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11)

5월 20일 새벽, 강경대를 망월동에 묻고, 박승희 장례식이 5월 25일로 잡혔다. 시민항쟁 단계로 진입한 광주는 큰 싸움을 준비했다. 

91년 이후, 한총련의 투쟁 방향을 놓고 토론할 때, 남총련은 항상 낙관적이고 실천 중심적이었다. 남총련 감수성의 원형은 91년 오월 운암대첩에서 박승희 장레식까지 일주간의 혁명적 경험이 깊이 배어있다.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나의 기억2 - 운암대첩부터 박승희 장례식, 혁명적 일주일

 

운암대첩 이후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 

91년 오월투쟁 관련 토론회 발제를 준비하면서, 필자는 5월투쟁의 절정기를 운암대첩부터 박승희 장례식까지로 잡았다. 운암대첩을 통해 노태우 정권이 가진 경찰력은 단결된 민중의 힘을 막을 수 없음을 보여주었고, 시민 학생들은 승리와 자신감으로 투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광주는 운암동에서 투쟁을 통해 일반적인 집회, 시위의 수준을 뛰어넘었고, 시민항쟁 수준으로 진입했다. 자신감이 차오른 광주의 시민 학생들은 노태우와 끝장을 보자는 결의가 차올랐다. 5월 20일 새벽, 강경대를 망월동에 묻고, 박승희 장례식이 5월 25일로 잡혔다. 민족전대와 광주시민 모두 큰 싸움을 준비했다.

강경대 장례식 당시, 광주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전대신문 칼럼 소개한다. [경대 아버지의 웃음] 1991년 5월21일, 전대신문 12면

그림 파일 확대하여, 칼럼 내용 확인해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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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 앞 노제가 무엇이길래?

광주의 도청 앞 광장. (지금은 도청이 무안으로 옮겼지만, 편의상 도청이라 함. 현재는 ‘5.18 민주광장’ 이라고 부르고 있음) 80년 오월 전두환 군부의 집단발포에 수많은 시민이 피를 흘린 후, 시민군이 총을 들고 탈환한 곳. 공수부대를 몰아낸 후 해방광주 기간 동안 시민들의 집회가 이어지고, 최후 항전이 벌어진 곳. 그래서, 해마다 오월이면 모두가 모여 먼저 가신 님들의 뜻을 되새기던 곳. 87년 6월항쟁의 격전지며 이한열 열사 노제가 열렸던 곳. 그러하기에, 광주시민 가슴가슴에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87년 6월항쟁 후, 88년, 89년 오월에는 도청 앞 집회를 열 수 있었으나, 90년 3당합당 이후 도청 앞 광장은 열리지 않았다. 항상 도청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금남로 1가 광주은행 사거리에서 엄청난 병력과 최루탄에 막혀 분노를 삼킬 수 밖에 없었다.

91년 당시, 운암대첩 승리 후 사기가 오른 우리는 이번에는 우리 몸이 부서지더라도 도청을 뚫기로 결의했다. 노정권 입장에서는 도청 앞을 막는다는 것이 경찰력으로 사태를 통제할 수 있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사실상, 도청 앞길을 뚫느냐의 문제는 ‘노태우 정권과 싸워 이기느냐’, ‘노정권에게 항복을 받아내느냐의 의미로 커져 버렸다. 

 

무기와 만장 – 대학 전체가 작업장

5월 20일부터 오월대는 무기 만들기, 선전국은 만장과 걸개그림, 플랭카드 만들기에 돌입했다. 

모든 학생들이 빈병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고, 거리의 가로수 철근 지지대나 수도파이프 등을 모았다. 우리 진달래 중대에 할당된 꽃병 물량은 3000개, 철근은 500개를 더 모아야 했다. (대략, 전남대만 꽃병 1만개, 철근 3000개를 추가로 준비했다)

전남대 교정 곳곳에서 빈병 박스를 쌓아놓고 꽃병을 제작했다. 시내 곳곳을 돌아 철근을 모아오면, 검은색 락카를 칠하고 건조시켰다. 시내 전체에서 검은색 천이 동났다는 말이 들릴 정도로 검은 색과 흰색 천을 모아와 교정 곳곳을 물들였고, 플랑카드와 만장 수천장이 만들어졌다.

날마다 이어지던 집회도 필요 없었다. 모두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했다. 아침마다 동네 주변에서 빈병을 모아 왔고, 천을 재단하고 만장을 만드는 것을 도왔다. 모두들 슬픔과 분노를 넘어서 엄숙한 의식을 치르듯 큰 싸움을 준비했다.

노태우 정권은 도청 앞 집회는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전국의 병력이 광주로 집결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이러한 소식에 우리의 의지는 더 커졌다. 한달 여 간의 싸움이 지루했고. 대치상태를 깨버릴 순간이 오기를 기대했다.

새로 만든 진달래 중대 깃발, [결사선언 진달래] 기치는 91년 박승희 장례식 준비하며 만든 것이다.
새로 만든 진달래 중대 깃발, [결사선언 진달래] 기치는 91년 박승희 장례식 준비하며 만든 것이다.

출정 전야. 진달래 중대 전술회의

5월 24일 밤. 진달래 중대 전체 전술회의가 열렸다. 이날 진달래 중대 깃발이 새로 만들어졌다.  원래 쓰던 주황색 깃발은 일주일 전 운암대첩 때 지랄탄 불꽃에 그을리고 타버려 다시 만든 것. ‘결사선언 진달래’는 이날 만들어진 문구다.

평소 우리 중대는 1~2학년 중심으로 대략 50여명 정도 모였는데, 이날은 예비역 대원들까지 150여명 가까이 모였다. 새로 만든 깃발을 배경으로 중대장 신고산 동지가 단상에 올라 발제를 시작됐다.

5월 25일 도청 앞 광장 주변에 배치될 병력 규모는 5천. 대략 반경 500미터의 좁은 공간 건물 숲에 5천명을 배치한다면, 조그만 틈도 없는 수준. (금남로가 광주의 중심가지만, 왕복 6차선. 서울로 치면 조그만 이면도로)

이전 서울에서 있었던 강경대 장례식 저지 경찰 배치를 보았을 때, 경찰들은 차량저지 장애물을 철사나 쇠사슬로 묶어 1차 저지선을 만들고, 2차 저지선은 쓰레기차 등으로 막은 후, 후면에서 페퍼포그 등으로 최루탄을 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에, 우리측은 방패조와 절단조가 방독면을 쓰고 맨앞에 나가 절단기로 철사와 쇠사슬을 끊어 장애물을 제거한 후, 쓰레기차는 밧줄 등으로 끌어당기거나 차량 또는 중장비를 동원하여 제거한다. (방패와 방독면은 운암대첩 때 빼앗은 200 여개가 준비되어 있었고 절단기도 구매했다고 한다)

장애물 제거 후, 전경과 대치하면 화염병과 철근으로 뒤로 물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열 쪽으로 끌어당겨 하나씩 무장해제 시킨다.

어둠이 깔릴 때까지 도청 앞을 뚫지 못하면… 오월대를 비롯한 일부 대오는 외곽으로 빠져, 시청, 구청, 세무서, 경찰서, 파출소 등 모든 공공기관을 점거한다는 지침이 전달됐다.

서울에서 강경대 장례식을 막았던 경찰 바리케이트. 사진 저작권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서울에서 강경대 장례식을 막았던 경찰 바리케이트. 사진 저작권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운암대첩 후 전남대 1학생회관 앞에 전시한 전리품(?) 사진 저작권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운암대첩 후 전남대 1학생회관 앞에 전시한 전리품(?) 사진 저작권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후, 질문과 토론이 이어졌다.

‘공공기관 점거라면, 도청 주변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것인가? 아님 말 그대로 민중봉기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그것은 둘 다 열려있다. 내일 현장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도청 앞 노제를 사수할 것이다.’ 말 그대로 우리 앞길을 막을 경우,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는 말이었다.

전술회의가 끝난 후, 쉽게 잠들지 못했다. 1주일전 운암대첩에서 일반적인 집회-시위 수준은 이미 넘겨버린 상황에서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것이기에… 그리고, 새로운 역사에 나의 피를 바칠 것을 결심하며 짧은 생을 돌아보았던 것 같다.

아마, 노태우 정권의 앞잡이들도 잠 못 이루는 밤이었을 것이다.

 

압도적 민중의 힘으로 도청 길을 뚫다

5월 25일 아침부터 수많은 시민들이 전남대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노태우 정권은 장례행렬을 감히 막지 못했고, 도청 앞 노제는 민중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광주에서 20만 시민이 공권력을 몰아내고 승리를 자축할 때, 서울에서 독기 어린 권력의 앞잡이들은 김귀정을 살해했다.

압도적 민중의 힘으로 일궈낸 작은 승리와 정권의 만행이 교차하던 날이었다.

하성흡 작, 박승희 장례행렬도
하성흡 작, 박승희 장례행렬도

몇 년이 지난 후, 그날 도청 앞길을 뚫기 위해 특공조도 편성됐다고 들었다. (주로 승희가 활동했던 1학생회관 죽창 중대에서 지원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건물 숲 곳곳에 신나통과 꽃병을 숨겨놓고, 병력을 흩어놓기로 하는 역할에 자원했던 벗들도 있었다. 경찰 병력 한가운데서 사실상 퇴로가 없이 투신까지 각오했던 벗들이다.

역사에 가정은 필요 없다지만, 노정권이 박승희 노제를 막았다면, 그날 광주에는 경찰이든 학생이든 엄청난 희생이 따르고, 정권도 뒤집어졌을 것이다.

 

관련 기사 - 박승희 열사의 장례식 / 당시 광주전남대책위 간부의 회고

http://www.gwangjuin.com/news/articleView.html?idxno=67777

 

남총련의 실천적이고 낙관적인 정서가 만들어진 원형

이제와 돌아보면, 91년5월투쟁 이후, 학생운동 진영 내에서 남총련과 다른 지역의 감수성이 달랐던 것은 91년5월투쟁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광주는 트라우마 속에서도 승리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지역은 패배와 아픔 뿐이었으니…  서울에서 한번이라도 우리 힘으로 시청 앞 광장을 뚫었다면, 패배와 아픔의 기억을 상쇄시켜 주었을 텐데.

90년대 한총련의 투쟁 방향을 놓고 토론할 때, 남총련은 항상 낙관적이고 실천중심적이었다. 남총련 감수성의 원형은 91년 오월 운암대첩에서 박승희 장레식까지 일주간의 혁명적 경험이 깊이 배어있다.

96년 연대항쟁 후, 97년 한총련이 외쳤던 <김영삼 정권 타도 전민항쟁>의 원형은 운암대첩과 박승희 장례식이라고 본다. 하지만, 96-97년 한총련은 처절한 패배로 끝났다.

한총련이 꺾이고 20년이 지난 후,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촛불을 들었다. 그날을 위해 20년을 준비하여, 박승희 장례식처럼 압도적 민중의 힘으로 승리한 것이라고 난 주장한다. 

< 계속 >
주변에 아직도 91년5월투쟁이 패배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차별로 배포해 주십시오. 다양한 의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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