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총선의 역사(5)

1. 선개헌 후선거의 병폐

4.19혁명 이후 허정과도내각이 출범했다. 허정은 이승만 측근이었다. 국회 역시 즉각 해산되지 않았다. ‘선선거 후개헌’이 아니라, ‘선개헌 후선거’로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신헌법을 통해 부정선거원흉 처벌을 위한 특별법 근거조항이 실종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 장면과 윤보선
▲ 장면과 윤보선

6월 15일 통과된 개헌안은 내각제와 양원제를 특징으로 하였다. 대통령에게는 약간의 권한을 주었는데, 국무총리 지명권, 계엄선포거부권 등이었고, 군통수권은 총리와 분점했다. 제2공화국 헌법은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등 기본권을 확장하고 정당해산을 헌법재판소에 맡김과 더불어 상당한 권한을 갖는 헌법재판소를 신설했다. 또한 중앙선관위를 헌법기관으로 승격시켰다. 

▲ 제5대 총선, 참의원 입후보 합동연설회(효창공원)
▲ 제5대 총선, 참의원 입후보 합동연설회(효창공원)

7월 29일 5대 민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1,160만 유권자 중 977만명(84.3%)가 투표하였다. 개표 결과는 예상보다 민주당의 압승이었고, 기대했던 혁신계는 저조했으며, 자유당은 몰락했다. 233석 중 민주당 175석, 혁신계 사회대중당 4석, 한국사회당 1석, 구자유당계는 무소속 포함 10명 내외였다. 함께 실시된 1대 참의원선거에서는 58석 중 민주당 31석, 무소속 20석에, 자유당계는 4석으로 무소속까지 포함하면 20명 정도나 되었다.
혁명 후의 선거였지만, 강력한 반공의 그늘, 진보당 해산의 후유증을 보여주는 선거였다. 또한 학생들이 강력하게 당선저지투쟁을 전개한 민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당계가 패망했지만, 출마자 절반을 연명하여 기표하는 참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당 3.15선거대책위원회 지도위원을 했던 백남준 같은 자까지 당선되는 맹점이 있었다.

2. 혁명입법의 좌절

민주당은 선거전부터 사실상 분당상태였다. 지주친일세력을 주축으로한 한민당, 민국당으로 이어지던 구파는 사실 자유당과 다를 바가 없었고, 신파 역시 일제말 군수급 친일파, 원내자유당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에 불과했다. 이들이 혁명과업을 완수할 수는 없었다.

▲ 3.15부정선거관련 혁명재판 장면
▲ 3.15부정선거관련 혁명재판 장면

특히 3·15부정선거 원흉들에 대한 처단이 지지부진하였다.
이승만은 제거되었으나 이승만 체제는 그대로 있었다. 검사들은 홍진기·장경근·임철호 계열이 장악하고 있었고, 판사들 역시 이승만 정권의 시녀노릇을 하던 자들이었다. 검찰은 반민주행위자들에게 국가변란죄나 국가보안법이 아니라 허우위문서 작성, 횡령, 직무유기 등을 적용했다. 재판부는 10월경 반혁명적 판결을 잇따라 내렸다. 장택상은 면소판결을, 최인규 부정선거 관련 건은 아예 판결을 미루고, 발포명령 관련해서는 홍진기 전내무장관, 조인구 전 치안국장, 곽영주 전 경무대 비서관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정치깡패사건 역시 무죄, 경량을 선고했다. 4.19혁명 희생자, 부상자들의 반발과 여론이 들끓자 연말이 되어서야 겨우 반민주행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 근거조항을 제정 공포했다.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은 1961년 2월 25일, 부정축재처리 특별법안은 솜방망이법으로 1961년 4월 10일 확정하였으나 이마저도 5.16쿠데타로 시행조차 하지 못했다.
1961년 1월 17일 우여곡절속에 4.19혁명 특검이 출범했다. 수사가능기간은 34일 정도였다. 그런데 경무대앞 발포 문제는 홍진기, 조인구, 관영주 등이 상호모의했는가가 핵심인데 겉돌고 있었고, 군부의 부정선거 수사는 장면 정권과 매그루더 미8군 사령관의 반대로 수사가 보류되었다. 정치자금 조달관계는 경제난을 핑계로 아예 손을 대지 않았다. 특별재판소는 5부가 구성되어 운영되었지만, 부정선거 재판은 5.16쿠데타 전까지 103건 263명을 접수받아 고작 최인규 사형, 이강학 징역15년이 판결이 전부였고, 공민권 심사위원회는 원래 대상숫자의 절반 정도만 공민권을 제한했다.
혁명에 따른 적폐청산과업은 오히려 정권, 국회, 법원의 삼중방해 속에서 좌절되고 있었다.

3. 민중운동, 자주통일운동의 성장

4.19혁명과업의 완수는 민중의 몫이었다.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회를 건설하여 ‘대한민국학생자치연합회’라는 연합조직 건설로 나아갔다. 학생들은 어용, 무능 교원을 배척, 학원비리척결 등 학원민주화투쟁을 전개함과 더불어 4.19혁명정신을 전파하는 국민계몽운동, 신생활운동을 전개했다.
노동자들은 부산부두노동조합 민주화투쟁 등 대한노총 민주화투쟁을 거쳐 ‘전노협 건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으로 통합의 과정을 거쳤다. 이와 함께 금융분야와 언론 분야에서 사무직 노동조합을 건설하였으며,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 건설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4.19혁명의 공간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경남 거창, 제주를 비롯하여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일원의 학살에 대한 피학살자유족회들이 건설되고 국회차원의 조사도 진행되었다. 또한 김구암살진상규명운동 역시 전개되었다. 

▲ 한미행정협정반대투쟁(왼쪽)과 2대악법반대투쟁(오른쪽)
▲ 한미행정협정반대투쟁(왼쪽)과 2대악법반대투쟁(오른쪽)

4.19 시기 민중운동은 자주통일운동으로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통일논의가 대두되고, 학생민족통일연맹이 건설되었으며, 혁신계정당과 통일단체들을 망라한 거대한 연합조직으로 10만 회원을 거느린 민족자주통일협의회가 출범하였다.
당시 민중들의 요구는 민족자주통일과 자립경제에 대한 지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예속적인 한미경제협정을 강행하는 한편, 통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반공임시특별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데모규제법)’ 2대 악법 제정을 추진했다. 민중진영은 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속에서 연대의 힘을 다지고, 2대 악법 저지투쟁을 통해 더욱 강력한 연대전선을 형성함으로써 결국 입법을 저지하였다. 
민중운동은 바야흐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자 판문점에서!’라는 구체적인 실천구호를 들고 자주통일운동을 향해 더욱더 고양되고 있었다.
미국의 눈에는 이러한 상황을 대처하기에는 장면정부가 너무 약해 보였을 것이다.
결국 5.16쿠데타로 5대 국회는 불과 10개월 만에 해산되고, 민중운동은 또 다시 단절의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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