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32)
어느덧 4050 나이에 접어든 벗들이여, 수많은 아픔과 패배의 기억도 있지만, 한총련 세대의 경험은 조국과 동지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자산’이다. 우리는 이 자산을 키워,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
강경대, 박승희가 떠난지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까. 3가지 과제를 함께 하자고 제안하며, 글을 마친다.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제3부. 1991년~1997년 학생운동 흐름 및 주요 사건
제5부 90년대 학생운동, 무엇을 남겼나? 성과와 한계
<마치며> 강경대 박승희가 떠난지 30년, 무엇을 할까
<마치며> 강경대 박승희가 떠난지 30년, 무엇을 할까
한총련 세대의 경험은 ‘아픔’이 아닌 ‘자산’
필자는 96년 연세대항쟁을 거친 후, 바로 대학을 졸업했다. 연희동 골목에서 붙잡혀 서대문경찰서에서 풀려난지 이틀만에 코스모스 졸업을 하고, 학생운동 조직에서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리고, 97년 투쟁은 대학생이 아닌 시민의 입장에서 바라보았고, 한총련의 시련을 보며 ‘우리는 왜 패배하였나?’ ‘우리가 학생운동을 망친 것인가?’ 하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학생운동이 확연히 꺾인 후배세대들을 보며 조금 원망했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깨달았다. 어린 시절 518항쟁을 경험하고, 87년항쟁 이후 뜨거웠던 시절에 10대 후반과 20대를 보낸 우리 세대의 경험은 너무도 특별하다는 것을... ‘대학생은 데모하는 것이 당연하다’ 는 생각도 특별한 역사적 시기에 만들어진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른 맥락으로 우리의 청춘시절을 돌아보니, 90년대라는 시공간 속에 한총련이 있고, 그 속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럽고, 함께 했던 수많은 동지들이 너무나 소중하다.
이제 어느덧 4050 나이에 접어든 벗들이여, 수많은 아픔과 패배의 기억도 있지만, 한총련 세대의 경험은 조국과 동지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자산’이다. 우리는 이 자산을 키워,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
강경대, 박승희가 떠난지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까. 3가지 과제를 함께 하자고 제안하며, 글을 마친다.
민족민주운동의 서사구조를 다시 짜자
우리 사회 주류에서 민족민주운동 역사를 바라보는 통념은 ‘민주화 운동’이라는 틀로 폭을 좁힌 후, 87년 6월항쟁을 민주화 운동의 절정으로 기록하고, 노태우 정권이라는 과도기를 거친 후, 93년 문민정부 탄생과 함께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사를 1919년 삼일독립항쟁과 봉오동-청산리전투,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어지는 민족주의계열의 활동만 기록하고, 사회주의와 아나키스트 계열의 투쟁 및 만주지역의 항일빨치산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축소한 것과 비슷하다.
필자는 이러한 ‘민주화운동에 대한 통념’을 거부하고 민족민주운동의 서사구조를 다시 짜자고 주장한다.
87년 6월항쟁은 제한된 승리로, 청년학생들과 민중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곳곳에서 싸웠다. 특히, 91년 오월투쟁은 노태우 정권의 강경대 폭력살인 만행을 계기로, 6월항쟁에 대한 반동 체제인 민자당을 거부한 투쟁으로, 90년대 학생운동과 민족민주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93년 출범한 김영삼 정권은 초기 군부독재 청산작업에 나섰으나, 94년 조문파동 이후 민족 대결 정책으로 돌아섰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몰아가다가 IMF 국난을 불러왔다. 97년 수평적 정권교체는 IMF체제로 경제주권을 빼앗겨 절반의 승리로 끝났다. 한총련은 90년대 중후반 팽배했던 개량주의 흐름을 물리치고, 자주 민주 통일의 원칙을 지키며 싸우다가 부서졌다.
87년 6월항쟁 신화에서 벗어나야한다. 518항쟁은 80년 5월 27일 끝난 것이 아니라, 95년 전두환-노태우를 처벌할 때까지로 인식을 넓히고, 민주화운동 역사는 87년 또는 93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98년 수평적 정권교체까지로 확장해야 한다. 다음으로, 절차적인 민주화를 뛰어넘어 경제적, 사회적 시스템을 바꾸고자 했던 변혁운동 및 계급계층운동, 시민사회운동도 제대로 기록하고 평가해야 한다.


지난 2021년 610항쟁 기념식 자리에서, 강경대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되었다. 너무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87년에만 묶여있다고 비판받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나보다. 이제 90년대 투쟁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고 있는 듯 하다. 벗들이여, 조금만 힘을 더 모아보자.

자주통일운동은 민주화운동의 하부 영역이 아닌 독립 영역으로 제대로 기록해야 한다. 자주통일운동은 ‘88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96년 연세대 항쟁으로 고난의 시기를 거쳤으나, 2000년 615선언을 통해 도약하고, 2020년대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으로 꽃을 피웠다’고 쓰여져야 한다.
2021년 610항쟁 기념식에서 강경대와 함께 조성만에게도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되었다. 88년 ‘독재타도를 넘어 자주통일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밝혔던 조성만 열사에게 훈장이 수여된 것은, 자주통일운동에 대한 국가 차원의 재평가가 시작된다는 반가운 신호라고 본다. 여기에도 힘을 모으자
한총련 세대의 기록을 남기자
두번째 과제는 우리 세대의 진짜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제1부 4장, 한총련 명예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부분에서 기록을 남겨야 하는 이유는 자세히 밝힌바 있다.
필자는 총학생회에서 활동했던 95년과 96년 자료를 플로피디스크로 수십년간 보관하고 있었다. (3.5인치 플로피디스크. 요즘 세대는 박물관에서나 구경할 희귀템이다) 언젠가 우리 세대의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명박근혜 정권이 이어지고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 사태를 보며 한동안 꿈을 접었다. 그런데,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2016년 촛불항쟁과 2018년 남북회담과 북미회담이 이어지며, 기회가 왔음을 느꼈다. 당시 활동했던 주체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평가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시간이 너무 지체되는 것 같아, 일단 개인적인 기록부터 먼저 내놓는다. 벗들과 후배들의 기록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
지난 2017년에 6월항쟁에 앞장섰던 전남대 선배들이 모여 ‘전남대6월항쟁동지회’를 결성하고,자료수집과 집단토론을 거쳐, 출판위원회를 만든 후, 2021년 전남대 6월항쟁사 ‘아! 다시 부르는 청춘의 노래’라는 책을 출판한 사례가 있다. 필자의 이번 작업은 개인적인 기록이지만, 선배들의 작업은 조직적이고 집단적이다.

오월대 동우회, 녹두대 동우회 벗들이여. 모여서 체육대회 하고, 술 한잔 마시는 것도 좋지만, 자료를 모으고 기록을 남기시라. 각 대학의 민주동우회 벗들이여, 기록을 남기자. 기록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다. 필자가 앞에서 제안했던 ‘연세대항쟁동지회’를 만들고 한총련 세대의 기록과 기억을 모아보자.
90년대 기억을 복원하고 돌아보는 것은, 새로운 한반도 질서가 만들어지는 오늘, 우리 사회 진보의 상상력을 넓혀줄 것이다. 언제까지 우리의 진보 모델을 노무현 정부에서 찾고, 유럽에서 찾을 건가. 우리는 이미 더 큰 진보를 만들고 직접 운영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자주의 정치세력’을 만들자
필자의 증조부는 1919년 삼일독립항쟁 당시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벌이며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가 ‘보안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왜놈들의 감옥에서 1년6개월간 옥고를 치루셨다. 75년의 세월이 지난 후, 증손자들이 미국과 분단체제에 저항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한명은 2년간 감옥에 갇혔고, 동생은 재판정에 끌려갔다. 그리고, 필자의 딸이 대학에 입학할 만큼 세월이 또 흘렀지만,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살아있다.
필자는 우리 사회가 진보와 보수, 또는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이 힘을 쓰고, 반북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좌파’란 말이 성립하나? 삼일절과 광복절에 성조기와 일장기를 흔들며, 한미일 공조를 외치는 세력은 ‘토착왜구’가 정확한 개념이지, 어떻게 ‘보수’라고 부른단 말인가?
미국과 중국이 서로 자기들 밑으로 줄서라고 강요하는 지금, 남측은 ‘숭고한(?) 한미동맹’을 따르고, 북측은 중국-러시아와 공조한다면, 우리 땅은 미국과 중국이 부딪히는 대결의 땅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친미파나 친중파가 아니라, 민족의 이익을 중심으로, 민족공조를 통해, 평화와 번영, 통일을 만들어 나갈 ‘자주의 정치세력’이다.
그런데, 자주의 정치세력이 필요하다는 것 잘 알고 있고,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고? 기다리기만 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자주의 정치세력,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한총련 세대 우리가 직접하자.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우리의 숙명인 듯 하다.
강경대, 박승희의 벗이 90년대 학생운동을 이야기한 개인적인 기록을 마친다.
내가 먼저 한총련을 소환했으니,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 벗들이여, 응답하라.
응답하라, 한총련
다시쓰는 90년대 학생운동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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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90년 91년 5월 광주 투쟁들은 지금도 생생히 와닿습니다.
정말 외 혁명이 광주라 불리는지 이 시기에 알았습니다. 오월대, 녹두대의 활약상은 눈부셨죠. 강열사 노제를 금남로에서 치룬 것도 오월대 녹두대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셔 반드시 한총련의 명예회복은 될 것이라 믿습니다. 반드시 그리 되어야 하구요.
그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