당시 6월에 시작된 월드컵 본선 보도로 가득찼고, 미국발 전쟁위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는 전쟁위기설은 뻥카이고, UR 비준안 강행 처리가 정권의 의도라고 보았다. 어쩌면, 미국의 폭격 준비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반공반북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부딪치기는 부담스러웠고, UR국회비준 저지라는 고리로 반미, 반김영삼 투쟁을 확산시키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한총련 입장에서, 미국의 전쟁 음모와 김영삼 정권의 민족대결책동을 막는 방법은, 반미 반김영삼 대중투쟁을 열심히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은 없었다.
남총련은 월드컵과 한반도 긴장에 모든 언론매체의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UR국회비준 문제를 쟁점으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서울에서 강력하게 투쟁하기로 했다. 여의도에서 열릴 국민대회에 참가하고, 남총련이 선봉에서 국회의사당까지 밀어부치는 투쟁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의도 집회는 허가가 나왔지만, 남총련 상경은 경찰이 막았다. 그래서, 6월17일 밤, 송정역 근처에서 서울로 가는 통일호 열차를 강제로 정차 시킨 후, 단체로 탑승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618 홍익대 투쟁에 대한 경험담은 별도의 글로 정리해 올리겠다)

남총련 홍익대 투쟁 관련 기사 보기. 동아일보 1994-06-18, 27면
후에 듣기로, 미국의 북한 폭격 D-Day가 바로 남총련이 피터지게 싸우고 있던 6월18일 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홍익대에서 싸우던 순간에 미국의 폭격기가 폭탄을 가득 싣고 대기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싸우고 있던 바로 그 시간에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이루어졌고, 미국에서 열린 월드컵 본선에서 한국팀이 스페인과 2:2로 무승부를 이뤘다.
지금 와서 되돌아 보면, 남총련의 618 홍익대 투쟁은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핵심 구호도 정세를 꿰뚫지는 못했다고 본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의 폭력을 뚫고 살아남은 남총련의 투혼은 한총련 백만학도 사이에 두고두고 전설이 되었다. 6월 19일 동아일보, 정상회담 발표와 월드컵 무승부라는 큰 사건이 겹친 날이지만, 사회면 지분의 절반 이상을 남총련이 차지하고 있다. 93년 11월 광주 미문화원 투쟁 때는 3부 장관이 나와서 ‘남총련을 때려잡겠다’고 선포했는데, 94년 6월에는 국무총리가 나와서 ‘모조리 잡아들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94년 상반기 전쟁위기는 남북정상회담 합의로 겨우 넘겼다. 하지만, 뜨거웠던 여름 또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618 홍익대 투쟁과 94년 하반기 이야기는 다음 글로 계속된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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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고사 시험기간 도서관가서 홍대투쟁에 대햐 왜곡된 언론보도에 대해 투쟁의 주내용을 미친듯이 아지하고 다녔던 기억이. . .
그때 남총련동지들 홍대투쟁 이후 부산으로 오신 동지들도 꽤 있었죠
부경총련 부산대에서 집회에 오셨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