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의 이념과 실제] (3) 레닌주의의 문제①

1924년에 펴낸 『레닌주의의 기초』에서 스탈린은 레닌주의를 “제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 시대의 맑시즘”으로 정의하고는, “보다 정확히 말하면 레닌주의란 넓게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과 전술이며, 좁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론과 전술”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렇다. 레닌주의란 맑스주의 이론들에 의거하여 레닌이 진술한 이론과 전술의 체계이다. 1917년 이전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후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설교했던 그것은, 그 본질이 급진적 노동운동에서 발전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론이었다. 레닌은 후진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적 관계들이 성장하고 있음을 논증했으며, 그럼으로써 노동자-농민의 제휴에 의거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10월혁명 후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발전을 위한 이론을 제시하고 그것을 정치로 실현했다.

문제는 스탈린이 레닌주의를 맑시즘 반열의 과학이라 선언하면서, 모든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과 전술로 일반화한 데 있었다. 레닌의 이론들은 대개 러시아 혁명에 구속되어 있으며, 이는 레닌주의에 대한 분석을 통해 쉽게 확인된다.

그런데 볼쉐비키에게 이론이란 자연의 법칙성과 본질적 관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주는 과학적 지식의 최고 발전형태로서도 아니고, 임의의 사회현상에 대한 해석과 설명을 시도하는 시각과 표상 및 개념의 총체로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역사운동에 있어서의 혁명성 및 실천성과 관련해서 그 의미가 인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 작업은 여러 나라의 노동운동 경험을 분석하고 일반화하는 것, 또는 그런 일반화를 문제 해결이 요구되는 상황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한정될 수 없었다. 오히려 이론은 운동경험의 창조적 재해석을 통해 혁명의 실천을 위한 새로운 전망을 제공해야 했다. 볼쉐비키에겐 혁명이나 당의 정책 실현을 위한 유용성이 과학적 이론의 규준이 되었다. 이에 의거하여 그들은 단순한 일반화, 강령, 테제를 자주 이론이라 칭했다. 

레닌의 언어는 난삽하다. 때에 따라 모순되기도 했던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과 독재를 위해 전체적으로 체계를 이룬다. 그가 양산한 많은 신조어 중에는 전혀 근거 없는 것들도, 무단 도용된 것들도 있었다. 소수자였던 레닌파를 볼쉐비키, 즉 다수파로 규정했으며, 자신의 정치를 국가자본주의 개념으로, 그리고 전시공산주의 개념으로 정당화했다.

레닌주의는 후에, 특히 부하린주의자들에 의해 사회민주주의적으로 호도되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레닌주의는 러시아 노동운동 진영에서 그 지지자들이 소수에 불과했던 극좌적 이론체계였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그것의 사회적 기반은 극히 협소했으며, 따라서 사회주의 정권의 유지, 발전을 위한 레닌의 정치는 폭압적이며 잔혹할 수밖에 없었다. 레닌의 이론과 정치를 공시적 비평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의 육성을 통해 고찰하는 것은 레닌주의의 객관적 평가에 유용한 계기가 된다.

1) 낡은 볼쉐비즘

1894년 레닌은 『‘인민의 벗’이란 누구이며 그들은 어떻게 사회민주주의자에 맞서 싸우는가?』를 출간했으며, 이를 계기로 러시아 혁명운동권에서 맑스주의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레닌에 의하면, 일하는 개인의 복지가 진보의 유일한 척도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인민주의자들이 범한 근본적 과오는, 심화되는 사회경제적 관계의 모순들을 도외시한 것이었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추세가 되었고, 계급으로서의 노동자들이야말로 역사적 진보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맑스주의자들의 기본 과제는 인민들로부터 노동자들을 추출하여 혁명을 위해 조직화하는 것이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치활동은 러시아 노동운동의 발전과 조직화에 조력하고, 개별적이고 지도이념 없이 항의, ‘폭동’, 파업이 전개되는 현 상태의 노동운동을 부르주아 체제에 대항하는 전체 노동계급의 조직적 투쟁으로, 착취자에 의한 착취 및 근로자들에 대한 억압에 기초한 사회질서의 청산을 지향하는 전체 노동계급의 조직적 투쟁으로 변환시키는 데 있다. 이 활동의 기초가 되는 것은 러시아 노동자가 러시아의 모든 근로자와 피착취 주민들의 유일하고 당연한 대표라는 맑스주의자들의 일반 신념이다.”

위 책에서 레닌은 맑스-엥겔스의 저작들을 고찰하고 그 본질과 역사적 의미를 설명했으며, 특히 『자본』을 “과학적 사회주의를 진술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작품”이라 평가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맑스주의의 “과학”을 러시아 현실에 그대로 대입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혁명운동에서 이론 투쟁의 가치는 “과학”의 재창조로 담보됐다.

“우리는 맑스의 이론을 완전하고 불가침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 이론은 사회주의자들이 삶에서 낙오되기 원치 않는다면 반드시 전방위적으로 발전시켜야할 과학에 초석을 놓았을 뿐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우리는 맑스의 이론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에게 특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이론은 프랑스에 비해 특히 영국에 다르게 적용되는, 독일에 비해 특히 프랑스에 다르게 적용되는, 러시아에 비해 특히 독일에 다르게 적용되는, 그런 공통된 지도적 명제들을 제공할 뿐이기 때문이다.”

▲ 모스크바 루츠니키 스타디움 정문에 서 있는 레닌 동상의 모습 [사진 뉴시스]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주의 승리를 위해 나아간다

1899년 출간된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은 방대한 분량의 자료가 동원된 실증적 연구였다. 레닌은 1861년 농노제 폐지 이후 농촌에서 상품생산 사회에 전형적인 모순들이 생성, 발전하고 있음을 지적했으며, 농노제의 잔재들, 특히 대지주제가 혁명적으로 붕괴되는 방식으로 농업이 발달할 가능성을 예상했다. 그러한 전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이에 의거한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을 가능케 하여 자본주의 타도라는 노동계급의 향후 과제를 실현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조성할 것인데, 연구를 통해 그가 도달한 결론은 아주 급진적이었다. 러시아에서 “수백만 명의 농민을 강력한 동맹자로 가진 프롤레타리아트가 선봉에 선 위대한 인민혁명이 성숙하고 있는데, 그 혁명은 짜리즘 타도에 국한될 수 없으며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멀리 자본주의 타도를 위해,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 나아간다는 것”이었다.

레닌의 화두는 혁명이었으나, 그의 초기 이론은 인민주의를 비판하고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 및 노동계급의 성장을 논증하는 데 집중됐다. 사회주의 혁명에 관한 그의 이론도 역사발전에 관해 맑스주의자들이 공유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레닌주의적 이론의 등장은 1902년 출간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확인되었으며, 그 요체는 계급의식의 외부 주입론과 노동계급의 전위로서의 혁명가 정당에 관한 것이었다.

레닌의 분석에 따르면, 독일의 베른슈타인주의, 러시아의 경제주의 등 대다수 사회민주주의 사조들은 노동자들이 운동 속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자연적으로 발전시킨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계급혁명을 반대하는 다양한 논의에 불과했다. “노동계급은 단지 트레이드-유니온이즘적 의식 정도를 자주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뿐이며, 깊은 과학적 지식에 기초해 얻어지는 사회주의 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에 의해 노동운동에 주입”될 수 있었다. 노동계급을 이끄는 “전위적 전사들의 역할은 오직 전위적 이론에 지도되는 당에 의해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이 레닌의 주장이었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완전한 혁명이론”이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수정주의와 경제주의의 출현으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에서 시작된 “분열, 해체, 동요의 시기”를 청산해야 한다는 레닌의 외침은 플레하노프의 입장에도 부합했다. 하지만 레닌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플레하노프가 사회주의 운동에서 인텔리겐치야의 지도적 역할을 강조한 데 비해 레닌은 혁명가 정당을 요구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아르키메데스의 아포리즘을 바꿔 외쳤다.

“우리에게 혁명가 조직을 달라. 그러면 우리는 러시아를 뒤엎을 것이다!”

그것은 직업혁명가들로 구성된 폐쇄적이며 강력한 중앙집권적 조직으로, 활동의 비밀성과 규율성이 필수적이었다. 직업혁명가들로 구성된 전위정당이라는 개념은 지하운동을 하는 데 유용했을지는 몰라도 “러시아를 뒤엎는” 데에는 그리 소용이 없었다. 1917년의 2월혁명 이전에 그 존재를 확인하기 어려웠던 “직업혁명가 조직”과 비교하면, 10월혁명 당시 볼쉐비키당은 대중정당으로 성장해 있었다. 1917년 4월에 약 8만 명이었던 당원 수는 동년 여름에 20만 명을 상회했다. 레닌도 문제를 어느 정도 인식했던 것 같다. 첫 번째 러시아 혁명이 진행되고 있던 1905년 11월,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대의원 소비에트가 혁명의 지도기관으로 등장했다는 소식을 접한 레닌은 소비에트의 역할에 대해 숙고하였다.

“내가 실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하건대, 정치적 측면에서 노동자 대의원 소비에트는 ‘임시혁명정부’의 맹아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소비에트는 가능한대로 빨리 자신을 ‘임시혁명정부’로 선포하거나 아니면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레닌의 급진주의는 이념적 사조에 머물지 않았다

1903년 여름 제2차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대회에서 레닌은 직업혁명가 조직이라는 뜻의 당 개념을 관철시키는 데 실패했지만 레닌파가 새로 구성된 당 중앙기구에서 과반 이상을 차지함으로써 자신들을 볼쉐비키(=다수파)라 부를 수 있었다. 그런데 대회 직후 레닌은 당 지도기관으로 규정된 《이스크라》 편집국에서 축출됨으로써 당권을 잃었고, 이후 볼쉐비키는 폐쇄적으로 조직된 당내 소수 분파로서 독자적인 혁명운동을 벌였다. 1908년 레닌은 분파 내 2인자인 보그다노프와 결별하였고, 그의 운동권 내 입지는 더 좁아졌다. 그 타개책으로 그는 1912년 초 자신을 추종하는 젊은 직업혁명가들을 규합하여 볼쉐비키당을 창당하였다. 레닌, 스탈린, 스베르들로프, 말리놉스키 등으로 당 지도부가 구성되었는데, 여기에 레닌의 당 개념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문제는 볼쉐비키당의 활동이 보잘 것 없었다는 데 있었다. 스탈린과 스베르들로프가 1913년 2월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지로 쫓겨나는 등 볼쉐비키의 국내 활동은 지속적 탄압으로 급속히 동결되었다. 특히 전쟁이 시작되면서 러시아 혁명운동의 휴지기가 시작되었다.

1917년 1월, 레닌은 첫 번째 러시아 혁명의 12주년을 기념해 스위스 청년노동자들이 준비한 집회에서 강연할 기회를 가졌다. “러시아 혁명의 독특함은 그것이 사회적 내용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것이었지만, 투쟁수단의 측면에 있어선 프롤레타리아적이라는 데 있다”고 한 레닌은 “1905년 러시아 혁명이 미래의 유럽 혁명의 서곡”으로 남아 있으며, 현재 유럽의 깊은 고요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침략전쟁은 “가까운 시기에 인민들의 봉기로 이어질 것”이며, 금융자본과 자본가에 반대하는 유럽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며, 내용상 사회주의 혁명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46세의 볼쉐비키 지도자는 스위스 청년들을 축복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우리 노인들은 이 미래 혁명의 결전의 순간까지 살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희망은, 스위스와 전 세계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이렇게 훌륭한 역할을 해내는 청년들이야말로 투쟁하는 행복뿐 아니라, 다가올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승리하는 행복까지도 누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혁명정당의 존재는 혁명 후의 문제를 궁리하게 하였고, “우리는 부단한, 연속된 혁명을 지지한다. 우리는 중도에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선언으로 압축되는 연속혁명론은 그 귀결이었다. 문제는 연속혁명론의 골자를 이루는 ‘노동자-농민의 혁명적 민주독재’ 개념에 있었다. 여기에는 다른 문제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노동자-농민의 제휴 형태 및 방법에 대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었다. 문제는 제국주의 연구를 통해 해결되었다. 레닌은 1916년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를 출간했으며, 이를 계기로 영구혁명론을 수용하였다. “새 볼쉐비즘”의 시대가 도래하였고, 「4월 테제」는 그 시작이었다. 

국가는 언제 비로소 소멸할 것인가

1917년 8∼9월 레닌은 핀란드에 피신한 몸으로 『국가와 혁명』을 썼다. 맑스의 모범을 따라, 그는 국가란 화해 불가능한 계급 적대감의 산물로서 피억압계급을 착취하기 위한 도구라고 규정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가 실시되는 혁명적 이행기가 놓여 있으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부르주아 국가를 폐지하고 대신 자신의 국가기구를 수립하여 계급독재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는 두 단계로 구별되는데, 최초의 낮은 수준의 단계가 곧 사회주의로서, 사회주의 하에서는 계급 착취가 폐지되지만 자본주의적 권리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으며,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노동에 따라 공평한 분배를 받게 되면서 일정 수준의 불평등이 함축된다. 사회주의 발전에 따라 구현되는 최고 단계의 사회가 바로 공산주의로서, 이때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사라짐과 동시에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방식으로 인민의 사회적 삶이 영위되는데, 이 단계에 이르러 계급독재 기구로서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소멸을 위한 경제적 조건에 대해 기술했다. 이를 근거로 많은 학자들은 레닌이 공산주의에 도달하기에 장구한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반되는 사실도 있다. 1918년 3월, 러시아볼쉐비키공산당 제7차 대회에서 부하린은 당 강령을 수정하자고 제안했다. 강령의 이론 부분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상세한 성격 규정과 더불어, 조만간 소멸할 국가에 관한 명확한 언급을 포함시키자는 것이었다. 레닌은 그를 거부했다. 

“지금 우리는 무조건 국가를 지지합니다. 국가가 없는 미래의 사회주의에 관해 그 성격을 자세히 규정하자 말하는데, 그때는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라는 원칙이 실현된다는 것 말고 여기서 궁리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직 요원합니다. [중략] 언제 비로소 국가가 소멸하기 시작할 것인가? ‘자, 보시오. 어떻게 우리의 국가가 소멸하는지’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시간적으로 우리는 두 번 이상 당 대회를 소집할 수 있을 겁니다. [중략] 미리 국가 소멸을 선언하는 것은 역사적 전망에 대한 교란이 될 겁니다.”

당장 국가의 소멸을 계획하자는 제안에 레닌은 2∼3년 후에나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반박했다. 당시는 당 대회의 매년 개최가 원칙이었다. 그들의 그런 판타지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세계 사회주의 혁명이 임박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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