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의 이념과 실제] (6) 소비에트 국가사회주의의 발전②

2) 위로부터의 혁명: 사회주의의 승리

1927년 12월에 열린 전연방볼쉐비키공산당 제15차 대회는 당의 총노선을 확정함으로써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발전을 위한 새 장을 열었다. 대회는 첫째, 농업의 집단화 방침을 수립했으며, 둘째, 산업화 속도를 최대로 높여야 한다는 당위성과 함께 우선적이고 가속화된 중공업 발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 셋째, 경제계획의 원리가 강화되어야 했으며, 그 기본 방침은 인민경제 5개년 계획을 조속히 작성하라는 당 대회의 지시에서 확인되었다. 이와 함께, 대회의 결정에 따라 트로츠키파, 지노비예프파 등 반대파의 주요 인물들이 당에서 추방되었다. 특히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이며, 공화국혁명군사회의 의장으로서 내전 승리에 큰 공을 세운 트로츠키는 1928년 1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추방되었고, 이로부터 정확히 1년 뒤 당 정치국은 알마티에서도 반당 투쟁을 계속한 그를 터키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반대파의 시비를 묻어버리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시점에 농업 부문에서 심각한 위기가 발생했다는 데 있었다. 생산량 감소가 아니었다. 그간 진행된 공업과 농업의 불균형 발전으로 도시-농촌 간 상품교환이 마비되었다. 중공업 위주의 투자는 경공업의 “상품 기근”을 초래했고, 이는 농민들로 하여금 곡물 판매를 단념하게 만들었다. 1927년 말 소비에트 정부가 조달한 곡물의 규모는 목표치의 70%를 미달하고 있었다. 이는 도시와 군대에 공급해야 할 식량이 절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특히 봄에, 기계와 설비의 수입 대금으로 계획된 수출 곡물을 확보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모든 경제계획과 목표 수치가 완전히 허물어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위기는 전시공산주의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약 3만 명의 공산당원이 전국 농촌으로 급파되었고, 이들은 무단으로 농가를 수색하여 “잉여곡물”을 징발했다. 그에 협력하는 빈농들에게는 몰수된 곡물의 25%를 차지할 수 있는 특전이 부여되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석 달 만에 농촌 발 위기를 해소하였다. 

이런 식의 위기 해결은 부하린을 비롯한 당내 우파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그들은 농민이 다수인 러시아에서 농민을 적대하고서는 소비에트 권력이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보는 위기 해결책은 중공업 우선 정책을 포기하고 경공업 투자를 늘리는 데 있었다.

스탈린 “계급투쟁의 격화는 필연적”

1928년 여름,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스탈린은 총노선의 이론적 합리화를 시도했다. 네프(신경제정책)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독특한 표현이며 수단”이라고 규정한 그는 바로 계급투쟁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빈농에 의지하고 중농과 연대하며 부농과 투쟁하라!”는 레닌의 슬로건이 아직까지 농촌에서 유효하다고 하면서 당의 정책과 무관하게 계급투쟁의 격화가 필연적 성격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소멸하는 계급이 저항을 포기하며 자발적으로 자기 진지를 내주는 일은 과거에 없었고 앞으로도 없습니다. 계급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의 사회주의로의 전진이 투쟁과 사회적 동요 없이 이루어지기란 과거에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사회주의로의 진행은 이 진행에 대한 착취분자들의 저항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착취자들의 저항은 계급투쟁의 격화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부하린이 1925년 개진한 이론, 즉 사회주의 발전에 따라 노동자 계급의 적들은 점차 뒤로 멀리 물러설 것이며, 다음에 “전혀 예기치 않게” 부농이나 빈농, 노동자나 자본가들 같은 모든 사회적 그룹이 투쟁과 저항 없이 돌연 사회주의 사회의 품안에 놓일 것이라 전망하는 이론을 비웃었다. 동시에 그는 부하린이 「경제학자의 수기」에서 개진한 농업과 공업 균형발전론을 비판했다. 스탈린은 그 이론이 각 경제 부문의 배후에 계급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의 운동은 격렬한 계급투쟁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확대재생산의 가능성이 없는 소농민 경제와 같은 농업 토대를 갖고서는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빠른 템포로 계속 추진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이런 논리에 근거하여 그는 균형이론이 “유토피아적이고 반(反)맑스주의적인” 것이라 주장했다. 1928년 가을 우익 편향을 비판하는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이는 1년 이상 계속되었다. 

스탈린과 부하린의 대치는 이론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1928년 7월, 부하린은 필사적인 행보를 감행했다. 그는 카메네프와 비밀스런 회합을 가졌고, 여기서 그에게 스탈린을 제거하는 일에 자신을 지지해주거나 아니면 최소한 중립이라도 지켜줄 것을 요청했다.

급속히 확산된 사회주의적 경쟁

1928년 말부터 1929년 봄까지, 1년 전과 같은 곡물위기는 재발하지 않았다. 물론 곡물조달 캠페인이 어렵게 진행되었는데, 농민들에 대한 강제가 배제되었다고 믿을 근거는 없다.

드디어 인민경제발전 5개년 계획이 1929년 5월 제5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승인되었다. 시기적으로 그것은 1928년 10월부터 1933년 9월까지의 기간을 포괄했다. 경제계획에 따라 5년간 공업총생산은 136%, 농업총생산은 55%, 국민소득은 103% 증대되어야 했다. 스탈린은 세계사에 유례없는 속도의 경제성장을 기획하고 있었다. 놀라웠던 것은 중공업 생산의 3.3배 성장을 목표로 하면서 총투자 자본의 78%를 생산수단의 생산 분야로 집중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선전과 선동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공장과 건설현장에서 이른바 사회주의적 경쟁을 위한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프라우다》를 필두로 각종 언론매체 및 당과 콤소몰, 노동조합 기관들은 노동자의 발의에 의한 모범적 생산 사례들을 선전했으며, 노동창발성을 발휘할 것을 고취했다. 그러면서 “경제 고지”의 선점을 위한 돌격대 운동, 할당된 계획보다 더 높은 목표치를 담은 계획을 경쟁적으로 내놓는 “대응 계획”의 채택 운동, “연중 무휴제”, 생산량과 생산성 등에서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고 추월하자!”는 운동 등과 같은 사회주의적 경쟁의 형태들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1929년 가을, “5개년 계획을 4년 내에 완수하자!”는 슬로건이 등장했다. 사회주의적 경쟁운동은 작업현장에서 노동자 대중의 혁명적, 낭만적 기분을 확산시켰고, “돌격”, “강습”, “돌파”를 통해 모든 것을 완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강화시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볼쉐비키식으로” 등의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1929년 말, 미국이 대공황으로 경제가 마비되어가고 독일에서는 약 600만 명이 실업상태에 빠지면서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나치)당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던 때, 소련에서는 국토지리를 바꾸는 공업화의 대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던 그때 스탈린은 주로 노동자들을 설득하며 사회주의 건설현장으로 동원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으며,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도약을 시작하고 있었다. 소련에게 1929년은 “위대한 전환의 해”였다.

공업화 과정에 수반한 도시 거주민의 급속한 증가는 결국 식량배급제를 통해 국가가 직접 부양해야 할 인구의 급증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1929년 봄의 곡물조달은 극히 어렵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조달계획을 완수하는 데에만 있지 않았다. 상황은 조달 목표치를 최대한 상향 조정할 것을 요구했다. 

1929년 가을부터 곡물조달은 노골적 부농해체 정책과 병행했다. 말이 부농해체이지 실제로는 부농계급의 청산이 추구되었다. 스탈린에 의하면, 전면적 부농해체가 추진될 수 있었던 논거는 부농계급에 의한 생산이 집단농장(콜호즈)과 국영농장(솝호즈)으로 대체될 수 있는 물질적 토대가 갖추어졌다는 인식에 있었다. 

1929년 말, 우파 지도자들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분쇄되었다. 11월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부하린, 릐코프, 톰스키의 행동을 “정치적 파산자의 책동”으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책동과 유사한” 것으로 규정하고는 “우익 편향의 주창자이자 그들의 지도자”로서 부하린을 정치국에서 축출하기로 결정했으며, 릐코프와 톰스키에 대해서는 당 중앙위원회에 대한 투쟁을 계속하려는 시도가 발각될 경우 즉각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취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들 3인은 자신들의 정치적 과오를 인정하고 기존의 견해를 버리면서 “전향”을 선언했다.

농촌혁명의 상징, ‘거대 국영농장’ ‘기계-트랙터관리창’

1930년 1월, 당 중앙위원회는 〈집단화의 템포 및 협동조합 건설에의 국가 지원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고, “필사적으로 부농계급에 선전포고하고 최종적으로 그들을 완전히 소탕하라”는 명령을 각급 당 조직에 하달했다. 이후 집단화 지역에서 토지 임대가 폐지되고 고용노동의 사용이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농들로부터 모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는 조치가 취해졌다. 농촌의 “반(反)혁명 분자들”과 그 가족은 제1범주로 분류되어 북극이나 오지로 추방되었다. 집단화에 적극 반대하는 부농들과 옛 “반(半)지주들”은 가족과 함께 제2범주에 해당되어 시베리아 등의 변방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나머지 부농들은 “해체”된 다음 제3범주로 분류되어 집단농장의 경계 밖에 특별히 할당된 곳에서 거처를 마련해야만 했다.

1929년 여름, 콜호즈에 편입된 농가는 전체 약 2500만 호의 2%를 웃돌았다. 1930년 1월 하순 전체 농가의 약 17%에 해당하는 430만 호가, 1931년 여름에는 전체 농가의 52.7%가 콜호즈로 포섭되었다.

집단화 캠페인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들, 즉 “거대 국영농장”, “기계-트랙터관리창”(엠테에스), “전면적 집단화 지구”, “예약 수매” 등의 용어가 일상화되었다. 물론 당시 신조어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그것들 속에는 농촌생활에서 이루어진 엄청난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진보가 함축되어 있었다. 각 낱말은 실제적 삶의 변화를 반영하였고, 낡은 기술, 낡은 경제양식과 계급관계, 낡은 생활조건이나 전통 등 농촌의 오래된 기반이 급진적으로 타파되고 있음을 나타냈다. 특히 콜호즈 등에서 사용되는 트랙터 및 각종 농업기계의 배급과 관리를 집중 담당하는 “엠테에스”라는 축약어 하나가 상징했던 것은 바로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시작된 농촌혁명이었다. 

스탈린이 급속한 공업화와 전면적 농업 집단화를 추진했던 것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1931년 2월, 그는 전국사회주의공업일꾼총회에서 연단에 올라 1931년도의 목표로 설정된 45%의 공업 성장을 완수할 것과, 기간공업 분야에서 5개년 계획을 단 3년 만에 실현할 것을 요구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선진 국가들에 비해 50~100년을 뒤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간격을 10년 만에 뛰어 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해내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를 분쇄할 것입니다.” 

1932년 가을, 전면적 농업 집단화가 종료되었다. 전체 농가의 61.5%, 전체 농지의 약 70%가 콜호즈로 통합되었다. 농업 집단화 관련 5개년 계획의 목표를 겨우 3년 만에 3배나 초과 달성하였다. 그에 따라 확보된 것은 매년 5개년 계획의 완수에 필요한 곡물을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농업구조 재편의 직접적 결과로써 야기된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는데, 비극의 발생은 1931∼32년의 흉작 때문이었다. 

▲ 이오시프 스탈린의 고향인 조지아 고리에서 시민들이 스탈린 동상에 생일을 축하는 꽃을 바치고 있다. 스탈린은 1879년 12월18일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이던 조지아의 고리에서 태어났다. [사진 : 뉴시스] 

볼쉐비키의 승리와 사회적 긴장완화

1931년 가을 “가뭄과의 투쟁은 풍작을 위한 투쟁이다!”라는 슬로건이 등장했다. 곡물조달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곡물 탈취자는 ‘인민의 적’으로 규정됐으며, 농촌의 당 간부들에 대한 문책이 이어졌다. “잉여곡물”은 모두 징발되었고, 농민들은 굶주림에 방치되었다. 특히 1932년 곡물조달의 위기와 병행한 대기근은 우크라이나, 북카프카즈 등의 농촌 지역에서 수백만의 인명이 스러지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이런 사실에 대해 침묵이 강요되었다.

약탈된 식량은 도시에 겨우 공급되었고, 참혹한 기근이 노동자들을 덮치는 상황은 방지되었다. 그러면서도 소비에트 정부는 기계설비 수입에 필요한 외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계획된 식량 수출을 중단하지 않았다. 스탈린에 대한 당내의 비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기는 한순간에 극복되었다. 1933년 기후조건은 농업에 유리했다. 또한, 농촌에서 정치적 조직성이 강화됨과 더불어 트랙터 등 농기계가 빠르게 보급되면서 콜호즈와 솝호즈에서의 생산성이 높아졌으며, 그 결과 소련은 완전한 풍작을 경험하게 되었다. 1933년 곡물조달 연차계획은 동년 12월초에 완수되었다. 호전된 경제상황은 1933년 중반부터 감지되었고, 이는 사회에 드리워진 무거운 분위기를 신속히 제거함과 동시에, 스탈린의 총노선에 대해 당의 일각에 존재하던 의구심과 불안감, 정치적 긴장감을 순식간에 해소시켰다. 고통을 인내하던 소비에트 사회는 농업문제가 해결되면서 순식간에 환한 세상으로 변모했다. 경제의 사회주의적 재편이 완료되었으며, 그 감격적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신문 등에 옛 반대파에 속했던 인사들이 바치는 스탈린 찬가가 자주 등장했다. 또한 한 번 더 사회주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스탈린에 요청했던 지노비예프나 카메네프 같은 인사들이 속속 유배지에서 돌아와 당에 복귀했다. 공공연하게 “볼쉐비키의 승리”가 선언되었고, 이와 함께 스탈린 숭배 분위기가 급속히 고조되었다.

1934년 초에 열린 제17차 당 대회는 당시 《프라우다》의 표현대로 “승리자”들의 잔치였다. 스탈린의 당내 위신이나 정치적 비중, 그리고 그의 개인적 권위가 한껏 고양되었다. 당 대회는 요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에 의해 추진된 총노선의 승리를 기념하는 화려한 축제였으며, “현명한 스승이며 영도자”인 그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찬사를 바치는 장엄한 무대였다. 여기에는 얼마 전까지 영도자의 정치적 경쟁자였으며 이념상의 적수였던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프레오브라젠스키, 부하린 등의 인물들도 참여했다. 그들은 당원들 앞에서 재차 자신의 과오를 참회했으며, 영도자의 정치적 무오류성에 대한 확신에 관해 발언했다. 완전히 당 위에 올라선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가 확립되었다. 

제17차 당 대회가 끝난 이후 국내의 상황은 대회에서의 승리 분위기가 단순한 정치적 과시가 아니었음을 입증했다. 옛 반대파 지도자들에 대한 복권 조치가 계속되었다. 엠테에스, 즉 기계-트랙터관리창과 솝호즈에 설치된 정치부도 해체되었다. 농촌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관”인 정치부를 없앤다는 것은 농업의 안정이 없이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1928년에 도입된 “급식정량제”, 즉 양곡배급제가 폐지되었다. “부유한 삶을 맞이하자!”라는 슬로건도 등장했다. 

양곡배급제 폐지에 관해서 당시 서유럽의 간행물들이 “소비에트의 봄” 혹은 “붉은 러시아의 탈색”을 알리는 주요 징후라고 지적했던 것은 나름 충분한 근거를 갖는다. 적색의 소비에트 사회가 분홍으로 탈색되었다는 주장은 경제운영의 방식이 통제적-억압적인 것으로부터 여기에 의사(疑似)시장적 원리가 혼합된 방식으로 전환된 것에 의거하지만은 않았다. 기업에서 개수임금제가 정착되었으며, 당원들에게 의무로 부과되었던 급료상한제가 폐지되었을 뿐만 아니라(1921년에 도입된 당원급료상한제는 당 간부들의 임금이 그들이 지도하는 기관이나 기업 평균임금의 150%를 넘지 못하게 규정하였다), 인민들이 사용하는 소비재 상품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심지어 테니스, 재즈, 폭스트롯이라는 사교춤 등 이전에는 부르주아적인 것이라고 해서 배척되었던 풍조들이 당원들 사이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시기를 상징했던 가장 중요한 징표는 바로 사회적 긴장의 완화였다. 

상품과 화폐의 사용이 늘어났으며, 상품화폐관계를 점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극좌적 아이디어”라는 낙인이 찍혔다. 

‘국가소멸’ 논쟁에 종지부를 찍다

10월혁명 후에 대다수 볼쉐비키는 “계급 철폐가 사회주의의 과제”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착취적 계급관계의 청산을 위해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우선으로 했던 조치들은 그 자체로서 사회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단지 사회주의적 경제로의 이행을 위한 전제조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18년에 쓴 『‘좌익’ 소아병과 소부르주아성』에서 레닌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라는 표현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실현한다는 소비에트 권력의 각오를 의미하는 것이지 결코 새로운 경제질서를 사회주의적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국가권력이 가장 중요했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농업의 사회화된 영역은 그 자체로 사회주의적 경제형태가 아니라 단지 소련에서의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존재와 관련해 사회주의적인 것이 된다”고 한 스탈린의 1929년 발언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국영공업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해질 수 있다. 국영공업이 사회주의적일 수 있는 이유는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볼쉐비키당이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 단 하나였다. 국영공업과 집단농장은 의심할 바 없이 10월혁명의 가장 큰 성과물이었다. 설령 내부적으로 착취적 계급관계를 배제하고 있다는 뜻에서 그것들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스탈린이 보기에 그것들은 단지 형식으로서의 조직형태에 불과했다. 이런 이론적 입장에 근거해 스탈린은 사회주의 건설 사업에 있어서의 핵심문제는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그 형식에 어떤 내용이 채워지는가에, 즉 누가 국영공업과 집단농장을 장악하고 지도하는가에 있다고 강조했다. “레닌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조직의 한 형태로서 취급된 소비에트처럼 집단농장은 도구였으며, 단지 도구였다.” 확실히 사회주의로의 진입 테제를 제시하면서 스탈린은 인민경제에서 사회주의적 영역의 형식적 우위를 고려했다기보다는 공업과 농업에 대한 국가의 장악에 의거했다. 사회주의의 승리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당과 국가의 승리를 의미했다.

소련이 등장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소비에트 권력의 결단성”이야말로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한 거의 유일한 현실적 보장이었으며, “혁명적 국가권력”은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위력적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인민대중의 삶이 영위되는 모든 영역에서 국가가 행사하는 권한은 사회주의 발전의 척도가 되었다. 바로 여기에 소비에트 체제가 국가사회주의로 정의되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사회주의에서의 국가소멸에 관한 가설은 맑스주의의 기본 이론 중 하나였다. 또한 10월혁명 직전에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국가의 소멸을 설교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당원은 없었다. 스탈린은 1930년 여름 제16차 당 대회에서 그러한 이론과 혁명적 실천 사이의 모순에 대해 해명했다. 

“우리는 국가의 소멸을 지지합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여태까지 존재한 국가권력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위력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강화를 지지합니다. 국가권력의 소멸을 위한 조건들의 준비를 목적으로 하는 국가권력의 최고의 발전, 이것이 맑스주의적 공식입니다. 이것이 ‘모순적’입니까? 그렇습니다. ‘모순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있는 모순이며, 이것은 통째로 맑스의 변증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설명에도 당내에서 국가소멸과 관련된 문제제기가 그치지 않자, 최종적으로 1939년 3월 제18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은 사회주의 국가에 관한 맑스주의적 교의가 불완전하며 불충분하다고 선언했다. “엥겔스의 명제가 과연 옳습니까?”라고 청중에게 질문을 던진 다음 그가 대답했다. 

“예, 옳습니다. 단 두 가지 조건 중 하나가 충족될 경우에만 옳습니다. а) 만약 미리 국제적 요인들을 배제하고서, 연구의 편의를 위해 국제적 환경으로부터 나라와 국가를 고립시킨 상태에서 사회주의 국가를 단지 국내적 발전의 관점에서만 고찰한다면, 또는 b) 만약 사회주의가 모든 나라에서 혹은 대다수의 나라에서 이미 승리했고, 자본주의적 포위 대신 사회주의적 포위가 존재하고 있으며, 더 이상 외부로부터의 침공 위협이 없고, 더 이상 군대와 국가를 강화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스탈린은 국가소멸에 관한 소모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운명에 관한 엥겔스의 공식이 일반적으로는 옳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자본주의의 포위 상태에 있는 일국의 사회주의라는 구체적 사례에까지 확장하여 적용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공산주의 하에서도 국가가 존속할 것인가? 스탈린은 분명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만약 자본주의적 포위가 근절되지 않을 경우,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침공 위협이 청산되지 않을 경우에 국가는 유지될 겁니다.” 

스탈린의 아이디어는 당 대회에서 많은 연사들에 의해 반복, 강조되었으며, 맑스주의 이론의 “천재적 발전”이라고 칭송되었다. 소련에서 사회주의는 국가가 되었으며, 국가 발전에의 헌신이 곧 사회주의에의 헌신을 의미했다. 

스탈린의 논리에 따르면, 소련에서 화폐, 상업 및 상품화폐관계의 사회주의성은 바로 그 모든 “도구”들이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의해 사회주의의 이익에 부합되도록 사용되거나 사용될 수 있음으로써 보장되었다. 또한 국영공업, 콜호즈 등은 그 자체로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그냥 형식일 뿐이었다. 그러한 도구와 형식의 사회주의성은 사회주의 국가권력에 의해 담보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쪼개어 말하면, 소비에트 사회의 사회주의성은 국가가, 국가는 맑스-레닌주의라는 “과학”으로 무장한 당이, 하급 당원들의 당성(黨性)은 간부들이, 간부들은 ‘인민의 영도자’인 스탈린 자신이 그 사회주의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런 관념이 스탈린의 사회주의 국가론의 기본을 이루었다. 이로부터 그가 1935년에 왜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구호를 내세웠는지, 그가 왜 특히 당 간부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넓게는 국가사회주의였으며, 아주 좁게는 스탈린 사회주의였다.

사회주의의 승리가 선언되었던 제17차 당 대회가 열리던 시기에 소비에트 국가는 사회 전체를 완전히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위력적인 “빅 브라더”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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