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침략 미일결탁의 역사 ⑪

춘생문 사건

러시아의 만주 진출을 둘러싼 일·미·영의 연합전선 형성

일본의 러·일전쟁 도발을 부추기고 지원한 미국

<을사조약>을 지지환영한 미국

을미사변을 둘러싸고 일본에 대한 유럽 열강의 비난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미국은 일본의 책임회피와 사태 수습행위를 엄호해 주었다. 미국은 민비 살해 사건이 일본군 소행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미국 대리공사 알렌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함께 사변 직후에 칼로 무장한 30여 명의 일본인이 철수하는 모습을 보았으며 또 시위대 교관 미국인 마크 다이도 일본 군인들이 궁중에 침입하여 민비를 살해하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하였다. 그렇지만 미국은 알렌에게 일본의 모든 행동을 무조건 지지하라는 지침을 주었다. 그에 따라 알렌은 민비 살해범이 일본군이라는 폭로를 하지 않았으며, 열강의 항의가 들끓는데도 전혀 동참하지 않았다.

미국의 친일적인 태도는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가 1895년 9월 19일 일본공사관에서 진행된 열강 회의에서 민비 살해 사건의 책임을 대원군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에서 드러난다. 미국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을미사변 이후의 정세는 일본에 불리하게, 러시아에 유리하게 전변되어 갔다. 조선에 대한 세력권 확장을 노린 러시아의 영향력은 3국 간섭 이후 특히 을미사변을 계기로 일본을 압도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의 확대는 미국의 이해관계에 저촉되는 것이었다.

춘생문 사건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급속히 강해지자, 미국은 자국의 이익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고종납치를 시도했다. 경복궁 춘생문을 통하여 고종을 납치하려 했기 때문에 이를 <춘생문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동안 일본을 앞세우면서 뒤에서 조선 수탈을 벌여온 미국이 막상 일본의 영향력이 위기에 처하자, 직접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이 <춘생문 사건>은 을미사변 두 달 후인 1895년 10월에 발생했다. 미국은 알렌의 지휘 밑에 시위대 교관 마츠다이, 통역관 언더우드, 선교사 어브슨, 헐버트 등을 사전에 경복궁에 잠입시켜놓고, 궁궐 공격 신호에 따라 고종을 납치하게 하였다. 미리 왕궁호위를 담당하던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어 왕궁을 습격할 때 친위대가 안에서 호응할 계획도 세웠다. 이 계획은 궁을 나온 고종이 미국 공사 알렌의 보호를 받으며 정동구락부에 머무르면서 친미정부를 조직한 후 고종을 환궁시키는 것이었다.

3발의 총소리를 신호로 언더우드 일당은 고종 침전으로 달려가 출입을 가로막는 장교들을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침전으로 뛰어들었다. 총소리에 놀라 불안해하던 고종은 언더우드 일당을 보자 마음을 놓았다. 언더우드는 급히 고종을 왕궁 밖으로 데리고 가려 하였다. 이때 김홍집을 비롯한 정부 관료들이 달려와 국왕을 안심시키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고 하자 언더우드 일당은 김홍집을 가로막았다. 국왕이 언더우드의 의사를 따르겠다고 하자, 관료들은 사태가 진정되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총소리를 신호로 춘생문 쪽에서 일제히 무력침공이 개시되었으나 사전에 외부대신 김윤식은 중추원 의관 안경수에게서, 탁지부 대신 서리 어윤중은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에게서 미국의 왕궁 습격 음모책동을 통보받고 경비를 강화하고 있었다. 경복궁 공격에 동원된 병사들은 어윤중의 호소를 듣고 친미분자들의 기만술책에 속았다는 것을 깨닫자 일제히 공격을 중지하였다. 이렇게 미국의 경복궁 습격과 고종 납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경복궁 습격이 실패하자 미국은 미국 공사관에 도망친 주모자를 상해에 피신시키려는 현지 공사관의 계획을 부결하면서까지 미국 관여 사실을 한사코 부정하였다. 이 사건은 을미사변으로 일시 타격을 받은 일제가 역공을 펼치고 기세를 만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의 만주 진출을 둘러싼 일·미·영의 연합전선 형성

19세기 말이 되면 공업생산이 유럽보다 앞서게 된 미국은 식민지 초과이윤을 얻기 위한 상품시장으로 만주 진출이 절실했다. 그러나 의화단 폭동진압 후 동북아시아에서 러시아의 힘이 급속히 강화되자, 미국의 만주 진출은 만만치 않았다. 3국 간섭으로 일본이 요동 반도를 내놓게 한 러시아는 1898년 요동반도를 타고 앉았으며, 의화단 폭동진압 후에는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철수하지 않은 채 만주를 강점하였다. <문호개방>과 <기회균등>을 내걸고 세력권을 넓히려고 한 미국으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조선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는 일본을 적극 지지하면서,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내몰아 러시아를 약화시키는 전략을 추진한다. 미국은 고종이 환궁한 이후 조선에서 강화되는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각방으로 책동하였으며 러시아를 반대하는 일제의 전쟁 준비를 돕는 방향으로 나갔다.

오래 전부터 러시아와 대결하던 영국도 일본을 지지하는 동맹자가 되었다. 이 시기 영국은 북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 분할에 몰두하고 있어, 러시아의 만주 침략에 대응할 형편이 아니었다. 이런 조건에서 영국은 의화단 폭동진압 시 큰 공을 세운 일본을 러시아를 견제하는 동맹자로 인식하게 되었고 일제를 러시아를 견제할 돌격대로 세우기 위하여 1902년 1월 30일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영일동맹 체결되자, 미국무장관 헤이 등은 <극동에서 미국의 산업과 상업을 대대적으로 발전시키는 중요한 담보가 마련되었다>고 만족해하였다. 이제 일본은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저지시키며 조선을 강점하기 위한 러·일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일본의 러·일전쟁 도발을 부추기고 지원하면서 일제의 조선강점을 엄호한 미국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조선 정부는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하여 중립을 선포하려고 하였다. <한일의정서> 조인 예정 전날인 1904년 1월 21일, 고종의 명을 받은 이용익, 현상건 등이 청나라에서 조선의 중립선언을 발포함으로써, 조선의 <엄정중립> 의지를 세상에 공개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의 <중립화 안>과 관련하여 소집된 서울주재 각국 외교대표 회의에서 조선 정부가 미국의 찬동을 부탁하자 냉담하게 거절하였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국은 ‘일본에 호의적일 것’이라면서 일본의 전쟁 도발을 공개적으로 부추겼으며 독일과 프랑스가 러시아 편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경고까지 하였다. 아무런 기초도 없이 발표된 조선의 중립선언은 점차 유명무실한 것으로 되어갔다. 일본은 조선의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1904년 2월초 인천과 여순항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불의에 공격하여 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하였으며 2월 10일에는 선전포고를 하고 2월 23일에는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였다.

미국은 전쟁과 관련하여 일본에게 막대한 차관과 무기, 군수 기자재들을 공급해주었다. 이미 1904년 1월에 육군장관 태프트를 일본에 파견하여 군사적 지원 강화를 약속한 미국은 영국과 함꼐 일본의 총 전쟁비용 17억 원 중에서 8억 원을 보장해주었다. 미국의 한 신문은 《미국의 원조가 없이는 일본의 재정계획이 파탄했을 것이며 전쟁 자체도 수행하지 못했을 것 》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외에도 러·일 전쟁 시기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데 필요한 《국제적 담보》를 마련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영국이 일본과 <제2차 영일 조약>을 맺도록 막후 활동을 벌렸다.

▲ 포츠머스 강화조약 체결 장면
▲ 포츠머스 강화조약 체결 장면

미국은 <러·일 강화 회담(포츠머스 조약)>에서 일본의 요구를 실현시켜주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루즈벨트는 일본의 강화조약 초안에서 일본의 강화조건에 조선통치권을 포함되어있는 것을 보고 적극적으로 동의했으며, 담판이 시작된 다음에는 일본의 안을 관철을 위한 막후조종을 벌렸다. 러·일 강화 회의에 조선 정부 대표가 참여하겠다고 제기하자, 단호하게 거절한 것을 보아도 조선의 통치권을 일본에게 넘겨주려는 미국의 저의를 알 수 있다.

미국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독점 보호권을 <조약의 형식>으로 실현하며 만일 조선 정부가 <조약> 체결에 응하지 않으면, ‘조약은 체결되었다’라고 선포하여 기정사실로 만들겠다는 일본의 계획을 무조건 지지해주었다. 러·일 강화회담이 끝난 직후인 9월 9일에 일본 전권대표 고무라는 주미일본 공사 다까히라와 함께 백악관을 방문하여 이 같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계책을 건의하여 루즈벨트로부터 ‘마음대로 하라’는 조건 없는 승인을 받았다.

<을사조약>을 지지환영한 미국

미국은 <을사조약>이 발표된 후 제일 먼저 공사관을 철수시킴으로써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되었다는 것을 세상에 널리 공표해주었다. 당시 미 국무장관이였던 푸트는 조선 국왕이 <조미수호조약>에 의거하여 미국에 《주선》과 《원조》를 요청하려고 파견한 특사를 만나주지도 않았으며 나중에는 <한국 정부가 1904년 2월 23일 일본과 맺은 한일의정서, 또 8월 22일 맺은 한일협약서>를 통해 <일본에 많은 특권을 주었고, 조선 스스로 일본 정부의 완전한 보호 밑에 들어간 만큼> 이제 와서 <조미조약의 조항들을 적용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면서 일제의 조선강점을 비호하고 두둔하였다.<계속>

 

신냉전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한미일 군사협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얼마 전 프놈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프놈펜 성명은 한미일 군사협력을 사실상 군사동맹수준으로 격상시킨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19세기 때부터 한반도 침략을 위해 결탁해왔다. 서세동점의 구한말 시대, 냉전이 시작되던 시대 등 국제질서와 아시아 질서 변동기 때마다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와 아시아 침략과 지배를 위해 결탁했으며 그 결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결국 한미일 군사협력과 군사동맹은 미일 침략 세력에게 침략의 문을 더 크게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 침략을 위한 미일 결탁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 한미일이 추진하는 군사동맹의 본질과 성격, 그 목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막는 투쟁을 조직하는 데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이에 본지는 김이경 남북역사교류협회 상임이사가 작성한 소중한 원고를 연재한다. 연재는 다음과 같은 순서도 게재될 것이다.<편집자주>

조선의 대일 교린 외교와 19세기 일본의 위기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1

메이지 정권의 정한 외교와 조일 국교단절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2

조선 침략을 위한 미국의 국가정책 - 미국의 조선침략 1

186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조선침략 - 미국의 조선침략 2

1871년 조미 전쟁(신미양요) - 미국의 조선침략 3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은 미일의 조선 침략이다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1

음융한 계책으로 조미통상조약 맺은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2

조선침략을 둘러싸고 본격화되는 미일의 공모결탁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3

청일전쟁을 준비하는 미일의 공모결탁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4

일본의 청일전쟁 도발과 미국의 전폭적 지원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5

청일전쟁 이후 일제의 조선강점을 백방으로 지원한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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