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침략 미일결탁의 역사 ②

메이지 정권의 정한 외교

막부 정권이 조선통신사 접대 비용을 다이묘들에게 전가하면서 유포시켰던 <조선멸시론>은 조·일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더 강화된다. 일본의 대표적인 국수학자 ‘나카이 지쿠잔’은 <일본서기>의 허황한 내용을 신봉하면서 ‘예로부터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었으므로 조선통신사를 지금처럼 국빈 환대할 필요가 없다.’라면서 조선에 대한 적대 정책을 막부에 건의했다.

막부 말기에 본격적으로 제기된 <조선멸시론>은 메이지 정권 초기에 <정한론>으로 급속히 발전한다. 1867년 1월 청나라 광저우에서 발행한 『중외신문』에 하찌노헤라는 일본인이 <정한론>을 주장하는 글을 실어 당시 중국과 조선의 정국을 혼란 속에 몰아넣기도 했다. 이 기사의 내용은 현대적 용어로 보자면 완벽한 가짜 뉴스로 외교 마찰을 만들려는 의도였다.

‘일본은 군제를 개혁하여 신형 병기와 군함을 구입, 제조 중이며 이미 화륜병선(火輪兵船) 80척을 확보했다...... 막부는 260명의 제후를 에도로 결집시켜 조선을 정벌하려는 중이다. 일본이 조선을 정벌하려고 하는 것은 조선이 5년에 1회 시행하던 조공을 폐지한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이다.’

정한론(征韓論)은 고대 일본의 신공왕후가 삼한(三韓)을 정복했다는 <일본서기>의 전설에 기초한 것으로, 한반도를 정벌하여 일본의 국력을 배양하자는 주장이다. 막부 말기, 사회 계급적 및 민족적 위기가 첨예화됨에 따라 일본 각지에서 사무라이 출신의 이른바 우국지사들이 출현한다. 그들은 조성된 위기를 조선을 정복하는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정한론>은 <정한 외교>로 발전된다.

▲ 일본은 야마토 시대의 신공황후가 조선 남쪽으로 쳐들어오자 삼한이 항복했다고 가르친다.
▲ 일본은 야마토 시대의 신공황후가 조선 남쪽으로 쳐들어오자 삼한이 항복했다고 가르친다.

메이지 정권 성립 직후,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정한 외교>를 확산시켰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불철저한 근대 혁명인 <메이지 유신>으로 정권을 잡은 사무라이 출신의 군벌과 관료들은 자본주의를 강행 발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통치체제를 군국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상황은 메이지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광범한 사무라이들이 기존의 특권적 지위를 부정했기 때문에, 그들이 반정부 역량으로 대두할 우려가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이러한 사회정치적 위기의 출로를 <정한 외교>의 간판 밑에 조선 침략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둘째, 메이지 정부는 일본 자본주의를 위한 원시적 축적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는 군사 무력 근대화와 관료 통치기구의 정비에 필요한 방대한 자금을 조선 침략과 약탈로 해결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메이지 정부는 서양 열강에 의한 반식민지적 예속상태에서 벗어나 부국강병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조선 침략>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서양 열강 세력을 내쫓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당시의 메이지 정부로서는 그 출로를 ‘큰놈을 등에 업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일찍이 <정한론>의 광신자 요시다 쇼인은 “러시아, 미국과 강화조약을 맺은 이상 결코 그를 파기하여 신용을 잃을 것이 아니라 규범을 엄격히 지켜 그들과의 신의를 강화할 것이다. 그 사이에 국력을 길러 빼앗기 쉬운 조선, 만주, 청나라를 종속시킬 것이며 교역을 통해 러시아와 미국에 빼앗긴 손실을 조선과 만주영토를 빼앗아 내는 것으로 보상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즉 <정한 외교>의 목적은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 무력침공의 구실을 만들고, 그 구실을 핑계로,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 실현의 길을 터놓자는 것이었다. <정한 외교>의 첫 시작은 1868년 11월에 쓰시마번의 히구치 데츠시로였다. 그는 조선에 일본 왕정복고를 알리는 서계를 가지고 부산 왜관에 와 조선 정부와 공식적인 접촉을 했다.

이 접촉에서 일본은 그동안 합의되었던 문서 격식을 무시하여 조선 관리가 서계 접수를 거절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조·일간의 합의된 교섭방식은 쓰시마 도주가 조선 국왕이 보낸 도장을 찍은 문서를 보내야만 접수되는 방식이었다. 조선 국왕이 쓰시마 도주에게 주었던 도장은 일종의 신임장인데, <일본>이라는 도장이 찍힌 문서를 조선 정부에 제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쓰시마 도주의 명의로 보내기는 했지만, 쓰시마 도주로서 보낸 것이 아니라 일본 관리의 직함을 뒤에 달아, 수백 년을 내려오던 교린 외교의 형식을 일방적으로 무시한 서계였다.

일본의 외교 도발과 조일 국교 단절

이 서계는 단지 격식을 깬 것만이 아니었다. 일본 왕을 천황으로, 조선 국왕을 왕으로 호칭함으로써, 일본 왕의 격을 조선 왕보다 더 높여서 호칭하였다. 이는 종전의 조·일 교린 관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조선을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려는 도발 행위였다. 조선은 서계 접수를 거절하였으며 조·일 관계에 예전에 없었던 긴장 상태가 조성되었다. 이것이 일본 정부의 의도적인 도발이었다는 것은 이 접촉이 있기 닷 새 전인 1868년 12월 14일 일본 참의(메이지 정권에서 차관급에 해당하는 직책) 기도 다카요시가 의정관 이와쿠라 도오미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최대의 당면과업은.....사절을 조선에 파견하여 그들의 무례함을 문책할 것이며 만일 그들이 불복할 때에는 죄를 뒤집어씌워 공격함으로써 일본의 위력을 뻗쳐주기 바란다.’

위에서 말한 메이지 정권 출범 후 조·일 정부 사이의 첫 공식접촉은 12월 19일이었다. 그런데 조·일간의 공식접촉이 진행되기도 전인 12월 14일에 기도 다카요시가 ‘조선 정부의 무례함을 문책하여야 한다.’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일본은 조선 정부가 일본에게 불복할 것을 예측하고 꾸며낸 모략 도발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은 그 후에도 외교관례에 어긋나는 서계를 계속 들이대면서 조선 정부를 굴복시키려고 하였지만, 대원군 정권의 완강한 태도로 실패했다. 이듬해 1월, 일본은 외무성의 모리야마를 조선에 보내 추후 조일 외교를 외무성이 주관하겠다고 통고하였다. 조선은 이를 묵살하였고, 외교적으로 조선을 굴복시키려던 일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렇게 되자 일본 정계에서는 당상 조선을 침략하자는 조선 침략방안이 거듭 상정되었다. 1870년 <사다 하쿠보의 조선침략 방안>, <참의 기도 다카요시의 조선출진 의견서>, <외무성 관리 야나기와라 의견서>, 사이토 등 조선 사절단의 연명으로 낸 <정한건의서> 등이 그것이다. 이 문서들은 무력으로 조선을 정복하자는 주장이었다. 일본은 외교적으로 조선을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무력침공으로 조선을 항복시키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참고 - 이 시기는 미국의 <1871년 조미 전쟁>에서 실패하자, 일본이 <이와쿠라 사절단>을 미국에 보내 <미·일 결탁>을 시도하던 때와 일치한다.)

1872년 8월 18일 천황의 명령으로 일본 외무성 관리 하나부사에게 부산 왜관을 접수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는 불법이었으며 조·일 관계를 더 첨예한 단계로 몰아가려는 도발이었다. 부산 왜관은 조선의 소유였다. 왜관을 세운 것도, 또 식량을 대준 것도 모두 조선이었다. 조선 정부는 부산 왜관을 쓰시마 도주, 또 도주가 보내는 관리, 상인만 사용할 수 있도록 운영권을 준 것이지, 소유권을 포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일본 외무성이 쓰시마번으로부터 왜관을 접수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날강도 같은 짓이었다.

1872년 9월 하나부사는 군함 <가스가>호와 기선 <유코마루>에 보병 2개 소대를 싣고 부산 왜관에 들어왔다. 그는 쓰시마 도주가 파견하여 왜관에서 일하던 쓰시마섬 관리들을 파면시키고 일본 외무성 관리들로 교체하였다. 이렇게 왜관을 강점한 후 다음 해 2월, <대일본 공관>이라는 간판까지 걸었다. 일본은 제 소유물도 아닌 왜관을 점령하고 간판까지 내거는 동시에, 종래의 공무역에서 남아있는 부채까지 잘라먹을 흉계까지 꿈꾸었다.

조선 정부는 왜관에 철공철시(물자 공급중지)로써 대응하였다. 조선 정부의 조치로 왜관이 봉쇄되자 1872년 9월 말 하나부사 일행은 더 머물 수 없어,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부터 조선과 일본과의 합법적이며 공식적인 외교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사실상 국교단절상태에 들어갔다.<계속>

신냉전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한미일 군사협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얼마 전 프놈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프놈펜 성명은 한미일 군사협력을 사실상 군사동맹수준으로 격상시킨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19세기 때부터 한반도 침략을 위해 결탁해왔다. 서세동점의 구한말 시대, 냉전이 시작되던 시대 등 국제질서와 아시아 질서 변동기 때마다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와 아시아 침략과 지배를 위해 결탁했으며 그 결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결국 한미일 군사협력과 군사동맹은 미일 침략 세력에게 침략의 문을 더 크게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 침략을 위한 미일 결탁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 한미일이 추진하는 군사동맹의 본질과 성격, 그 목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막는 투쟁을 조직하는 데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이에 본지는 김이경 남북역사교류협회 상임이사가 작성한 소중한 원고를 연재한다. 연재는 다음과 같은 순서도 게재될 것이다.<편집자주>

조선의 대일 교린 외교와 19세기 일본의 위기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1

메이지 정권의 정한 외교와 조일 국교단절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2

조선 침략을 위한 미국의 국가정책 - 미국의 조선침략 1

186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조선침략 - 미국의 조선침략 2

1871년 조미 전쟁(신미양요) - 미국의 조선침략 3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은 미일의 조선 침략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1

음융한 계책으로 조미통상조약 맺은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2

갑오농민전쟁부터 청일전쟁까지의 미국의 역할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3

러일전쟁 전후 일본의 조선강점 후원한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4

관련기사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