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침략 미일결탁의 역사 ⑤
포함외교의 협박(셔먼호 사건)과 공포(남연군 묘 도굴)로 조선을 개항시키려던 노력이 실패하자, 미국은 1871년 신미양요 사건을 일으킨다. 80여 문의 포를 장착한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군인을 출동하여 전면적으로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미국은 이를 ‘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라고 부른다.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뜻이다.
미국의 조선 침공 준비
남연군묘 도굴 실패 직후, 1868년 8월 미국은 무력으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첫 작업을 시작한다. 청 주재 미국공사, 일본 주재 미국공사, 청나라 주둔 미국 사령관 로완 제독이 모여 미 국무장관에게 ‘조선 개항을 위한 무장간섭 건의안’을 제출한다. 조선에 대한 무력 개입이 불가피한데, 로완 제독의 병력으로는 부족하므로 미국 해군 차원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그들은 건의안에서 『동아시아 연안의 중심에 위치, 외국 선박들이 길게 뻗은 해안선을 통해 오고 가며… 조선은 미국 상품의 훌륭한 시장일 뿐 아니라 중국과의 무역에도 상당히 유리… 태평양 상업의 경로이며… 러시아 영토가 인접… 다량의 석탄이 생산될 것이며, 해운에 필요한 물자를 희망봉을 우회해 운반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했다. 조선을 아시아 침략의 경제, 군사적 기지로 만드는 효과에 대해 강조한 내용이다.
이 건의안에 따라 1869년 《콜로라도》호, 《알래스카》호, 《베니치아》호, 《팔래스》호, 《모노캐시》호가 미국 아시아함대에 편입되어 청나라에서 조선 침략 준비에 들어간다. 그 다섯 척의 군함은 당시 미국이 파견할 수 있는 최대 숫자의 함대였다. 일본에게는 조선에 대한 자료와 길잡이 제공을 요구하며 나가사키와 요코하마를 물자보급, 함대 수리와 정탐기지로 이용하기로 하였다. 또 미국은 1869년 말 로우를 청나라 주재 미국공사로 임명하고 조선 침략의 전권을 주며 조선 침략계획을 하달하였다.
- 국무성은 조약체결을 목적으로 조선과 담판 전권을 위임한다.
- 조약의 원칙적 목표로 1854년 가나가와, 1858년 에도에서 체결된 조약을 따를 것.
- 원정은 1871년에 할 것.
- 일체 경비는 런던은행과 바링그 형제 상회에서 인수할 것.
미국은 무력침공에 앞서 청나라 정부를 통하여 조선 정부에 최후통첩을 전달하였다. 내용은 “1854년 일본에서 미국 선원이 1명 죽은 것을 계기로 페리 함대가 일본을 굴복시킨 사실을 상기시키며, 《셔먼》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2〜3개월 내에 대표를 파견한다”는 통지였다.
이를 통해 미국이 치략할 의도를 알게 된 조선은 회답을 보냈다. “《셔먼》호가 수장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학대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외국 배가 조난하게 되면 필요한 물품을 내주고, 순풍이 불 때를 기다려 돌려보내거나… 육로로 호송해주기 때문에 따로 협정이 필요 없다… 우리나라는 쌀과 천은 넉넉지 못하여, 다른 나라와 유통하여… 고갈시킨다면 조그마한 강토는 위기에 빠질 것”이라며 통상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면서 “다시 함부로 멸시, 학대한다면, 방어하고 소멸해 버릴 것”이라며 침략 시 정면 대응 의지도 밝혔다.

이에 미국은 나가사키에서 침략 준비를 끝냈다. 로우는 1871년 3월 미국무성에 ‘동방정부와 백성에게 관대해진다면 정책상의 오류가 될 것이다’라고 큰소리까지 쳤다. 1871년 3월 27일 미국 함대는 ‘서울로!’라는 깃발을 달고 조선으로 향하였다.
좌절된 미국의 침략 전쟁 “이보다 장렬한 군대는 없었다”
1871년 4월 3일! 아산만 풍도 앞에 미군 함대가 나타났다. 7일과 8일 연흥도, 작약도 부근을 측량하고, 9일이 되자 미군은 함대가 들어온 이유를 묻는 남양 부사의 편지에 협박으로 임한다. ‘우리는 미국 배인데, 전권대사가 조선국 사이에 협의하기 위하여 왔으니 만족스러운 처리를 볼 때까지 이 해안 일대에 정박할 것이다.’ 다음날 조선 정부는 통사 3명을 전권위원으로 보낸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미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작약도 주변에서 전투준비를 시작했다. 13일 조선 정부가 3품 관리 등을 전권의원으로 보냈지만, 미군은 서기관 대리를 보내어 조선 대표의 관직이 낮고, 위임장이 없다며 담판을 거절했다. 첫날부터 ‘화목하게 지내려고 왔다’던 온 미군의 침략적 본성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14일 한강 진입이 가능한 4척의 함정이 강화해협에 대한 <측량>을 핑계로 강으로 들어왔다. 동원된 병력은 전체의 절반인 650명이었다. 그들은 먼저 조선 군대의 포사격이 시작될 것을 기대하면서 강을 따라 서서히 거슬러 올라왔다. 전투 시작 구실을 마련하려는 행동이었다. 손돌목은 중요한 요새지였다. 조선은 병인양요(1866년) 이후 이곳을 중시하여 군사를 늘이고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조선 선박도 통행증이 없으면 통과시키지 않았다. 그러한 요새지에 미국 함선이 나타나자 광성진, 덕진진, 덕포진의 수비병들은 일제히 포사격을 시작했다. 불의에 타격을 받은 《모노캐시》호 등이 침수되기 시작하자 미군은 황급히 후퇴하였다.
이날 조선에서는 강화도 방어를 위한 긴급조치를 내렸다. 어재연을 군사 책임자로 임명하고, 각 군영에서 군사와 무기, 식량 등을 강화도로 보냈다. 17일 대원군은 로우에게 ‘손돌목 전투에서 우리 군대가 벌인 투쟁은 정당하다. 협상할 필요 없으니 돌아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력침략을 작심하고 들어온 미군은 20일 ‘3〜4일 이내에 협상의 확답이 없으면 우리 마음대로 하겠다’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미군은 손돌목에서 파손된 배들을 수리하면서 본국으로부터 전쟁을 최종 승인받았다. 《콜로라도》호, 《베니치아》호, 《알래스카》호 3척은 한강을 봉쇄하고 《모노캐시》호, 《팔라스》호 등 소함정과 20척의 단정으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큰 함선의 함포들을 해체하여 소 함정에 설치하여 화력을 강화하였다. 4월 23일 미군은 강화도 공격을 개시하였다. 2시간 이상의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히 파괴하고 상륙을 감행하는 과정에 대해 로우는 ‘제2차 아편전쟁의 대고 포대 점령보다 더 큰 전투였다’라고 하였다. 24일 아침 미군 한 부대는 덕진 포대를 점령하고, 함포사격의 엄호를 받으며 안개를 이용해 산발을 타고 진격하는 사이, 다른 한 부대는 광성진 서남쪽을 공격하였다. 3면에서 쏘아대는 포탄에 조선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조선의 항전의지는 대단했다. 어재연의 지휘 밑에 광성진 70여 명은 몸이 새카맣게 타버렸거나, 포탄에 맞아 산산조각이 난 동료의 시신을 보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버텼다. 포격이 끝나자 살벌한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조선 군사들은 쓰러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미군 흙을 집어 미군의 얼굴에 뿌리며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많은 전투를 치러온 미국이지만 낙후한 무기를 들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 결사적으로 맞서는 적은 처음 보았다. 로우는 이 장면을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군사는 다시 찾아볼 수 없다’라고 회고하였다. 광성진 전투에서 조선군은 거의 모두 전사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자결하거나 바다로 투신했다. 조선군의 헌신적 투쟁은 미군에게 공포를 주었다. 미군은 망연자실했다. 포탄 몇 개면 항복할 것으로 예상하고, 느슨하게 가져왔던 무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 초지진에서 후퇴했던 첨사 이임이 미군을 기습한다. 이때부터 미군에게 한성을 공격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미군은 25일 새벽, 작약도로 철수했다.

27일 조선 부평부의 항의와 물러가라는 공문이 왔지만, 미군은 아직도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저번 사건은 귀국의 잘못으로 생겨난 것’이라며, ‘우리의 함포는 원거리 사격을 할 수 있으며 모두 명중된다.…’는 위협편지를 고종에게 보내 달라고 하였으나 부평부 도호부사는 수신조차 거부했다. 끝까지 항전 의지를 과시한 것이다. 5월 1일 로우는 『화친』을 하자며 다시 국왕에게 편지를 전달하려 했으나 다시 거절당하자 미군은 5월 16일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18년 전인 1853년! 불과 4척의 전함과 300명의 병력을 이끈 페리에게 별다른 저항도 없이 항복한 일본의 굴욕적 자세와는 극명히 대조되는 모습이다.<계속>
신냉전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한미일 군사협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얼마 전 프놈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프놈펜 성명은 한미일 군사협력을 사실상 군사동맹수준으로 격상시킨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19세기 때부터 한반도 침략을 위해 결탁해왔다. 서세동점의 구한말 시대, 냉전이 시작되던 시대 등 국제질서와 아시아 질서 변동기 때마다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와 아시아 침략과 지배를 위해 결탁했으며 그 결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결국 한미일 군사협력과 군사동맹은 미일 침략 세력에게 침략의 문을 더 크게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 침략을 위한 미일 결탁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 한미일이 추진하는 군사동맹의 본질과 성격, 그 목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막는 투쟁을 조직하는 데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이에 본지는 김이경 남북역사교류협회 상임이사가 작성한 소중한 원고를 연재한다. 연재는 다음과 같은 순서도 게재될 것이다.<편집자주>
조선의 대일 교린 외교와 19세기 일본의 위기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1
메이지 정권의 정한 외교와 조일 국교단절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2
조선 침략을 위한 미국의 국가정책 - 미국의 조선침략 1
186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조선침략 - 미국의 조선침략 2
1871년 조미 전쟁(신미양요) - 미국의 조선침략 3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은 미일의 조선 침략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1
음융한 계책으로 조미통상조약 맺은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2
갑오농민전쟁부터 청일전쟁까지의 미국의 역할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3
러일전쟁 전후 일본의 조선강점 후원한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