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침략 미일결탁의 역사 ④

《제너럴 셔먼》호의 조선침략
1866년부터 미 의회에서 조선 침략방안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프랑스가 조선의 가톨릭 탄압을 핑계로 조선 침략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미국은 프랑스에 조선 침략 포기를 종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급해진 미국은 프랑스보다 한발 앞서 남북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군함 《제너럴 셔먼》호를 조선에 파견한다.
《제너럴 셔먼》호는 미군 장교 프레스턴의 개인 무역선으로 등록한 뒤 1866년 6월 천진에서 영국 목사 토마스를 채용하였다. 7월 7일 대동강 앞바다에 들어왔다. 정체불명의 이양선이 나타나자, 조선은 관리를 보내 ‘국적과 대동강에 들어온 목적을 밝히라’고 하였다. 《셔먼》호 선장 프레스턴은 여러 국가의 사람들로 평양행이 목적이라고 답했다. 입국 허락을 구할 생각은 않고, ‘평양 산천은 어떤가? 당신네 나라 보물이 어디에 많은가’라고 거드름을 피웠다. 또 “우리나라 사람 7명이 왜 당신네 나라에서 죽었는가!”고 마치 프랑스인처럼 굴면서, 총을 내보이며 위협하기도 했다.
그들은 대동강을 올라가며 온갖 협박과 대포 사격 등 군사행동, 약탈, 납치를 감행한다. “종이, 쌀, 금, 인삼, 털가죽 같은 조선 특산물을 서양 옷감, 유리그릇과 바꾸자! 거부하면 수도까지 가서라도 장사를 한 다음에야 돌아가겠다. 누가 감히 우리를 막는가! 평양으로 갈 것이다”라고 윽박질렀다. 12일 평안감사 박규수가 사람을 보내 담판하려 했지만, “부식을 내놔라. 평안감사를 만나야겠다. 군함 8척이 조만간 서울 근처에 올 텐데, 중국도 제압할 수 있는데, 하물며 조선 같은 작은 나라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않다!”라며 행패를 부렸다.
15일은 보트로 만경대에 상륙, 지형을 정찰하다가 군사적 저지를 받고 쫓겨났다. 18일에는 불법적 수심 측량을 막으려던 중군(중대장)을 납치하고 중군과 함께 있는 군사를 죽이는 만행을 벌렸다. 19일 중군 이현익을 돌려받기 위한 회담이 열렸지만, 평양성에 들여보내 준 이후에나 석방하겠다며 쌀 1,000석과 많은 양의 금, 은, 인삼 등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다. 자신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평양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과 대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20일에는 《셔먼》호를 양각도 서쪽 여울목에 정박시키고 어선들을 납치하고 살육하였다.
19일 아침이 되자 평양 민중들이 격분을 이기지 못하여 앞을 다투어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돌멩이를 마구 던지고 고함치며 화살을 쏘자, 적들은 도망쳐서 배가 있는 데로 돌아갔고, 양각도 아래까지 물러갔다. 프레스톤 일당이 놀라 허둥대는 사이, 퇴역군인 1명이 단신으로 배에 들어가 억류되어있던 중군을 구출했다.
이때 민중들은 《셔먼》호 격멸을 위한 창발적인 전법을 제기했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한 대동강에 불 배를 이용하여 《셔먼》호를 태워버리는 화공전술이었다. 22일 프레스톤 일당은 조선 불 배들의 공격을 받자 뒤로 물러섰지만, 여울에 걸려 꼼짝할 수 없게 되어, 이틀 후에나 빠져나와 뒤로 후퇴한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평양 민중들은 《셔먼》호가 다시 여울목에 걸린 기회를 이용, 24일 대대적인 화공전을 펼쳤다. 배들을 총동원하여 연결하고 나무를 싣고 유황을 뿌린 다음, 불을 붙여 띄워 보냈다. 동시에 온 성의 민중들과 군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힘을 다하여 공격하였다. 배에 불이 옮겨붙자 토마스와 중국인 조능봉이 뱃머리에서 생포되어 모래사장으로 끌려 나와 성난 군중에게 맞아 죽는 등 20명이 사망했다. 《셔먼》호는 창고에 적재되어 있던 화약이 폭발함으로써 대동강에 수장되고 말았다.
《셔먼》호의 침략, 즉 미국의 첫 조선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외세의 횡포를 응징하겠다는 결심과 대동강의 특성을 잘 아는 평양 민중의 슬기로운 전술 때문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근대 함선과 무기에 짓눌리지 않고 투쟁한 그들의 서슬 퍼런 결심이 없었으면 조선의 운명이 어찌 되었을지 아찔한 순간이었다.

《셔먼》호 사건 이후, 무덤까지 도굴하는 파렴치한 미국의 범죄
《셔먼》호 소식을 궁금해하던 미국은 그해 8월 말 프랑스인들로부터 대동강에서 서양 배 1척이 불에 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미국은 《셔먼》호로 단정하고 조선을 굴복시킬 구실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청을 통해 조선에 《셔먼》호 행방과 선원들을 돌려보내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조선으로부터 그것은 영국 배이며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는 답신을 받았다. 미국은 이번에는 《셔먼》호 행방을 직접 알아본다며 《와츄세트》호를 황해도 앞바다로 불법 침입시켜, 5일간 해안 일대를 정찰한 후 돌아갔다.
《와츄세트》호의 정찰로도 조선을 굴복시킬 명분을 찾지 못하자, 상해 미국 총사령관의 통역 젠킨스가 해괴한 계획을 제출한다. 조선인에게는 조상숭배에 대한 미신이 완고하므로 대원군 아버지 무덤의 매장물을 손에 넣고 협박하면 미국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이를 승인하고 젠킨스에게 ‘첫째 《셔먼》호 승무원 중 생존자는 구할 것, 둘째 《셔먼》호 배상금을 받아낼 것, 셋째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조약을 체결할 것’을 지시하였다. 만일 조선이 도굴 후에도 협상을 거부한다면 대규모적 무장간섭을 협박하라고 하였다. 미국은 젠킨스를 총책임자로, 조선에서 10년간 활동한 프랑스 신부 페론을 통역으로, 독일계 상인 오페르트를 비롯한 140여 명으로 된 도굴단을 조직하고 선박 등 일체를 지원해주었다. 이 사건은 「독일계 오페르트」와 「프랑스 신부 페론」을 주범으로, 미국인 젠킨스가 자본을 댄 『국제도굴단』으로 알려졌지만, 미군 통역사였던 젠킨스에게 자본이 있을 리 없다. 유럽 각국 출신들을 끼어놓음으로써, 미국의 소행을 은폐하려는 술수였다.
미국은 젠킨스 일당을 보내기 직전, 별도로 군함 《셰난도어》호를 조선에 보냈다. 《셔먼》호 사건조사를 구실로 소동을 벌이면서 대동강 일대에 이목을 집중시켜 놓고, 그 사이에 남연군묘 도굴을 성공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군함에는 1문의 대구경포와 8문의 대포가 설치되었으며 230명의 미군이 타고 있었다. 1868년 3월 18일 《셰난도어》호는 오리포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그들 중 20여 명이 상륙하여 만나는 주민들에게 닭, 돼지, 양 등을 요구하였고 5명은 마을로 가서 약탈하였다.
21일 조선 수군 방어사가 배에 접근하자, 대포를 쏜 후, 다시 상륙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서울까지의 거리, 알곡과 목화 산지 등을 물어보고, 기독교 유인물을 던져놓고 돌아갔다. 25일 미군은 《셰난도어》호로 조선 관리를 끌고 가, 총포로 사격을 가하며 협박하였으나 대동강 수심이 낮아 큰 배가 항해할 수 없다는 답을 들을 뿐이었다. 26일에는 편지를 보내, ‘대동강에서 없어진 배를 조사하기 위하여 정부의 지시로 왔다면서 우의를 두텁게 하려는 것이니 귀국 왕이 잘 의논하여 두 나라가 화목하게 지내기 바란다.’라고 떠벌렸다.
미국의 파렴치한 행위는 조선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의병대들이 모여들었으며 민중들은 투쟁에 나섰다. 대동강 연안 요충지에는 방어진지가 꾸려졌다. 《셰난도어》호는 결국 철도포대에서 경고 사격을 받고 평양 침입을 포기한 후 4월 1일 안악 경내로 물러섰다. 4월 8일 비련도에 상륙, 대원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만일 자신들이 《셔먼》호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다면 대규모적인 무력간섭이 있을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그들은 그 후에도 20여 일 동안 우리 연안을 측량하는 불법행위를 계속하였다.
《셰난도어》호가 남포 앞바다에서 소동을 피우는 사이, 젠킨스 일당은 680톤급의 《차이나》호를 타고 아산만에 들어왔다. 4월 18일 홍주 행담도에 들어온 젠킨스 일당은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하였다. 은신 중이던 카톨릭 신자의 안내를 받으며 러시아 군대로 가장하여 관청을 습격한 다음 남연군의 묘로 쳐들어갔다.
이를 본 민중들은 호미와 괭이를 들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들은 총, 칼을 휘두르면서 민중들의 반항을 제압하고 묘를 마구 파헤치기 시작하여, 다음 날 새벽에는 묘의 한 귀퉁이를 파헤칠 수 있었다. 그러나 썰물 시간이 다가온 데다, 조선군이 몰려오면 생명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그들은 갑자기 허겁지겁 도굴을 포기하고 도망가고 만다. 젠킨스 일당은 도굴 실패 분풀이로 4〜5호 밖에 없는 덕산군 후포 마을로 들어가 약탈한 후 22일 영종도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여기서 프러시아 수군 제독 명의로 대원군에게 협박장을 보냈다. 이번에는 무덤도굴을 도중에 그만두는 정도로 그쳤지만, 전쟁이 두려우면 조선은 협상에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영종첨사는 이들을 엄중히 꾸짖으며 물러가기를 종용하는 편지를 보낸다. 젠킨스 일당은 분풀이로 4월 25일 영종진을 공격하였지만, 조선 군사들이 그들 중 2명의 목을 잘라 동쪽 성문에 달아매고 공포를 주자 상해로 달아났다, 《차이나》호에 기대를 걸고 황해도 연해를 다니며 소동을 부리던 《셰난도어》호도 상해로 도망갔다.<계속>
신냉전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한미일 군사협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얼마 전 프놈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프놈펜 성명은 한미일 군사협력을 사실상 군사동맹수준으로 격상시킨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19세기 때부터 한반도 침략을 위해 결탁해왔다. 서세동점의 구한말 시대, 냉전이 시작되던 시대 등 국제질서와 아시아 질서 변동기 때마다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와 아시아 침략과 지배를 위해 결탁했으며 그 결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결국 한미일 군사협력과 군사동맹은 미일 침략 세력에게 침략의 문을 더 크게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 침략을 위한 미일 결탁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 한미일이 추진하는 군사동맹의 본질과 성격, 그 목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막는 투쟁을 조직하는 데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이에 본지는 김이경 남북역사교류협회 상임이사가 작성한 소중한 원고를 연재한다. 연재는 다음과 같은 순서도 게재될 것이다.<편집자주>
조선의 대일 교린 외교와 19세기 일본의 위기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1
메이지 정권의 정한 외교와 조일 국교단절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2
조선 침략을 위한 미국의 국가정책 - 미국의 조선침략 1
186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조선침략 - 미국의 조선침략 2
1871년 조미 전쟁(신미양요) - 미국의 조선침략 3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은 미일의 조선 침략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1
음융한 계책으로 조미통상조약 맺은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2
갑오농민전쟁부터 청일전쟁까지의 미국의 역할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3
러일전쟁 전후 일본의 조선강점 후원한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