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침략 미일결탁의 역사 ①

연재를 시작하며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가속화되면서, 한미군사훈련으로도 모자라 한미일 군사훈련까지 국가적 기정사실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국민적 반일정서를 잘 알면서, 이렇게 자위대까지 한반도에 다시 끌어드리는 것은 역시 미국의 압력 때문이다.

일본이 미국의 아시아 침략정책에 달라붙어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의 아시아 침략에 없어서 안 될 전략적 동맹자였다. 왜 미국은 아시아 침략에서 굳이 일본과 동맹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놀랍게도 조선이 미국의 직접 침략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한 덕분이다. 미국이 포함외교를 시작한 이래, 함선을 들이밀고, 공포만 몇 발 날려도 벌벌 떨며 항복하는 것이 일반적인 약소국의 모습이었지만 조선은 달랐다. 1866년 미국 <제너럴 셔먼호>의 대동강 침략, 1868년 국제범죄행각 <남연군 묘 도굴> 사건, 1871년 조·미 전쟁(신미양요)에서 모두 조선 민중의 치열한 투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은 직접적 조선 침략을 포기한다. 그러나 아시아 침략과 그 관문인 조선을 포기할 수 없었던 미국은 일본을 앞세운 대리침략으로 노선을 변경한다. 일본이 조선 침략과 전쟁에 나설 수 있도록 미국이 지원·엄호하면서 일본의 후견인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챙길 수 있는 막대한 정치·경제적 이익은 빠짐없이 챙겼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왜 알지 못할까? 막후 공작을 하면서 침략성을 감추는데 능한 미국의 간교함 탓이다. 미국은 자신들의 침략적 본성을 감추기 위해 온갖 공작과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유포해왔다. 당시에도 고종은 미국의 속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에 의지하여 나라와 왕권을 유지하려 했다.

태평양전쟁 기간을 제외하고 아시아에서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는 비결이었던 미·일 결탁을 제대로 알아야 미국의 침략적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해방된 지 75년이 넘도록 일본은 반성과 사과조차 없는데, 미국은 왜 일본 자위대를 다시 한반도로 끌어들이려 이리 난리를 치는지 알 수 있다. 일본 근대화의 추진력은 그들의 개혁성이 아니라, 미국에 빌붙어 조선을 침략한 군국주의라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설마 국권까지 빼앗기랴 안일하게 생각했던 조선 말기 위정자들의 잘못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조선 시대 대일 교린 외교

조선이 일본과 교린 외교를 시작한 중요한 이유는 왜구의 잦은 침략과 노략질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조선이 막부와 여러 다이묘(지방영주)들에게 직접 인부(조선 국왕이 발부한 도장)를 주고, 인부가 찍힌 서류만 접수하는 방식의 교류였다. 일본 사신들은 대장경을 얻어가거나 사찰건립비용 마련, 무역 등을 위해 수시로 조선을 왕래했다. 조선으로서는 왜구의 해안 침탈을 줄이려는 의도가 컸기 때문에, 왜인들의 귀순을 장려하고 회유책을 썼지만, 왜구의 침략은 끊이지 않았다. 일본은 참으로 골치 아픈 이웃이었지만, 조선은 왜구토벌과 함께 살길을 열어주는 평화 <교린 외교>가 최선이라고 여겼다.

교린(交隣)

가까운 이웃과 친교를 맺는다는 뜻으로, 조선 시대 교린의 대상은 일본, 여진 등 주변국들에 대한 외교정책이다.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서는 사대, 주변국에 대해서는 교린을 대외정책의 기본으로 설정했다.

이같은 교린 정책에 근거하여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부침을 반복하였다. 1426년부터 3곳(진해의 제포, 부산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을 열어 무역을 허락하였다. 1443년 매해 정기 무역선을 50척으로 하고 쌀 200석을 일본에 하사하는 『계해약조』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1510년 삼포왜란으로 3포가 폐쇄되고 조일 무역이 중단되었다.

1512년 『임신약조』를 체결하여 교린정책은 재개되는데, 3포 중 제포만 개항하고, 쓰시마 도주에게만 교역권을 주고 그 외 선박과 왜인들은 왜구로 간주해 처벌하는 등 보다 엄격한 교린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중단됐던 조·일 관계는 1609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간청으로 복구되어 『기유약조』를 맺는다.

이 때부터 조일 정부간 접촉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일본 막부의 새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조선이 축하사절단을 파견하는 방식이었다. 일본 막부의 외교 사절단은 조선 한성에 올 수 없었다. 조선 민중의 대일 적개심이 극도에 달했고 사절단의 한양 진입로가 임진왜란 때 침략 경로로 사용된 전철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 막부가 조선 조정과 의논할 일이 생기면, 부산 초량왜관에서 협의하는 방식이었다. 새 막부 취임 축하사절단 일본 방문 외의 일상적인 조-일 국가 간 교섭은 오직 부산 초량왜관을 통해서 쓰시마 도주만 진행할 수 있었다.

▲ 초량왜관도
▲ 초량왜관도

이 왜관은 조선 정부가 설치하여 매년 쌀 100석의 운영자금을 주었으며 관리만 일본인에게 맡겼다. 일본은 초량왜관을 통하여 막부의 서계(일본과 주고받는 공식 문서)와 명목적인 헌사 예물을 전달하며 답례로 후한 희사품을 받아갔다. 모든 서계는 조선 국왕이 준 관인을 찍은 쓰시마 도주의 문인을 사용해야만 했다. 조선이 에도에 파견한 막부 취임사절단(조선통신사: 조선왕의 뜻을 전달한다는 의미가 담겨져있다)는 1811년까지 총 19회였다.

반면 일본사절단(일본국왕사: 막부의 장군이 조선과 교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조선의 왕 앞으로 보낸 사절단)이 조선 초량왜관에 온 것은 70회이다. 조선과 일본이 대등한 관계임에도 파견된 사절의 횟수의 횟수에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조선의 사절단 파견은 교린 외교를 유지하는 형식이었음에 비해 일본국왕사의 목적은 경제적 욕구와 대장경을 얻어가는 것이 절절했기 때문이다.

▲ 일본에서의 조선통신사 행렬
▲ 일본에서의 조선통신사 행렬

조선통신사들은 대략 사오백 명 정도로 규모가 상당히 컸다. 통신사 대열이 쓰시마섬에 도착하면 일본은 무려 1,400여 척의 배에 1만여 명이 영접을 나와서 마중하였다. 통신사 접대비가 일본 막부의 1년 예산과 같았다고 하니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알 수 있다.

일본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통신사를 접대했던 이유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다. 1600년 도쿠가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막부를 세우고 쇼군이 되었지만, 일본 각 지역의 모든 다이묘와 낭인들의 불만을 모두 평정할 수는 없었다. 그런 정황에서 도쿠가와 막부의 국제적 위상과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 조선통신사 초청의 가장 큰 이유였다.

일본 막번 체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권력을 잡은 후 에도에 막부(사령부라는 의미를 갖지만 중앙통치기구로 이해하면 된다)를 세우고 쇼군(막부의 대장, 즉 최고권략자)이 된다. 막부는 직할지역만 직접 다스리고, 번(지역행정단위)에 대해서는 다이묘(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에게 일임하고 간섭하지 않았다. 이렇듯 일본은 메이지 유신 전까지 막주-번으로 이뤄지는 지방분권적인 정치체제를 갖고 있었고, 이를 막번 체제라고 부른다.

다만, 막부는 조선통신사 행렬이 일본에 조공하러 온 복속 사절이라고 자국 정치세력들에게 설명했다. 막대한 접대비를 분담해야 했던 다이묘의 불만이 높아지자, ‘조선멸시론’으로 불만을 잠재우려 했던 것이다. 조선의 ‘교린정책’을 자기 입맛대로 재단하고 국내정치에 악용하는 일본의 교활성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일본의 위기와 메이지 정권의 탄생

19세기 일본은 상업의 발달로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했으며 도쿠가와 막부 최고의 문화적 번성을 누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집권 세력의 사치와 빈부의 차가 극심하여, 봉건제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회모순이 쌓여갔다.

특히 1830년대 중반, 홍수와 냉해 등 수년간 기근이 이어졌다. 수확량이 반도 되지 않자 도시 상인들은 쌀을 매점했고, 쌀값이 폭등했다. 가장 번화했던 오사카에서도 하루 100명 이상이 굶어죽을 정도로 전국 곳곳에서 아사자가 속출했다. 1837년 일본 막부의 관리였던 오시오 헤이하치로가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난은 곧 진압되었지만, 관리의 반란은 일본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발생한다.

▲ 미국 페리 제독의 일본 침략
▲ 미국 페리 제독의 일본 침략

일본의 위기를 더욱 앞당긴 것은 미국 페리 제독의 일본 침략이었다. 미국이 중국 동북지방을 신식민지로 개척하려면 먼저 조선과 일본을 차지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는 1853년 6월과 다음 해 2월 두 번에 걸쳐 일본 도쿄만을 침입하여 함포를 쏘는 등 무력시위를 벌인다. 부패하고 무능했던 일본 정부는 페리 함대의 협박용 함포 소리에 굴복하여, 1854년 3월 <일미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횡단 기항지로서 시모다, 하코다테를 개항하고 영사주재권, 최혜국대우권을 강탈당한다.

미국은 일본에 <일미수호통상조약(1858년 7월)>을 강요하였고, 같은 해에 일본은 미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 5개나라와 <안세이조약>을 체결하면서 유럽 국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서양의 값싼 상품이 대량으로 유통되면서, 서양에 대한 일본인의 감정은 갈수록 나빠졌다. 1864년 사쓰마, 조슈번이 양이(서양 배척) 운동을 일으키자 미국·영국·프랑스·네덜란드는 17척의 군함으로 시모노세키를 침공하였으며 1866년 <개세약서>로 관세권을 장악하였다. 일본은 서양 열강의 반식민지로 빠져들면서 대량의 금이 국외로 유출되어 경제가 혼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나락에 빠져들었다.

일본 경제가 심각해지자, 막부를 중심으로 한 개국파와 막부에 불만을 품은 개국 반대파로 나누어진다. 개국 반대파가 천황에게 정권을 돌려주어야 한다며 막부 타도를 주장하자, 두 세력 간의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된다. 개국 반대파는 천황을 중심으로 서양세력을 물리치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을 전개했다. 1866년 막부의 조슈번 정벌이 실패로 끝나자, 조슈번과 사쓰마번 등이 막부 타도 운동이 흐름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막부를 지지하는 군대는 곳곳에서 패배했고, 사쓰마번과 조슈번 군대가 에도성에 입성하면서 천황 정부를 수립한다.

다급해진 막부는 1868년 1월 10일 영국·프랑스·미국·네덜란드·이탈리아·프러시아 6개국 대표와의 회담에서 양이(洋夷)를 내세운 천황 정부의 불법성을 강조하고, 기존의 조약체제 준수를 약속하면서 열강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아직 전세가 어떻게 전개될지 확인할 수 없었고, 또 천황 정부가 양이(攘夷) 구호를 내리지 않은 조건에서 서양 열강은 막부가 정통 정권임을 인정하였다. 막부는 1월 17일 미국에 <에도-요코하마> 철도부설권을 내주면서 서양 열강의 지지를 호소한다. 막부와 천황 정권의 대립은 곧 전국적인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이제 내전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양이(洋夷)를 기치로 봉기하였던 천황 정권은 태도를 돌변한다. 1월 17일 불평등 조약 체제의 유지를 보장함으로써 외국과의 화친을 국내외에 선포한 것이다. 그러자 열강의 입장이 누그러진다. 서양 열강은 내전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내전 이후 자국의 이익 확보를 위해 국외 중립을 선언하고 불간섭의 자세를 취하였다.

1869년 5월 막부 세력이 모조리 섬멸되자, 새로 성립된 메이지 정부는 ‘막부 정권이 서양과 맺었던 조약을 이행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서양 열강의 지지를 받게 된다. 이것이 메이지 유신이 성립되는 과정이며 정상적인 서양과 달리 서양 열강의 과도한 수탈 속에서 일본의 근대화가 처음부터 군국주의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이다. 우리는 메이지 유신이 일본의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일본의 근대화는 자체적 자본주의 발전 과정이 아니었다. 미국을 등에 업은 근대화였으며, 그 결과 미국과 결탁하여 군국주의적 조선 침략을 모색하게 된다.<계속>

신냉전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한미일 군사협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얼마 전 프놈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프놈펜 성명은 한미일 군사협력을 사실상 군사동맹수준으로 격상시킨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19세기 때부터 한반도 침략을 위해 결탁해왔다. 서세동점의 구한말 시대, 냉전이 시작되던 시대 등 국제질서와 아시아 질서 변동기 때마다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와 아시아 침략과 지배를 위해 결탁했으며 그 결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결국 한미일 군사협력과 군사동맹은 미일 침략 세력에게 침략의 문을 더 크게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 침략을 위한 미일 결탁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 한미일이 추진하는 군사동맹의 본질과 성격, 그 목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막는 투쟁을 조직하는 데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이에 본지는 김이경 남북역사교류협회 상임이사가 작성한 소중한 원고를 연재한다. 연재는 다음과 같은 순서도 게재될 것이다.<편집자주>

조선의 대일 교린 외교와 19세기 일본의 위기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1

메이지 정권의 정한 외교와 조일 국교단절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2

조선 침략을 위한 미국의 국가정책 - 미국의 조선침략 1

186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조선침략 - 미국의 조선침략 2

1871년 조미 전쟁(신미양요) - 미국의 조선침략 3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은 미일의 조선 침략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1

음융한 계책으로 조미통상조약 맺은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2

갑오농민전쟁부터 청일전쟁까지의 미국의 역할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3

러일전쟁 전후 일본의 조선강점 후원한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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