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29)

이제 3부의 마지막인 1997년 이다. 앞글에서도 밝혔다시피 97년에 필자는 학생운동 현장에 없었고, 취재와 자료도 부족하다. 하지만, 한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97년의 기억과 기록은 전면 재검토하고 다시 쓰여져야 한다. 특히, 비정규직과 금융자본주의 양극화가 판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97년 역사를 다시 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97년, 오직 한총련만 싸웠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졌다

 

97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1997년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해다. 정치권과 언론 및 학계에서는 ‘87년 체제’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필자는 오히려 ‘97년 체제’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본다. 사실상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은 97년에 만들어졌다. 

87년항쟁 이후 10여년간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민족민주운동은 97년 IMF체제에 대응하지 못하여 쪼그라들었다. 90년대 중반 이후 민족민주운동에 팽배했던 개량주의와 합법노선은 민중들 가슴속 변혁의 꿈을 꺾어버렸다. 개량주의와 합법노선에 투항했던 당시 운동 지도부 또는 재야 원로(?)들은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싸웠던 한총련 청춘들을 고립시키고 시대에 뒤떨어진 ‘주사파 꼴통’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워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다음으로, DJP연합에 의한 수평적 정권교체는 우리 사회의 정치 사회 지배 시스템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 98년 이후 거리에서 공식적으로 최루탄은 사라졌다. 군부독재와 김영삼 처럼 억압과 폭력을 통한 지배가 아니라, 사회적 압력과 자본의 힘으로 굴복시켰다. 그전까지 노동자들의 파업현장에 식칼테러와 구사대로 무식하게(?) 밀어붙였던 악덕 자본가들은 97년 이후 손해배상 소송과 아웃소싱으로 대응했다. 

아 참, 이명박근혜 정권을 불러들인 주역 뉴라이트도 97년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북총련을 장악한 후 한총련 타도(?) 운동을 열심히 벌였던 그룹과 남총련 내에 숨어있다가 수면위로 부상했던 청년공동체 그룹은 모두 김영환 일당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들은 97년 한총련을 장악하기 위한 공작이 실패한 후, 뉴라이트로 정체성을 명확히 했다. 뉴라이트와 수구기독교가 결합하여 정권을 탈취(?)하는 모델은 97년 11월 전남대학교 총학 선거에서 처음 실행되었고, 반미구국의 철옹성 전남대 자주총학은 무너졌다.

이렇듯,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이 모두 변화했던 97년을 놓고, 민주화운동 세대라는 학자, 언론인, 재야원로들은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승리의 역사’라고 기억하는 듯 하다. ‘IMF라는 일시적 국난을 겪었지만, 금 모으기 등으로 극복했다’ 정도의 기억과 기록만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97년 류재을과 김준배가 목숨을 바치고, 수백명의 청춘이 감옥에 갇히며 치열하게 싸웠던 한총련은 기억과 기록에서 지워졌다.

나는 86세대와 그 잘난 진보(?) 학자들에게 묻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금융자본주의(카지노자본주의)로 비정규직과 양극화를 불러들인 97년이 승리의 역사인가? 노동악법 날치기, 한보 부도, 김현철 국정농단, 류재을 사망 등 폭정에 맞서 김영삼 정권 타도를 선언한  한총련이 과연 시대에 뒤떨어진 '주사파 꼴통' 이었나?

이제 97년의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 노동악법 날치기로 표면화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공세 앞에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맞섰으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민주노총 합법화 수준에서 무기력하게 타협했다. 오직 한총련 청춘들만 김영삼 정권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끝까지 싸웠다. 이석, 이종권 치사 사건 등 불행한 사고로 인하여 한총련의 총궐기는 실패하였으나, 한총련의 투혼은 재평가 되어야 한다. 

만약 그대가 97년을 승리의 역사라고 기억하고, 1987년만 주구장창 소환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민주화 꼰대’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분단체제를 해체하는 것과 함께 미국이 주도하는 카지노자본주의와 양극화를 극복해야 하며, 그 힘은 97년 한총련의 투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김영삼 조기 퇴진’ 구호가 그렇게 과격했나? 

지난 글에서 밝혔다시피, 한총련 청춘들은 연세대항쟁 이후 김영삼 정권에게 복수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조직을 복구하였다. 그리고, 96년에서 9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에 맞서 악법 철폐, 김영삼 타도 투쟁에 나섰다. 일반적으로 각 대학에서는 겨울방학 기간 동안 신입생 맞이 사업 및 조직정비 기간이라 투쟁에 나서기 쉽지 않았지만, 한총련 청춘들은 노동자들과 함께 싸웠다.

한총련은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날치기에 맞서 곧바로 투쟁에 돌입했다

민중들의 투쟁에 깜짝 놀란 김영삼 정권이 국회에서 노동법을 다시 고치기로 하면서,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잦아들었다. 하지만, 연이어 터진 한보 비리, 대통령 아들 김현철의 국정농단 폭로가 이어지며, 김영삼 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민중들의 분노는 터져나왔다. 3월 20일 조선대 2학년 류재을이 시위 도중 진압 경찰과 격돌하는 와중에 사망하였다. 김영삼 정권 측에서는 경찰측의 책임을 회피하며, 부검으로 사인을 밝히자는 말만 계속하였다. 96년 일방적인 부검 발표로 노수석의 죽음을 묻어버린지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경찰측의 부검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경찰측에서는 압수수색 영장을 받고 강제부검을 공언하였기에, 류재을 사인 진상 규명 투쟁은 길고 치열해졌다.

1997-04-08 전대신문 1170호 1면. 중앙도서관에 걸린 대형 현수막을 주목하길. '부활 류재을 타도 김영삼'
1997-04-08 전대신문 1170호 1면. 중앙도서관에 걸린 대형 현수막을 주목하길. '부활 류재을 타도 김영삼'

그리고, 4월 4일부터 6일까지 전남대에서 열린 한총련 대의원대회에서 전남대 총학생회장 강위원을 한총련 의장으로 선출하고, ‘모든 계기의 투쟁을 반김영삼 전선으로 모아내어, 전민항쟁으로 김영삼 정권을 조기에 타도하겠다’는 투쟁방침을 결정했다. (당시 한총련 총노선 해설기사와 강위원 의장 인터뷰 기사 전문을 첨부한다)

‘전민항쟁’, ‘조기타도’, 이런 단어가 나오니, 너무 과격하게 느껴진다고? 왜 이러시나. 새삼스럽게... 우리는 지난 2016년에서 2017년까지 촛불들고 ‘전민항쟁’을 벌였고, 박근혜 정권을 조기에 타도하지 않았나? 97년에는 백골단과 최루탄이 난무하던 환경이라 어쩔 수 없이 촛불 대신 꽃병을 든 것이고, 민중들의 분노와 의지를 보여준 것은 동일하다. 

더군다나, 97년 봄 당시까지는 선거를 통하여 정권을 바꾼 적이 한번도 없었다. 여기에, 우리는 수구냉전세력이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97년 대선 당시 신한국당의 차떼기, 북풍 공작, 총풍 사건 등 어마어마한 사건들이 있었다. 그리고, 박근혜는 군대를 동원하여 촛불항쟁을 짓밟으려 계획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97년 당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수구냉전세력이 딴 생각 못하도록 민중의 뜻을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필자는 97년 상황에서 ‘김영삼 타도’ 깃발을 들었던 한총련의 노선이 전혀 과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연세대항쟁 이후 분노의 정서가 너무 강하여, 한총련만 너무 조급하게 앞서나간 것이 아쉬울 뿐이다.

 

97년 총파업, 민주노총의 타협주의는 역사적 과오 

나는 97년 당시 노동자들이 ‘노동악법 철폐’라는 정치적 구호를 들고 조직적으로 투쟁하는 모습을 보며 감동했었다. 대학생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자 대열을 보며, 조국에 바친 나의 청춘이 밑거름이 되어 노동자들이 역사의 주인으로 나서고 있다는 보람도 느꼈다.

하지만, 당시 총파업을 통해 상급단체 복수노조 허용(민주노총 합법화를 의미)만 얻어냈을 뿐, 국회에서 여야합의로 개정된 노동법은 파견근로제, 변형시간근로제, 2년후 정리해고제 도입 등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를 막아내지 못했다. 

필자는 97년을 돌아볼 때마다, 민주노총은 왜 끝까지 싸우지 않고, 국회로 공을 넘겨버렸는지 참 아쉬웠다. 겨울이 지나고 개강을 하면, 한총련이 더 큰 힘으로 싸울 수 있었을텐데…

애도하지 마라 조직하라, 김창우 저, 2020, 구입을 강추하며, 도서관에서 빌려서라도 읽어보시라.

그런데, 2020년 3월 출판된 [애도하지 마라 조직하라]는 책을 보며, 나의 아쉬움과 궁금증은 풀렸다. 그리고, 97년 한총련이 왜 그리 외롭게 싸웠는지 알게 되었다. 97년 총파업 당시 민주노총의 합법노선과 타협은 역사적 과오이다. 나는 86세대들 사이에서 틈만 나면 소환되어 욕 먹는 ‘80년 심재철의 서울역 회군’ 만큼이나, 97년 민주노총의 총파업 철회는 비판받아야 한다고 본다. 결국, 합법화와 의회주의에 매몰된 당시 민주노총과 전국연합 상층의 타협주의는 한총련 청춘들을 고립시키고 사지로 밀어넣었다.

노동법과 맞바꾼 민주노총의 합법화, 외면받는 민주노총

 

저자에 따르면 민주노총은 창립 당시 사회개혁,개량주의를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민주노총의 합법화를 최대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합법정당을 건설하고 정치세력화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저자는 그 과정에서 민주노총이 합법화 자체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였고, 이후 합법주의가 민주노총의 활동 전반에 규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많은 문제와 혼란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는 민주노총의 역사에서 단 한 번의 총파업으로 기록될 만한 1996~1997년의 노동법개정투쟁(노개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당시 민주노총의 자료들을 살펴보면, 민주노총은 조합원들이 총파업을 하는 동안에도 합법화를 위해 정부와의 물밑교섭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한국노총이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기 위해 나름의 투쟁을 준비하던 시기에도 민주노총은 정부와 경영계가 양보할 가능성에 매달리며 총파업을 유보하거나 철회하는 등 끊임없이 동요했다.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에서 내놓은 노동법 개정안이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었어도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개위에서 탈퇴를 하면 합법화도 물 건너 갈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노개위 탈퇴를 주장하는 조합원들의 요구를 사실상 묵살했다. 그 결과 노동법은 민주노총의 합법화를 제외하곤 모든 것이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개정되었다.  (애도하지 마라 조직하라, 김창우 저, 2020, 회화나무 출판,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

오직 한총련만 싸웠다 

류재을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97년 봄은 잔인했다. 민주노총은 파업의 깃발을 내렸지만, 한총련 청춘들은 투쟁의 깃발을 더 높이 들었다. 한보비리와 김현철 국정농단 등 김영삼 정권의 부패와 무능을 규탄하다가 쓰러진 류재을을 보며 김영삼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겠다고 결의했다.

어떤 이들은 ‘97년 한총련 집행부를 강경 주사파가 장악하여, 한총련 혁신 요구를 무시하고 무모한 투쟁을 강행했다’고 이야기한다. 아직도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정신 똑바로 차리시라. 당시, 한총련 혁신을 이야기했던 자들 지금 대부분 뉴라이트에 있다. 스무살 후배의 죽음을 앞에 두고, 투쟁을 뒤로 미루고 조직 정비와 국민정당 창당을 이야기하는 것이 정상인가? 

김영삼 정권은 탈냉전 후 새로운 한반도 질서로 나아가는 흐름을 94년 조문파동과 96년 연세대 무력진압을 통해 남북대결 상태로 몰아갔다. 97년에는 김정권의 부패와 무능이 폭발하며, 한보부도를 시작으로 경제위기 상황으로 진입했다. 김정권은 경제위기를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며, 비정규직과 정리해고제 도입을 강행했고, 민주노총 지도부는 정권과 타협하였다. 97년 IMF 체제와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싸운 것은 오직 한총련 뿐이었다.         

스무살 재을이 / 류재을열사 20주기 추모영상

97년 5월16일부터 23일까지 일주일간 조선대와 광주 시내에서 처절하게 펼쳐진 류재을 장례 투쟁은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조선대에서 장례식 후 시내 노제를 경찰이 막아서자, 한총련 벗들은 봉쇄망을 뚫기 위해 온몸으로 싸웠다. 한총련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조선대로 총집중 할 것을 호소했고, 일주일 넘는 시간 동안 밤낮으로 싸웠다. 조선대학교 건물 옥상에 대형 스피커를 설치한 후, 강위원 의장이 마이크를 잡고 투쟁을 호소했다. 아직도 그 때 가슴을 파고 들었던 연설이 귓가에 쟁쟁하다. 한총련 청춘들의 일주일간 헌신적인 투쟁은 광주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김영삼 정권은 결국 조선대 봉쇄를 풀 수 밖에 없었다. 류재을의 상여는 일주일만에 조선대를 빠져나와 금남로에서 노제를 지내고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묻혔다.

1997-05-27 전대신문 1175호 1면
1997-05-27 전대신문 1175호 1면

류재을 장례 투쟁은 96년 연세대항쟁 이후 패배감과 두려움에 발목 잡혀있던 학생운동 조직의 기풍을 바꾸었다. 머리로만 투쟁하고 가슴으로 투쟁하지 못했던 무기력함을 승리의 확신으로 바꾸어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다음으로, 한총련의 총집중 투쟁은 스스로 퇴로를 끊고, 김영삼 정권을 타도할 때까지 전진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류재을 장례식을 마친 후, 전국 각지로 돌아간 벗들은 조선대에서 일주일간의 투쟁과 승리의 소식을 전하며, 5월 30일 한총련 출범식이 열리는 서울 한양대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석, 이종권 치사 사건은 불행한 사고 

류재을을 망월동에 묻고, 한총련은 서울로 모였다. 한총련은 경찰력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모든 행사를 평화적으로 진행하겠다고 밝혔으나, 김영삼 정권은 전국 각지 청년들이 서울로 모이는 것부터 폭력으로 막았다. 한총련 청춘들은 최루탄과 백골단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정권과 한총련 사이의 끊임없는 격돌은 폭력의 악순환 속에 이석, 이종권 치사 사건이라는 불행한 사고로 이어졌다.

1997-06-05 전대신문 1176호 8면
1997-06-05 전대신문 1176호 8면

97년 봄의 류재을 장례식과 한총련 출범식은 별도로 자세한 기록과 평가가 이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이번에는 간략히 마무리하고, 취재와 자료수집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97년 당시에 투쟁에 참여했던 벗들은 계속 쫓겨다니고 감옥에 갇히면서, 97년 한총련 출범식과 이석, 이종권 치사사건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제 제대로 된 기록과 평가를 시작하자.

필자는 97년 한총련 투쟁을 돌아보면,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겹쳐진다.

소마(주윤발 분)는 송자호(적룡 분)를 함정에 끌어들인 배신자를 처단하기 위해 혈혈단신 대만으로 건너간다. 江湖道義現在已經不存在了.(강호의 도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풍림각으로 홀로 들어가 배신자들을 처단하지만, 불의의 총상을 입는다. 홍콩의 조직은 배신자인 아성(이자웅 분, 뉴라이트 같은 놈)이 차지하고, 소마는 굴욕의 세월을 보내는데… 

97년 한총련을 돌아보면, 복잡한 사회과학적 분석보다, 정서적으로는 홍콩느와르의 서사와 닮아있다. 영웅본색과 다른 점은, 다행히도 한총련은 뉴라이트 배신자에게 조직을 뺏기지는 않았다.

강위원 한총련 의장은 이석 치사사건 후, 수차례에 걸쳐 4천만 국민과 유가족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며 도의적 책임을 다했고, 이석 치사사건의 최종 책임자로 감옥에서 형사상 책임을 다했다. 강위원 의장은 폭행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재판정에서 아무런 핑계를 대지 않고 모든 책임을 졌다. 정의찬 남총련 의장도 이종권 씨를 폭행하는데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비난과 책임을 묵묵히 감내했다. 

이석, 이종권 치사 사건은 불행한 사고였다. 그리고,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실관계는 확인하자. 당시 수구언론과 검찰은 한총련과 남총련이 계획적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살인혐의를 씌웠지만, 당시 법원의 판단은 고의성이 없는 ‘폭행치사’ 였다. 우리의 벗들은 수구냉전세력들처럼 구질구질한 변명을 하지 않고, 감옥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강위원, 정의찬 의장은 사면-복권되어 공식적으로 전과기록은 삭제되었다는 사실도 밝힌다.

 

신념의 강자, 김준배 

이석, 이종권 치사 사건 이후, 김영삼 정권은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한총련 대의원들이 탈퇴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모두 구속시킨다는 무지막지한 탄압을 자행했다. 한총련 대의원의 자격은 각 개인의 희망과는 별개로, 각 대학의 단과대 회장이나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될 때 얻는 것이다. 한총련 대의원 자격은 학우들의 선출로 뽑힌 것이기 때문에, 한총련 탈퇴도 개인의 의사가 아닌 학우들 전체의 의견을 묻고 이에 따르는 것이 맞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은, 국민의 직접투표로 선출된 국회의원의 자격을 헌법재판소에서 빼앗은 지난 통합진보당 사태처럼, 억지논리로 밀어붙였다. 

그 해 여름, 수많은 청춘들이 김정권의 사냥감이 되어 쫓겨다니거나 감옥에 갇혔다. 당시에는 보안수사대 뿐 아니라, 경찰과 검찰의 모든 수사인력이 총동원되었다(심지어 기무사도 군대 내 학생운동 관련자들을 색출했다). 한총련 핵심간부들과 대의원들은 당시 경찰들에게 ‘로또’ 였다. 2계급 특진, 3계급 특진이 남발되었고, 포상금도 수천만원 붙었다. 당시, 경찰들은 포상금은 쳐다보지도 않고, 특진에 매달렸다. 10년 넘게 걸리는 두계급 특진을 한방에 받는다면, 수억원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다는 공무원들이 가득했다. 97년 한총련 대탄압 당시, 경찰들은 눈에 불을 켜고 수배자들의 가족, 친지, 선배, 후배 등 주변사람들을 쫓아다니며 협박과 회유를 이어갔다. (돌아보면, 참으로 눈물나는 사연들이 많다. 이 모든 일들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김준배 열사 추모 영상

김정권의 모든 공권력이 한총련 청춘들을 사냥하던 와중에, 추석이었던 97년 9월 16일 새벽, 한총련 투쟁국장 김준배가 13층 아파트에서 경찰의 습격을 피하다가 사망했다. 후에 밝혀진 바로는 김준배 투쟁국장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주변 인물 회유 공작이 계속되었고, 사망 당일 경찰들은 케이블을 잡고 벽을 내려와 1층으로 뛰어내린 김준배를 그자리에서 집단 폭행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증언이 있다. 당시 경찰측은 추락사로 발표하고 수사를 종결했지만, 김준배 투쟁국장의 죽음은 아직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의문사’다.

4년 만에 드러난 김준배 사망 사건의 진실 / 시사저널, 2001-09-13, 고제규,차형석 기자

너무 오래된 기사라, 인터넷에서 내려갈 수도 있을 것 같아, PDF 파일로 첨부한다.

97년 김영삼 정권과 한총련이 격돌하는 와중에 류재을, 이석, 이종권, 김준배 네 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이석, 이종권을 죽음에 이르게 한 한총련 청춘들은 역사의 죄인으로 감옥에서 책임을 졌다. 하지만, 류재을, 김준배를 죽음에 이르게 한 김영삼 정권은 그 누구도 처벌받거나 책임지지 않았다.

추석날 새벽, 한총련을 지키기 위해, 13층 높이에서 몸을 던진 김준배의 투혼은 한총련 벗들 사이에서 ‘신념의 강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있다.

 

현실투쟁에서 역사투쟁으로  

97년 한총련을 돌아보며 안타까움이 앞서는 것은, 96년 연세대항쟁 이후 엄혹한 탄압을 뚫고 한총련 조직을 복구하고, 류재을과 함께하는 일주일간의 투쟁으로 학생운동 대오의 자신감을 채워, 국민들과 함께 큰 싸움을 준비했는데, 불행한 사고로 인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김영삼 타도 깃발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총련이 산산이 부서진 후, IMF와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은 별다른 저항없이 밀고들어와 민중의 등골을 뽑아먹고 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동학농민군이 우금치 마루의 왜놈들과 미제 기관총을 넘지 못했던 비통함과 맞닿아있다. 

97년 한총련은 대중적인 지지와 조직 기반을 상실하고, 이를 복구하지 못했다. 새롭게 펼쳐진 IMF체제와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정치사회적 변화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90년대 후반에는 김영환 일당과의 사상투쟁으로 불신의 골이 깊어 이념적 탄력성도 극히 떨어진 상태였다.)

97년 이후 한총련을 보면 애잔한 느낌을 준다. 마치 1953년 정전협정 이후 현실적인 승리를 포기하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정당함을 증명하고자 했던 지리산 빨치산을 보는 듯 하다. (조정래 작가는 소설 ‘태백산맥’에서 이를 두고 ‘역사투쟁’이라 불렀다.)  한총련은 97년 이적단체로 규정된 후, 수많은 활동가들을 감옥으로 보내며, 반미와 자주통일 노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역사투쟁에 돌입했다고 본다.

(필자의 이러한 마무리에 98년 이후 한총련 투쟁을 평가절하한다며 돌 던지고 싶은 후배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이번 글에서 86세대 비판했던 것처럼, 후배들의 비판 언제나 환영한다. 필자가 98년 이후 학생운동의 흐름은 몰라서 그런 것이니, 너그럽게 이해하고, 98년 이후 학생운동사도 언능 정리해주길 바란다)

3부는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한총련 명예회복을 위해 벗들의 많은 관심과 공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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