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침략 미일결탁의 역사 ⑫(최종)
시베리아 횡단철도
만주에서의 국제적 긴장 고조
<가쓰라–태프트 조약>의 내용
<가쓰라–태프트 조약>의 성격
<가쓰라-태프트 조약>의 불법성
연재를 마치며
일본의 조선 강점은 일본 단독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일본은 1867년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했다. 미국 등 서양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으로 수탈당하는 상황속에서 메이지 정권의 선택은 군국주의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 자체적으로 군국주의로 갈 수 있는 최소한의 정치·경제적 기반도 없었던 일본은 미국의 아시아 침략에 적극적인 선봉장 역할을 하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아시아 제국주의 세력의 일원으로 부각하게 된다. 일본의 조선 강점은 미국과 영국이 러시아의 만주 진출을 막아준 일본에 던져준 일종의 상금이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할 수밖에 없었던 열강들 이해관계의 충돌과 그 과정에서 그들 사이에 일본의 조선강점이 인정되는 과정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서 본 연재를 마감하려 한다. 당시의 세계 제국주의 두 우두머리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내세워 러시아를 공격하는 러일전쟁은 <제0차 세계대전>이라고 부를 만큼 세계 제국주의의 판도를 가르는 첨예한 전쟁이었다.
그 후 12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도 그때와 비슷하다. 신냉전의 구도를 만들어, 몰락해 가면서도 자국 중심의 세계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 미국에 빌붙어 전쟁을 도발하지 않고서 미래의 전망을 열 수 없는 일본의 행보는 동북아시아를 세계대전의 앞마당으로 쓸어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형국이다. 많은 분이 한미일 동맹을 반대하고 심각하게 우려하면서도 설마 전쟁까지 가기야 하겠냐며 자위하지만, 전쟁은 국가 간 이해의 대립이 외교와 대화로서 풀리지 않을 경우,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1900년대 초반 러시아와 미국, 일본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한 치도 양보할 수 없었다. 지금도 미·일 동맹의 폭력적 패권 앞에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우리 한반도! 우리 민족이 평화를 지키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그런 문제의식으로 다시 1900년 초반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시베리아 횡단철도
지금이야 미국의 패권에 영국과 일본이 영합하는 형국이지만, 1900년대 초기 제국주의 패권 국가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영국)>이었다. 영국이 제국주의 패권국가로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강력한 해군력이었다. 그런데 영국 해군의 해상봉쇄가 먹히지 않는 국가가 몇 개 존재했는데 미국이 대표적인 국가였다. 영국은 카리브에 대한 주도권을 포기하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의 정책을 인정하며 연대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미국 이외에도 영국의 해군력이 미치지 않는 또 하나의 나라가 바로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대륙에 ‘철도’라는 자기만의 항로를 보유하고 있었고, 덕분에 대영제국 해군이 간섭할 수 없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성되면 사실상 거의 모든 물류를 철도로 운송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철도 끝에 아시아와 태평양으로 향하는 항로까지 연결되면 시너지 효과가 엄청나게 커져 영국이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부르는 영국과 러시아의 대결인데, 사실상 세계 패권을 유지하려는 영국의 위협인식에 대한 표현이었다.
1859년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계획이 처음 발표되는 순간부터 서양 열강은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에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으며, 그 후 30년이 지난 1891년부터 철도 착공이 이루어지고 1902년 블라디보스톡까지의 철도가 개통되면서 만주의 지배권을 둘러싼 영국·미국·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은 사실상 초읽기에 들어간 셈이었다. 본고에서는 러일전쟁에 관한 영국의 지대한 역할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만주에서의 국제적 긴장 고조
3국 간섭으로 일본이 강점한 요동 반도를 내놓게 한 러시아는 청나라와의 협상 끝에 1898년 5월 자신들이 요동 반도를 타고 앉았으며 1901년 의화단 항쟁 진압 후에는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철수하지 않은 채, 만주를 거의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1902년 4월 청나라와 <만주 반환에 관한 러·청 조약>을 결성했지만, 만주를 둘러싼 국제적 긴장이 강화되자, 철군은 하지 않은 체, 1903년 4월부터 러시아의 만주 점령을 위한 더 많은 편의를 청나라에 요구하게 된다. 여순항은 아예 러시아의 군사기지가 되어 버렸다.
또 조선에서 갈취한 <압록강 두만강 유역 살림 채벌권>을 핑계로 1903년 용암포에 포대를 구축했으며, 단동에도 군사시설을 설치하고 단동과 용암포 사이에 군용통신설을 설치했다. 요양에는 16만의 러시아 군대가, 또 여순항 언덕에는 콘크리트 포대와 보루를 쌓고 러시아군 4만 7천 명이 상주했다.
청일전쟁 이후 이미 러시아와의 전쟁을 염두에 준비하던 일본도 러시아의 만주침략에 뒤질세라, 청과 통상조약을 개정하여 일본 외양 선박의 <내륙하천 항해권>을 강탈하고, 장사, 성도에 이어 압록강 입구까지 개항을 요구하였으며 영일동맹 체결로 얻은 영국 차관으로 경부선 철도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러시아의 3국 간섭으로 요동을 빼앗겼던 1895년부터 절치부심하며 러시아 침략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1895년 말 <군비 확장 10개년 계획>을 세워, 6개의 육군 사단을 13개 사단으로 늘이고, 병력을 평시 15만 전시 50만으로 확대하였다. 해군 함선의 경우 39척에 불과했으나 1902년까지 106척을 건조하였다. 육군 병기공장의 무기 생산능력이 10년 사이에 6.7배로 늘어났으며 해군 병기공장은 11.4배로 증가하였다. 1904년 러시아의 군비 확장 계획이 발표되자 일본은 함선을 132척 (25만 4681톤)으로 증설하였다.
만주에서 세력권을 넓히려던 미국도 러시아의 만주 진출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부터 미국은 러시아를 만주에서 밀어내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미국은 조선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일본을 러일전쟁으로 내몰며 만주에서 미국의 지위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미극동정책사>를 보면 ‘러시아의 만주점령으로 생긴 오랜 분쟁으로 미국의 동정은 일본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러시아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미국의 만주침략 만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이 러시아의 속국이 되고 일본의 항구가 러시아에 조차될 것이며 미국의 필리핀 지배가 위협받을 것으로 보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만주에 있는 러시아 세력을 약화시키려면 일본을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내몰고 그렇게 된다면 조선은 일본의 통치하에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미국은 고종의 환궁 이후 조선에서 강화되는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각방으로 책동하였으며 러시아를 치려는 일본의 전쟁 준비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은 일본에 호의적일 것>이라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의 전쟁으로 부추겼으며 독일과 프랑스에게 러시아 편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기도 했다. 미국은 러일전쟁을 준비하는 시기와 전쟁 시기에 막대한 양의 차관과 무기, 군수 기가재를 일본에 공급해주었다.
영국과 미국 두 나라는 일본 정구가 발생하는 공채를 매입하는 형식으로 러일전쟁에서 일본군 전비의 60%를 부담했다 (실제 구매자는 대부분 유대인 금융자본가들이었다) (러일전쟁 시기 미국의 일본 지원에 대해서는 지난번 글에서 정리하였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한다) 미국은 러일전쟁 동안 재정 분야 만이 아니라 무역 분야에서도 일본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다. 1905년 미국의 대일 수출은 1903년의 2.5배로 늘어났으며 1905년의 미일 무역액은 1903년보다 1.6배나 늘었다. 미국 대일 수출품에서 면화, 밀, 석유 등 군사 물자가 1,2,3위를 차지하였으며 일본은 이를 침략전쟁 수행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가쓰라–태프트 조약>의 내용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예상되자, 미국은 일제와 러시아에 대한 세력권 분할을 위한 흥정판을 벌려놓았다. 이 시기에 미국이 일본의 조선강점을 인정하고 만주침략을 지지해 나선 것은 미국의 해외 팽창야망과 관련이 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손을 빌려 만주에 침투한 러시아를 밀어내고 이 지방을 미국의 자본수출 대상지로 만들며, 일본의 동남아시아 진출 기회를 막아버림으로써,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더욱 틀어쥐려고 하였다. 1905년 7월 29일, 일본의 조선강점을 촉진시킨 미국의 범죄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는 <가쓰라-태프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비밀 협약은 일본 수상 가쓰라와 미 육군장관 태프트 사이에 체결되었다. 1905년 7월 말 태프트는 필리핀으로 가던 도중 도쿄에 들렀다. 이 도쿄 방문이 미국과 일본의 사전 합의로 이루어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 일행은 루스벨트의 딸과 10명의 상원의원, 40명의 하원의원 등 54명으로 이루어진 엄청난 규모였다. 일본은 천황과 황족들까지 나와 미국 대표단을 대대적으로 환영하였다. 태프트가 일본에 체류한 마감날인 7월 29일 태프트와 일본 수상 가쓰라 사이에 비밀회담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회담을 비밀리에 진행하기 위하여 전문 통역관을 참가시키지 않고 일본 외무성 외무차관을 통역으로 참가시켰다. 회담 끝에 각서가 교환되었다. 가쓰라와 태프트 사이에 진행된 이 비밀회담의 내용은 1924년까지 극비에 부쳐졌다.
1905년 일본 외무성 <비밀 전보집>에는 7월 29일 밤 가쓰라가 포츠머스에 머물고 있던 전권대표 고무라에게 보낸 <태프트와의 회담에 관한 제 18호 제19호 전보>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일본과 미국이 이 회담을 얼마나 비밀리에 진행하였으며 또 내용이 담고 있는 침략적 성격으로 하여 먼 훗날에조차 떳떳이 공개할 수 없는 엄청난 범죄의 산물인지를 뚜렷이 보여준다. 이 회담에서는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지지하는 대가로 미국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적 지배를 인정한다’는 비밀협약이 체결되었다.
비밀 회담에서 진행된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태프트가 <필리핀은 미합중국과 같은 강국에 의하여 통치되는 것이 마땅하며 필리핀 인민의 민족적 해방과 자주적 국가의 수립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자 가쓰라는 <일본은 필리핀에 대하여 그 어떤 침략계획도 없다>며 맞장구를 쳤다. 가쓰라가 <러일전쟁의 논리적 결과로서 조선 문제 해결을 매듭지는 것이 일본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며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라고 하자, 태프트는 <조선은 일본의 허락이 없이는 어떠한 조약도 체결할 수 없으며 일본군의 도움으로 조선에 보호 제도를 수립하는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쟁의 필연적 결과>라면서 적극적인 찬동을 표시하였다.
<가쓰라–태프트 조약>의 성격
이 시기에 미국이 일본의 조선강점을 승인하게 된 것은 러시아를 억제하여 미국의 만주시장 진출 가능성을 열어준 일본에 베푸는 일종의 떡고물이었으며, 동시에 일본에게 앞으로 필리핀과 동남아시아에 눈독을 들이지 말라는 신호였다. 또 1882년 조선이 미국에 온갖 특혜를 보장하며 맺어준 <조미조약>을 배신하고, 일제의 조선강점을 동의해준 것이다. 극동에서 차지한 미국과 일본이 차지한 진지를 확고히 하고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통치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조선에서의 행동의 자유를 인정해달라는 일본의 요구에 화답한 것이다.
또 이 조약은 영국이 일제의 조선강점을 인정한 제2차 <영일조약>의 기초가 되었다. 회담에서 가쓰라는 극동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보장하며 아시아에서 침략적 팽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유리한 수단은 일본· 영국· 미국 세 나라의 우호 관계라고 하였다. 태프트는 영일동맹의 비밀성원국으로 되는 것은 공식적 가맹국으로 가담하는 것보다 큰 의의를 가질 것이라고 하면서 <아무런 협약이 없더라도 극동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는 영일 양국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그 어떤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일영 양국과 동일한 미합중국의 행동을 마치 미국이 조약의 의무에 의하여 수행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여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가쓰라-태프트 조약>은 미·영·일 3국 동맹의 전통을 재확인하고 공고화되었다.
이로써 1870년대 초엽에 형성되고 1890년대 말에 재편성된 미국과 일본의 연합은 종국적으로 공고화되었다. 다시 말하여 <가쓰라–태프트 조약>은 20세기 초엽까지의 조선침략에서 미일 공모 결탁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쓰라-태프트 조약>의 불법성
<가쓰라-태프트 조약>은 비밀 조약으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파렴치하고 불법적인 조약이다.
조약의 불법성은 첫째로 국제법의 공인된 원칙인 <영토의 완전성과 불가침 원칙>을 위반하고 주권 국가들을 침략하려는 목적으로 체결되었다는 점이다. 매개 국가는 자기의 영역전반에 대하여 주권을 행사하며 어느 나라도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략을 할 수 없다. 이 조약은 공인된 국제법의 원칙들을 위반하고 미일의 해외침략 야망을 <국제조약>이라는 미명 하에 성문화한 불법 문서이다.
둘째로 이 조약은 국제법을 무시하고 조선의 운명을 저들 마음대로 난도질한 범죄적 흥정의 산물이다. 원래 국제조약은 조약을 맺는 당사국들의 권리와 의무만을 규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물론 여러 나라가 함께 참가하여 만든 국제 조약에서는 조약에 참가하지 않는 나라의 권리에 대하여 규정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에도 그 규정은 해당 나라의 국가적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어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될 수 있으며 그 나라가 허용하고 받아들여야 효력을 가질 수 있다.
셋째로 이 조약은 <국제조약의 의무를 준수하여야 하는 국제법의 원칙>을 위반한 미국의 범죄행위의 산물이다. 국제관계에서 국제조약의 준수 원칙은 국제법적 원칙으로 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저들의 해외 침략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제조약의 준수 원칙을 위반하고 조약상 의무를 태공하는 범죄행위를 감행하였다. 1882년 체결된 <조미조약>의 제 1조는 <만일 다른 나라가 일방정부에 대하여 부당하게 또는 강압적인 행동을 할 때에는 상대방 정부는 그 사건의 통지를 받는 대로 원만한 해결을 가져오도록 필요한 조치를 다 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제3국이 조선의 이익을 침해하는 경우, 그를 반대하는 효과적인 조치를 취해야 할 국제 조약상의 의무를 지니고 있다. 고종은 1904년 12월 일본주재 조선공사를 통해 미국이 <조미조약>의 의무를 이행하여 조선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밀서를 미 국무장관에게 보냈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들의 조약상 의무를 저버리고 <미국은 조선의 운명을 일본에 맡길 준비가 되어있다>라면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적극 지지하였다. 미국의 행위는 <조미조약>에 대한 난폭한 위반이었을 뿐 아니라 국가 관계의 일반 도덕과 국제적 정의에 대한 노골적인 유린이었다.
연재를 마치며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 결탁의 역사는 단지 일본 강점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침략 결탁은 해방 후에도 지속되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미일 결탁의 역사는 전쟁을 수반했다는 점이다. 1차 결탁기였던 구한말~일제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고, 2차 결탁기였던 8.15해방~냉전기 역시 한국전쟁이 존재했다. 그리고 3차 결탁기라고 할 수 있는 지금, 또 다시 한반도에 전쟁이 엄습하고 있다.
따라서 미일 결탁은 한반도 침략과 지배를 위한 군사 결탁을 본질로 하며, 항상 전쟁이 수반되었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최근 윤석열 정부는 한반도 침략과 지배를 위한 미일 결탁에 완벽하게 편입하고 있다. 신냉전이라는 명분 아래, 북한 위협이라는 구실 아래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을 용인하는 프놈펜 성명을 채택하고, 자위대의 ‘반격 능력’을 용인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결탁을 양손 벌려 환영하는 모양새이다.
1945년 일본제국은 전쟁에서 졌으나 일본 침략범죄의 단죄, 군국주의세력의 척결로 이어지지 않았다. 한반도와 아시아 지배를 위해서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필요했던 미국 때문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로 상징되는 냉전기 미일 결탁은 본 연재에서 살펴본 조선강점을 위한 미일 결탁의 재판이자 연장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신냉전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미일 결탁은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미일 결탁은 단지 과거의 역사 기록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다. 본 연재에 이어 냉전 시기 미일 결탁과 현재의 신냉전기 미일 결탁 과정 그리고 120년이 넘는 미일 결탁에 대한 정치적 이해를 높일 수 있는 후속 기사를 기대하며 본 연재를 마친다.<끝>
신냉전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한미일 군사협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얼마 전 프놈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프놈펜 성명은 한미일 군사협력을 사실상 군사동맹수준으로 격상시킨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19세기 때부터 한반도 침략을 위해 결탁해왔다. 서세동점의 구한말 시대, 냉전이 시작되던 시대 등 국제질서와 아시아 질서 변동기 때마다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와 아시아 침략과 지배를 위해 결탁했으며 그 결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결국 한미일 군사협력과 군사동맹은 미일 침략 세력에게 침략의 문을 더 크게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 침략을 위한 미일 결탁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 한미일이 추진하는 군사동맹의 본질과 성격, 그 목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막는 투쟁을 조직하는 데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이에 본지는 김이경 남북역사교류협회 상임이사가 작성한 소중한 원고를 연재한다. 연재는 다음과 같은 순서도 게재될 것이다.<편집자주>
조선의 대일 교린 외교와 19세기 일본의 위기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1
메이지 정권의 정한 외교와 조일 국교단절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2
조선 침략을 위한 미국의 국가정책 - 미국의 조선침략 1
186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조선침략 - 미국의 조선침략 2
1871년 조미 전쟁(신미양요) - 미국의 조선침략 3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은 미일의 조선 침략이다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1
음융한 계책으로 조미통상조약 맺은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2
조선침략을 둘러싸고 본격화되는 미일의 공모결탁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3
청일전쟁을 준비하는 미일의 공모결탁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4
일본의 청일전쟁 도발과 미국의 전폭적 지원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5
청일전쟁 이후 일제의 조선강점을 백방으로 지원한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6
미일 결탁의 절정, 가쓰라-태프트 밀약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