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총선의 역사(6)

1. 친미친일군사정권의 등장
5.16쿠데타로 제2공화국과 장면정권은 9개월 만에 무너졌다. 미국은 주한미원조단 보고를 통해 4.19혁명이 1주년을 거치며 민중봉기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박정희 등이 6개월 전부터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CIA국장을 지낸 덜레스(Allen W. Dulles)는 "내가 재임 중 중앙정보국의 해외활동에서 가장 성공한 것은 이 혁명(5.16쿠데타)"라고 언급했다.
의회를 해산시킨 쿠데타 세력은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비상기구를 설치하고 2년 3개월 동안 군정을 실시했다. 제일 먼저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혁명재판이라는 것을 실시하여 혁신계 정당과 민통련, 민자통 등 통일운동단체, 피학살유족회, 민족일보, 교원노조 등을 집중적으로 탄압 와해시켰다.
군정연장을 선포했다가 국민적 반발에 밀려 다시 민정이양을 선포한 쿠데타 세력이 통치자금, 공화당 창당자금, 민정이양 선거자금 등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4대 의혹사건’이 발생했다. ‘워커힐사건’, ‘증권파동’, ‘새나라자동차사건’, ‘빠찡고사건’ 등 이른 바 ‘4대의혹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구악’을 능가하는 ‘신악’이라며 쿠데타세력의 부정부패를 규탄했다.

2. 군복을 민간옷으로 갈아입은 군사정권
12월 17일 개헌안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85.28% 투표율에 78.78%의 찬성으로 통과했다. 개헌안의 핵심은 4년 임기, 1차 중임가능 대통령중심제, 4년 임기 단원제 국회제도였다. 이때 당적 이탈이나 변경, 정당해산 시 의원직을 상실하는 제도가 도입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구정치인들을 ‘정치활동정화법’으로 묶어놓고 군정세력만 독주하는 가운데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공화당 창당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1963년 10월 15일 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46.6%를 득표하여 윤보선 후보를 15만 표 차이로 따돌리고 어렵게 당선되었다. 제3공화국의 시작이었다. 선거쟁점에서 한심한 것은 윤보선은 박정희가 남로당 경력을 가진 빨갱이라고 색깔논쟁을 일으켰고, 박정희는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다는 점이다. 윤보선이 대통령 당시 박정희 쿠데타를 이용해서 장면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쿠데타 진압명령을 거부한 것도 우습지만, 그런 자가 다시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오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박정희가 아니라 야당세력이 색깔논쟁을 주도했다니, 4.19혁명을 왜 말아먹었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박정희가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 역시 지식인층과 국민들이 한때 현혹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한일협정을 추진과정에서는 결국 분노로 바뀌게 된다.
대선 한 달 후인 11월 26일 6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최초로 선관위가 관리했고, 전국구 비례도 처음 도입되었다. 총 의석은 지역구 131명, 전국구 44명으로 총 175석이었는데, 전국구 비례방식은 꼼수였다. 제1당이 전국득표에서 과반을 넘을 경우에는 득표비례만큼 의석수를 배분하나, 제1당 득표율이 과반에 못 미치면 전국구 의석의 절반을 가져가도록 하여 무조건 제1당이 유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득표율이 5%미만이거나 지역구 의석이 3석 미만인 정당은 전국구 의석을 배정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출마하려면 필수적으로 정당공천을 받도록 하였다.
총인구 2천 627만 명에 선거인수 1천 334만 명, 투표자 수 962만 명으로 투표율은 72.1%를 기록했다. 선거결과 175석 중 민주공화당이 지역구 88명 전국구 22명으로 총 110석을 차지했다. 제1야당 민정당은 지역구 27명, 전국구 14명으로 41석을 차지했다. 기타 민주당 13명, 자유민주당 9명 등이었다. 민간의 옷으로 갈아입은 군사정권은 2/3에 육박하는 안정의석을 장악한 후, 곧바로 한일협정 체결과 개발독재의 길로 치달았다.

3. 한일협정비준국회
미국은 대소, 대중봉쇄를 위해 일본재무장, 재벌유지, 노조탄압정책으로 회귀했다. 또한 한미일삼각동맹을 추진했다. 소련이 핵무장에 성공하고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함과 동시에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북의 사회주의 경제가 성장하자,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을 군사적으로 편입하고, 대북체제경쟁을 위해 경제개발의 필요성이 증대하였다. 문제는 한일갈등이었다. 케네디 정부는 한국과의 관계에서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역할분담을 강조하며, 한일양국에 한일협정체결을 강력하게 압박했다. 정통성이 취약한 박정희 정권 역시 경제개발에 명운을 걸고 한일협정체결을 강행했다.
핵심 쟁점이 되었던 청구권 문제 역시 미국의 개입에 의해 정리되었다. 한국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청구권’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미군정이 한국내 일본인 소유 재산을 한국에 이양함으로써 청구권은 사실상 소멸되었다는 ‘역청구권’을 주장하며, 경제협력자금, 독립축하금으로 규정하려 하였다. 미국은 미군정이 한국내 일본인 재산을 몰수한 것은 전패국 재산의 몰수로서 일본의 역청구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한국의 대일청구권 역시 귀속재산을 한국에 양도했기 때문이 이미 충족된 것이라는 일방적 주장으로 한일양국을 정리해 들어갔다. 남은 것은 액수였다. 이 역시 1962년 11월 김종필-오히라 메모라는 비밀협상을 통해 대일식민지 배상청구권, 평화선을 포기하고 굴욕적인 한일기본협약과 4개의 부속협정을 타결하고 말았다.

국민들은 한일회담이 경제발전이 아니라 경제종속을 불러올 것이고, 주권과 영해를 팔아먹는 매국행위로 규정하고 강력한 투쟁에 돌입했다.
1964년 3월 24일 시위로 시작한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5월 20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5월 25,26일 난국타개 학생궐기대회에 이어, 5월 30일 이후에는 집단단식투쟁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6월 3일 학생과 시민들의 분노는 ‘박정희 정권의 타도’를 내걸고 3만여 명이 참가하는 4.19에 버금가는 대규모 항쟁으로 발전했다.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학원을 침탈하며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또한 학원보호법, 언론윤리위원회법 등을 추진하고, 불꽃회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1차)을 조작하며 학생과 시민들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하여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였으나 결국 한일회담 연내 타결은 하지 못하였다.

1965년은 6.3항쟁으로 중단되었던 한일협정이 타결된 시기로 한일협정조인반대투쟁,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 한일협정비준무효화 투쟁으로 이어졌다.
2월 20일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되면서 범국민 투쟁위원회의 순회 성토대회가 열리고 3월부터 학생들의 투쟁이 시작되어, 4월 16일 동국대 학생 김중배가 경찰의 곤봉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더 격렬해졌다. 전국 34개 대학, 119개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지만 시위는 미국에 대한 규탄으로 발전했다. 5월 중순부터 매일 시위, 동맹휴학 투쟁으로 저항했고, 6월 14일 서울대 법대생 200여 명이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한일협정이 1965년 6월 22일 정식으로 조인되자 투쟁은 협정비준반대 투쟁, 3만 명 서명운동으로 발전되고, 기독교계와 불교 및 유교 등 종교계, 재경 대학교수단 354명 회담 반대 선언 등 지식인, 예비역 장성 11명 반대성명으로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공화당은 7월 14일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날치기 발의하였다. 민중당으로 통합된 야당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리고 적전 분열하면서 범투위는 현저히 약화되었다. 8월 11일 비준특위에서도 역시 날치기 통과되었다. 결국 8월 13일 베트남 전투병파병동의안, 8월 14일 한일협정비준동의안이 본회의에서 각각 날치기 통과되었다. 학생들은 ‘매국국회, 매국문서, 매국정부’ 화형식, ‘매국국회해산’을 요구하며 1만여 명 이상이 강력하게 저항하였지만, 박정희 정권은 8월26일 ‘위수령’을 발동하고, 학원에 군대를 상주시킴으로써 투쟁을 진압하였다.
이로써 6대 국회는 친일매국협정을 비준한 범죄적 매국국회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