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의 이념과 실제] (5) 소비에트 국가사회주의의 발전①

1924년 1월, 레닌이 사망하였다. 그가 유산으로 남겨놓은 것은 러시아볼쉐비키공산당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즉 소련이라는 국가체계였다. 당 지도부에서는 대립과 반목이 심화되고 있었고, 나라 경제가 소생되고 있었으나 인민들의 생활은 혁명 전 수준에 한참 미달되었다. 1923년 4월 제12차 당 대회에서 G. 지노비예프가 나라의 경제상황을 총괄 보고하였다.

“1922년에 우리는 농업에서 전전(戰前) 시기 평균수확량의 약 3/4을 달성했습니다. 공업은 전전 시기의 25%에 해당하는 생산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대외무역은 전전 수지의 14% 수준입니다. 노동생산성은 약 60%, 임금은 전전의 약 50% 수준입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СССР) 수립

10월혁명 이후 레닌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국가체계 구성을 서둘렀고, 스탈린에게 그 임무가 맡겨졌다. 스탈린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발흥을 우려하던 레닌의 지시로 1913년 「맑스주의와 민족문제」를 썼는데, 여기서의 결론이 볼쉐비키당의 민족문제에 관한 강령이 되었다. 「맑스주의와 민족문제」에서 그는 민족이란 자본주의의 산물이며 국가처럼 사회주의 발전에 따라 소멸될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민족문제를 도외시하거나 과장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썼다. 지금까지 큰 민족으로부터 탄압을 받아온 피압박 소수민족들에 대한 정치적 위로와 보상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그의 결론은 피압박 민족들에게 지역 차원에서 자치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1918년 초부터 러시아의 제 민족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8개 자치공화국과 13개 자치주를 내포한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РСФСР)이 동년 7월 헌법을 공포하며 공식 출범하였다. 규모가 있는 민족은 자치공화국, 소수민족은 자치주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1921년 네프가 시작될 무렵, 옛 러시아제국 영토에는 6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즉 러시아공화국, 우크라이나공화국, 벨로루시공화국, 아제르바이잔공화국, 아르메니아공화국, 그루지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형식적으로 그들은 독립국이었지만 러시아공화국의 정치군사력과 볼쉐비즘이 나머지 공화국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1922년 여름 이들을 하나의 국가로 구성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을 때, 그 일을 지도하던 스탈린의 구상은 5개 공화국이 자치공화국의 지위로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에 흡수되는 것이었다.

그것에 와병 중이던 레닌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그의 요구는 러시아공화국과 다른 공화국들이 대등한 지위에서 연방을 구성해야 한다고 것이었다. 그는 러시아공화국의 법적, 정치적 위상을 격하시키고 새 연방에서 러시아 색채를 지워버림으로써 각 민족공화국 내 “독립파”들이 민족주의적 저항을 전개하는 데에 동원되는 구실을 배제하려 했다. 1922년 12월, 스탈린은 제1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자카프카지예(자카프카지예는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이 구성한 연방공화국 이름이다),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4개국 간 조약에 의거하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СССР)의 수립을 보고했다. 소련 헌법은 레닌 사망 열흘 후인 1924년 1월 31일 제2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비준되었다.

스탈린은 소비에트 민족정책을 “민족과 민족적 편견에 대한 양보정책”이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소비에트 러시아의 제 민족과 소수민족, 인종들은 사회주의적 유대에 기초한 단결된 소비에트 인민이 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 관계 내지 “민족 간 계급관계”가 해소되고 동등한 권리가 실현되어야 했다. 그래서 소수민족에 대한 양보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레닌의 국가체계 구상은 그가 소비에트 사회주의에 대한 치명적 위협이 된다고 강조했던 “대러시아 쇼비니즘”을 억제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소비에트 권력의 발전에 따라 가능했던 그의 구상은 레닌주의적 중앙집권주의와 민족적 연방주의가 엮여진 매혹적인 직물(織物)이었다. 제 민족이 동등한 지위로 가입할 수 있게 하는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구현하고 있었고 동시에 세계 혁명에 대비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미래에 실현될 세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의 본보기”라고 선언했다.

1) 네프의 목적: 사회주의적 축적

소련이라는 국가체계의 수립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당 지도부 내 이견은 네프, 즉 신경제정책에 있었다.

1922년 1월, 트로츠키는 자신의 저작 『1905년』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는 자신의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자신의 지배 최초의 시기에 봉건적 소유제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에 대한 깊숙한 침입을 감행하게 된다. 이 경우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는 혁명투쟁의 초기에 자신을 지지했던 모든 부르주아적 당파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협력이 있음으로써 자신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광범한 농민대중과 적대적으로 충돌하게 된다. 낙후된 나라의 노동자 정부가 처한 상황에서의 모순들은 오직 국제적 차원에서,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의 무대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트로츠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반 ‘국영공업 강화’

그는 자신의 이론이 역사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을 확신했다. 10월혁명뿐만 아니라 특히 전시공산주의가 영구혁명론의 정당성을 완전히 입증했다는 것이다. 그는 네프는 단기의 “전술적 후퇴”로 간주했다. 

이런 맥락에서 트로츠키는 1923년 4월 제12차 당 대회에서 국영공업에 관한 보고를 통해 사회주의적 본원축적의 방법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반인 국영공업”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장은 내부적 축적이 완전히 결핍되어 있으나 “농업에 대한 과세를 통해, 농민이 생산한 곡물의 해외 판매 수수료를 통해, 소비에트 관료들의 감축과 국가기구의 저비용화를 통해” 사회주의적 축적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본주의 분자들을 향한 “집중된 경제적 공세”를 즉시 시작하자고 호소했다.

트로츠키의 공업독재론은 E. 프레오브라젠스키에 의해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게 되는데, 그는 1924년 발표한 논문 「사회주의적 축적의 기본 법칙」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 있는 소비에트 경제의 철칙을 정식화했다. 

“사회주의적 생산의 조직화로 이행하는 어떤 나라가 경제적으로 보다 낙후되고 소부르주아적이며 농민적일수록, 사회혁명의 시점에 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의 사회주의적 축적을 위한 펀드로 상속하는 유산은 보다 적어지며, 그럴수록 사회주의적 축적은 경제의 전(前)사회주의적 형태에 대한 수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중략] 거꾸로, 사회혁명이 승리한 어떤 나라가 경제적으로 산업적으로 더욱 발전했을수록, 국유화 이후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상속하는 고도로 발전한 산업과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된 농업이라는 형태의 물질적 유산은 보다 많아지며 [중략], 그럴수록 사회주의적 축적의 무게 중심은 사회주의적 형태의 생산기반으로 옮겨지게 된다. 즉, 자기 고유의 공업 및 농업에서의 잉여생산물에 의존하게 된다.”

한마디로, 프레오브라젠스키는 경제적으로 낙후되었고 게다가 황폐화된 소련 같은 나라에서 사회주의적 축적이란 현실적으로 소생산자들 내지 “전(前)자본주의적 경제양식들”에 대한 수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정책이 모든 분야에서 상당히 충실하고 일관성 있게 시행되고 있지 않지만, [중략] 그러나 이 모두는 단지 시간상의 문제일 뿐”이라고 역설했다. 

트로츠키의 제안은 당 정치국의 3인방, 즉 스탈린, 카메네프, 지노비예프에 의해 무시되었다. 10월혁명의 이론적 저작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며 스스로를 레닌에 버금가는 혁명지도자로 자부하던 트로츠키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는 1923년 10월 정치국 앞으로 서한을 보냈고, 곧이어 그를 지지하는 ‘좌익 반대파’의 성명이 발표되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경제 분야, 특히 당내 관계 분야에서” 그간 행사된 지도력에 대한 당원들의 불만을 지적하면서 정치국 3인방을 비판했으며, 당의 노선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했다. 

개별 분파 형성이 허용되어야 하는가

이를 계기로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백화제방(百花齊放)”이 시작되었다. 전국의 당 조직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집회가 개최되었으며, 열정적으로 진행된 토론에서 중심 쟁점은 네프가 정당한가의 문제와 당내에 개별 분파의 형성이 허용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네프의 확대에 따라 경제가 빠르게 소생하는 상황에서 토론은 후자에 집중되었고, 이때 제10차 당 대회에서 채택된 〈당의 단결에 관한 결정〉이 부각되었다. 1924년 1월, 토론의 결과를 총괄하기 위해 소집된 당 협의회는 당 기구의 관료주의를 비판하며 “고참 당원들의 변절” 위험성을 열심히 지적한 트로츠키에게 “유죄”를 선고하였다. 

“우리는 현 반대파에게서 볼쉐비즘을 수정하려는 시도와 레닌주의로부터의 노골적 이탈, 그리고 선명한 소부르주아적 편향을 본다.”

당 협의회의 결론은 정치국의 레닌파 3인이 트로츠키를 당 지도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협의회에서 스탈린은 연단에 올라 힘주어 말했다.

“우리의 지도자는 한 분, 레닌 동무뿐입니다.” 

분파 문제와 관련하여, 레닌은 제10차 당 대회에서 당내 분파활동을 금지하는 〈당의 단결에 관한 결정〉을 이끌어냈으나, 레닌이야말로 분파주의의 화신이라 할만 했다. 그가 반대파가 출몰하는 당을 지도할 수 있었던 데에는 혁명지도자로서의 권위와 지적 우월성도 있었지만 레닌파가 다수파였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는 당 중앙위원회에서 자파(自派)가 늘 다수파가 되도록 만들었으며, 1922년 4월에는 자파의 권력기반 강화를 목적으로 자기 심복 스탈린이 서기장에 선출되게 했다. 서기국은 레닌의 비서실이었다. 당시 스탈린은 정치국원이자 당 간부의 선발 및 배치를 담당하는 조직국의 좌장으로, 정치적으로 막강한 인물이었다. 서기장 스탈린은 뇌졸중으로 모스크바 근교에서 와병 중인 레닌을 찾아다니며 그의 지시를 수행하였다. 레닌은 자신의 질환이 악화될 경우 안락사용으로 청산가리를 구해줄 것을 요청할 정도로 스탈린을 신임하였다. 레닌은 트로츠키를 혁명 동지로 존중하였으나, 그에 대한 견제의 끈을 풀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사적 관계가 없었다. 

▲ 제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일 기념행사에 시민들이 스탈린의 초상화를 들고 나왔다. [사진 뉴시스]

‘자력갱생’과 ‘네프의 합리화’ 

1924년 봄 스탈린이 쓴 『레닌주의의 기초』가 《프라우다》에 연재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레닌의 주요 생각들을 간결하고 도식적인 형태로 서술하였으며, 그럼으로써 당원대중에게 레닌주의에 대한 일목요연한 설명을 제공하려 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스탈린은 『레닌주의의 기초』에서 영구혁명론의 의미를 폄하하면서, 과거에 레닌이 러시아 혁명에서 농민계급의 역할을 무시하는 영구혁명론자들을 조롱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10월혁명이 승리하고 소비에트 권력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스믜츠카”, 즉 노동자와 농민의 제휴를 기반으로 하는 레닌주의가 혁명운동의 이론이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고는, 소련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전략적 계획으로서 일국사회주의 이론을 원초적 형태로 제시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당 최고지도자로서의 위상을 과시했으며, 인민들에게 사회주의 건설의 길에 동참할 것을 레닌의 이름으로 요구하며 네프를 합리화했다. 

스탈린이 영구혁명론을 레닌주의와 차별화하며 폄하했던 것은 트로츠키와의 노선투쟁 때문이기도 했지만, 영구혁명론이야말로 소련의 사회주의적 자력갱생을 위해 극복되어야 할 이론이자 의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이 임박했다는 확신은 10월혁명의 동기가 되었지만, 서유럽의 혁명이 지연되면서 영구혁명론은 러시아 사회주의 정권의 종말을 예고하는 묵시록이 되었다. 

트로츠키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그것도 세계혁명의 완성에서 자기실현을 발견하는 “영구한” 혁명을 위한 이데올로기이다. 반면 스탈린주의는 기본적으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이론과 전술이다. 바로 여기에 이들의 차이가 존재한다. 지금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이유로 소련의 역사에서 일국사회주의론이 가졌던 의미를 과소평가하고 있으나, 일국사회주의론은 스탈린이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당원대중을 설득하고 다잡을 수 있었던 ‘콜럼부스의 달걀’이었으며, 소련의 역사과정을 규정한 일종의 청사진이었음을 망각할 필요는 없다. 

물론, 스탈린도 영구혁명론적 관념과의 결별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는 『레닌주의의 기초』에다 이렇게 썼다. 

“이전에, 부르주아에 대한 승리를 위해서는 선진 제국 노동자들의 하나가 된 행군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일국에서의 혁명의 승리를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했다. 지금 이런 시각은 이미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다. 지금은 그러한 승리의 가능성에 의거하는 것이 필요한데, 왜냐하면 제국주의라는 상황하의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의 발전에서 나타나는 불균등하며 비약적인 성격과, 필연적 전쟁으로 이어지는 제국주의 내부의 파국적 모순의 발전과, 그리고 세계 모든 나라들에서의 혁명운동의 성장, 이 모든 것들은 개별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할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 필연성을 결과시키기 때문이다. [중략] 승리한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고, 그리고는 농민을 이끌면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으며 또한 당연히 건설해야 한다. [중략] 사회주의의 주된 과제, 즉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하는 일이 아직 미해결의 상태에 있는 한, 특히 러시아와 같은 농업국가에서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위해서는 몇몇 선진 국가 노동자들의 조력이 필수적인데, [중략] 승리한 나라의 혁명은 스스로를 자체로 독립적 의의를 갖는 귀중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렛대로 간주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1924년 말 「10월혁명과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전술」에서 자력갱생 논리를 확장시켰다. 

“10월혁명의 국제적 성격을 망각하면서 일국에서의 혁명 승리를 순전히 민족적인 것으로, 민족적 현상으로만 선언하는 자들은 옳지 않다. 또한 10월혁명의 국제적 성격을 기억하면서 이 혁명을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아야만 하는 소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자들도 옳지 않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은 1925년 말 출간된 『레닌주의의 문제』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여기서 그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사회 건설 가능성에 관한 문제”가 세계 혁명의 문제와 관련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에 따르면, 다른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는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안전보장을 위해 필요할 뿐이었다. 타국에서의 사회주의 승리 여부와 무관하게 소련에서 사회주의 승리 가능성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그리고 그 권력을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계급 간 모순의 해결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보장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네프는 계속 확대, 발전되었다. 과거 ‘좌익 공산주의자’에서 네프의 전도사로 변신한 부하린이 1925년 봄, 농민을 향해 외친 “부자가 되시오!”라는 구호는 당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레닌의 처 N. 크룹스카야가 즉각 부하린에 반대하는 글을 발표했다. 스탈린 역시 부하린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이 구호는 우리 것이 아닙니다. [중략] 우리의 구호는 바로 사회주의적 축적입니다. 우리는 농촌의 복지 향상을 가로막는 행정적 장애들을 제거합니다. 이런 조치는 당연히 모든 종류의 축적을, 사적-자본주의적 축적도, 사회주의적 축적도 용이하게 합니다. 그러나 당은 사적 축적을 우리의 구호로 삼는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주의적 축적에 관한 우리 구호의 실현을 용이하게 할 목적으로 네프를 확대하면서 사적 축적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구호뿐만이 아니었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 농업세 경감, 농촌에서 토지 임대와 임금노동의 합법화 등을 포함하는 조치가 취해졌을 정도로 네프는 발전해 있었다. 

신(新)반대파 등장, 스탈린 노선 비판

이 시점에서 레닌파 내부에서도 스탈린이 주도하는 정책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른바 ‘신(新)반대파’가 등장하였다. 1925년 10월, 지노비예프는 「시대의 철학」이라는 논문으로 스탈린의 정책노선을 비판하고 나섰다. 네프의 발전방향에 문제를 제기한 그는 “네프란 세계 혁명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도입된 농민국가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술”이라고 단언하면서, “원형 그대로의 레닌 정신”에 따라 당의 노선을 실행하라고 요구했다. 카메네프도 모스크바 당 조직의 집회에서 당의 노선을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크룹스카야, 소콜니코프와 함께 서기국의 횡포를 질타하고 정책상의 이견에 대한 광범한 토론을 요구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트로츠키가 옳았다고 하면서 스탈린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했다. 1926년 6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그들은 트로츠키파와 연대하며 ‘연합 반대파’를 구성하고 스탈린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들은 “공업에의 집중”과 “빈농과의 연대”를 위한, 그리고 “분파의 온상이 되는 당의 관료주의적 변질”에 반대하는 투쟁을 위한 정책이 추진되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동시에 “소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승리가 마치 유럽과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의 진행과정이나 그 결과에 전혀 연관되지 않다는 식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의심쩍은 모든 새로운 이론을 제거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반대파는 스탈린의 노선을 우익 반동정치로 규정하였다. 이런 평가는 스탈린의 사회주의적 축적 노선이 네프에 의거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때는 스탈린주의의 초극좌적 성격이 네프의 발전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네프와 함께 국가재정이 확충되었고, 정권의 경제 운영력이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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