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평가와 한국의 당 건설(7)

본문 요지
민주노동당이 채택했던 ‘거대한 소수’ 전략은 대중투쟁과 의회활동 중 사실상 의회활동을 우위에 두면서 대중투쟁을 그 하위에 복속시키는 한국적 ‘의회주의’ 노선이었다. 그러나 뒷받침해 줄 독자 언론매체도 없고 강력한 산별조직도 부재한 민주노동당의 ‘거대한 소수’ 전략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4. 패권주의의 기원과 의회주의

1) 문제는 ‘의회주의’ (지난 호)
2) ‘거대한 소수’ 전략

의회주의 길을 걸었던 민주노동당의 사민주의 경향은 ‘거대한 소수’ 전략이라는 형태로 구체화 되었다. 이는 한국판 ‘양 날개론’이라 할 수 있는데,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관계를 연구한 바 있는 김장민씨에 따르면 이 전략은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을 전후로 하여 당 내에서 꾸준하게 논의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2009년 집권전략위원회가 제출한 <민주노동당 의원활동 기조와 방침에 대한 중앙위원회 권고안>에 포함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중앙위원회에서 정식 채택되었다.1) 이 전략이 어떤 것인지를 보도록 하자. 

“거대한 소수 전략은 애초에 의정활동전략으로서 제기되었으나 집권전략위원회 등 일부에서는 집권전략의 일환으로서 논의되었다. 이에 따르면 민주노동당은 의정활동만을 통해 집권할 수 없으므로 대중투쟁과 결합된 의정활동을 토대로 당 지지율을 높여 합법공간에 더 많이 진출하고 확대된 합법공간을 이용하여 사회변혁 전략의 일환으로 강력한 제도개혁운동을 전개하는 등 대중투쟁―의정활동 성과―정당지지율 상승의 선순환 전략을 수행”한다는 것이다.2)

이러한 ‘거대한 소수전략’이 실제 작동한 사례로 2005년과 2006년의 ‘쌀 수입 개방 협상 및 비준안' 반대투쟁, '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 투쟁을 들 수 있다. 민주노동당은 이때 나름대로 ’거대한 소수‘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전자의 경우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상임위원회를 몇 차례나 저지하고 밖에서도 농민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이런 농민들의 저항은 의정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민주노동당은 비록 원내에선 소수정당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쌀 개방을 막지 못하고 비정규직 철폐법안 또한 성사시키지는 못했지만, 국회 밖에서는 전농뿐만 아니라 농민 5단체, 그리고 민주노총뿐만 아니라 한국노총과의 연대투쟁을 주도하면서 거대 여야를 압박할 수 있었다. 

민주노동당이 의정활동을 통해 대중투쟁을 촉발시키고, 이를 통해 다시 합법공간과 의회활동 기반을 넓힌다는 전략은 얼핏 대중운동과 합법정당 모두를 활성화시키는 상생 전략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가 보여주듯, ‘거대한 소수’ 전략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무슨 이유에서 일까? 다시 김장민씨의 말을 들어보자.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대중투쟁을 국회에서 지원하고 당원들이 투쟁에 결합했지만, 원내 소수정당이기 때문에 민주노총의 입장을 국회에서 관철시킬 힘이 없었다. 이러한 투쟁이 반복될수록 조합원들은 대중적 정치투쟁의 한계만을 인식하게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국회에서 비정규직법이나 노사관계 로드맵이 개악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개악을 막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을 보였고 조합원들은 역시 ‘소수정당은 안 된다’는 패배감을 느꼈다.”3) 

이렇듯 ‘거대한 소수전략’은 가능성으로만 언급되었을 뿐 실제로는 전혀 거대하지 않은 소수의 저항의 몸짓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민주노동당 자신은 그 주요한 원인을 외부에서 찾았다.  즉 ‘거대한 소수전략’ 자체는 타당했으나, 민주노총 등 “함께 했던 대중조직들이 사회적 힘을 충분히 형성하지 못”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의 의정활동을 뒷받침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이다.4)

이러한 평가는 타당한 것일까? 애초에 민주노동당을 결성한 목적은 대중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도리어 대중운동이 약해서 민주노동당을 지원하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셈이 된다. 목적과 수단이 도치되었다. 그렇다면 진짜 실패 원인은 무엇일까?

진정한 원인은 다름 아닌 ‘거대한 소수’ 전략 자체에 있다. 이 전략은 대중투쟁과 의회활동 중 사실상 의회활동을 우위에 두면서 대중투쟁을 그 하위에 복속시키는 한국적 ‘의회주의’ 노선에 다름 아니다. “의정활동만으로는 집권할 수 없기 때문에”, “대중투쟁과 결합된 의정활동을 토대로” 제도개혁을 이루려고 한다는 취지가 바로 그 점을 말해준다. 여기서 의회정당인 민주노동당은 단순히 대중운동에 복무하기 위한 합법정당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전략당으로 위상 지워진다. 이럴 경우 주변의 대중투쟁은 이러한 전략당인 의회주의정당의 목표 실현을 위해서 복무해야만 한다.

의회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전략당이 될 경우, 결국 대중투쟁의 성과를 최종적으로 ‘표’로 귀결시킬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럴 경우에만 비로소 ‘집권’이라는 전략목표와 제도개선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 문제가 있다. 여기서 표(의석)는 단순한 ‘결과물’이 아닌 ‘목적’이 된다. 사전의 제반 활동이 최종적으로 표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만년 소수정당으로서 ‘국회에서 관철시킬 힘’을 갖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이 전략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하지만 현실에선 의정활동이 대중투쟁을 유발하고, 그런 대중투쟁이 다시 선거를 거쳐 표로 연결되기까지에는 중간에 수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첫째, 대중투쟁을 유발키 위해선 무엇보다 충분한 정치폭로와 정치선동 그리고 이와 긴밀히 연계된 현장의 조직적 행동이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의회연단’의 활용은 분명히 훌륭한 정치선동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의회연단의 정치선동을 뒷받침하고 ‘증폭’시켜줄 수 있는 ‘확성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언론매체’이다. 10명이라는 ‘원내교섭단체’도 안 되는 의원수를 가진 민주노동당으로서는 더욱 더 이러한 언론매체의 협조가 필요하였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과거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프라우다>와 같은 자신의 독자적인 영향력 있는 언론매체를 갖지 못했다.5) 그렇다고 한국의 보수언론이 일부러 진보정당의 활약을 선전해 줄 리 만무하다. 강기갑 의원의 ‘공중부양’ 사건에서 보듯, 그들은 오히려 진보의원의 활약을 희화화하고 왜곡선전을 일삼았다. 결국 충분한 정치선동이 뒷받침되지 못한 상황에서 민주노총 등 외부 대중조직의 호응은 기껏해야  ‘연대집회’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다

둘째, 설령 의회연단을 통한 ‘폭로’를 통해 대중투쟁이 폭발하더라도, 그것이 다시 선거를 통해 ‘표’로 연결되는 일은 생각만큼 간단치가 않다. 유권자들의 투표행위를 결정하는 요소는 많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총파업이 발생한 시기에 선거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혹시라도 ‘계급투표’가 성사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96-97’ 총파업 당시의 높은 여론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막상 97대선에서 국승21의 권영길 후보는 1.3%라는 낮은 득표율에 머물러야만 했던 선례가 있다. 이렇듯 성공적인 총파업일지라도 그것이 일단 선거시기와 일정한 시간차가 있을 경우, 대중들의 투표심리는 ‘사표방지’나 언론이 유도하는 다른 쟁점에 의해 영향 받기 쉽다. 자본주의 사회의 선거는 그만큼 결점이 많으며 진정한 민심을 반영하기 어렵다.

이렇듯 독자 언론매체도 없고, 총파업으로 뒷받침해 줄 대중조직도 없으며, 또 총선시기도 결정할 수 없는 민주노동당의 ‘거대한 소수’ 전략은 틀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대중조직을 원망하고, 대중조직들은 거꾸로 만년 소수당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민주노동당을 원망하였다. 민주노동당은 심지어 민주노총이 국민적 이미지가 안 좋아지자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하였다.6) 폭넓은 지지층 확대를 위해서는 과격한 이미지를 벗어나 ‘시민정당’으로 탈바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일단 의회주의노선을 걷게 된 민주노동당에게 있어선 ‘표’가 생명이고 ‘하늘’ 이었다.

민주노동당은 당 창립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노동자계급의 기대를 저버린 채 지나치게 표를 의식한 나머지 점차 선거정당으로 변모해갔다. 무릇 초심을 잃어버린 사업은 성공하기 어렵다. 결국 ‘거대한 소수’ 전략의 실패는 민주노동당이 걸었던 ‘의회주의 노선’의 실패라 말할 수 있다. (계속) 


본문 주석

1) 김장민, 2017년,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관계> (박사학위 논문), p137.

2) 위 논문, p137.

3) 위 논문, pp138-139.

4) 위 논문, p139. 필자는 김장민 박사의 논문에서 간접 인용하였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면 이러하다. “거대한 소수 전략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민주노동당과 함께 했던 대중조직들이 사회적 힘을 충분히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의 배후지 즉 민주노총, 전농, 상설연대체, 시민사회단체 말하지만 대중적 힘을 발휘할 진지가 강력하게 구축되어 있었어야 했는데, 이것이 부족했기 때문이다(민주노동당, 2009d).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노동운동과 의정활동의 결합이라는 거대한 소수전략을 설정한 것은 타당했으나 실제로는 원외 대중운동은 연대집회에 머물렀으며, 원내 활동은 소수정당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5) 대중의 정치적 각성과 투쟁의 활성화를 위해 소수의 의석만 가지고서도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과거 러시아혁명 시기 볼셰비키 ‘사회주의 의원단’의 활동에서 볼 수 있다. 당시 볼셰비키 의원단은 모두 6명에 불과하였는데, 이는 전체 500명 정원을 가진 두마의회에서는 겨우 1% 남짓 한 수치였다. 그럼에도 이들 6인조 사회주의 의원단은 반동파와 자유주의파 의원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두마의회 속에서 훌륭하게 노동자계급 의식화와 변혁운동의 발전을 위해 자기 역할을 다하였다. 이는 의회활동의 성패여부는 본질상 절대적인 의원 수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프라우다>와 같이 영향력 있는 ‘노동자 독자매체’와의 결합 여부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선 필자의 졸고 [레닌의 정치신문과 현대사회](제5회) 참조. 
    http://www.minplu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44

6) “≪한겨레21≫에 따르면 국민들이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동일시하는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 1년 만에 지지율이 한 자릿수까지 폭락한 것은 거대 노조들이 ‘뻘짓’을 했기 때문이고, 이러한 여론을 반영하여 노회찬 의원, 최규엽·김종철 최고위원 등은 민주노총에 할 말은 하고, 당 차원에서 직접 비정규직 등 약자를 보듬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신승근, 2005). 반면 민주노총의 지도부들과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주요과제가 민주노동당을 통해 실현되기를 기대하였지만 민주노동당은 원내 소수정당으로서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고, 그로 인해 민주노총의 당에 대한 결합력이 점차 약화되었다. 민주노동당까지 민주노총 내부의 부정적인 사건에 대해 비판하자 민주노총 측의 이러한 불만은 더욱 증폭되었다.”김장민, 2017년,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관계> (박사학위 논문),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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