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침략 미일결탁의 역사 ⑥
미국에 접근하는 일본
미국은 1871년 조미전쟁(신미양요)에서 빈손으로 물러가야 했지만, 조선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당시 청나라는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열강의 각축장이었으므로 후발주자 미국이 헤집고 들어갈 여유가 없었다. 미국이 노릴만한 유일한 곳은 중국 동북부였지만 이곳은 장차 러시아와의 결전을 각오해야 하는 지역이었다.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방대한 영토를 가진 러시아는 야심찬 제국주의적 진출을 모색하는 상태였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도 미국은 일본을 이용하는 것은 긴요했다. 이는 1854년 <일·미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을 반식민지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도 미국의 아시아 침략 동맹자가 됨으로써, 큰 나라를 등에 업고 자신의 취약성을 보충하는 해외 팽창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일본의 경제는 엉망이었다. <미·일 통상조약> 체결 후 10년 동안 미국의 대일 수출액은 59배, 수입액은 13.7 배였다고 하니 수탈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 경제를 회복할 수 있는 획기적 방안도 절실한 상황이었다.
먼저 꼬리를 흔든 것은 일본이었다. 막부시대였던 1866년, 미국 《셔먼》호의 침공이 실패하자 주일 미 대리공사에게 각서를 보낸 적이 있었다. “조선이 이를 데 없는 무의망동을 벌려 미국인을 살해하니 우리 대군은 통탄하고 있다. 일본이 조미관계를 중재하여 미국 국기를 조선에 휘날리도록 하겠다.”라는 내용이었다. 막부 정권의 몰락으로 실행되지 못했지만, 1870년에 들어오자 미국은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와 천황제의 호전적인 성격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미 국무장관 슈워드는 아시아 침략에서 일본과 공모 결탁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첫 시도는 신미양요 준비 과정부터 나타난다. 1871년 3월 일본은 미국 아시아함대가 나가사키에서 조선 침략을 준비하자, 《팔래스》호 함장에게 조선의 지리 등 전반 자료를 보내주었다. 부산 왜관에 있던 요시오카를 불러 미국과의 우호를 강조하면서 영어통역관으로 조선 침략에 파견한다.

미국의 조선 침략이 실패로 끝난 1871년 겨울, 일본은 미국 및 유럽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 개정을 염두에 두고, 미국과 유럽을 돌아보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보낸다. 표면적으로는 조약개정과 근대시찰이었지만, 속내는 신미양요 이후 미국의 대조선 정책을 확인하며 미국과 결탁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조선 침략에서 일본의 쓸모를 부각하는 편이 <미·일 불평등 조약>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도쿄를 떠나기 직전 대표단 중 한 명인 기도 다카요시는 “조선에 뻗치려는 무진년(1868년; 정한외교가 시작된 해) 이래의 정책은 마침내 이룩되려고 한다.”라며 기대를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자신들의 생각이 미국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분위기를 보니 미국은 조선을 직접 침략해보려고 나서지 못한다. 워싱턴에 도착하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틀림없을 것 같다.”라는 편지를 일본으로 보냈다.
미국의 정부, 국회, 언론 모두 일본 사절단에 대하여 큰 환대를 아끼지 않았다. 미국 출판보도물은 일본이 아시아에서 미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을 노골적으로 기대했다. 사절단 대표 이와쿠라는 피쉬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 ‘미국의 조선과 아시아의 문호개방에 일본이 적극 협력한다면 일정한 시기에 일본과 맺은 조약개정에 응할 것’을 확인하였다.
일본을 지원하는 미국
이와쿠라 사절단이 돌아온 후 미국은 일본이 조선 침략의 길을 닦게 한 뒤 열매를 가로채려는 계책으로 일본의 침략 준비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1871년 일본 외무성 고문으로 스미스를, 법무성 고문으로 하우스를 보냈다가 1872년 퇴역 장성 리젠드르를 일본 외무성 고문으로 바꾼다. 리젠드르는 고문이 되자마자 ‘일본은 곧 조선을 점령하고 요동지방을 제압하며 대만을 점령하고 중국을 제압해야… 중국을 반달형으로 둘러싸면 러시아의 동방진출을 막을 수 있다’고 떠들었다.
1873년 일본 해군성이 생길 때까지도 일본의 군함은 철함 2척, 나무함과 철을 섞은 함선 1척, 목조함정 등 겨우 17척에 지나지 않았는데, 미국이 3척의 군함과 8,000만여 발의 탄약을 넘겨주었다. 미국의 지원은 침략열에 들떠있으면서도 미약한 경제, 군사력으로 감히 침략의 길에 나서지 못하고 있던 일본이 노골적인 조선 무력침공을 감행할 수 있게 한 기폭제였다.
그뿐 아니라, 일본의 조선 침략 과정은 사전에 <국교 단절>과정부터 전형적인 미국의 포함외교에 의한 약소국 강제 개항과 수법이 완전히 일치하며 일본이 미국에 당한 전철을 고스란히 조선에 적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미국과 일본은 1875년, 함께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 침략을 본격화한다. 그러므로 일본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과 조선을 식민지로 떨어뜨린 계기가 된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은 일본의 단독 침략이 아니라. 미·일의 조선 침략이라고 정리해야 한다.

민비 통치집단의 사대주의와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
본 고에서는 <운요호> 침략의 불법성과 <강화도조약>의 불평등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이 왜 그렇게 불평등하게 작성되었는지 모르는 분들이 많아, 간단히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873년 조선 정부의 실권이 대원군에서 민비에게 넘어간다. 민비를 대장으로 하는 민가 일당은 역대급 사대주의적 통치집단이었다. 조선을 얕보고 무시하면서 조·일 관계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재수립하려는 교활한 일본에 강경하게 대응한 대원군의 대일 정책에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투항주의적 정책을 합리화하며 그동안 벌려온 조선 민족의 반외세 투쟁을 모독하였다. 예를 들어 근 10년 동안이나 조일 국교 관계를 담당하고 현장에서 일본의 침략을 막아온 경상도 관찰사와 동래부사를 직위 해제시켰으며, 관련 실무자의 목을 잘라 왜관 앞에 매달라 놓는 악독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민가 일당이 사대주의적 대일 굴종 정책을 추구하게 된 동기는 청나라 관리들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1864년 6월 청나라 정부는 조선에 비밀 편지를 보냈다. 그들은 <지금 나가사키에는 5,000명의 일본군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대만에 출병하였던 군대가 돌아오면 침략의 예봉이 조선으로 돌려질 것이다. 프랑스와 미국이 일본을 돕고 있으니, 조선은 3국에 대항하지 못할 것이다. 조선 국왕은 깊이 생각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라면서 <조선은 일본과 미리 타협하여 ‘평화’를 유지할 것>을 설교하였다. 이 편지를 보낸 이유는 만일 조선이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면, 난감해지는 청나라의 처지를 미리 모면하려는 얄팍한 술책이었다.
청나라의 눈치를 살피는데 익숙한 민가 일당은 이 권고를 받자 곧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교섭을 시작하려고 하였다. 일본 외무성에 편지를 보내 <그간 조·일 외교 관계의 잘못은 모두 조선 정부에 있으므로 앞으로는 관계 개선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며 비굴하게 사죄하였다. 민가 일당의 이러한 대일 굴종 행위는 일본의 조선 침략 야망을 더욱 조장시켰을 뿐이다. 그 뒤 일본은 더 고압적인 자세로 서계를 보냈고, 조선조정의 회의에서 오만한 문서에 격분이 일어, 조·일 관계를 풀 실마리는 더 멀어진다.
일본은 결국 무력으로 조선 정부를 굴복시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다. 전쟁을 작정하고 덤비는 일본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할 방법은 우리도 무력으로 대응하겠다는 태세를 갖추는 일이다. 그것만이 일본을 다시 대화 마당으로 끌어내면서도 주동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일본은 조선을 제압하려고 불법적으로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지만, 민가 일당은 이미 청나라의 권유로 일본과의 조약 체결을 결심하고 있었다. 조선에 대한 불평등조약을 작심하고 있었던 일본으로서는 거릴낄 것이 없었던 셈이다.
결국 민가 통치세력의 사대주의가 불평등한 <강화도조약> 체결을 초래한 것이다. <강화도조약>은 종속적 조일 관계의 시작이 되었으며 종국에는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는 시작점이 되었다. 지배세력이 사대주의에 빠지면 나라는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는 피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계속>
신냉전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한미일 군사협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얼마 전 프놈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프놈펜 성명은 한미일 군사협력을 사실상 군사동맹수준으로 격상시킨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19세기 때부터 한반도 침략을 위해 결탁해왔다. 서세동점의 구한말 시대, 냉전이 시작되던 시대 등 국제질서와 아시아 질서 변동기 때마다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와 아시아 침략과 지배를 위해 결탁했으며 그 결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결국 한미일 군사협력과 군사동맹은 미일 침략 세력에게 침략의 문을 더 크게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 침략을 위한 미일 결탁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 한미일이 추진하는 군사동맹의 본질과 성격, 그 목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막는 투쟁을 조직하는 데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이에 본지는 김이경 남북역사교류협회 상임이사가 작성한 소중한 원고를 연재한다. 연재는 다음과 같은 순서도 게재될 것이다.<편집자주>
조선의 대일 교린 외교와 19세기 일본의 위기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1
메이지 정권의 정한 외교와 조일 국교단절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2
조선 침략을 위한 미국의 국가정책 - 미국의 조선침략 1
186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조선침략 - 미국의 조선침략 2
1871년 조미 전쟁(신미양요) - 미국의 조선침략 3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은 미일의 조선 침략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1
음융한 계책으로 조미통상조약 맺은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2
갑오농민전쟁부터 청일전쟁까지의 미국의 역할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3
러일전쟁 전후 일본의 조선강점 후원한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