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침략 미일결탁의 역사 ⑦
미국은 <조·일통상조약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이제는 조·미통상조약을 체결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였다. 1876년 주일미국 대리공사 스티븐스는 미 국무장관 에바쓰에게 ‘극동에서 세력균형을 이루기 위하여 조선이 영국과 프랑스 및 기타 외국과 조약을 맺게 하여야 하며 일본 정부가 이를 준비하도록 촉구해야 한다.’라고 보고했다.
1878년 4월 미 상원 서전트 위원장의 결의안에는 더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일본은 지금 홀로 조선 동해를 지키고 있다. 미국이 하루빨리 조선에서 개입력을 높여 일본의 입지를 적극적으로 키우고, 무장을 강화해 주면,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 일본을 강화하는 것은 러시아의 동해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절실하다. 러시아가 조선을 먹을 의도가 있다는 것은 얼어붙은 아무르 지역과 동해의 부동항을 연관해서 보면 분명해진다. 만일 러시아가 조선을 지배하게 되면 일본도 빼앗길 우려가 있다.”
이는 일본이 미국을 대리하여 조선의 지배권을 확충하도록 사주하기 위해서는 미국도 조선에 대한 개입력을 합법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뜻이다.
1878년 미 하원 결의안 채택 이후 미국은 곧바로 움직인다. 일본 주재 미국공사 빙햄에게 ‘일본 외무성이 조선에 보내는 『조미조약체결 권고 편지』를 받아 놓을 것’을 지시하고 해군 제독 슈펠트를 조·미 통상교섭 담당자로 일본으로 보낸다. 부산에 있는 일본영사가 이 권고 편지를 동래부사에게 전달하려고 했지만, 그는 편지를 거절하며 ‘서양 오랑캐가 조선에서 싸우다가 격멸된 것을 알면서도 일본이 수호조약을 알선하는 것은 조·일교린 우호를 해치는 처사’라는 경고까지 보낸다.
이에 부산까지 왔던 슈펠트는 일본으로 돌아가 외무대신 이노우에에게 직접 주선을 의뢰한다. 이노우에는 조선 예조판서에게 미국과의 국교를 권하는 <화친신서>를 보낸다. ‘지금 조선을 위하여 말하노니, 미국의 요청을 들으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 피해가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두 달 뒤 일본에 온 수신사 김홍집으로부터 ‘조선은 미국의 제안을 거절한다.’라는 답변과 함께 열어보지도 않은 <화친신서>를 돌려받는다. 일본을 앞세워 조선을 개항시키려는 미국의 의도는 실패하고 만다.
청나라를 통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일본을 통한 조선과의 교섭은 어렵다고 판단한 슈펠트는 청나라를 이용하는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1880년 7월 주일 청나라 영사 하여장을 만난다. 슈펠트는 러시아가 조선과 청나라을 침략하려고 해군을 동부에 집결시키고 있다고 거짓 정보를 흘린다. 청나라는 해군을 강화하고, 조선은 유럽 나라와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 대한 방어력을 높여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극동 개발에 집중하고 있어, 전쟁을 준비할 단계가 아니었다. 슈펠트는 청나라를 ≪조·미 조약≫의 중재자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기행각을 벌인 셈이다. 이 무렵, 청의 실권자 이홍장은 열강에 온갖 특혜를 내어준 대가로 군함을 사들이고 있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오키나와까지 병합되자, 일본 견제심리가 매우 높아졌다. 또 러시아 함대가 동해를 돌아 청나라 연해까지 진출하는 것을 보면서 긴장한다. 이홍장은 자신의 주도로 조선과 미국 등 열강의 통상교류를 유도하면, 열강 사이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동북 진출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미국의 청나라를 통한 조미조약 알선계획은 이홍장의 계책과 일치하였다.
고종은 이홍장의 야심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조미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이홍장의 권고를 믿고, 교섭의 주선을 일임한다. 이는 조선의 운명을 청·미 양국의 먹잇감으로 내어주는 망국적 행위였다. 이홍장과 슈펠트는 다섯 차례에 걸쳐 ≪조·미조약문≫을 만들며 조선을 먹잇감으로 한 각자의 이익을 협상하고 거래한다.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 설치된 천막에서 슈펠트와, 신헌을 전권 대신으로 한 협상단이 전문 14개 조로 된 <조·미수호통상조규>에 도장을 찍는다. 여기에는 청나라 마건충도 참가한다. 조선은 ‘쌀의 수출을 인천항에 국한한다.’라는 내용을 첨가했을 뿐, 청나라와 미국의 조율된 문서에 도장을 찍어주는 치욕적인 외교사였다.

조미통상조약의 침략성
<조미조약>은 미국에는 일방적인 권리만이, 조선에는 굴욕적인 의무만이 가득 찬 불평등 조약이었다. 조약은 우선 조선이 미국 자본주의 상품시장으로 전락하는 시초를 열어놓았다. <조약 6조>에는 미국의 침략적 목적에 부합되게 “미국 상인이 도착한 조선 항구에서 거주할 수 있으며 주택을 세내고 땅을 조차하며 집을 지을 수 있으며 모든 토산물 및 생산품과 금지 규정이 따로 없는 물품은 모두 매매할 수 있으며 원료 및 가공품도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자유로운 교역>이란 경제가 앞선 나라들이 후진국에 상품을 들이밀어 그 나라를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기 위한 상투적인 수법이다. 이러한 교역이 당시 조선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넣는 것은 명백하다. 또 <조약 4조과 14조>에서는 조선 정부의 국가권력 행사를 제약할 수 있는 권리 즉 치외법권과 일방적인 최혜국 대우 등을 규정하였다.
<조미 조약>은 미국의 중국 침략 거점을 마련할 가능성을 열어주는 침략적인 조약이었다. <조약 3조>는 “미국 배가 조선의 근해에서 만약 사나운 바람을 만났거나 통상항구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식량, 석탄, 등이 떨어졌을 때, 아무 곳에나 정박하여 사나운 바람을 피하고 식량을 사며 배를 수리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조난한 배를 구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조선은 관례적으로 난파당한 미국 선박에 대하여 구조 활동을 해왔다. 그런데도 굳이 이 조항을 넣은 것은 인도주의나, 기항문제가 아니라, 미군 해군에게 조선 연해에서의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여 주고, 대륙침략 기지를 확보할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었다.
<조약 4조>에서 조선 정부의 치외법권을 강요하면서 “만약 조선이 이후에 법률 및 심의 방법을 개정하여 미국이 자기 나라의 법률 및 심의 방법과 그것이 서로 부합된다고 인정할 때에는 즉시로 미국 관리가 조선에서 사건을 심의하던 권한을 철회하고 이후로는 조선 경내의 미국 사람들을 지방 관리에게 넘겨 관할케 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마치 일정한 시기에 치외법권을 철회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선의 법률과 재판질서가 미국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요한 것이었으며 나아가, 치외법권을 철회할 정도로 개혁이 진행되었는가를 판정하고 결론할 권리는 오직 미국만이 갖는다는 규정이었다. 이처럼 <조미 조약>은 미국의 교활성, 음흉성으로 일관된 조약이었다.
<조미조약>은 서양 열강이 조선 정부에 강요한 첫 불평등 조약으로서 유럽 열강들의 조선 침략의 시초를 열어놓았다. 1882년 이후 유럽 열강의 조선 침략의 명분을 마련해 주었으며 유럽 열강과의 조약의 기틀을 규제하였다. 이후 청나라의 개입 밑에 유럽 열강이 조선과 체결한 모든 조약은 <조미 조약>과 유사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조미통상조약 체결 후 미국의 조선 수탈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조선경제 수탈은 여기서는 생략하고,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미국의 조선경제 수탈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미국은 1883년 인천에 <타운센드 상회>를 비롯한 회사들을 세우고 막대한 이윤을 남겼으며 조선 정부의 물자거래 창구를 독점하였다. 1892년 이후에는 자금을 선대하는 방식으로 농민들로부터 헐값으로 약탈하여 인천항으로 실어나르는 약탈무역을 진행하였다. <타운센트 상회>는 조선 상인들을 계약위반으로 걸어 자주 분쟁을 일으켰다.
1892년 4월 이 회사가 제출한 한 해의 부채액이 1885∽1894년의 10년간 조선 상인들이 일본 상인에게 걸머진 미청산 부채액의 50%를 초과하는 거액이었다. 미국이 조선사람을 대상으로 얼마나 가혹한 경제적 착취를 감행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1883년 <쟈덴마제슨 상회>는 인천-상해 항로설정권, <미국무역회사>는 울릉도 목재채벌권, 1884년 <에디슨상회>는 왕궁 전등가설권을 독점했다. 또 1885년 화약공장 건설권, 조선연해 진주채취권, 원산 해저전선가설권 등을 강탈하였다.
미국의 조선 수탈에 대해서 유명한 내용 한 가지를 더 짚고 넘어가자. 1895년 미국은 조선에서 가장 금 매장량이 풍부한 <운산 금광>을 차지했다. 금이 하도 많이 쏟아져 나와 놀란 사람들이 금을 만져보려 하자, 미국인이 ‘no touch’라고 외쳤는데, 그때부터 횡재를 노다지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광산의 채굴권이 미국으로 넘어가자 이미 이곳에서 종사하던 채굴업자들이 저항했으나 끝내 밀려나고 말았다. 미국은 처음에 <운산 금광>의 채굴 기한을 25년으로 약속했다. 조건은 주식의 4분의 1을 조선 궁내부(왕실)가 소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금이 기대 이상으로 쏟아져 나오자 마음을 바꾸어 궁내부 소유 주식을 10만 달러에 사고, 대가로 세금을 해마다 이만 오천 원을 냈다.
그러다가 1900년 세금 만이천오백 달러를 내고 계약 기간을 15년 더 연장했다. 여기서 생산된 금은 일본에 팔아넘겼다. 1902년 연간 백오십만 원의 이익이 발생했는데 1901년 조선 정부의 예산이 육백만 원인 것에 비하면 얼마나 큰 이권이었는지 알 수 있다. 미국은 선광석 일 톤 당 칠백오십 달러의 이익을 냈는데 조선 노동자들에게 준 임금은 고작 오십 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1903년부터 배당이 시작되었는데, 만약 고종의 지분 양도가 없었으면 첫 해에만 배당금 십삼만삼천 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운산 광산>은 조선이 일제에게 강점된 뒤에도 줄곧 미국의 소유였다가, 1939년 미·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본에 팔백만 달러에 양도된다.<계속>
신냉전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한미일 군사협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얼마 전 프놈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프놈펜 성명은 한미일 군사협력을 사실상 군사동맹수준으로 격상시킨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19세기 때부터 한반도 침략을 위해 결탁해왔다. 서세동점의 구한말 시대, 냉전이 시작되던 시대 등 국제질서와 아시아 질서 변동기 때마다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와 아시아 침략과 지배를 위해 결탁했으며 그 결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결국 한미일 군사협력과 군사동맹은 미일 침략 세력에게 침략의 문을 더 크게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 침략을 위한 미일 결탁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 한미일이 추진하는 군사동맹의 본질과 성격, 그 목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막는 투쟁을 조직하는 데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이에 본지는 김이경 남북역사교류협회 상임이사가 작성한 소중한 원고를 연재한다. 연재는 다음과 같은 순서도 게재될 것이다.<편집자주>
조선의 대일 교린 외교와 19세기 일본의 위기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1
메이지 정권의 정한 외교와 조일 국교단절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2
조선 침략을 위한 미국의 국가정책 - 미국의 조선침략 1
186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조선침략 - 미국의 조선침략 2
1871년 조미 전쟁(신미양요) - 미국의 조선침략 3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은 미일의 조선 침략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1
음융한 계책으로 조미통상조약 맺은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2
갑오농민전쟁부터 청일전쟁까지의 미국의 역할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3
러일전쟁 전후 일본의 조선강점 후원한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