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침략 미일결탁의 역사 ⑧

임오군란의 발생과 개화파의 개혁활동

조선의 개혁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미국

조선의 개혁 정부를 침몰시킨 청나라, 일본 그리고 미국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시작되자 제일 먼저 군대를 보낸 미국

1876년 일본과의 강압적이고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 이후 1882년 조미 통상조약을 시작으로 조선은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서양 각국과 통상조약을 맺는다. 조선에 싹트던 자본주의는 서양 열강의 경제침략으로 싹이 잘리고, 부패한 권력자와 외세의 수탈로 민중의 삶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민중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원흉이 일제, 외세와 결탁한 민가 집단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1882년 임오군란도 신식 군대와 구식 군대의 차별이 아니라, 일본과 민가 일당에게로 분노의 화살의 과녁이 분명히 맞추어져 있었다. 폭동을 일으킨 군인들이 민비를 처단하려고 궁으로 달려가는 한편, 다른 부대는 일본공사관으로 쫓아간 것만 보아도 <반외세·반봉건 항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별기군도 부분적으로 항쟁에 합세했다. 항쟁군이 문제로 삼은 것은 호리모토 일본 교관이었지, 별기 군인들이 아니었다.

임오군란은 개화파의 개혁 활동을 더욱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84년 개화파들은 정변을 통해서라도 근대 정부를 세우고 번영하는 국가를 만들려고 했지만, 청나라와 민가 일당의 방해로 좌절되고 만다.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창덕궁 침략과 일본의 배신으로 실패했지만, 이들의 배후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이 있었다.

열강들은 모두 <조선의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자유 무역>과 <불평등 조약>을 강요했지만, 결코 조선의 근대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또 미국과 일본이 조선에서 청나라를 몰아내고, 중국 침략 기지로 만들기 위해 개화파들을 어떻게 이용하려 했는지 잘 드러난다. 이번 회차에서는 이 과정만 축약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조선의 개혁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미국

김옥균이 정변의 방식을 택하기 전, 평화적인 방법으로 근대 정부를 만들려고 노력하던 시점에 차관을 얻어서라도 근대화 자금을 만들기 위해 일본을 세 번 방문한 적이 있다. 일본 정계는 조선에서 청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으로 부상하는 김옥균을 회유하기 위하여 차관이 가능한 듯 답변했으나 김옥균이 차관 조건을 갖추어 오자, 돌연히 태도를 바꾼다. 일본 정부의 재정이 열악하다는 점도 있었지만, 김옥균이 추구하는 근대화가 일본의 이익과 정반대인 <자주적인 근대화>라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며, 미국과도 조율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 개화를 주장하며 갑신정변을 일으킨 인물들. 왼쪽부터 김옥균, 서상범, 박영효, 홍영식.

▲ 개화를 주장하며 갑신정변을 일으킨 인물들. 왼쪽부터 김옥균, 서상범, 박영효, 홍영식.

김옥균은 절절한 심정으로 미국에 대출을 요구하지만, 그동안 입만 열면 조선의 개혁을 적극 지지한다고 떠벌리던 미국은 이를 거절한다. 그들이 말하는 <조선의 개혁>이란 수탈을 위한 명분에 불과했지, <조선의 근대화>와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목표는 <조선의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청나라를 몰아내고, 조선을 발판으로 하여 중국을 침략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이러한 입장은 갑신정변을 전후하여 잘 드러난다. 당시 개화파들이 추구한 것은 <반외세, 반봉건 근대화>였지만, 서양 열강에 일정한 환상이 있었다. 김옥균은 정변 거사를 앞둔 9월 27일 미국공사 푸트를 만나 언질을 준다. 미국은 개화파의 친청 세력과의 투쟁을 지지해왔기 때문에 정변에 대해서도 서양 열강의 <우호>와 <협조>가 가능했다고 본 듯하다.

그러나 미국은 김옥균에게 <선 청군 철수 후 개혁>을 주장했다. 푸트는 ‘지금 귀국에는 청군의 철수가 가장 긴급한 일이다..... 기다릴 것을 희망한다.’라면서 시기상조론을 들고 나왔다. 더구나 ‘그대들이 만일 시일을 끌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잠깐 산천을 유람한다든지, 상해나 나가사키 같은 곳에라도 갔다가 돌아와서 일을 꾀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라는 말을 보면 김옥균을 정변에서 떼어내고 시간을 끌어서라도 정변을 와해시키려는 미국의 의도를 알 수 있다.

개화파는 계획대로 1884년 10월 17일 무력정변을 단행하였다. 수구파 우두머리들이 처단되고 개화파의 새 정부가 출현하였으며 정강이 발표되었다. 정강에는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성격과 함께 외세의 침략을 반대하는 애국 사상이 구현되어 있었다. 특히 독립 국가의 존엄과 체면을 손상하는 외교 관계의 관례를 청산할 계획, 국방력을 강화하여 근대적 군대를 건설하려는 조항 등은 서양 열강으로서는 예민한 문제였다.

조선의 개혁 정부를 침몰시킨 청나라, 일본 그리고 미국

반포된 갑신정변 정강에서 개화파의 자주적 입장이 명백해지자 서양 열강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서양 열강은 개화파가 추구하는 개혁이 청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데 집중하면서도 친일적이며 친 유럽적이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자주적 근대화를 표방하는 성격이 분명해지자, 새 정부를 요람기에 압살하기 위한 서양 열강의 공모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청나라 군사령관 오조유는 개화파의 새 정부를 반대하는 무력간섭을 단행할 결심을 품었지만, 10월 18일 왕궁 수비에 일본군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당장 무력간섭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였다. 새 정부를 진압하기 위해서는 왕궁을 침입해야 하는데, 조선 국왕의 요청이 없다는 사실이 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사정으로 청나라 군대는 그날 오후 조선 주재 미국공사와 영국, 독일 공사들과 만나 본 이후에 왕궁침입을 결심하게 되었다. 민비를 몰래 만나, 조선 국왕이 청나라 군사를 요청하는 형식을 갖추었지만, 개화파 정부에 대한 청군의 무력간섭은 서양 열강의 묵인 조정하에 감행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개화파의 요구에 마지못해 국왕 호위에 공사관 군대를 동원했으나,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때 청나라 군사령관 오조유가 원세개, 장광전 등의 연명으로 다케조에에게 공문을 보냈다. ‘무력간섭을 단행하는 목적은 국왕을 보호하며 일본공사관을 원호하는 것이지 다른 의도는 없다’라는 내용이었다. 청나라 군대가 왕궁에 침입하는 것을 일본이 양해해달라는 것으로 청일 양국이 개화파 정부를 압살하기 위한 협력을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청나라의 공문을 받은 다케조에는 일본 정부의 최종회답이 오기 전까지는 청나라의 공문에 대한 입장표명을 보류하였으며, 개화파 정부 측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하였다. 청나라 군대가 다케조에에게 공문을 보낸 그 날 오후 3시경, 청나라 군대 1500명이 왕궁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청나라군의 공격이 있기 한 시간 전, 다케조에는 ‘개화파의 정변을 지지하지 말라’는 외무대신의 지시를 받았다. 이것이 일본은 갑신정변에 참여하였다가,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는 조건에서 김옥균을 배신하고 철군하게 된 전모이다.

일본의 개화파 배신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우선, 청-프 전쟁(1884년 8월∽1885년 4월)이 끝나면,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은 다시 강화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영향력이 다시 강화된다면 아직 청과 정면 대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일본으로서는 청군에 맞서는 것은 불리하다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의 개화파 배신은 개화파의 개혁이 일본의 조선 침략에 조금도 유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개혁이 성공할 경우, 그동안 조선에서 닦아놓은 수탈을 위한 조건도 박탈될 수 있다는 미국의 판단과도 궤를 같이한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시작되자 제일 먼저 군대를 보낸 미국

10년이 지나고 <척양척왜>의 기치를 든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한다. 이를 계기로 맨 먼저 무력간섭을 감행한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미국은 갑오농민전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도 이전인 1893년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이 발발하자 농민봉기가 급속히 확대될 것으로 예측하고 기민하게 대응태세를 갖추어 상해로 항행 중이던 군함을 인천항으로 기항시킨다.

얼마 후 농민전쟁이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경상도 등 남부 전역으로 확산, 서울까지 위협하게 되자, 농민전쟁을 진압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일본주재 미국공사 씰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조선 정부는 반란군을 진압할 능력이 없다’라고 우려하면서 농민전쟁 진압을 위해서는 즉각 미군 함대를 보낼 것을 역설하였다. 씰의 보고서를 본 미국은 아시아 함대를 인천으로 급히 출동시켰다. 5월 2일 청나라 그리고 일본보다도 앞서 <볼티모어>호를 기함으로 한 함대를 인천에 입항시켰으며,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해병대를 서울로 급파하였다. 곧이어 베링 해협을 거쳐 2척의 군함이 인천에 들어왔으며 그 외에도 함선 4척이 더 들어 왔다.

그렇지만 미국은 무력간섭을 확대할 수 없었다. 만일 미국이 무력간섭을 확대할 경우, 필연적으로 조선을 둘러싼 청일 각축에 전면적으로 휘말릴 위험성이 있었으며 이는 동아시아에서 유럽 열강의 무력충돌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럴 경우, 미국의 국내정세와 군사적 준비로는 열강의 무력충돌에 주동적으로 대처할 준비가 되지 못했다는 판단이었다. 미국은 <최혜국 대우에 관한 조항> 확보 등 미국의 이익과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에 집중시키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는 미국이 전면적으로 나서는 것보다 일본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거점으로 관리하는 편이, 러시아의 만주 진출을 억제하고, 미국의 중국 동북부 진출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방도라는 전통적 아시아 정책의 연장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직접적 무력간섭을 중지하고, 일본을 내세워 농민군 등조선의 반봉건, 반외세 움직임을 탄압하며, 일본의 조선 침략을 더욱 적극화시키는 것으로 최종방안을 정리하였다. 미국은 <전주 화의> 이후 조선 주둔 명분을 잃고 있던 일본에게, 조선에 있는 일본인을 보호하려면 일본군이 주둔해야 한다며 일본의 청나라 침략에 필요한 명분과 시간을 벌어준다. 즉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미국의 신속한 무력간섭은 일본의 무력간섭을 적극적으로 추동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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