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총선의 역사(9)

1. 유신독재 - 체육관 선거

박정희 정부는 70년대초 정치적, 경제적, 국제적 위기에 봉착했다.

7대 대선에서 김대중이라는 위협적 존재가 등장하고, 8대 총선에서 사실상 신민당에게 패배하여 정치적 위기가 가중되었다.

이 시기 세계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들어갔다. 1971년 8월 닉슨은 달러화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며 브래튼우즈체제가 붕괴하고 보후무역주의가 대두하였다. 60년대 후반 한국경제는 고도성장을 하였으나 외채가 늘어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또한 긴축통화정책으로 자금이 경색되고 부실기업의 도산이 이어졌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미중관계가 개선되고 데탕트가 도래하면서 미국이 요구하는 남북관계개선 압력을 피해갈 수 없었고, 1972년 7.4공동성명을 합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3중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오히려 남북관계를 이용했다. 안보위기속에서 통일을 능동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새로운 비상정치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이른바 ‘10월 유신’이었다. 국회가 해산되고,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1972년 11월21일 계엄령하에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유신헌법이 91.5%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 1인 독재헌법이었다.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선거인단을 먼저 뽑고, 이들이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했다. 이른 바 ‘체육관 선거’의 출현이다. 박정희는 1972년 12월 23일 정당에 가입할 수 없는 무소속 출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에 의해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 1972년 12월 23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여기서 박정희를 8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 1972년 12월 23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여기서 박정희를 8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렇게 체육관에서 뽑힌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했다.
대통령은 국회의원 1/3을 임명할 수 있었고, 국회해산권, 법안거부권을 모두 가졌다. 반면 국회는 국정감사권을 박탈당하고 회기도 줄였다. 대법원장, 대법관, 법관을 모두 대통령이 임명했다. 대통령은 초헌법적 비상대권인 긴급조치 발동권을 가지게 되었다. 박정희는 죽기전까지 8년 동안 9번의 긴급조치권을 발동한다. 그야말로 최소한의 선거민주주의가 말살되고, “암흑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2. 거수기 국회

유신체제속에서 국회는 거수기 이상이 아니었다. 1973년 2월 27일 실시된 제9대 국회의원 선거는 임기가 6년이었다. 각 지역구에서 2인을 뽑는 중선거구제가 도입된다. 총 219석 중 146명을 선출하는 뽑는 직접선거에서 무조건 여당의 당선을 보장하는 장치였다. 또한 나머지 73명은 대통령이 지명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하는 간선제도였다. 이들은 ‘유신정우회(유정회)’라 불렀다.

이런 선거에서 공화당은 지역구에서 73석, 신민당은 52석을, 무소속은 19석을 얻었다.

▲ 유신시대 대표 금지곡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양희은의 '아침이슬'
▲ 유신시대 대표 금지곡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양희은의 '아침이슬'

유신폭압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새마을 운동으로 전사회동원체제를 구축하고,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는가 하면, 대중가요를 금지곡을 지정하며, 막걸리 국가보안법위반자를 양산했다.

특히 1973년 8월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하여 수장시키려 기도했다. 학생들과 재야의 반유신투쟁이 격화되자, 긴급조치 1호에서 4호까지 발동하며 무자비하게 탄압하였고, 마침내 1974년 4월 민청학련-인혁당 사건을 조작하고, 1975년 4월 9일 대법원 확정판결 다음날 사형을 집행해버렸다. 그러나 유신독재는 종말을 향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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