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10)
91년5월투쟁, 서울 지역 중심의 패배적인 평가는 버리고, 5월19일 운암대첩을 중심으로 다시 평가해 보자.
91년5월투쟁을 돌아보며, 운암대첩을 경험한 사람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의 평가는 엇갈렸다. 30주년을 맞이하며, 91년5월투쟁에 대한 전면적인 재평가를 제안하며, 나의 기억을 먼저 꺼내 놓는다.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91년 오월투쟁, 87년항쟁에 대한 반혁명을 막아낸 투쟁
나의 기억1 - 강경대, 박승희, 운암대첩, 91년5월투쟁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나의 기억1 - 강경대, 박승희, 운암대첩, 91년5월투쟁
4월 26일 강경대 사망, 그리고 4월 29일 박승희 분신
1991년 당시 나는 전남대학교 신입생이었고, 오월대 진달래 중대 인문대 소대원 이었다.
4월 26일 서울 명지대에서 백골단이 신입생 강경대를 죽였다는 소식을 그 날 저녁에 들었고, 다음날(27일) 아침부터 교내는 술렁거렸다. 곳곳에 대자보가 붙고, 1학생회관 앞에는 강경대 분향소가 만들어졌으며, 총학생회실 에서는 하루 종일 선전 방송이 이어졌다.
4월 27일 오후에 긴급하게 1차 집회가 열렸다. 많은 학우들이 분노하고 있었지만, 당일 집회는 평소 정치집회와 거의 비슷한 숫자의 학우들만 모였다. 대략 500여명. 이날 집회에서 학생회 간부들은 피를 토하듯 연설을 했다. ‘먼저 조직된 우리들이 양손에 동료 친구들을 모아서, 29일 날 다시 모이자. 우리의 벗 경대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
그리고, 4월 29일. 강경대 학우 타살에 대한 소식은 다 알려졌고, 학내 곳곳에 대자보와 플랑이 채워졌지만, 518광장에 모인 학우들의 숫자는 조금 더 늘어난 수준이었다. 대략 800여명. 전남대 학생들이나 시민들 모두 분노하고 있었으나 행동에 나서기는 주저하고 있었다. 광주에서는 89년 조선대 이철규 열사 사인 진상 규명을 위해 처절하게 싸웠으나 별다른 성과를 남기지 못했고, 90년 3당 합당(노태우-김영삼-김종필 야합)으로 광주만 싸워서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패배감도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집회가 진행되는 도중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노태우 처단 미국반대를 외치며 한 학우가 몸에 불을 붙인 것이다. 2학년 박승희. 그 날, 우리 모두는 행동하지 않은 우리들이 2학년 여학생을 분신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모두가 흐느끼고 아파했다. 4월 27일, 29일 집회에 평소보다 더 많은 학우들이 행동에 나섰다면 박승희는 분신하지 않고 같이 싸웠을 것이라는 자괴감이 가장 컸던 것 같다.

그날부터 민족전대의 분노는 폭발했다. 당일부터 모든 수업을 거부하고, 철야농성에 들어갔으며, 집중 집회가 열리면 전남대 대열만 8천명이 넘게 모였다. 다행히 당시 박승희는 전남대 병원으로 옮긴 후, 소생의 가능성이 조금은 있다고 알려졌다. 모두들 우리들의 투쟁으로 박승희가 다시 힘을 내고 소생하기를 기원했다.
5·18 11주년, 경대를 기다리며 17일부터 치열한 싸움
5월에 들어서서 투쟁은 계속 확대되었고, 광주시민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광주는 80년대 중반부터 5월에는 시민과 학생이 모두 모여 금남로에서 싸웠다. 전체 인구 100만 명인 조그만 도시에서 남녀노소 10만 명 이상이 모였다. (생각해 보라. 당시 전두환-노태우 학살 원흉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있는데, 오월을 그냥 보낼 수가 있었겠는가)
가장 집중되는 시기는 5월 17일 전야제와 518 집회. 5월 18일에는 강경대 열사의 광주 도청 앞 노제도 예정되어 있었기에, 광주는 5월 17일 전야제부터 수많은 시민들이 금남로로 집결했다. 5월 17일 오후 대규모 집회 후 다음날 새벽까지 금남로 곳곳에서 전투. 5월 18일 오후 대규모 집회 후 강경대 운구를 기다리며, 도청 앞을 뚫기 위하여 19일 새벽까지 전투. 서울에서 강경대 장례식이 늦어져 다음날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에 새벽 2시쯤 전남대에 모여 휴식 및 대기. 나는 화염병을 베개 삼아 518광장에서 잠들었다.
5월 19일 새벽. 운암동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고속도로 나들목(톨게이트)에서 강경대 열사 운구행렬을 막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운암대첩 – 승희의 죽음으로 길을 뚫다
운암대첩 상황 1 – 해방광주 재현 (5월 19일 정오까지)
91년 5월 19일 운암동에서 싸움을 누구도 시위 또는 집회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집회나 시위는 하나의 목표에 대하여 뜻을 모으고 세를 과시하는 것이지만, 운암대첩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30개 중대 병력에 막힌 곳을 뚫기 위해 모였다.
다음으로, 강경대 운구가 막혀있던 곳은 광주 대중교통으로는 닿기 힘든, 시 외곽 지역에 야산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대략 시내버스가 다니던 종점 운암동 주공아파트에서 2Km정도 떨어진 곳. 하지만, 새벽부터 남총련 학생들과 시민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누구도 뚫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경대의 마지막 길까지 막아서는 노태우 정권을 응징하기 위하여, 이미 2박 3일 싸움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모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운암동 주공아파트. 단지 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운암동 주민 여러분, 학생들이 지금 밥도 안 먹고 싸우고 있답니다. 모두들 나와서 밥이라도 해 줍시다” 곳곳에서 주먹밥과 김밥이 만들어졌고, 시민들이 이불솜과 빈병, 휘발유를 모아왔다. 당시 문화예술회관 공사 중이었는데, 공사장의 합판은 우리의 방패가 되었고, 각종 철제 빔과 파이프들은 시민들의 무기가 되었다.
말 그대로 1980년 해방광주가 눈앞에서 재현된 것이다.
2박 3일간의 싸움으로 지쳐있던 남총련 학우들도 시민들의 응원에 힘을 내기 시작했다. 어머님들이 직접 해 준 주먹밥을 먹고, 어찌 뒤로 물러서겠는가. 오전 내내 밀어붙였지만, 오전 10시쯤부터 경찰병력은 고지 위에 버티고 서서 최루탄과 돌멩이를 쏟아 부었다. 대치상황이 이어지며, 부상자가 계속 늘어났고, 뚫기 힘든 상황이었다.
운암대첩 상황 2 – 대치상황 (5월 19일 정오까지 상황)
경찰 1차 저지선 : 대략 15개 중대 2000 여명.
<서광주 나들목>에서 강경대 운구 진입을 저지. 광주 시내 진입하지 말고, P턴하여 <문화동 나들목>을 통해 망월동 묘역으로 바로 가라고 요구.
경찰 2차 저지선 : 대략 15개 중대 2000 여명.
광주 시내에서 나오는 시민-학생 대열이 강경대 운구와 결합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인구 밀집지가 끝나는 운암동 3거리부터 산능선을 따라(현재 광주문화예술회관은 당시 공사중이었음) 넓게 포진.
운암대첩 상황 3 – 승희 죽음 소식에 저지선을 괴멸시키다
19일 정오까지 열심히 싸웠지만, 저지선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하지만, 1시쯤 박승희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퍼지며 상황은 급변했다. ‘아 승희 열사가 경대가 오는 길을 뚫기 위해 20일간 버티었던 것이구나.’ 잠시 묵념 후, 우리들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독기를 품고 돌격하여, 2차 저지선을 단숨에 괴멸시키고, 광주시민과 강경대 운구대열이 만났다. (대략 페퍼포그 1대, 최루탄 운반 차량 1대 전소. 전경 200 여명 무장해제) 이후, 경찰병력은 전의를 상실하고, 자리를 지키기만 하였다.

운암대첩 상황 4 – 강경대 운구 행렬 우회로를 만들어 시내로
* 오후 1시 30분경, 시민-학생 대열이 2차 저지선을 뚫고 강경대 운구행렬과 만나고, 경찰병력을 포위했으나 운구차량이 시내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확보하지는 못함. 사람들은 쉽게 오고 갈 수 있었으나, 차량이 움직일 수는 없었음.
(2차 저지선을 돌파한 후, 나를 포함한 진달래 중대는 박승희가 잠들어 있는 전남대 병원으로 배치되어, 가드레일을 뜯고 시내로 진입할 때에는 현장에 없었다)
* 오후 5시경, 시민, 학생들이 고속도로 가드레일을 뜯어내고, 배수로를 메운 후, 우회로를 만들어 운구행렬 광주시내로 진입



왜 고속도로를 막았을까?
나는 얼마 전까지도 노태우정권이 왜 고속도로를 막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니, 노정권은 일단 강경대 장례식이 끝나면, 투쟁동력이 내려갈 것으로 보고, 유서대필 조작사건 등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광주시민들의 투쟁을 시내에서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서, 강경대 운구 시내진입을 막은 것이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고속도로까지 그렇게 몰려들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막은 황당한 결정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일단, 시내에서 가져와야 할 전경들의 식사와 최루탄 보급이 끊겼다. 우리는 시민들에게 김밥과 물을 보급받으며 싸웠지만, 전경들은 물한모금 제대로 마실 수 없었다. 민중들이 역포위를 해버리니 30개 중대 병력도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 무리가 되어버렸다.
서울로 비유하면, 남쪽에서 올라오는 운구행렬을 수도권순환고속도로에서 막고, 시내로 들어오지 말고 마석모란공원으로 바로 가라고 강요한 것인데… 광주는 뚫어버렸다. 그리고, 노태우 정권은 공포감에 휩싸여, 당시 노재봉 국무총리와 주요 장관을 사퇴시키고, 박승희 도청 노제를 개방하였으며, 결국은 내각제 포기를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운암대첩 당일 MBC 9시뉴스 보도. 5월19일 당일 톱뉴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어보는 뉴스앵커 아저씨 정이 압권이다.
운암대첩 당일 KBS 9시뉴스 보도. 고속도로에서 벌어지는 초기 공방전이 잘 잡혔다..
운암대쳡_실천문학 1991년08월 / 91년 당시에 발표된 보고 문학
https://drive.google.com/file/d/18K5qulphx2HTnU8AdnrtAZyFp_erxO7E/view?usp=sharing
우리는 그날을 ‘운암대첩’이라 부른다 / 무크지_청년 1991년08월
https://drive.google.com/file/d/1XNKHFbdX4i-olB3XtEzhJkT9V1n_oNCC/view?usp=sharing
민중이 역사의 주인임을 확인한 순간
91년 5월 투쟁을 돌아볼 때, 다른 지역 학우들은 대부분 패배의 쓰린 기억만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운암대첩을 경험해 본 벗들은 승리의 기억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91년 5월 19일 우리는 해방광주가 다시 만들어진 것을 보았고, 민중이 역사의 주인임을 확인했다. 나는 운암대첩을 기억할 때, 가장 먼저 주먹밥과 김밥의 중간 형태인 ‘전투형 김밥’이 떠오른다. 아마, 80년 오월 시민군도 먹었을 그 주먹밥과 김밥. 평생 잊을 수 없는 맛이다.
그리고, 경대를 망월동에 묻은 후, 경대 어머님이 광주에 식당을 내시고 10여년간 운영하셨다. 전남대에서 망월동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했던 [경민회관]. 나를 포함한 전남대 총학생회 일꾼들, 경대 어머님께 고기 많이 얻어 먹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 계속 >
주변에 아직도 91년5월투쟁이 패배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차별로 배포해 주십시오. 다양한 의견 바랍니다.
관련기사
- 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을 소환한다
- 주사파? 친북? 종북? 그래서 어쩌라고…
- 반수구세력 콘크리트, 70년대생 한총련세대(현 40대)
- 한총련 명예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 선도투쟁에서 대중운동으로, 이론에서 실천중심으로
- 분단체제 및 미국에 맞선 대중조직, 범청학련에서 과학생회까지
- 강력한 학생권력, 저항의 공동체, 민중 연대
- 91년 오월투쟁, 87년항쟁에 대한 반혁명을 막아낸 투쟁
- 나의 기억2-운암대첩부터 박승희 장례식, 혁명적 일주일
- 92년, 학생운동의 정점-전총련, 범청학련, 대선투쟁
- 남총련 전투력의 비밀-경찰서 습격, 남대문 돌파 등
- 93년, 흐트러진 전선 복구, 문민의 가면을 벗기다
- 개량적 흐름 속 혁신의 과제, 52표차 아슬아슬했던 총학선거
- 94년 상반기, 쌀수입 반대, 전쟁위기, 정상회담 합의, 618 홍익대 투쟁
- 남총련, 618 홍익대 상경투쟁 보고 - 94년 당시 자료
- 94년 조문파동과 공안정국, 전남대 분향소, 제네바 합의
- 통일운동의 분열, 보안수사대vs한총련, 전남대 총학 선거
- 95년, 학생운동의 중흥기, 전-노 학살자 처벌, 민족사의 대전환기
- 학살자를 법정으로! - 95년 518 특별법 제정 투쟁
- 95년 가을, ‘사람사랑 학생회’의 등장, 사상-조직운동의 위기
- 96년, 노수석과 벗들의 죽음, DMZ 불인정 선언, 계속되는 연행,구속,공안정국
- 연세대항쟁 01. 침묵과 트라우마를 딛고, 통일시대를 여는 힘으로~~
- 연세대항쟁 03, 북한 붕괴 망상 속에 자행된 예비검속 만행
- 연세대항쟁 04, ‘내부의 적’은 존재했나?
- 연세대항쟁 05, 재평가와 명예회복, ‘연세대항쟁동지회’를 만들자
- 연세대항쟁 이후 조직을 복구하며, 97년 복수전을 준비
- 97년, 오직 한총련만 싸웠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졌다
- 90년대를 관통한 두가지 문제의식과 실천
- 90년대 학생운동, 무엇을 남겼나? 성과와 한계
- ‘응답하라, 한총련’ 출판에 뜨거운 반응 - 4일만에 후원금 4백만원 돌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