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평가와 한국의 당 건설(6)
본문 요지
민주노동당은 의회주의노선에 따라 시간이 흐를수록 ‘선거’를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간주하고 당력을 집중하였다. 당은 점점 더 의회활동과 ‘의원단’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졌으며, 다른 활동들은 모두 이를 위한 보조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 NL과 PD 양대 진영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의회주의 노선에 있어서의 ‘일치성’은 양 파벌의 정체성인 ‘계급모순’ 혹은 ‘민족모순’ 우위와 같은 구체적인 노선 차이를 압도하였다. 이리하여 한정된 의원직과 당직을 놓고 싸우다 보니 정파 간의 갈등은 심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의회주의야말로 민주노동당 내 패권주의의 일차적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 패권주의의 기원과 의회주의
1) 문제는 ‘의회주의’
민주노동당의 탄생과 그 이후 8년간의 활동은 한국의 노동운동과 변혁운동사에 있어 큰 의의를 갖는다. 그동안 ‘재야세력’으로만 머물면서 도덕적 정당성을 갖는 것에 만족하여야 했던 진보진영은, 사회변혁을 주도할 일원으로 대중 앞에 자기 모습을 새롭게 드러내었다. 이제부턴 보수야당의 들러리나 지원세력이 아니라, 그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당당하게 ‘정권 창출’과 새로운 사회 건설의 주체세력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를 위한 첫 번째 관문으로, 그간 진보세력의 제도권 진출을 번번이 가로막았던 ‘3%룰’ 을 무력화시키면서 2004년 국회에 첫 입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 후부터 한국 진보진영은 마음만 먹으면 합법정당을 결성하고 제도권에 진출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게 되었다. 지자체 의원, 자치단체장, 국회의원, 심지어는 대선 후보까지도 배출하는 등 제도권 정치 경험을 착실히 쌓아갔다. 의회연단을 활용하는 기술과 대중적 정당운영의 경험을 축적하였으며, 수만 명의 당원과 당직자 등 귀중한 인적 자산도 확보하였다. 이제 ‘국회’라는 철옹성은 노동자와 민중의 눈높이 수준으로 낮추어 졌으며, 아직 얼마간 거리가 있긴 하지만 ‘권력 장악’이라는 목표 역시 단지 추상적이고 당위적인 것만이 아닌 현실적 목표로 전환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거둔 이 같은 성과와 함께 여러 가지 문제점도 동시에 노정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민주노동당은 대중운동에 복무한다는 ‘초심’에서 멀어지면서 의회진출과 제도권 활동에만 매몰되어 갔다. 당의 모든 활동은 의회사업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갔으며, 또한 각종 출세주의와 개인적 야심가들이 활개치고 정파 간의 권력다툼도 도를 더해갔다. 마침내 민주노동당 초기의 자제, 양보, 타협, 균형의 정신이 깨지고, 정파 간 갈등은 결국 화해할 수 없는 대립으로 치달아 민주노동당은 분해되고 말았다.
민주노동당은 왜 초기의 장애를 넘어서서 막 ‘생존’의 가능성을 확인하자마자, 그 내부 갈등의 격화로 스스로 분열하여 자멸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이제 이와 관련한 문제점을 점검하면서 이후 노동운동과 변혁진영의 전진을 위한 타산지석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대체로 민주노동당을 평가할 때 사람들은 ‘패권주의’ 문제를 많이 거론한다. 그것 때문에 민주노동당이 ‘분열’되었으며 결국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패권주의’란 연합정당 내에서 다양한 참여세력 간의 구동존이(求同存異), 즉 상호 존중과 배려하는 정신에 입각하지 않고 다수파가 힘으로 밀어붙이는 식으로 당의 의사결정과 당직을 독단하고 독식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 결과 연합세력 간에 앙금이 깊어지고, 결국 내부 조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갈등이 심화되어 ‘연합’이 붕괴되고 만다.
민주노동당이 분당될 시점에 이 같은 패권주의 문제는 실제로 매우 심각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때론 파벌간의 대립이 불거지기도 하였지만, 민주노동당에 참여하는 제 정파들은 당의 ‘연합체’적 성격을 잘 의식하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어느 특정 정파나 집단의 독주로 인해 당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당직 개편 후 출범한 1기 지도부(2004년6월~2005년11월) 때까지만 하더라도, 당시 최고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한 자주파는 평등파와 협의해 대표를 추대하고 정책위의장을 평등파에 양보하는 등 서로를 배려하면서 일종의 ‘계파 안배’에 신경을 썼던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소수파에 대한 이 같은 배려에 대해 다수파는 “거추장스럽고 불만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당내 다수파는 1기 지도부 선거 때와는 달리 2기 지도부 선거 때에는 당3역을 모두 장악하는 전략을 추진했으며, 비록 무산되기는 하였지만 나중에는 대표가 사무총장과 정책위의장을 임면할 수 있게 하는 당헌 개정까지 추진했다.
이처럼 민주노동당 내에서 한쪽의 일방적 독주에 의한 ‘패권주의’ 현상이 전면에 돌출하게 된 것은 ‘특정 시점’ 부터라 할 수 있다. 이는 잠재되어 있던 정파들 간의 모순이 어떤 계기에 의해 격발된 후, 더 이상 화해할 수 없는 지경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과정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당내 파벌 갈등을 격화시킨 요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이에 대해 두 가지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첫째, 중간에 북핵문제가 대두되면서 북한에 대한 태도를 놓고 양자간의 ‘노선대립’이 전면화 되었을 가능성이다. 둘째, 민주노동당이 선거에서 일정한 성공을 거두면서, 애초 ‘대중투쟁의 활성화’에 복무한다는 취지에서 멀어져 감에 따라 선거와 당직을 차지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을 가능성이다.

이중 첫 번째 것은 서로 다른 정파 간의 노선 상의 문제와 관련된다. 이에 비해 두 번째 것은 의회활동에 대한 기본 태도와 관련된다. 과연 민주노동당에 있어선 NL과 PD 두 진영 간의 노선차이가 주요한 문제였나, 아니면 의회사업에 대한 기본 태도가 문제였을까?
외부에는 2005년과 2006년 사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선언과 1차 핵실험 성공 발표로 ‘북핵문제’가 첨예한 쟁점이 되고, 이후 민주노동당 내 일부 당직자가 북한에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당내 양대 정파 간 대립이 첨예해진 것으로 알고 있다. 민주노동당 전체가 이로 인해 보수세력과 여론에 의해 ‘친북단체’로 집중 공격당하면서 곤경에 처하고, ‘종북세력’과 결렬해야 한다는 얘기도 이즈음을 전후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이와는 다른 해석을 한다. 그것은 당시 비주류로 몰렸던 PD정파 내 일부 집단이 당내 주도권을 탈환하기 위한 하나의 명분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처럼 ‘노선대립’이 격화한 것조차 일종의 ‘결과’이며 분당의 진정한 원인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PD진영 내 일부 세력이 당내 NL진영의 약진과 자신들의 지역 정치기반이 침식당해 공천이 어려워지고 지구당의 당권을 빼앗기게 된 상황에서 NL과의 분당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북핵문제나 북한과의 연계(소위 ‘종북세력’) 문제는 그를 위한 빌미가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어느 쪽이 좀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민주노동당의 파벌문제를 연구했던 인하대 정영태 교수에 따르면 민주노동당 내 파벌 갈등은 2004년 총선과 2007년 대선을 기점으로 다음 3단계를 경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 시기는 2000년 창당부터 2004년 총선까지다. 이 시기는 건수도 많지 않고, 대부분이 지역 수준에서 당규 위반으로 발생했으며, 광역시‧도당이나 중앙당에서 당규나 정치적 리더십으로 무난히 해결됐다. 두 번째 시기는 2004년 총선부터 2007년 대선까지다. 발생 건수도 많아지고, 당규 위반보다는 제도 개선 방안이나 이념‧노선을 둘러싸고 지역보다는 중앙당에서 많이 발생했으며, 대부분 중앙위원회나 당 대회의 표결로 처리하면서 소수파의 소외감과 불만이 누적됐다. 세 번째 시기는 2007년 대선이 끝난 직후부터 2008년 2월 3일 임시 당 대회까지다. 불과 한 달 반 정도 기간에 거의 매일같이 논란과 대립이 나타났고, 두 번째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념과 노선, 특히 다수파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친북 노선을 둘러싸고 중앙당 수준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지만 주로 외부 언론을 통해 논박이 진행됐다. 두 번째 시기처럼 조정자 또는 중재자로서 권위 있는 정치적 리더십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파벌 지도자가 전면에서 싸우는 양상이 돼버렸다. 더구나 다수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인 친북 노선과 패권주의가 대립의 초점이 되면서 전형적인 제로섬 게임, 특히 치킨게임으로 발전해 결국 분당으로 귀결됐다.”1)
정교수의 민주노동당 내 파벌갈등에 관한 서술이 어느 정도 객관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면, 북핵문제와 같은 NL과 PD진영의 정체성과 관련된 본질적 노선갈등은 양진영 대립의 막바지 단계에서나 전면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첫 번째 시기에도 이러한 이념과 관련된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당명을 ‘민주노동당’으로 할 것인가 ‘통일민주진보당’으로 할 것인가, 강령에서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진보적 사회주의’인가, ‘북한 체제의 성격과 통일방향’과 같은 당의 이념과 노선을 둘러싼 논쟁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갈등의 해결 방식을 보면, 당시에는 이러한 중앙당 차원의 갈등이 파벌 간 타협이 어려운 이념이나 노선과 관련된 문제였음에도, 공식 회의에서 토론과 표결로 처리하고 소수파도 결과를 수용하면서 무난히 해결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시기 갈등의 주요한 진원지는 지구당이었다. 지구당 차원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은 대체로 당직 선거권을 포함한 당권의 행사 조건(당비 대납, 주소지 이동 등), 공직 선거후보 선출과 선거운동, 재정 운영(예, 회계 부정) 같은 당권의 획득이나 행사 또는 선거운동과 관련된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문제들은 지구당 운영위원회나 시‧도당 지부의 선거관리위원회 또는 당기위원회가 당규에 따라 처리했으며(서울 노원도봉지부 사건, 인천 남동갑 지구당 사건 등), 지역에서 해결하지 못할 경우 중앙당이 개입해서 해결했다(2000년 총선 시기 울산 북구 사태 등). 그리고 중앙당의 기관이 당규에 의거해서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는 당대표단이 공식‧비공식 통로를 통해 갈등 당사자 간의 타협을 유도해 해결했다. 한 마디로 첫 번째 시기 양진영의 갈등은 당내의 강령과 규약과 같은 ‘제도적 틀’ 내에서 무난히 수습이 가능하였던 것이다.2)
그러나 두 번째 시기(2004년 총선~2007년 대선)에 들어선 후부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앞서 인용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파벌갈등이 지구당보다 중앙당 차원에서 많이 발생하였으며, 그 성격도 지엽적인 ‘당규 위반’보다도 제도 개선 방안이나 이념‧노선을 둘러싼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가까웠다. 해결 방식에 있어서도 사전 조율이나 지도자의 리더십에 의존해서보다 대부분 중앙위원회나 당 대회의 단순 표결로 처리하였으며,3) 이에 따라 소수파의 소외감과 불만이 누적되어 갔다. 심지어는 내부적 해결이 불가능함에 따라 외부세력인 검찰에 고발하는 사건까지도 발생하였다.
마지막 세 번째 시기는 두 번째 시기의 연장이자, 막바지 최종적인 파국으로의 치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이 단계에 들어서서는 당내 파벌갈등은 수습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으며, 탈당파들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설정한 수순을 밟아 나갔다.

이렇게 볼 때 관건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기 사이에 당내 파벌 갈등의 성격 변화를 결정 지었던 원인에 대한 해명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두 시기를 가르는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다. 하나는 당내 정파 역관계의 변화이다. 자주파는 2001년 전국연합 9월 대회 이후 가맹 조직들이 속속 민주노동당에 가입하였는데, 특히 2003년 10월 전농의 가입은 민주노동당이 농촌지역과 전라도에서 지지기반을 크게 넓히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와 함께 자주파는 특유의 조직사업 능력을 발휘하여 자파 당원수를 확대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차츰 대의원대회, 중앙위원회 등 당의 주요 의사결정기구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4)
이로써 민주노동당 내 다수파와 소수파가 바뀌었다. 처음 당 창건을 주도했던 평등파는 소수파로 밀려났으며, 뒤늦게 참가한 자주파가 다수파가 되어 당권을 장악하였다. 민주노동당의 두 번째 시기는 이 같은 당내 정파 역관계의 변화 추세 속에 있었는데,5) 다수파는 힘의 우위를 확보한 후 스스로를 절제하는데 실패하였다. 연합정당의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파 간 ‘균형’이 파괴되고 당이 분해될 수도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파의 ‘독식 욕구’를 억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두 번째 시기에 민주노동당 내 패권주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 원인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여기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기를 가르는 또 다른 변화가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민주노동당이 17대 총선에서 지역구 2석을 포함한 총 10석을 획득함으로써 국회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지지율도 한 때 20%에 육박하게 되었다. 이처럼 민주노동당이 외형적인 성공을 거둠에 따라 당내 파벌 갈등은 더욱 커졌는데,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다음 글을 한 번 보도록 하자.
“(2기 선거 때는 평등파와 협의해 추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주파가 독자적으로 투표방침을 결정한 것은)……1기를 해보니까 대표와 정책위의장 등 다른 주요 당직을 다른 진영에서 하니까 정책은 정책대로 안됐죠, (또 그 사람들이) 대충대충 하죠. ……(그래서)이제는 다수 이쪽에서 해야 되는 거 아니냐 한 거였어요.”6)
당시 다수파였던 자주파 인사의 말이다. 위 인용문에는 파벌 갈등 심화와 관련한 중요한 열쇠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여 진다. 참고로 여기서 1기는 2004년 17대 총선 이후 정책위의장 직선과 최고위원제를 도입한 이후를 말한다.(2004년6월6일 ~ 2005년10월31일)
사실 민주노동당 1기에는 각 계파 간 균형에 신경을 쓰는 바람에 그 대가로 당의 집행력에 문제가 생겼다. 당 대표로 자주파의 지지를 받은 김혜경, 사무총장은 자주파계열(울산연합) 김창현, 정책위의장은 평등파계열(자율과 연대) 주대환이 당선되었다. 이리하여 사업 집행에 있어 위의 자주파 인사가 지적하듯이 당 3역간 ‘엇박자’가 발생하였다. 그 때문에 다수파는 최소한 당 3역은 자파가 모두 차지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주파의 고민은 원래 17대 총선 전부터 이미 표출된 민주노동당 전체 집행체계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2003년 후반 당원이 증가하고 당세가 확장되자 지도 집행체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민주노동당은 여러 가지 제도를 개선했다. 기존의 다원적이고 복잡한 집행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13인의 최고위원회’ 제도가 새로 도입되었다.7) ‘13인의 최고위원’ 중 의원단 대표를 제외한 12인의 최고위원은 당원의 직선으로 선발되었다. 하지만 애초 취지와는 달리 이 제도 역시 당의 집행력을 강화시키지는 못했으며,8) 오히려 다수파에 유리한 ‘세팅투표제’9)로 말미암아 승자승 독식이 강화되었으며 ‘패권주의’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에선 연합정당의 성격 상 계파간의 균형이 요구되고, 다른 한편에선 당 전체의 사업체계 강화가 필요한 이 같은 딜레마적 상황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이 문제는 보다 심도 깊은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기에 아직 본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만한 사안은 아니다. 여기선 다만 문제의 해결 방향으로 정파 간의 동질성이 높아지는 길 밖에 없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많은 실천과 토론 속에서 어떤 노선이 정확한지 실천적으로 검증될 수 있고 제 정파 간 상호침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조직을 이끌 수 있는 ‘안정적 다수’, 그리고 ‘권위 있는 지도부’가 창출됨으로써 비로소 이 같은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 민주노동당은 아직 창당 초기로써 그럴만한 조건을 갖추지 않았다는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왜 그토록 빨리 민주노동당에 ‘과부하’가 걸리게 되었는지를 주목해야만 한다.
2004년 총선을 거친 후 민주노동당은 그 위상이 높아졌다. 이대로 가면 ‘집권’도 가능하다는 장밋빛 기대감까지도 갖게 되었다. 참여 정파 간에 여전히 현저한 이질성과 노선차이가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과도한 기대는 민주노동당으로 하여금 조기에 과부하가 걸리게끔 만들었다.
의회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우선 가능한 많은 의원을 당선시켜 국회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목표가 달성되고 나면 다음은 제1 야당이 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최대 다수당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법 개정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근본적 개조를 할 수 있게 된다.
민주노동당은 이 같은 의회주의노선에 따라 시간이 흐를수록 ‘선거’를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간주하고 당력을 집중하였다. 당은 점점 더 의회활동과 ‘의원단’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졌으며, 다른 활동들은 모두 이를 위한 보조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에 따라 민주노동당에 참여하는 각 정파들은 자파 소속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을 얼마나 많이 당선시키느냐를 놓고, 혹은 이러한 공직 진출의 전단계로 간주되는 당3역 내지 광역시‧도당 및 지구당(지역위원회)을 장악하기 위한 ‘내부 투쟁’에 가장 열을 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국회나 지방권력에 진출할 수 있는 공직과 당직은 어차피 한정되기 마련이다. 이처럼 한정된 감투를 놓고 싸우다 보니 정파 간의 갈등은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민주노동당이 애초 성과를 거두지 못했더라면 그토록 큰 기대를 갖지 않았을 터인데, 오히려 가능성이 확인 되는 순간 내부 갈등은 심해졌다.
결국 ‘의회주의’야말로 패권주의의 일차적 원인이다. 민주노동당이 성공을 거둘수록 다수파는 계파균형 보다도 ‘사업적 고려’를 우선시 하였는데, 다수파는 이를 위해 심지어는 연합정당이 붕괴될 위험까지도 감수하는 ‘모험’을 서슴지 않았다. 이렇듯 진짜 문제는 ‘의회사업’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있었다. 이 문제는 북한에 대한 입장 차이와 마찬가지로 ‘기본노선’ 문제에 속하며, 전통적으로 개량주의세력과 변혁세력을 갈랐던 원칙적 성격을 지닌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양대 진영은 전혀 다르지 않았다. NL이든 PD든 자파가 하나라도 더 많은 의원직과 당직을 차지하길 바랐으며, 서로 조금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민주노동당의 ‘패권주의’는 노선차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노선상의 일치 때문에 발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양자는 민주노동당이 과부하에 걸릴 만큼 의회사업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의회주의 노선에 있어서의 자주파와 평등파의 ‘일치성’은 양 파벌간의 정체성과 관련된 ‘계급모순’ 우위 혹은 ‘민족모순’ 우위와 같은 구체적인 노선 차이를 압도하였다. 당시 (자주파 성향을 가졌지만) 특정 정파 조직에 가입해 있지 않았던 한 중앙당 당직자는 민주노동당 시절의 정파 갈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일단 철학적 기반이 되는 어떤 가치에 대한 문제나 이런 철학적 기반에 대한 차이들은 조금 조금씩…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런 견해들이 당내에서 합법적 진보정당 내에서 노선과 정책으로 자리 잡을 때는…별로 차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10)
또한 평등파 계열의 최대 정파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한 인사도 정파 간의 갈등은 이념이나 정책보다는 조직 운영 방식에 대한 인식 또는 조직 문화의 차이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는 비슷한 지적을 하였다.11)
겉으로 들어나는 양자의 모습이 엇비슷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목표와 방식이 큰 틀에서 일치하게 되면 나머지는 사소한 차이로 밖에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가정해 볼 수 있다. 만약 민주노동당이 대중투쟁에 복무하는 것을 진정으로 당 활동의 목표로 삼았다면, 그 참여 정파들이 그렇게까지 당직과 공직에 연연해 할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의석수가 많으면 좋긴 하지만, 그것은 변혁운동의 관점에서 볼 때 절대적 필요조건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중의 정치적 각성이자 그 물질적 표현인 조직이기 때문이다. (계속)
본문 주석
1) 정영태, 2011년, <파벌>, 이매진,p113 참조. 굵은 글씨체 강조는 인용자에 의한 것임.
2) 이상, 위의 책, p115-116 참조. 다음을 보면 좀 더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정당 초기에 지구당에서 발생한 사건 중 상당수는 당원 자격(당비의 수준, 납부 방식, 주소지 등)과 관련된 당규 규정이 모호하거나 아예 없어서 발생했다. 따라서 중앙당은 분재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당규의 규정을 개정 또는 신설했다. 예를 들면, 2001년 후반기에 지구당 이동과 당비 문제로 서울 노원도봉지부와 용산 지구당에서 파벌 간의 분쟁이 발생하자, 중앙위원회는 당비의 수준과 납부 방식, 당원 등록 주소지 관련 규정을 정비했다. 이전에는 1000원짜리 당원도 가능했고, 당비 대납도 가능했으며, 거주지나 직장 소재지와 무관한 주소지의 지구당에 당원으로 등록할 수 있었지만, 그 뒤에는 반드시 본인이 직접 하거나 본인의 동의를 얻은 경우에 한해 대납할 수 있게 했으며, 거주지나 직장 소재지로만 당원 등록을 할 수 있게 개정했다.”위의 책, p116.
3) 예컨대, 민주노동당 초대 당 대표인 권영길씨는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당 초기의 파벌 갈등을 봉합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권영길 대표는 민주노총의 조직적 지지와 개인적 포용력, 친화력을 바탕으로 민주노동당 내 다양한 정파를 아우르면서 정파 간 갈등을 조정하였다. 김장민씨의 연구에 따르면, 권영길 대표가 정파에 휘둘리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으로서 민주노총의 전폭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당내 지도력을 견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권영길 대표의 정파에 대한 리더십은 이후 두 차례 위기를 겪으면서 점차 붕괴되었다. 첫 번째는, 2004년 총선 직후에 국회의원 당선자는 당 지도부인 최고위원회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하는 ‘당직공직겸직금지당규’가 중앙위원회에서 논란이 되었을 때이다. 권영길 의원이 직접 토론자로 나서 반대를 호소하였지만, 애초에 이 당규에 찬성하였던 평등계열뿐만 아니라 일부 자주계열도 이 당규에 찬성함으로써 권영길 의원은 당대표에 출마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2007년 대선 후보로 선출된 것과 관련된다. 권영길 의원이 대선 3수를 한 것은 본인과 측근의 의지도 있었지만, 원내 진출 이후 대중적 인기를 얻은 노회찬 의원과 심상정 의원을 대통령후보로 내세운 평등계열을 견제하려는 자주계열의 추대가 크게 작용하였다. 권영길 의원은 노회찬 의원과 심상정 의원을 누르고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로 나섰으나 또다시 3% 이하의 성적을 거두는데 그쳤다. 2007년 대선 이후 권영길씨는 평등계열에 의해 자주계열에 경도되어 있는 것으로 비판을 받고, 대선 패배의 책임론이 결국 분당으로 이어지면서 과거 정파를 포괄하였던 리더십은 큰 상처를 입었다. 이상, 김장민,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관계> (박사학위 논문), pp.184-185 참조.
4) 자주파가 민주노동당 내 다수파가 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조직성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자민통 전국모임은 자주와 통일의 공동의 목표를 공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90년1월 전민련을 시작으로 1991년12월 전국연합을 거쳐 2000년 창당 무렵 자민통 전국모임으로 이어지는 10년 이상의 공동행동과 협력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구성원들이 노동자, 농민, 학생, 청년 등 거의 모든 직종/계층 조직에 퍼져 있기 때문에 다른 어느 조직보다 선거와 의사결정 동원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반면 민중민주 계열로 대변되는 파벌들은 같은 기간 동안 민족해방 계열과는 아예 대화와 협력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부에서 노선과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과 대립을 벌여왔기 때문에 민족해방 계열 파벌들보다 단결이 잘 되지 않아 민주노동당이 출범한 이후에도 한동안 개별 행동을 했다. 그러다가 민족해방 계열의 파벌들이 창당 무렵부터 자민통 전국모임으로 결집해 선거와 당론 결정 과정에서 통일된 행동을 하면서 당권과 공직 후보를 장악해 가자, 여기에 자극받아 2003년부터 전진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정영태, 2011년, <파벌>, 이매진, pp89-90. 이 같은 해석은 일정 일리가 있어 보인다. 확실히 전국연합은 자민통 계열의 결집을 위한 조직적 틀을 제공했다. 과거 활동의 공감대, 초기 소수파라는 불리한 처지를 극복하는데 있어서의 공통의 이해 등은 충분히 자주파의 단결을 위한 동력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반대급부로 이는 상대(PD좌파)의 대통합을 유도하였다. 이리하여 민주노동당 내에는 거대한 양대 진영이 형성되게 되었다.
5) 당내 어느 파벌에도 깊숙이 개입하지 않은 채 2기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한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민주노동당 내 현 다수파는 민주노총 내 다수파와 결합하여 총연맹과 진보정당에서 결코 깨지지 않는 60퍼센트의 블록을 형성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민주노동당 내 소수파는 민주노총 내 소수파와 연합하여 공개정파를 형성하였다.” 김정진, “문제는 민주노동당 내 양대 정파다”, 레디앙, 2006년11월14일. http://www.redian.org/archive/15162.
6) 정영태, 2011년, <파벌>, 이매진, p144.
7) 지도체계 개편 전에는 대표단(대표, 부대표 4인, 사무총장)―전국집행위원회(대표단, 중앙위 선출 9인, 16개 광역시•도지부장, 여성과 노동 부문 할당 집행위원)―상무집행위원회(대표 임명 부서장)의 복잡한 ‘3원 집행 구조’를 가졌다. 이 때문에 비효율적이고 무기력한 문제가 노정되었다.
8) 그 원인으론 다음을 참고. “당연직인 의원단 대표를 제외한 12인의 최고위원이 모두 당원 직선으로 선출된 데다가 다수결로 의사를 결정하기 때문에 각자의 위계, 특히 대표나 당3역과 다른 최고위원 간의 위계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정영태, 2011년, <파벌>, 이매진,p130.
9) 여기서 말하는 ‘세팅투표제’는 1인 다수투표제를 말한다. 2004년2월에 개최된 중앙위원회에서 당규 개정을 통해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선출 방법으로 ‘1인4표제’를 도입했으며, 2004년 총선 직후인 5월에 개최된 중앙위원회에서는 여성 부문과 일반 부문의 최고위원 7인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당원 1인이 7표를 행사하는 ‘1인7표제’를 도입하였다. 이럴 경우 다수파의 수적 우위가 그대로 여과 없이 직접적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후보 선출과 최고위원 선출에 반영되게 되어 소수파는 더욱 불리해지게 된다.
10) 정영태, 2011년, <파벌>, 이매진,p52.
11) 위의 책, p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