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의 이념과 실제] (4) 레닌주의의 문제②

2) 새 볼쉐비즘

1918년 봄, 레닌은 볼쉐비키 권력의 당면 과제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구상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했는데, 그것은 무자비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정치를 내포했다.

(1) 국가자본주의 

『소비에트 권력의 당면 과제』 및 다른 글과 연설에서 레닌은 이제 소비에트 권력이 모든 역량을 “사회주의 혁명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려운 측면”에, 즉 경제 재편이라는 과제에 집중시킬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불가피한 내전의 시기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물론, 속단이었다.

레닌은 노동생산성 향상이 경제 재편의 기본 조건이라 말하면서, 기업에서의 노동규율 확립, 경영의 단독책임제 도입, 독립채산제 실시, 부르주아 전문가의 활용, 개수임금제 도입, 경쟁의 조직화, 테일러 시스템의 적용, 협동조합 조직의 활용 등의 조치들을 제안했다. 그런 것들이 “파리코뮌 원칙으로부터의 일보 후퇴, 사회주의 원칙으로부터의 후퇴”를 의미한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경제 재편이라는 과제 해결에 생산과 분배에 대한 전면적 회계와 관리가 더 큰 중요성을 갖는다고 강조했다. 국가권력의 조직성을 제고하여 경제 장악력을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자본주의를 실현한다는 것

“지금 국가자본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자본가 계급이 실행시킨 바로 그 회계와 관리를 실시하는 것을 뜻한다. [중략] 나는 국가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구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러시아에서 국가자본주의를 갖는다면, 완전한 사회주의에로의 이행은 용이해지고 우리 수중에 장악될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자본주의는 중앙집권화된, 계산된, 관리된, 사회화된 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국가라는 강제”가 불가피함을 역설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철권이 확립되고 모든 경제 분야에 국가독점이 정상화될 때, 도입된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고유의 경제 기반을 상실하고 순순히 노동자 정부에 봉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강제와 독재 없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에로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엄청난 우둔함이며 황당한 이상주의일 것이다. [중략] 시간이 필요하며, 철권(鐵拳)이 필요하다.”

국가자본주의 구상은 N. 부하린 등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비판에 부딪혔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요소의 도입뿐 아니라, 국가권력의 조직화 요구도 파리코뮌의 원칙에서 후퇴하는 것이라며 따졌다. 이에 레닌은 1918년 5월 출간한 『“좌익” 소아병과 소부르주아성』에서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경제적 본질”과 “이행기에 있는 러시아 경제의 독특성”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국가자본주의의 성격 규정을 시도했다. 레닌은 소비에트 러시아에 다섯 개의 사회경제적 생활방식, 즉 우클라드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 원시적인, 즉 매우 자연경제적인 농민경제; ⒝ 소상품 생산(여기에 곡물을 생산하는 농민들의 대다수가 관계된다); ⒞ 사경제적 자본주의; ⒟ 국가자본주의; ⒠ 사회주의. 이처럼 다양한 사회경제적 우클라드가 뒤엉켜 있을 정도로 러시아는 광대하고 복잡하다. 바로 여기에 상황의 독특함이 있다.” 

레닌에 따르면, 러시아와 같은 소농의 나라에서는 소위 “소부르주아적 광풍”이 지배적이기에 사회주의의 실현 문제는 자본주의와의 투쟁뿐 아니라 소농들과의 투쟁까지 포함한다는 것이다. 광풍이 갖는 위력은 “국가자본주의의 덮개(곡물독점, 국가통제 하에 있는 기업가와 상인, 부르주아 협동조합 운영자들)를 도처에서 파열시키는 투기꾼들”이 충분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국가자본주의가 타 영역에 비해 “경제적으로 비할 바 없이 우위에 있고” 또 “내부에서 노동자와 빈민의 힘”을 확보한 소비에트 권력이 그것을 지원하는 한 사회주의의 승리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레닌의 설명이었다.

노동자국가가 생산력 발전을 촉진한다

레닌은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드러낸 “문제에 대한 완전한 몰이해”를 비난했다.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화를 요구하는 그들의 주장에 레닌은 답했다.
“어제 국면의 핵심은 최대한 단호하게 국유화하고, 몰수하고, 부르주아지를 쳐부수고, 완전히 타도하고, 태업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지금 장님들만이 벌써 우리가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 많이 국유화했고, 몰수했고, 충분히 격파했고, 완전히 분쇄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사회화는 단순한 몰수와 확실히 구별되는 것으로, 몰수는 정확히 회계하고 분배하는 능력 없이 확고한 결의로도 가능하지만, 그런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사회화는 불가능하다.”

레닌의 말처럼, 볼쉐비키에겐 자본가 계급의 박멸보다 농민과의 투쟁이 더 어려운 과제였다. 도시와 농촌간의 곡물 유통이 마비된 상황에서, 도시 노동자와 병사들의 급양을 위해 레닌은 1918년 5월 곡물에 대한 국가독점을 규정하는 일련의 법령을 공포하며 ‘잉여곡물의 몰수 및 사적 거래의 금지’라는 식량정책의 원칙을 확립했다. 잉여곡물을 매도하지 않은 농민은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레닌은 노동계급에 “곡물투기꾼, 부농, 국가자본주의적 질서의 파괴자들에 대한 대규모 십자군 원정”을 조직하라고 선동했다. 그는 농촌에 곡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 농촌 졸부 및 부농들이 곡물의 국가분배체계를 파괴하고 투기행위를 했기 때문에 기근이 발생했다고 강조했다.

“의식화된 전위 노동자들이 자기 주위에 빈농대중을 결집하고, 강철 같은 규율과 가차 없이 엄격한 권력 및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확립하고 승리하던가, [중략] 아니면 부농의 지원 하에 부르주아가 소비에트 권력을 타도하던가, [중략] 둘 중의 하나이다. 다른 방도는 없다.” 노동자들이 곡물조달을 위해 “십자군 원정”을 떠났고, 농촌에서 빈농위원회(콤베드)가 등장했다. 이때부터 볼쉐비키 정권은 농촌에서 본격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정치를 실현했다.

국가자본주의가 지향했던 것은 경제 전반에 대한 국가의 지배권 확립이었고, 그 방법은 공업기업의 국유화, 농촌의 볼쉐비키화였다. 10월혁명 직후 공포된 〈노동자 통제에 관한 법령〉과 〈토지에 관한 법령〉은 무시되었다. 레닌이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쓴 이유는 노동자 국가가 자본가를 대신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의 생산력 발전을 강제, 촉진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는 원래 선진 자본주의를 위한 개념이었다. 부하린은 1915년 출간한 『세계경제와 제국주의』에서 국가가 단순히 지배계급의 정치적 도구이거나 또는 부르주아 집단들 간에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시장경쟁의 객관적 중재자가 아니라, “금융자본을 매개로 직접적 경제 조직자 및 소유자가 되어 있는” 20세기 서구 자본주의를 국가자본주의라 규정하며 분석한 바 있었다. 레닌은 그 용어를 다른 방식으로 활용했는데, 부하린은 자기 개념을 무단 표절하여 후진적 러시아에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이론적 무지의 소치라고 레닌을 비난했다.

▲ 크렘린(Kremlin, 성채)과 바실리 사원이 위용을 뽐내고 있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 [사진 뉴시스]

(2) 전시공산주의와 네프

1918년 9월, 내전이 본격 시작되면서 레닌은 적색 테러를 정당화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소브나르콤은 이 상황에서 테러를 통한 후방의 안전 확보가 절대 필요하다는 것과 [중략] 계급의 적들을 강제수용소에 격리시킴으로써, 그들의 위협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의 안전을 보장함이 불가피하다고 여기면서, [중략] 백군 조직 및 모반, 반란에 참여한 모든 자들을 총살할 것을 결정한다.”

레닌은 사회주의 정권의 수호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비상수단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산당 독재가 최대한 강화됐고, 사회적 수탈과 폭력과 야만은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그는 내전 때 추진된 자신의 정책을 후에 전시공산주의라고 명명했는데, 내전기의 치열함과 생존에의 의지가 반영된 그 정책의 독특함은 ⒜식량자원에 대한 징발정책 ⒝모든 중소기업의 전면적 국유화(당시 대기업은 이미 모두 국유화되어 있었다)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를 위한 총관리위원회 제도 ⒟임금의 현물화 및 분배의 평등주의 ⒠모든 인민에 부과된 강제노역 의무에서 표현되었다. 

식량자원 징발, 노역의무 부과… 국가자본주의 정책 가속화

전시공산주의의 가장 특징적 모습은 식량자원에 대한 징발정책에서 나타난다. 내전 확대에 따라 군대, 도시 노동자 등 소비에트 국가의 근간을 부양하는 것이 절대 과제가 됐다. 볼쉐비키는 실질적 보상 없이 농민에게서 “잉여곡물”을 강제 몰수하기 시작했다. 식량징발정책이 갖는 특징은 곡물조달에 수반되었던 무(無)보상적 강제성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한 생산물의 강제적 지정 및 생산량의 사전 결정에 있었다. 그 목표는 농촌을 국가권력에 예속된 곡물 생산 공장으로 변화시킴과 동시에 농업을 완전히 장악, 계획화함으로써 소비에트 권력의 안정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곡물징발정책은 도농(都農)간의 경제적 연결관계를 붕괴시키고, 전시공산주의 체제에 전형적이었던 일련의 현상들을 확대, 심화시켰다. 즉, 경제의 현물화가 급속히 전개되는 가운데 화폐가 소멸했으며, 상업이 거의 완전하게 폐지됐다. 화폐의 폐지 또한 가속화됐다. 레닌은 화폐 소멸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부르주아 분자들이 아직 개인소유로 남아 있는 화폐를 투기와 돈벌이, 근로자들에 대한 약탈 등의 수단으로 계속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경제에 대한 국가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서도 화폐의 역할은 감소되어야 했다.

노동문제와 관련해서, 1918년 7월 제정된 소비에트 러시아 헌법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선언하며 “사회적 기생계층들의 박멸과 경제 조직화를 위해 전면적 노역의무가 부과된다.”고 규정했다.

“비(非)프롤레타리아 분자들”에 대한 노역의무 부과라는 헌법적 원칙은 1918년 가을 더욱 강화되었다. 소브나르콤은 〈비(非)근로자들을 위한 노동수첩에 관한 법령〉을 의결했고, 그에 따라 16세부터 50세까지 노동능력이 있는 모든 인민은 노역 이행 관련사항이 기재되는 노동수첩을 손에 쥔 후에, 할당된 강제노동을 수행한 후에 비로소 배급식량을 수령할 수 있었다.

농업, 공업, 유통, 노동력 등 경제의 전 분야에 걸친 국가통제의 확립과 극단적 중앙집권화 및 군사화는 전시공산주의의 특징적 모습이었고, 그것은 분명 내전과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내전으로 강요된 임시적 조치만이 아니었다. 레닌은 전시공산주의 정책을 합리화하는 가운데, 그 정책으로 야기된 소비에트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상황 속에서 공산주의의 맹아가 성장하고 있다고 보았다. 내전이 종료된 1920년에도 전시공산주의는 그대로 유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추진력을 갖고 심화, 확대됐다. 레닌은 국유화가 기본이 된 사회주의적 생산과 분배를 지향하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당 강령에 분명히 규정했고, 내전은 그의 공산주의적 이상을 보다 빠르게 실현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됐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레닌은 전시공산주의 정책들에서 자기 본래의 이념적 지향과 모순되는 바를 발견할 수 없었다. 전시공산주의는 레닌의 국가자본주의 이론에 의해 계획된 정책이 가속화되어 발전된 형태에 다름 아니었다. 레닌의 확신에 의하면,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라는 형식은 서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곧 확보될 사회주의적 생산력이라는 실질적 내용으로 채워질 예정이었다.

“전쟁이 야기한 조치“

레닌은 1921년 4월 저술한 『식량세론』에서 처음으로 전시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썼는데, 그것은 레닌이 고안한 개념이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한때 볼쉐비키 분파의 핵심 멤버였던 A. 보그다노프의 개념이었다. 

보그다노프는 제1차 대전을 치르는 서유럽 국가들에서 등장한 새로운 현상들을 지적하며 1917년 여름 전시공산주의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에 의하면, 대개 군대란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소비코뮌”이며, 생산과 분배에 대한 국가 통제가 강화됨에 따라 군대에서 사회 전체로 점차 확산되는 “전시-소비공산주의”는 전쟁의 영향으로 인한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레닌을 포함한 “최대강령주의자들”에게 전시에 나타나는 독특한 사회적 소비형태인 전시공산주의를 사회주의와 혼돈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최대강령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현재의 믿음과 희망에 담긴 사회주의적 내용은 현실 자체에 일정한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는 전시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반영이다. 그래도 전시공산주의도 역시 공산주의이며, 또 개인적 취득의 통상적 형식에 대한 전시공산주의의 뚜렷한 대립은 사회주의의 어렴풋한 미래상을 사회주의의 실현으로 여기게 하는 환상을 조장한다.”

보그다노프는 “전시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발전 결과가 아니며 따라서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는 가운데, 임박한 세계 혁명에 대한 확신으로 러시아에서 10월혁명을 준비하는 레닌의 환상을 비판했다.

레닌은 보그다노프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전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실현된 공산주의를 반추하며 그것이 전쟁으로 강요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기에 전시공산주의라는 말이 그럴싸해 보였다. 어차피 말이란 사용하기 나름 아닌가. 레닌은 자신의 정책을 이렇게 변명했다.

“우리가 만약 대공업이 지배적인, 아니 지배적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대공업이 고도로 발달한, 그리고 대규모 농업생산이 매우 발달한, 그런 국가를 보유하고 있다면 공산주의로의 직접적 이행이 가능합니다. [중략] 우리가 수행했던 전쟁이라는 조건 하에서, 기본적으로 그 정책[=식량징발정책]은 옳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보상도 없이 모든 잉여곡물을 징발하는 것까지도 포함하는 즉각적인 [곡물에 대한] 독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다른 가능성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식량징발을 시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은 잘 만들어진 경제제도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중략] 전쟁이라는 상황에 의해 야기된 조치였습니다.”

신경제정책 ‘네프’

1920년 여름, 레닌은 세계 혁명에 대한 기대를 잠시나마 접어야 했다. 1921년에 들어와 확산된 도시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 그리고 이어진 크론쉬타트 해군기지 수병들의 반란은 그를 긴장시켰다. 특히 수병들은 “모든 권력을 당이 아니라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빨갱이 없는 소비에트”를 만들어 그곳에서 정부를 새로 구성하라고 요구했다. 당내 사정도 복잡했다. 반대파들은 레닌을 공격했고, 이들에 대해 레닌은 단호한 조치로 대응했다. 1921년 봄에 열린 제10차 당 대회 때 노동자반대파의 리더 A. 쉴랴프니코프는 연단에서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만약 동무[=레닌]가 많은 대중들과 유리되길 원한다면, 만약 동무가 혁명의 급류와 단절되길 원한다면, 자, 지금까지 동무가 해온 그대로 계속하십시오. 여기에 또 노동자반대파에 대한 사냥과, 우리들에 대한 중상을 추가하십시오!”

그러자 레닌은 이렇게 답했다. 
“왜 저런 연설을 하는 쉴랴프니코프를 재판에 회부하지 않는 겁니까? 조직된 당내에서 과연 우리가 규율과 단결에 관해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면 지금 크론쉬타트와 비슷한 집회에 앉아있는 겁니까? 이것[=노동자반대파의 테제]은 장총으로 대응해야 할, 무정부주의 정신의 크론쉬타트적 수사(修辭)요.”

제10차 당 대회에서 레닌은 전시공산주의 정책을 지속해야 할 필요성을 부인했다. 그동안 당이 군사적 방식에 집착하여 “이론적으로, 정치적으로 필요했던 것보다 훨씬 지나치게 행동했음”을 지적하며 레닌은 말했다.

“우리는 너무 멀리 나아갔으며, 많은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상업과 공업에 대한 국유화를 추진함에 있어, 지방 유통망 폐지를 추진함에 있어 우리는 너무 멀리 나아갔습니다.”

곡물징발정책을 현물세로 대체하면서 네프, 즉 신경제정책의 조치들이 이어졌다. 레닌은 “자본주의 발전을 금지하거나 막으려 시도하지 말고 그것을 국가자본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도록 노력”하자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는 곡물징발정책의 식량세로의 교체, 외국자본의 투자 유치 및 이권 허용, 자본가에게 기업 임대, 잉여농산물의 자유거래 승인 등의 조치들을 열거하며 그 필요성을 강조했다. 레닌은 그런 조치들이 사회주의로부터의 후퇴와 자본주의에 대한 양보를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후퇴가 가능한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진지(陣地)를 싸워 획득했는데, 1917년부터 1920년까지 그 진지들을 공략하지 못했다면, 우리에게 지역적 의미에서나, 경제적, 정치적 의미에서나 후퇴할 공간이 없었을 겁니다.”

레닌은 볼쉐비키가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대기업들과 철도 등”을 수중에 두고 기본적 경제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한 자본주의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반복 강조하였다. 물론 그의 생각은 서유럽의 “동무들”이 러시아를 지원하러 올 때까지 네프를 유지한다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었다. 볼쉐비키는 자본주의에 양보하면서 동시에 차후의 혁명적 진격을 준비해야 했다. 레닌에게 네프는 “많은 어려움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계급 폐지와 공산주의를 위해 나아가는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는 1920년 말, 경제의 물적, 기술적 토대 확충을 위한 장기프로젝트로서 대대적인 발전소 건설사업을 기획하였는데, 그 구상을 밝히면서 이런 테제를 제시했다.

“공산주의는 소비에트 권력 더하기 전국의 전기화이다.”

네프의 첫 해, 소비에트 러시아의 경제는 위기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기근이 계속됐으며, 파괴된 공업 중심지들에서 산업예비군이 넘쳐났다. 소비에트 정부의 재정수입과 재정지출 간 불균형 및 그 결과로 나타난 통화 증발은 물가상승과 경제 불안정을 가중시켰다. 인민생활에 필요한 공산품 소비재의 만성적 부족현상(=상품기근)도 위기가 지속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게다가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부패”가 빠르게 확산됐으며, 볼쉐비키당 내 “전열”도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1922년 3월 개최된 제11차 당 대회의 과제는 네프를 총괄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향후 계획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대회에서 정치보고를 위해 등단한 레닌은 “후퇴하는 자들”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동안 볼쉐비키가 자신들의 경영능력 부재를 완벽하게 입증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우리는 1년 동안 후퇴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당의 이름으로 마땅히 말해야 합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후퇴함으로써 추구했던 목표는 달성되었습니다. 이 [후퇴] 시기는 끝나고 있거나 이미 끝났습니다. 지금은 다른 목표가 설정되어야 합니다. 그건 바로 힘의 재편입니다.”

후퇴의 중단을 요구하면서, 즉 네프의 확대에 반대하면서 레닌은 공산당원이 아니라 자본가들이 농민과 제휴하는 데 성공했다고 지적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의 공고화를 위해 볼쉐비키는 자신이 농민에게 유용한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다. 레닌에 따르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생사를 건 투쟁에서” 공산당이 자본가에 승리했을 때 노동계급과 농민의 제휴가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 때 공산당은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투쟁무대”에서 불패의 세력이 될 수 있었다. 국가권력과 거대 경제자원을 갖고 국가를 운영하는 볼쉐비키에게 부족한 것은 경제운영에 필수적인 문화 역량이었다. 후퇴 중단 및 전열 정비를 통한 공산당의 경제 헤게모니 확립, – 이것이 1922년 봄 레닌이 연설한 내용의 골자였다.

레닌의 적극적 정치활동은 여기까지였다. 1922년 5월 말 뇌혈관 질환으로 쓰러진 그는 점차 정치에서 멀어졌다.

레닌의 목표 '소비에트 권력의 유지와 강화'

대개 레닌의 이론들은 그의 정치적 신념과 논리에 의거했으며, 강령적 성격을 가졌다. 강령도 “과학적 사회주의”에 의거한 현실 분석에서 도출됐기에 이론으로, 과학으로 규정됐지만, 1917년 이후 레닌의 이론과 정치가 의거했던 것은 “지금 당장 아니면 아주 빠른 시기에 서유럽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혁명이 시작될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10월혁명 후 레닌의 정치에 반전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의 말들이 때로 서로 모순되기도 하지만, 그의 정치는 전체적으로 합목적적이었다. 그에겐 소비에트 권력의 유지, 강화라는 정치적 목표가 윤리적 선악과 법률적 정사의 기준이었다. 그는 그것을 위해 무엇도 마다하지 않았다. 1918년 여름, 곡물 확보를 위해 그는 지방의 볼쉐비키에게 “부농 촌의 반란에 대한 가차 없는 진압”을 명령하며 지시하였다. 

“⑴이름난 부농, 부자, 고리채업자를 100명 이상 교수형에 처할 것(반드시 만인 앞에서 행해져야 함) ⑵그들의 이름을 공개할 것 ⑶그들에게서 모든 곡물을 압수할 것...”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명제는 레닌주의의 금과옥조였다.
레닌의 이론은 철저히 노동계급적이었다. 비록 농민들과의 제휴 필요성을 강조하긴 했으나 계급적 기반이 취약한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전면에 나서는 혁명을 구상했다는 점에서 “낡은 볼쉐비즘”은 좌파 급진주의 범주에 속했다. 1917년 이후 레닌주의는 소비에트에 집결한 노동자, 병사, 농민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를 수립하고 노동자 계급정치를 구현하면서 극좌적 급진주의로 발전하였다. 사회 내 계급적, 사회경제적 지지기반이 취약한 권력은 자기 의지의 실현을 물리적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레닌의 계급정치는 무단 차용된 개념들, 즉 국가자본주의와 전시공산주의로 포장되었지만, 그것에 담긴 극단성과 비(非)휴머니즘 및 엄청난 “혁명 비용”이 간과될 수는 없다. 그것들로 레닌은 비노동계급에 가한 탄압과 폭력을 합리화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벌어진 비인도적 참상을 호도했다.

1980년대 중반, 소련공산당은 레닌주의를 스탈린주의에 대조하면서 “레닌에게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레닌은 사회주의를 곧 민주주의로 이해했다”고 해석되었고, 그에 따라 사회주의 강화를 위한 “더 많은 사회주의”는 곧 “더 많은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강조되었다. 

1917년 10월혁명 이후 레닌주의는 노동자 정부의 존속과 발전을 위한 극좌적 계급정치의 이론과 전술이었다. 20세기 초 사회민주주의 진영의 분열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나름의 분석에 의거하였다. 현실에서 자본주의 붕괴 징후를 발견한 세력은 혁명적 맑스주의자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준비하고 나섰으며, 자본주의의 견고함을 확인한 세력은 사회주의를 과학이 아닌 인류적 가치로, 장기의 운동 목표로 이해하려 했다. 제국주의를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로 규정하며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인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미리 준비한 레닌주의는 가장 혁명적이고 극좌적인 노동해방 이데올로기였다. 무심코 레닌 숭배에 젖은 개혁주의적 운동세력이 제시하는 레닌주의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완전한 왜곡이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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