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의 이념과 실제] (2) 영구혁명론과 연속혁명론

올해는 러시아혁명 100주년이다. 100년을 되짚어보는 공론의 장이 활발히 열리고 있다. 혁명 역사의 현장을 찾아 러시아로 떠나는 사람들도 많다. 현장언론 민플러스는 러시아혁명 100주년의 발자취를 돌아보고자 러시아연방과학원 러시아역사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완종 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의 ‘러시아혁명의 이념과 실제’를 매주 금요일 연재한다. 1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독자 여러분이 러시아혁명을 재해석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편집자]

1935년 3월, 10월혁명을 회고하는 가운데 트로츠키는 역사 발전의 요인들을 지극히 단순화하면서 그 생각을 일기에 적었다. 

“분명히 해두기 위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1917년에 페테르부르크에 내가 없었더라도, 레닌의 존재와 그의 지도를 전제로 하는 경우에 10월혁명은 발생했을 것이다. 만약 페테르부르크에 레닌도 없고, 나도 없었더라면, 10월혁명은 없었을 것이다. 볼쉐비키당 지도부가 혁명의 실행을 방해했을 것이다.”

사실일까? 레닌과 트로츠키, 두 사람이 10월혁명의 주창자이며 고무자였다는 점에서 트로츠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조금 과장을 섞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1917년 4월까지 레닌과 트로츠키 외에 지구상에 어느 누구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며 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레닌 ‘노동자-농민의 혁명적 민주독재’ 제시

러시아혁명의 성격과 주체에 대한 규정 문제는 러시아 혁명운동에 존재했던 많은 조직과 다양한 이념적 사조가 상호 연대하거나 편을 가르는 기준이었다. 이 문제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내에서 갈등을 조장했을 뿐 아니라, 흔히 말하듯 멘쉐비즘과 볼쉐비즘이라는 두 분파로 노동운동을 분열시켰다. 멘쉐비즘은 “혁명은 부르주아적인 것이 될 것이며, 그 당연한 결과로 부르주아 계급으로의 권력 이전과 부르주아 의회주의의 실현을 위한 조건 창출 등이 혁명의 목적이 된다”는 입장에 의거했다. 반면 볼쉐비즘은 다가올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임시혁명정부”의 수립을 과제로 설정했다. 

1905년 여름 레닌은 『민주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을 썼는데, 여기에서 그는 멘쉐비키의 경제주의적 혁명전술에 자신의 혁명론을 대조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러시아 부르주아 민주혁명의 지도자가 될 수 있으며 또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부르주아 혁명의 성공에 만족해서는 안 되며 사회주의를 향한 성공적 투쟁을 위해 “민주적 전복”을 활용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그 방법으로 ‘노동자-농민의 혁명적 민주독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노동자-농민의 혁명적 민주독재’ 확립을 통해 “임시혁명정부”에 대해 민주공화국 수립, 지주 소유의 토지 몰수, 8시간 노동제 확립 등 정치적, 경제적 분야에서 당면한 민주적 요구의 조속한 실현을 촉구할 것이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할 수 없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조속한 실현을 위해 “임시혁명정부”에 대한 압박이 계속 가해져야 했는데, 그것은 우선 사회민주주의에 의해 지도되는 무장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밑에서 부르주아 계급을 물리적으로 압박함으로써, 그리고 위에서는 “모든 반(反)혁명 시도에 대한 가차 없는 투쟁과 노동계급의 자주적 이익 옹호를 위해 임시혁명정부에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참여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사회주의를 염원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지향과 부르주아적인 객관적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혁명 이후에 불가피한 것이었고, 레닌은 그런 모순의 해결 방법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정치적 인내와 자기규제에서 발견했다. 

제국주의가 바로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前夜)’

우리가 러시아혁명을 논의할 때 절대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내에 트로츠키즘이라는 가장 급진적인 사조가 조직으로서도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 노동운동은 세 가지로 분열해 있었는데,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에 의거하여 역사 진행을 예단했다.

1905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지도하면서 트로츠키는 “짜리 없는 노동자 정부!”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는 러시아혁명이 전제정 타도, 즉 공화 정부의 수립에 그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후진 러시아에서 노동자 정부를 수립한다니? 당시 입헌민주당 지도자 P. 밀류코프는 이런 트로츠키의 “헛소리”를 트로츠키즘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국제주의적 입장에서 러시아혁명을 파악하면서 이렇게 설파했다. 즉,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강령으로 제한하길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제한할 수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이 되며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1906년에 저술한 『총괄과 전망』에서 말했다.

“러시아의 경제적 상황에서 노동자 계급의 사회주의 정책은 얼마만큼 진행될 수 있는가? 하나는 확실히 장담할 수 있다. 사회주의 정책은 나라의 기술적 후진성에 부딪히기 훨씬 이전에 정치적 장애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제공하는 국가적 차원의 직접적 지원이 없이는 러시아 노동자 계급은 권력을 유지할 수 없으며 자신의 일시적 지배를 장기간의 사회주의적 독재로 전환시킬 수 없다.” 

러시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을 수립하는 것은 시대의 당위이며 결과이지만, 자본주의적 후진성으로 계급적 지지기반이 취약한 노동자 정권은 오직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그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 트로츠키즘의 이론적 요체였다.

레닌의 연속혁명론은 사회주의 실현에 요구되는 역사과정을 단축하려는 강한 의지와 그 급진성으로 멘쉐비키의 단계적 혁명론과 구별되었다. 하지만 레닌이 연속혁명 개념을 통해 볼쉐비즘을 차별화하고 그럼으로써 러시아에서 “혁명적 맑시주의”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의 입장은 영구혁명론과 크게 달랐다. 

1914년 여름,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키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의 본질을 해명하지 않고는 전쟁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평화주의 구호란 자본주의 하에서 실현 불가능한 허황된 요구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레닌은 1916년에 쓴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에서 경제적, 정치적 발전의 불균등성은 자본주의 발전의 절대법칙이며, 그 때문에 제국주의 시대에 세계의 분할과 재분할을 위한 전쟁이 발발하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라고 했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새로운 현상들을 숙고하면서 그는 제국주의가 독점자본주의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전화되는 모습을 주목했으며, 자본주의의 모순들이 한층 심화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동시에 그는 “최고 단계의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혁명적 이행을 위한 물적 조건들이 준비되고 있음을 확신했으며, 경제의 사회화나 생산과 분배에 대한 회계와 관리 등을 담당하는 기관들, 즉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 후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기관들의 등장에 주목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제국주의가 바로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前夜)”라는 것이었다.

레닌은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임박했으며 곧 세계 자본주의가 붕괴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제국주의로 하나가 된 세계에서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인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은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출발이며, 서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이 자기 토대가 빈약한 러시아 사회주의를 구원할 것이라는 게 1916년경 레닌이 도달한 결론이었다.

1917년 4월, 이제 레닌의 정치적 입장은 트로츠키의 그것과 구별되지 않았다. 제국주의 연구를 통해 이론적 각성을 얻은 레닌은 실질적으로 영구혁명론을 수용하면서 볼쉐비키에게 혁명사업에서 프롤레타리아 영웅주의의 기적을 발휘하라고 촉구했다.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민주혁명은 완결”되었고, 이제 혁명의 두 번째 단계에서의 승리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볼쉐비키혁명기념일(11월7일)에 모스크바에서 공산당 지지자들이 블라디미르 레닌의 초상이 든 붉은 깃발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낡은 볼쉐비즘’을 버리고 ‘새 볼쉐비즘’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요구하는 레닌의 “궤변”은 볼쉐비키당 내에서 거센 반발을 초래했다. 막 시작된 부르주아 민주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즉각 변환해야 한다는 레닌의 테제는 맑스주의자라면 당연히 거부해야 할 비과학적, 비역사적 구상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레닌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부르주아 혁명의 종결 문제를 제기하는 자는 살아 있는 맑스주의를 희생시켜 사문화하고 있으며 소부르주아적 혁명성에 완전히 굴복하고 있다”고 답했다. 또한 그는 “전체적으로 볼쉐비키의 구호와 이념은 역사에 의해 완전히 정당화되었으나, 지금의 구체적 상황은 흔히 (그 누구였든지 간에) 기대할 수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더 독창적으로, 더 독특하게, 더 복잡하게 성립”했으며, 따라서 “그런 사실을 무시하고 망각하는 것은 새롭고 살아 있는 활동의 독특함을 공부하는 것 대신, 암기된 공식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늙은 볼쉐비키와 흡사함을 뜻할 수 있다”고 강변했다. 

기왕에 레닌이 주창했던 연속혁명론은 2월혁명 후 형성된 이중권력 상황에서 폐기되었고, 볼쉐비키는 “낡은 볼쉐비즘”을 버리고 “새 볼쉐비즘”으로 자신을 무장해야 했다.

10월혁명은 영구혁명론에 의거하고 있었고, 서유럽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전제로 하였다는 뜻에서 그것은 정치적 투기 내지 정치적 모험주의의 결과였다. 트로츠키는 『총괄과 전망』에서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제공하는 국가적 차원의 직접적 지원이 없이는 러시아 노동자 계급은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고 대놓고 말했다. 그만큼 그에겐 임박한 세계 혁명과 사회주의적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10월혁명 직후 레닌은 〈평화에 관한 법령〉, 〈토지에 관한 법령〉, 「노동자 통제에 관한 규정」을 법제화했다. 하지만 〈토지에 관한 법령〉과 「노동자 통제에 관한 규정」은 볼쉐비키당의 강령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우선, 볼쉐비키의 강령은 모든 토지의 국유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토지에 관한 법령〉은 1917년 8월 공표된 242개 항목의 「농민 선언」을 기초로 작성된 사회혁명당의 농업 강령을 통째로 차용한 것이었다. 모든 토지의 사회화를 요구하는 「농민 선언」은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완전히 폐지하고 토지를 지방의 특수한 조건이나 노동 및 소비 기준에 따라 농민에게 분배 위임할 것을 골자로 하였다. 

그리고 페드로그라드 노동자들은 기업에 대한 노동자들의 자치적 통제 내지 자주관리를 의미하는 ‘노동자 통제’를 사회주의 제도로 간주했다. 하지만 레닌이즘의 강령에는 기업의 국유화가 고유한 것이었으며, 상디칼리즘(노동조합을 통해서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사상 및 운동)적인 ‘노동자 통제’는 거부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노동자 통제’는 1917년 볼쉐비키당이 행한 주요 선전-선동사항이었으며, 기업이나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임금 삭감, 대량 해고 또는 공장 폐쇄 등의 노동 탄압을 자행하는 자본가들의 폭력 앞에서 ‘노동자 통제’의 실현을 위해 투쟁했다. 10월혁명의 승리 후, 레닌은 내키진 않았지만 그것을 노동계급의 혁명적 요구로써 수용했다. 레닌이 초안을 작성한 「노동자 통제에 관한 규정」의 내용이 그대로 반영된 최종안은 1917년 11월 중앙집행위원회에 의해 법령으로 공포되었다. 그것의 제1항은 이렇다.

“인민경제의 계획적 관리를 위해,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거나 가내 노동에 의거하고 있는 모든 공업, 상업, 금융, 농업, 운수회사와 생산(협동)조합, 그리고 기타 사업체에서 생산, 원료의 구입 및 생산물의 판매, 보관 그리고 기업 재정에 대해 노동자 통제를 도입한다.”

〈평화에 관한 법령〉은 법령이라 했으나 거기엔 입법 조항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것은 교전 당사국들에게 각 민족의 자결권을 보장하고, 전쟁에 뒤따르는 합병과 배상을 배제하는 민주적 평화조약의 체결 협상을 즉시 시작하라고 촉구하는 호소문이었다. 볼쉐비키는 〈평화에 관한 법령〉의 실천에 나섰고, 그리하여 1917년 11월 하순 브레스트­리톱스크에서 독일군과 소비에트 정부 대표단의 공식회담이 시작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1918년 3월 독일과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은 레닌이 독단적으로 밀어붙인 결과였다. 조약의 결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등을 포함하는 서부 영토를 상실했고, 카프카즈 산맥 이남의 일부 지역이 터키에 할양되었다. 평화를 얻었으나 러시아는 전체 경작지의 약 25%, 탄전 및 철강산업 기반의 약 75%, 유전지역 대부분을 상실하는 등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감당하게 되었다.

레닌은 농민에 대한 양보, 노동자에 대한 양보, 그리고 영토 할양에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정권의 생존과 안정이었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하면 소비에트 러시아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며, 그때까지 소비에트 권력은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

레닌, “소비에트 체제 유지 위해 모든 것을 다했다”

“혁명가의 아내” N. 크룹스카야의 회고에 따르면, 레닌에게 평생 “가장 행복했던 나날들 중의 하나”는 10월혁명 1주년이 될 즈음 “독일 혁명에 관한 소식이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을 때”였다. 그는 역사에 대한 자신의 “과학적 분석”이 틀리지 않았음에 환호했다. 흥분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독일 혁명은 불길한 소식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불씨가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1920년 여름 레닌은 감추고 싶은 과오를 저질렀다.

1919년 여름, 폴란드 군대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대적 공세를 전개하였다. 1920년 2월, 레닌은 현실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국경문제를 해결하자고 바르샤바에 제안하면서 벨로루시 전역을 양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폴란드의 J. 피우숫스키는 우크라이나 서부지역까지 할양할 것을 요구하며 1920년 4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다. 붉은군대의 반격이 시작됐다. 그때면 내전도 끝나 있었다. 붉은군대는 퇴각하는 폴란드군을 추격하면서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7월 중순 볼쉐비키는 영국 정부로부터 한 통의 외교각서를 받았다. 각서에는 민족적 경계선을 국경으로 삼는 걸 전제로 폴란드 정부는 모스크바와 평화협상을 시작할 용의가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민족적 경계선은 당시 정전(停戰)를 권유한 영국 외상(G. Curzon)의 이름을 따서 ‘커즌 라인’이라 불렸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 설정된 소련과 폴란드 국경이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레닌은 거절했다. 그리고 명령을 내렸다. “진격하라!” 그때부터 전쟁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목표는 바르샤바가 아니라 베를린이었다. 혁명전쟁을 명령하면서 레닌은 붉은군대의 진격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의 보고에 의해서도 한껏 고무되었다. 레닌은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냈다.

“코민테른의 상황은 아주 좋습니다. 지노비예프, 부하린, 그리고 본인도 이탈리아에서 즉각 혁명을 고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의 개인 의견은 이를 위해 헝가리를 소비에트화 하고, 체코와 루마니아도 소비에트화 해야 한다는 겁니다.” 

8월 중순, 바르샤바 부근에서 붉은군대는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폴란드 군대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완패했으며, 순식간에 400km 이상을 퇴각했다. 붉은 기를 들고 베를린으로 입성했어야 할 붉은군대가 겨우 바르샤바에서 좌절하고 치욕스런 후퇴까지 하게 될 줄이야! 타협해야 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국경은 ‘커즌 라인’보다도 훨씬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레닌이 내걸었던 “베를린으로!”라는 구호에 대해 모두가 침묵했다.

국제적, 국내적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 결과가 1921년 봄 네프, 즉 신경제정책의 도입이었다. 1921년 7월, 제3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러시아 볼쉐비키공산당의 전술에 관한 보고를 위해 단상에 올라선 레닌은 말했다. 

“이미 10월혁명 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우리는 자본주의가 더 발전한 나라들에서 바로 지금 아니면 적어도 매우 빠른 시기에 혁명이 시작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당연히 파멸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인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 혁명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소비에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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