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침략 미일결탁의 역사 ⑩

일본의 조선정부에 대한 <내정간섭>

일본의 경복궁 침탈

청일전쟁에서 물심양면으로 일본을 도운 미국

일본의 조선정부에 대한 <내정간섭>

일본은 조선 정부가 일본에 굴복하는 것을 청나라 세력을 쫓아내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보았다. 조선이 일본에 청군 철병을 요청하는 형식이야말로 청나라를 칠 수 있는 가장 합법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제 일본은 조선 정부를 친일 예속 정부로 만드는 것에 매달리며 단독<내정개혁>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이 단독 <내정개혁안>은 청일 공동 <내정개혁안>과 달리, 조선 정부의 정치개혁을 비롯하여 외교. 재정, 재판, 병제 개혁과 서울-부산, 서울-인천의 전신선, 철도개설 등을 규정하였다. 이 내정개혁은 조선 정부의 자주권을 말살하고 이권강탈을 목적으로 한 일본의 대조선 예속화안이었다.

그러나 고종이 조선 문제 해결의 선결 조건은 일본군이 하루속히 철병하는 것이라며 <내정개혁안>을 거부하자 오토리는 <개혁안 조사위원>을 임명하여 <내정개혁안>을 토의해보자고 협박하여 6월 8일부터 남산 기슭의 노인정에서 3회에 걸쳐 조·일 담판이 개최되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자주적으로 내정개혁을 추진할 의사를 견지하고 있었다. 오토리가 <내정개혁>을 강요하기 이전부터 이미 국가적 부패와 폐정을 인정하고 내정개혁 논의가 진행 중이었다. 농민군과의 <전주 화의>에서 밝힌 바와 같이 폐정개혁 없이는 나라를 도저히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만, 자주적인 개혁으로 조선내정에 대한 일본의 간섭을 막아보려는 의지도 작용했다. 조선은 일본의 <내정개혁> 거절을 공식 결정한다. 결국 오토리는 외무대신 무쯔에게 ‘이제는 일·청 사이에 충돌을 일으켜서 파탄시킨 후가 아니면 조선의 내정개혁을 실행할 가망이 없다’라고 보고한다.

이제 일본은 <내정개혁>을 추진시키며 동시에 청나라와의 전쟁 도발 명분을 얻기 위한 방책으로 ‘조선 정부를 전복하고 친일 정권을 만드는 방법’을 추진한다. 노인정 회담이 결렬상태에 있던 6월 10일경 일본 무쯔는 오토리에게 “일·청 충돌을 촉구하기 위하여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 무슨 구실을 써더라도 실제적인 운동을 시작하라”고 강경 대응을 명령하였다. 오토리는 6월 17일과 18일, 조선 정부에 아래와 같은 최후통첩을 보내며 회답을 6월 20일 (양력 7월 22일) 기한으로 정했다.

첫째, 서울-부산 간 군용전신 가설을 일본정부 스스로 착수하게 할 것

둘째, 조선은 제물포 조약에 의하여 속히 일본군을 위해 규모있는 병영을 건설할 것

셋째, 아산에 주둔한 청병은 속이 철군시킬 것

넷째, <조중수륙무역장정 등> 청나라 간의 모든 조약을 파기할 것

일본의 경복궁 침탈

오토리가 조선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낸 6월 19일 일본 <대본영>은 조선 강점 일본군이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킬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육군은 아산에 있는 청나라군에 대한 일방적인 무력을 개시할 준비에 달라붙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대본영>의 청나라에 대한 전쟁 도발이 조선 정부에서 아무런 요청도 없는 상태에서 벌어지면 <합법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군부와 협상을 벌인다. 이때 그들의 협상의 내용은 당장 조선왕궁을 강점하여 국왕을 틀어쥐고 민가 일당의 정부를 전복한 후 대원군을 내세워 친일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 정부가 만들어지자마자 곧바로 일본에게 청군 철병요청서를 제출하게 만들면 청·일전쟁 도발을 <합법화>할 수 있고,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와 노동력 조달을 조선 정부의 명령으로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토리의 최후통첩기한인 6월 20일이 지나도록 조선의 답변이 없자. 일본은 6월 20일 밤부터 <한성 전보총국>을 공격하여 청나라와의 전신연락을 차단하고 군용전신을 가설하기 시작한다. 다음 날 새벽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를 전복하는 전대미문의 야만적인 폭거를 감행하였다. 6월 21일 새벽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 오시마 여단장과 보병 제11, 21연대를 주력으로 하고 기병 중대, 야전포 중대, 공병 중대의 총 8,000명에 달하는 방대한 무력이 서울 시내와 경복궁을 침략하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은 두 개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한 부대는 남대문으로부터 경복궁 서쪽의 건춘문 앞에 대기 시키고, 다른 한 부대는 서대문으로부터 침입하여 경복궁 동쪽의 영추문을 파괴하고, 궁내로 밀고 들어가 건춘문을 열어 건춘문에서 기다리던 부대와 합세하였다. 당시 경복궁 안에 있던 500여 명의 조선 병사들이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일본 침략군은 이들을 학살하고 모든 관문을 봉쇄하여 경복궁을 포위 강점한다. 일본군은 경복궁 깊은 곳에 있는 함화당까지 쳐들어가 고종을 감금하고 조선 병사들의 무장해제를 강요했다.

▲ 경복궁을 침탈하는 일본군
▲ 경복궁을 침탈하는 일본군

일본군의 또 한 부대는 서울 시내의 각 군영들을 모조리 포위 점령하여 조선 군대를 완전히 무장 해제하였으며 조금이라도 반일적 요소가 있어 보이는 정부 관리들의 집을 포위하고 가택 연금시켰다. 조선 정부는 마비 상태에 빠졌고 민가 정권은 붕괴하였다.

일본은 경복궁 점령 다음 날인 6월 22일 대원군을 협박하여 새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 정부에는 친일인사들도 없지 않았으나 김홍집, 정범조, 조병세를 비롯한 혁신관료들이 대거 진출한다. 본고에서는 김홍집 등 혁신관리가 일본이 청나라와의 전쟁에 집중해 있는 사이 느슨해진 공간을 이용해 자주적인 근대개혁(갑오개혁)을 실시하는 과정은 생략한다.

일본은 왕궁 강점 이틀 후인 6월 23일 이른 새벽 선전포고도 없이 불의에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함선을 공격하는 한편, 외무독판 조병직을 협박하여 ‘조·청 간 체결하였던 3개의 무역 장정을 폐기하고 아산에 있는 청군을 철거시켜 줄 것을 일본에 의뢰했다는 사실’을 청나라에게 정식 통고하게 만들었다. 6월 27일 일본은 아산 성환 전투에서 청군을 격파하였다.

청일전쟁에서 물심양면으로 일본을 도운 미국

당시 청나라는 군사력에서 그리 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북양대신 이홍장이 건립한 북양함대는 청일전쟁 직전, 78척의 함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배수량을 모두 합치면 8만 3,900톤으로 세계 8위의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다. 청-프랑스 전쟁에서 남양함대가 거의 전멸한 후 이홍장은 자기 실권을 늘릴 겸 북양함대에 엄청난 투자를 해 강력한 군함들을 보유하였다. 일본이 북양함대를 자체의 힘만으로 격파하는 것은 무리였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세계가 놀랐지만, 일본의 힘만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미국이 거대 군함으로 돕지 않았다면 실제 청일전쟁의 주요 해전에서 일본의 승리는 어려웠다. 미국은 1894년 8~9월 사이에 1,500~3,000톤급 군함들을 일본군에 넘기고, 10월에는 또 다시 1만톤급 군함 6척을 준 것을 비롯하여 전쟁 기간 내내 막대한 무기와 총포탄 및 군수물자를 주어 군력이 쇠약한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일본은 평양성 전투를 계기로 청나라 군대를 압록강 이북으로 완전히 몰아냈으며, 연이어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침입하였다. 일본의 군사 행동 범위가 급속히 확대되자, 청나라에 세력을 뻗치던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의 간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데 큰 우려를 느낀 미국은 시급히 방지대책을 고민하게 된다.

미국은 중재자로 둔갑하여 청나라가 스스로 조선에 대한 지배를 포기할 것을 독촉하는 한편 일본에게 “유럽의 어떤 강국이 강압적인 간섭으로 일본 측에 불리하게 전쟁을 종결짓게 할지도 모른다”라고 하면서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청일 두 나라의 명예를 다 같이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중재자로 나설 결심을 일본 측에 제기하여 일본의 걱정거리를 덜어주었다.

▲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장면
▲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장면

<시모노세키 조약 장면>

결국 미·일간의 은밀한 공모 결탁이 이루어진 속에서 일본은 1895년 3월 23일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에서 청나라로부터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차지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대만과 요동반도 등 많은 령토와 막대한 배상금을 강탈해냈다. 또 미국도 일본의 조선 침략의 가능성을 확고히 해주는 대가로 아시아 침략에서 서양 열강들보다 유리한 조건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저들의 독점적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전제를 마련한 것은 미·일간의 공모 결탁이 낳은 침략의 산물이었다.<계속>

신냉전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한미일 군사협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얼마 전 프놈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프놈펜 성명은 한미일 군사협력을 사실상 군사동맹수준으로 격상시킨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19세기 때부터 한반도 침략을 위해 결탁해왔다. 서세동점의 구한말 시대, 냉전이 시작되던 시대 등 국제질서와 아시아 질서 변동기 때마다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와 아시아 침략과 지배를 위해 결탁했으며 그 결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결국 한미일 군사협력과 군사동맹은 미일 침략 세력에게 침략의 문을 더 크게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 침략을 위한 미일 결탁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 한미일이 추진하는 군사동맹의 본질과 성격, 그 목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막는 투쟁을 조직하는 데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이에 본지는 김이경 남북역사교류협회 상임이사가 작성한 소중한 원고를 연재한다. 연재는 다음과 같은 순서도 게재될 것이다.<편집자주>

조선의 대일 교린 외교와 19세기 일본의 위기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1

메이지 정권의 정한 외교와 조일 국교단절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2

조선 침략을 위한 미국의 국가정책 - 미국의 조선침략 1

186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조선침략 - 미국의 조선침략 2

1871년 조미 전쟁(신미양요) - 미국의 조선침략 3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은 미일의 조선 침략이다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1

음융한 계책으로 조미통상조약 맺은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2

조선침략을 둘러싸고 본격화되는 미일의 공모결탁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3

청일전쟁을 준비하는 미일의 공모결탁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4

일본의 청일전쟁 도발과 미국의 전폭적 지원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5

관련기사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