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총선의 역사(11)

1. 서울의 봄의 좌절
부마항쟁으로 권력내부의 모순이 격화되고, 10.26정변을 이끌어내어 박정희 유신체제에 파열구를 내기는 하였으나 민중이 최종의 승자가 되지는 못했다. 박정희 피살 이후 즉시 개헌과 새로운 헌법하에서 민주선거를 치르는 것은 당연한 요구였다. 그러나 최규하는 계엄령 상태에서 권한대행에 올라 11월 선개헌 후대통령 선거의 요구를 무시하고, 기존 유신헌법의 틀 내에서 대선을 치른 후 잔여임기를 채우지 않고 개헌을 통해 조기선거를 하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박정희는 세상을 떠났으나 유신체제는 아직 몰락하지 않았다.
원래 박정희의 임기는 1984년 12월 26일까지였다. 1979년 12월 6일 박정희가 남기고 간 잔여임기를 채우는 선거가 유신종말에도 불구하고 체육관 선거를 통하여 최규하를 10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유신잔당 중 핵심세력이었던 하나회를 주축으로 한 신군부는 12.12쿠데타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고 본격적으로 집권음모를 실현하는 길로 들어섰다. 주한미군 역시 12·12군사반란을 용인하고 있었다.
야당과 일부 민주화세력은 12.12쿠데타를 보면서도 신군부의 쿠데타 음모를 과소평가하고 주어진 정치일정대로 진행하면 권력이 자신들에게 넘어올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1980년 4월에 들어서면서 유신세력의 재집권 음모가 노골화되고, ‘사북항쟁’과 노동운동이 고조되면서 학생운동 역시 전면적 반독재투쟁에 나섰다. 이른 바 ‘서울의 봄’이라 부르는 학생들의 투쟁은 학원민주화투쟁으로부터 5월에 이르러 “계엄철폐”, “유신잔당 척결”을 주장하며, 민주화를 향한 대규모 연합시위로 발전했다. 그러나 학생지도부는 15일 10여만 명의 학생들을 서울역에 집결시켜 놓고서도 강력한 투쟁으로 독재의 아성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지금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를 하고 있는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 등은 오히려 ‘계엄확대의 빌미’를 주어서는 안된다며, ‘회군’을 결정하고 말았다.

2. 광주항쟁
신군부는 서울역 회군을 기화로 전국에 계엄령을 확대하고, 권력장악과정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광주에서 계엄령 확대를 저항하는 학생들의 투쟁은 완강하게 전개되었다. 이를 군대를 앞장세워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광주항쟁”이 폭발하였다. 전두환 신군부는 ‘화려한 휴가’는 작전명을 내리고 광주민중에 대한 유혈진압에 나섰다. 철저하게 고립된 광주민중은 10여 일간의 영웅적인 항쟁을 전개하였으나 무참하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당시 민중들은 3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첫째는 자기 국민에게 총부리를 돌리는 무장한 군사독재세력에게는 총을 들고 맞서야 한다는 것, 둘째는 미국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우방이 아니라 한국의 침략자이고 군사독재 지원자에 불과하다는 것, 셋째는 한국사회를 바꾸어나가는 주체는 민중이라는 것이었다.
3. 유혈위에 세워진 국회
1981년 2월 25일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유신헌법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선거인단’으로 바꾼 것, 임기를 6년에서 7년으로 오히려 늘린 것, 단임제를 실시한 것 말고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1981년 3월 25일에는 제11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각 지역구에서 1구2인의 국회의원을 뽑는 중선거구제를 통한 직접선거로 184명을, 비례대표인 전국구에서 92명을 총 276명을 선출하였다. 전국구는 지역구 제1당이 2/3를 가져가는 것으로써 유신시대 선거법보다 더 나빴다. 그 결과 민주정의당이 전체 276석 중 151석(지역구 90명, 전국구 61명)로 과반수 이상을 완전히 장악했다. 나머지 야당들은 전두환이 광주항쟁학살과 더불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며 야당재야세력들을 모두 정치활동 금지로 묶어 놓고 순순히 순종하는 여당 2중대들 뿐이었다. 민주한국당(민한당)은 81석(지역구 57명, 전국구 24명), 한국국민당(국민당)은 25석(지역구 8명, 전국구 7명)였으나, 모두 민정당 들러리 역할이었다.
11대 국회는 광주학살이라는 유혈 위에서 세워진 군사독재의 하수인 국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