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총선의 역사(12)

1. 전두환 독재에 일격을 가한 선거
학생들은 광주학살 이후 암흑기를 넘어 82년 일본교과서 왜곡반대 투쟁으로 투쟁력을 복원하고 전두환독재 반대투쟁을 완강하게 진행해 왔다. 84년 들면서 전두환 정권은 약간의 유화조치를 취했다. 유화조치의 흐름에 따라 학생들은 학생회건설, 학원자율화투쟁에 본격 나서며 학생투쟁이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1985년 1월 25일 군사독재의 종식을 요구하며,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이 창당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신민당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원래 3~4월 예정된 선거일정을 2월 12일로 앞당겼다.
선거에서는 일대 반전이 일어났다.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국정감사권 부활’,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언론기본법 폐지 및 노동관계법 개폐’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선거 직전 김대중은 미국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히 귀국을 결행했다. 학생들은 ‘민주총선쟁취 학생연합’, ‘민정당재집권 저지투쟁연합’ 등을 결성하고 유세장 곳곳에서 강력한 반민정당 투쟁을 전개하였다. 유세장에서는 신민당 후보들이 이철희·장영자 비리,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단을 부르짖으며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2.12총선은 투표율이 84.6%에 달해 58년 4대 총선이 후 최고를 기록했고, 신민당은 예상을 뛰어넘는 돌풍을 일으켰다. 선거결과 민정당 148석(지역구 87석, 전국구 61석), 신민당 67석(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 민한당 35석(지역구 26석, 전국구 9석), 국민당 20석(지역구 15석, 전국구 5석)으로 신민당은 창당 3주 만에 제1야당을 올라섰다. 민정당 득표율은 35.25%에 그쳤고, 신민당은 29.26%, 민한당 19.68%, 국민당 9.16%를 합치면 야당 득표율이 58%에 달해 사실상 야당의 압승이었다. 신민당은 서울을 완전히 석권했다. 민정당의 2중대 역할을 하던 민한당, 국민당은 완전히 심판을 받고 이후 야권통합의 길로 들어섰다. 거대야당으로 몸집을 키운 신민당은 헌법개정운동에 돌입한다.
2. 국회보다 항쟁으로
학생운동은 더욱더 성장하였다. 85년 4월 전학련삼민투(삼민투 =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특별위원회)를 건설하고 7천여 명이 넘는 대규모 4.19시위에 나섰다. 5월부터 광주학살 원흉 처단투쟁에 대대적으로 돌입하는 한편, 5월 26일에는 미국의 책임을 물어 미문화원 점거농성투쟁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3월 재야와 청년운동세력을 주축으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민통련)이 출범했다. 학생, 재야, 야당 세력이 모두 각각 전두환 독재반대와 헌법개정투쟁을 위한 전열정비를 갖추게 되었다.
투쟁은 개헌투쟁으로 시작되었다. 신민당은 각 지역에 개헌추진위원회 지부 결성대회와 개헌현판식을 본격화했다. 개헌현판식은 지역별 국민적 투쟁의 장으로 되었다. 투쟁의 파고는 86년 인천 5.3투쟁, 6월 부천서 성고문 사건 폭로, 10월 애학련 건대항쟁으로 이어졌다.

86년 전두환 정권의 학원안정법 도입과 가혹한 탄압으로 민주화투쟁을 잠재우려 하였다. 그러나 87년 벽두부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재야, 학생, 야당은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로 집결하고, 고문폭로대회를 전개했다. 종교계도 가세하기 시작했다. 2.7추도대회와 3.3. 평화대행진을 거치며 투쟁의 파고가 확대되자 전두환 정권은 더욱 강경진압으로 나섰다. 이 와중에 신민당 이민우 지도부가 민정당의 내각제와 타협하려는 ‘이민우 파동’이 발생하자 김영삼, 김대중 등은 신당을 창당하고 직선제 개헌투쟁 원칙을 고수하고자 했다. 신당창당 발기인대회날에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미국은 직선제 개헌보다는 합의개헌을 요구했던 것이다.

호헌조치는 국민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87년 5월 18일 5.18광주민중항쟁 7주기 미사 중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조작사실을 폭로했다. 5월 22일 전국 18개 대학에서 뜨거운 투쟁이 벌어졌다. 5월 27일 아침 7시 명동 향린교회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발족되었다. 마침내 전두환 독재와 맞서 전국민적 항쟁을 지도하는 단일구심이 형성되었다.

6월 들어 학생시위는 국민적 항쟁으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6.10대회 중에 이한열 학생이 취루탄에 맞아 절명하였다. 국민운동본부는 전국민행동지침을 발표하고 명성당 농성에 돌입하였다. 전국적으로 연일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6월 18일 전국 16개 도시 247개소에서 최루탄 추방 시위와 집회가 열렸다. 6월 26일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이 전국 34개 도시, 4개 군에서 동시다발로 열리고, 100만이 넘는 인파가 집결하였다. 국민항쟁은 정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6월 29일 전두환 군사정권은 노태우를 통해 6.29선언을 통해 개헌을 약속하는 항복을 선언했다. 이렇게 역사는 국회가 아니라 항쟁으로 전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