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의 이념과 실제] (1) 1917년 혁명의 기록

올해는 러시아혁명 100주년이다. 100년을 되짚어보는 공론의 장이 활발히 열리고 있다. 혁명 역사의 현장을 찾아 러시아로 떠나는 사람들도 많다. 현장언론 민플러스는 러시아혁명 100주년의 발자취를 돌아보고자 러시아연방과학원 러시아역사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완종 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의 ‘러시아혁명의 이념과 실제’를 오늘부터 매주 금요일 연재한다. 1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독자 여러분이 러시아혁명을 재해석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편집자] 

2월 혁명이 시작되다

1917년 2월23일(신력 3월8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었다. 페트로그라드의 사회주의 운동세력은 여러 기념행사를 계획했고, 파업을 시작한 섬유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여성 평등권과 더불어 때로 빵을 요구하면서 거리로 나섰다. 아이들도 포함된 시위대에 “배고픈” 노동자들이 가세하면서, 러시아의 수도에서 소요사태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날 9만 명의 사람들이 시위에 가담했다. 다음날에는 “전쟁 반대”, “전제정치 타도” 등의 구호가 등장했으며, 25일에는 파업이 전면화되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페트로그라드 전체 노동자의 약 80%, 또는 3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왔으며, 학생이나 일반 시민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200만 명의 주민을 부양하던 페트로그라드의 도시 기능이 거의 마비되었다. 2월26일은 일요일이었다. 교외 공장지역에 결집한 노동자들은 정오가 지나면서 도심으로 진출했고, 거리를 메운 시위 군중에게 진압군이 총격을 가하면서 8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유혈사태가 빚어졌다. 

총격 소식에 격분한 일부 병사들이 병영을 이탈하여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병사들의 반란으로 귀결되었다. 27일 아침, 볼릔스키 근위연대에서 시작된 반란은 다른 부대로 확산되었고, 병사들은 노동자들과 합류했다. 혁명세력과 진압군 사이에 무질서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그날 저녁이 되기 전에 15만 병력의 수도관구군은 혁명에 용해되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그즈음 이미 6만6000명 이상의 병사들이 반란군에 가담하고 있었다. 28일 동이 트기 전에 혁명세력은 페트로그라드를 완전히 장악하였고, 짜리즘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동궁(冬宮)도 접수되었다. 

당시 3월2일자 《이즈베스치야》는 사태를 “기아 폭동”으로 규정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2월혁명은 “병사의 옷을 입은 노동자와 농민들”에 의해 완수되었다. 약 15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의 모범을 따라, 3월1일에는 모스크바에서도 “짜리즘”이 타도되었으며, 혁명은 순식간에 다른 지방 도시들로 파급되었다. 

▲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위치한 '크렘린' 궁전. 1917년의 러시아혁명으로 모스크바가 수도가 되어 1918년 이후 크렘린(Kremlin, 성채)은 당시 소련정부의 본거지가 되었다. [사진 뉴시스]

노동자-병사 대의원 소비에트라는 이름을 갖다

“무장한 폭도들”이 혁명과업에 종사하고 있던 2월27일 낮, 국가두마 일부 의원들과 이제 막 형무소에서 풀려난 활동가들이 국가두마 청사에 모여 소비에트의 창설을 논의했다. 대개 멘쉐비크나 에세르(=사회혁명당원)였던 그들은 그날 저녁 7시에 노동자, 병사 및 주민 대표들이 참여하는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고,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즉시 대표자나 대의원들을 선출하여 국가두마 청사인 타브리다 궁으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사회주의자들이 소비에트 창설을 도모하고 있던 시간에 일단의 국가두마 의원들도 타브리다 궁의 한편에 모여 “수도의 질서 확립을 위한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를 구성했다. 부르주아와 대지주들을 대변하던 10월당과 귀족주의적인 입헌민주당이 주축이 된 국가두마 임시위원회에는 두 명의 사회주의자, 즉 N. 츠헤이제와 A. 케렌스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파는 달랐으나 그들은 모두 짜리즘이라는 전제정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공유하였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공화주의자라고 불릴만했다. 짜리 니콜라이 2세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의 정당성을 승인해 달라는 두마의원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두마 임시위원회가 정부로서의 권한 행사를 시작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았다.

1917년 2월27일 밤 9시, 타브리다 궁에는 120~150명의 대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첫 회의가 개최되었다. “집행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소비에트 지도부가 구성되었으며, 그 의장으로 츠헤이제가 선출되었다. 3월1일에는 병사 대표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대의원 소비에트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의원 소비에트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2월혁명 후 러시아 전역에서 등장하게 되는 노동자-농민-병사 대의원 소비에트의 모범이 되었다. 1917년 3월에만 전국에서 약 600개의 소비에트가 등장했다. 1917년 6월 전국의 각 소비에트에서 선출 파견된 대의원 1000명 이상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전(全)러시아 소비에트대회가 개최됐다. 이렇게 1917년 봄에 혁명기구로서 소비에트가 신속히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은 1905년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 첫 등장, 노동계급을 대표한 최초의 대의기구

러시아에서 소비에트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을 계기로 시작된 첫 번째 러시아 혁명 때였다. 1905년 5월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대규모 노동자 파업이 있었고, 그때 처음 노동자 대의원 소비에트라는 회의체가 등장했다. 그것은 각 공장에서 선발된 약 150명의 대의원이 참여한 파업 지도기관이었다. 소비에트의 특성으로 자연발생성이 강조되기는 하지만, 그 구상 자체는 짜리 정부의 요구에 대응한 측면도 있다. 짜리의 지시로 “피의 일요일”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가 구성됐고, 위원회는 파업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불만을 대변할 공장대표들을 선출하라고 명령했다. 최초의 소비에트는 그 결과이기도 했다. 동년 10월 전국적으로 노동자 총파업과 시위가 전개되며 혁명운동이 정점으로 치달을 때,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도 노동자 대의원 소비에트가 조직됐다. 처음에 40명의 대의원들로 구성된 소비에트는 곧 20만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를 대표하는 약 560명의 대의원이 참여하는 초당파적인 대규모 조직으로 발전했다. 52일 동안 존속했던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비상한 권위를 획득했다. 그것은 참정권이 없던 노동계급을 대표한 최초의 대의기구였으며, 기관지 《이즈베스치야》를 발행하면서 짜리즘에 대한 혁명투쟁의 선봉에 섰다.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대의원 소비에트의 첫 의장은 노동운동에 가담한 변호사였던 게오르기 흐루스탈료프-노사리였다. 하지만 그는 명목에 불과했고 처음부터 소비에트의 실질적 지도자는 레프 트로츠키였다. 트로츠키는 소비에트의 성명서와 결의문들을 대부분 직접 쓰고 《이즈베스치야》를 편집했으며 각종 연설로 노동자들을 선동했다. 영구혁명론으로 전제정 타도 및 노동자 정부의 수립을 주창했던 그는 1905년 11월 흐루스탈료프-노사리가 체포되자 소비에트 의장에 공식 선출됐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마지막 선동은 동년 12월2일자 《이즈베스치야》에 공표된 이른바 「재정 선언」이었다. 

“전제정은 인민의 신임을 받은 적도, 인민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적도 전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짜리 정부가 노골적으로 전 인민과의 전쟁을 개시한 지금, 짜리 정부가 체결 도입한 모든 차관의 변제를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12월3일 트로츠키를 포함해 노동자 대의원 전원이 체포되면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와해됐다. 트로츠키는 20대 중반 나이에 혁명지도자로서 전국적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이름은 곧 전설이 되었다. 

아무튼, 1917년 2월27일의 결과 러시아에는 국가두마의 권력과 소비에트의 권력이 공존하는 이른바 이중권력이라는 독특한 상황이 창출되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임시정부로서의 내각을 합법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을 국가두마 임시위원회에 부여하였고, 그럼으로써 두 권력 사이에 협력관계가 설정되었지만, 그것으로 정치적 안정이 담보될 수는 없었다. 임시정부 각료들은 대개 대지주, 귀족, 자본가 출신의 정치인들이었다. 반면 노동자, 농민, 병사들이 집결한 소비에트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과 사회혁명당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기본적으로 노동자 정당이고 사회혁명당은 농민 정당이었다. 게다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멘쉐비키, 볼쉐비키, 트로츠키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고, 사회혁명당은 혁명노선을 둘러싸고 좌파와 우파로 분열해 있었다. 

레닌의 귀환과 「4월 테제」

1917년 4월3일, 스위스에 거주하던 레닌이 “밀봉열차”를 타고 독일을 경유하여 페트로그라드로 귀환하였다. 도착지인 핀란드 역에서의 첫 연설을 “사회주의 혁명 만세!”라는 외침으로 마감하여 환영 나온 사람들을 놀라게 한 레닌은 다음 날 「4월 테제」를 공표하였다. 10개 항으로 구성된 「4월 테제」의 핵심은 두 번째 항에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러시아에서 현 정세의 독특함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성과 조직성 부족으로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넘겨준 혁명의 첫 번째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이 당연히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 두 번째 단계로의 이행에 있다.”

러시아 맑시즘의 대부 G. 플레하노프는 레닌의 말을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멘쉐비키는 “일찍 권력을 장악한 계급은 파멸한다”는 맑스의 묵시록적 예언을 들먹이며, “러시아에 내전의 깃발을 세웠다”며 레닌을 비난했다. 이에 레닌은 “계급투쟁을 인정하는 자는 모든 계급사회에서 당연하며 또 필연적 계급투쟁의 결과로 나타나는 내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내전을 부정하거나 또는 내전을 망각하는 것은 극단적 기회주의에 빠지거나 사회주의 혁명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일갈했다. 

당시 스탈린을 비롯한 페트로그라드의 볼쉐비키는 레닌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과거에 그가 설교한 볼쉐비즘이 아니었다. 그러자 레닌은 혼란에 빠진 그들에게 『파우스트』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가르침을 주었다. 

“나의 친구 이론이여, 그대는 잿빛이나, 영원한 생명의 나무는 푸르도다!”

미국에서 2월혁명 발발 소식을 들은 트로츠키가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날은 1917년 5월4일이었다. 트로츠키는 지지자들에게 제2의 혁명을 준비해야 할 필요성에 관해 연설했으며, 이런 그를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이 환대할 리 없었다. 트로츠키를 반긴 사람은 레닌뿐이었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레닌을 만났을 때 그와 거리를 두었다. 그것은 그가 당시 페트로그라드에 퍼져있던 “레닌은 독일 스파이”라는 소문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레닌에 대한 누적된 불신 때문이었다. 

5월 10일에 레닌은 “메쥐라이온츼” 협의회에 참석해 “진정한 국제주의자들” 모두의 통합을 호소했다.

 

메쥐라이온츼

1912년 볼쉐비키당이 창당된 후, 트로츠키는 러시아 노동운동의 분열을 비판하며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통합을 호소했으며, 그 결과로서 분파 초월적 관계를 지향한다는 뜻으로 역제파(域際派)라고 직역되는 “메쥐라이온츼” 그룹이 1913년 말 페테르부르크에서 출현했다. 1917년 2월 수백 명에 달했던 “메쥐라이온츼”는 2월혁명에 적극 가담했으며, 1917년 5월 페트로그라드로 귀환한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메쥐라이온츼”, 즉 트로츠키파는 1917년 여름 볼쉐비키당에 합류하였다. 

그들이 볼쉐비키와의 통합에 즉시 찬성하지 않았지만, 트로츠키는 레닌의 혁명 노선에 대해 원칙적 동의를 표현하였다. 협의회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채택된 결의에 대해 나는 모두 동의합니다. 그런데 나는 러시아 볼쉐비즘이 국제주의화된 만큼만 동의하는 겁니다. 볼쉐비키가 탈(脫)볼쉐비즘화되었는데, 나는 볼쉐비크라고 불릴 수 없으며, [중략] 우리들에게 볼쉐비즘을 인정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던 중에, 임시정부에 대한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비난이 고조되었다. 이는 멘쉐비키와 에세르들이 지도하는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대한 불만이기도 했다. 그 원인의 중심에 전쟁문제가 있었다. 인민의 사회경제적 삶의 조건들이 악화되는 가운데 “제국주의적 전쟁”을 지속하려는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병사와 노동자들의 시위가 벌어졌고, 5월 초에는 임시정부의 정치적 권위를 보강할 목적으로 사회주의자 6인이 각료로 참여한 새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특히 7월3일,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전쟁을 거부하는 병사와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으며, 그날 저녁 볼쉐비키당은 시위대에 가담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무장 세력이 포함된 시위 군중은 임시정부의 청사이면서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가 있는 타브리다 궁으로 향하였다. 다음날 시위는 더 격화되었고, 임시정부는 군대를 동원했다. 4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유혈사태를 겪고서 시위는 진압되었고, 페트로그라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배후 세력으로 지목된 볼쉐비키에 대한 비난과 탄압이 시작되었고, 레닌은 핀란드로 피신하였다. 

10월25일, 임시정부를 타도한 무장봉기

7월8일에 케렌스키가 임시정부 수반으로 취임했으며, 7월말에는 사회주의자들 위주로 구성된 새 내각이 등장했다. 이에 이중권력으로 표현되었던 자유주의 대 사회주의의 정치구도가 “자유주의와 제휴한 사회주의 대 혁명적 사회주의”라는 구도로 바뀌었다. 혁명적 사회주의를 대표한 것은 볼쉐비즘과 트로츠키즘이었다.

1917년 여름 러시아 군부의 쿠데타 시도는 볼쉐비키에게 정치적 위기 극복의 계기가 되었다. 8월25일, 러시아군 총사령관 L.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의 퇴진을 요구하며 군대를 페트로그라드로 출정시켰다. 수도에 진입해 “질서를 회복하라”는 명령과 함께였다. 반란군 진압에 볼쉐비키-병사들이 가장 적극적이었고, 상황 종료 후, 볼쉐비키당에 대한 지지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9월4일 감옥에서 석방된 트로츠키는 며칠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모스크바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도 볼쉐비키가 소비에트에서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소비에트의 볼쉐비키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1917년 6월 전국의 각 소비에트에서 선출 파견된 1000명 이상의 대의원이 참여하여 제1차 전(全)러시아 소비에트대회가 열렸을 때 대의원의 절대다수는 멘쉐비키와 에세르였고, 볼쉐비키는 105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동년 10월 제2차 소비에트 대회 때는 볼쉐비키가 전체 대의원의 약 60%를 차지했다. 

핀란드에서 고난을 견디던 레닌은 9월 중순 볼쉐비키당 중앙위원회로 편지를 보내 “수도 두 곳[=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노동자-병사 대의원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확보했다면 볼쉐비키는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으며 당연히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무장봉기를 준비할 것을 요구하였다. 10월 초 레닌이 페트로그라드로 잠입했으며, 곧 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국가권력의 장악을 위한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무장봉기는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는 10월25일에 맞춰졌다. 새 권력은 소비에트 대회에서 승인될 필요가 있었다.

10월25일(신력 11월7일) 아침, 페트로그라드의 주요 거점시설을 거의 모두 장악한 볼쉐비키는 「러시아 공민들에게」라는 제호의 전단을 살포하며 임시정부가 타도되었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산하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권력을 장악했다고 선언하였다. 그날 오후, 레닌은 트로츠키의 주재 하에 열린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비상총회에 나타나 이렇게 열변을 토했다.

“볼쉐비키가 늘 주장했던 노동자-농민의 혁명이 완수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러시아 역사의 새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며, 이 세 번째 러시아 혁명은 궁극적으로 사회주의의 승리로 귀결될 것입니다. [중략] 러시아에서 우리는 지금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매진해야만 합니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 만세!” 

10월25일 밤, 제2차 전(全)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개막되었다. 카메네프가 대회를 주관했으며, 정부 권력, 전쟁과 평화, 그리고 제헌의회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자고 제안했다. 격렬한 논쟁과 상호 비난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혼란스런 분위기 속에서 혁명 지도자 트로츠키가 등단하여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일어난 것은 봉기이지 음모가 아니오. 인민대중의 봉기는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노동자와 병사의 혁명적 에너지를 달구어 왔습니다. 우리는 공개적으로 인민들의 봉기에 대한 의지를 단련시켜 왔으며, 우리의 봉기는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들은 우리에게 승리를 포기하고 타협할 것을 요구합니다. 과연 누구와? 당신들은 불쌍한 소수요, 당신들은 파산했소. 당신들의 역할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자, 가시오. 당신들이 지금부터 있어야 할 곳,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가시오!”

4월3일부터, 즉 레닌이 스위스에서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날부터 계속된 러시아 혁명가들의 지리한 논쟁은 그렇게 10월혁명으로 마감되었다.

10월26일 저녁, 제2차 소비에트 대회는 임시정부를 타도한 군사혁명위원회의 행위를 추인했으며, 레닌이 보고를 통해 제출한 〈평화에 관한 법령〉과 〈토지에 관한 법령〉, 그리고 〈소브나르콤 구성에 관한 법령〉을 승인했다. 새 내각인 인민위원회의, 즉 소브나르콤 의장은 레닌이었고, 트로츠키는 외무인민위원, 스탈린은 민족문제인민위원이 되었다. 대회의 마지막 안건은 소비에트의 상설 최고기관인 전(全)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는 일이었다. 62명의 볼쉐비키와 좌파 에세르 29명을 포함해 총 101명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대회가 끝난 후 레닌은 「노동자 통제에 관한 규정」을 법령화했다.

소비에트는 볼쉐비키 정권의 민주성과 정당성을 보증했으며, 레닌은 새 정권을 “소비에트 권력”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소비에트와 볼쉐비키 정권은 일정한 부정합 관계에 있었다. 볼쉐비키는 병사들에게 평화를, 농민에게 토지를, 노동자에게 공장(=노동자 자주관리)을 보장하겠다고 선전, 선동함으로써 소비에트의 지지를 획득했지만, 레닌의 목표는 더 멀리 있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한 사회주의 건설이었다. 

이완종 교수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후 러시아연방과학원 러시아역사연구소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러시아혁명 관련 저서로는 <러시아 10월혁명사>(2012), <이념의 제국>(2014)가 있다.

주요 논문으로 <러시아의 극동진출과 중-러 국경획정과정 연구>(2005), <사회주의와 민족문제 : 소련의 민족정책을 중심으로>(2007) 외에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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