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본 일본의 력사(10)

1. 3.1운동의 원인 - 주체역량의 성장

조선 3.1독립운동은 러시아의 10월혁명이나 윌슨의 14개 조를 계기로 고조된 ≪민족자결≫에로의 세계적인 기운을 배경으로 하여 조선반도만에 머물지 않고 세계 각지에 재주하는 조선인과 상호 연쇄하면서 발전한 전민족적인 반일독립운동이었다. 또한 3.1독립운동은 일본이나 유미제국의 식민지지배에 반대하는 아시아 민중들의 민족해방투쟁을 고무하였으므로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의 획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1910년대의 ≪무단통치≫하의 독립운동을 둘러싸서 그것은 ≪페새기≫(퇴조기-편집자 주)의 것이며 3.1운동은 러시아의 10월혁명이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매우 피상적인 시점이 일부에 지금도 아직 있다. 그러나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시기 국내외에서의 민족운동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고 그 속에서 민중의 저항의 에네르기는 착실하게 축적되어갔다.
광기와 같은 탄압속에서도 국내 각지에서는 독립의금부, 조선국민회 등 많은 비밀결사가 활동하고 있었고 근대적인 민족교육내용을 포함한 서당이나 노동야학이 민중에 의하여 보다 가까운 민족교육기관으로서 보급하고 있었다.
주목할 점은 이 시기 국내의 민족운동이 노동자, 농민 등의 민중운동에로 방향을 전환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토지・임야조사사업이나 증세에 반발한 농민・소상인은 토지・임야소유권의 소송을 일으키고 있었으나 측량반대, 주재소・면사무소의 습격 등 보다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본자본이 급속히 침투되어 그때까지의 자유노동자・광산노동자뿐만 아니라 공장노동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노동자들의 파업이 불어났다. ≪최근에 있어서의 조선치안상황≫(조선총독부 경무국,1933년)에 의하면 1912년부터 17년까지의 6년간의 연평균 파업 건수는 6건, 참가자는 958명이었던 것이 1918년에 50건, 6천 100명, 19년에는 84건, 9천 명으로 급증하였다.
국외에서는 간도나 시베리아에 이동한 의병이나 신민회 성원들이 장기항전을 위한 근거지창설을 서둘고 있었다. 각지에서 자치단체, 민족교육기관, 군사단체가 조직되어 그것은 곧 20년대에 전개되는 독립군의 모체로 되었다. 식민지하라는 상황속에서 ≪병합≫전의 의병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의 양자가 합류하여 보다 첨예화되고, 보다 대중화된 새로운 항일전선이 형성되어가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주체적인 역량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독립운동은 러시아혁명이나 윌슨류의 민족자결선언의 영향 등도 포함하여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정세에 재빨리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 3.1독립선언서 [사진 : 필자제공]
▲ 3.1독립선언서 [사진 : 필자제공]

2. 3.1운동의 전개와 특징

이때 국외의 독립단체들은 빠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계획을 전개하고 있었고, 국내에서도 천도교, 기독교, 학생 등의 단체가 제각기 독립운동계획을 입안하고 있었다. 한편 민중들속에서도 1919년 1월에 급사한 고종이 총독부의 염탐군에 독살되었다는 풍설이 돌고 민족의식은 더욱더 높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2월 8일 재일조선유학생들이 도쿄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운동실천을 위하여 속속 귀국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있는 속에서 국내의 종교단체 지도자들은 3월 1일에 서울의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방침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행 전야의 마지막 회합에서 내일 학생들이 다수 참가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종교단체 지도자들은 당일의 발표장소를 파고다 공원으로부터 시내의 요리점에 변경하고 낭독 후에 당국에 자수하고 말았다. 그러나 파고다 공원에 집합한 학생, 시민들은 선언서 낭독식을 결행하여 일제히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시가로 떨쳐나갔다. 이에 수많은 민중이 합류하고 수만 명의 시위운동으로 확대하였다. 서울과 동시에 평양, 의주, 선천, 진남포, 안주, 원산 등 북부의 여러 도시에서도 운동이 시작하였다. 3.1운동은 초기에는 조선 북부지방의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청년, 학생, 시민 등에 의한 평화적인 시위운동의 형태로 시작하였다. 3월 중순 이후에는 전국적 범위로 급속히 확대하여 농민, 노동자를 비롯한 각 계층의 민중이 적극적으로 참가함에 따라, 또한 일제의 탄압이 노골화함에 따라 운동은 점차 폭동화의 양상을 띠고 완강하게 전개되여갔다. 1918년경부터 깨어나기 시작한 노동자, 농민들의 운동은 1919년의 투쟁을 통해서 질적인 변혁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3.1운동에서는 각종 선전물, 격문, 지하신문이 배포되고 시위행진에서는 태극기가 날리고 애국가가 불리웠다. 이러한 시위가 일상화하게 됨으로써 “우리 민족”이라는 의식이 대중화하게 되었다.
3.1운동은 3월 하순부터 4월 상순에 걸쳐 최고조에 달하였다. 전국 218의 부군의 거의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200만 명 이상이 참가하였다. 또한 중국 간도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조선인들도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최초의 반제국주의운동으로서 중국의 5.4운동(1919년) 등 세계 각지의 민족운동을 크게 고무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그 지배정책을 어쩔 수 없이 변경하게 되어 1920년대에 이르러 ≪문화정책≫을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3.1운동은 일본의 쌀폭동(1918년)이나 중국의 5.4운동과 함께 동아시아에서의 운동의 새로운 발전으로서 자주 일괄해서 파악되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3.1운동의 특징은 민중운동으로서의 그 폭의 넓이의 크기에 있다. 쌀폭동이나 5.4운동에 비하여도 그 규모의 크기는 뛰여나다. 문자 그대로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이었다. 일본의 폭력적인 탄압에 의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었으나 거의가 무명의 사람들이었다. 3.1운동은 조선근대사에서 민족운동발전의 도달점을 보여주고있다.

▲ 서울을 경계하는 일본군대 [사진 : 필자제공]
▲ 서울을 경계하는 일본군대 [사진 : 필자제공]

3. ≪다이쇼데모꾸라시≫ - ≪전후민주주의≫와 ≪전쟁민주주의≫

일본은 조선총독부의 기존 폭력장치만으로는 부족하여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로 ≪자위단≫을 조직하는 한편 일본본토로부터 군대, 헌병을 증파하여 맨주먹의 민중에 대하여 철저하게 무력탄압을 가하였다. 희생자 7천 500명, 검거자 4만 6천 명이라는 수는 탄압의 현장이 전장 그 자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의 이 전쟁의 논리는 1920년 간도대학살사건, 23년 일본 관동대진재 대학살사건에서도 되풀이 되었다. 당시의 일본은 ≪다이쇼(大正)데모꾸라시≫의 시대였다고 이해되고 있으나 일본자본주의구조에 편입되고 있었던 식민지 조선을 포함한 ≪일본사≫의 총체로부터 보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조선인에게 있어서 국내외의 어디에 거주하여서도 ≪다이쇼≫년간은 가장 가혹한 시대였던 것이다.

≪다이쇼데모꾸라시≫의 기수라고 불리우는 요시노 사꾸죠(吉野作造)는 조선인에게  동정을 하였으나 식민지지배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하였다. 당시 대다수의 일본인은 3.1운동을 ≪소요(騷擾)사건≫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고 조선인에 대한 배외주의적인 적개심을 깊어갔다. 이러한 태도는 관동대진재시에서 군대, 경찰, ≪자위단≫(민병)의 삼위일체의 계엄령 체제 하에서의 조선인학살사건으로 이어졌다.

▲ 관동대진재시의 조선인학살(당시의 그림) [사진 : 필자제공]
▲ 관동대진재시의 조선인학살(당시의 그림) [사진 : 필자제공]

미쯔야 다이찌로(三谷太一郞)는 일본의 역사상의 민주주의는 모두 ≪전후민주주의≫었다고 말한다. 무진전쟁 후의 후꾸자외 유끼찌 등의 ≪공의여론(公議與論)≫ 요구, 서남전쟁 후의 자유민권운동, 일청전쟁 후의 정당정치의 활발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다이쇼데모꾸라시, 이것은 모두 현재의 ≪전후민주주의≫의 선구를 이루었다고 하여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아베정권의 자세를 비판하였다. 미쯔이는 일본근현대사에서 전쟁과 민주주의를 대립적으로 파악하고 전후민주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아베정권에 대하여 전후일본을 부정하는 정권이라고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전후민주주의를 어떻게 사는가』 도꾜대학출판사, 2016년). 이에 대하여 나까노 도시오(中野敏男)는 전쟁과 민주주의는 원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대항축으로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유민권운동 후에는 일청전쟁과 일로전쟁이 일어났고 한국≪병합≫에로 계속된다. 다이쇼데모꾸라시의 시대에는 3.1운동, 관동대진재 조선인대학살이 일어나고 ≪만주사변≫이후는 전쟁의 시대에로 계속된다. 전후민주주의의 시대에도 조선전쟁, 월남전쟁 등 동아시아의 전쟁의 시대였고 일본은 ≪기지국가≫로서 경제성장을 하였다. 다시 말하여 민주주의의 시대와 전쟁의 시대는 연속하였고 일본의 민주주의는 전쟁과 세트로 된 ≪전쟁민주주의≫였다고 정의한 것이다(「보고-전후 70년에 전쟁민주주의를 묻는다」 『심포쥼기록 동아시아에서 보는 전쟁민주주의와 전후일본』 도꾜외국어대학, 2015년 12월). 나까노는 같은 프로세스 속에서 행사된 식민지주의와 배제의 폭력이 사람들을 ≪국민≫ 내부에 응집시켜 ≪국민≫을 국민과 비국민, 안쪽과 바깥으로 구분하고 안쪽에서 만들어지는 민주주의는 바깥으로 향하는 폭력과 전쟁에 병행하여갔다고 한다.

4. 3.1운동체험이 가지는 의미

조선민중의 3.1운동체험은 그 후 독립운동의 원점으로 되었다. 가령 독립운동가들의 전기류를 보아도 3.1운동체험이 그들로 하여금 독립운동에로 참가하는 계기로 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북의 김일성주석은 8살 때에 일어난 평양에서의 3.1운동에 만경대의 주민들과 함께 달려갔다. 김주석은 ≪나의 세계관은 새로운 단계에로 도약하였다. 어른들의 틈바구니에서 발돋움을 하며 독립만세를 부르던 그 시각에 나의 유년시절은 벌써 끝났었다고 말할 수 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1권))고 회고하였는데, 3.1운동체험이 새로 혁명가로 되는 결의를 다지는 계기로 되었던 것이다. 김산(본명 장지락)은 조선에서 3.1운동에 조우하고 ≪몇천 명의 다른 학교의 생도나 거리의 사람들과 대오를 짜고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거리를 행진하였다. 나는 기쁨으로 심장이 터질뻔했고 누구나도 기쁨에 넘치고 있었다≫라는 체험을 하였다. 이 체험이 ≪나의 정치의식의 각성이었고 대중행동의 힘이 나를 근저로부터 뒤흔들었다≫고 회상하고 있다(≪아리랑의 노래≫).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기마연대 소위에 임관한 김경천은 3.1운동이 발발하자 조선을 경유하여 소련령의 연해주로 탈출하고 조선인 빨찌산부대의 지휘자로 되고 쏘련적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김경천아일록≫).
이러한 조선민중의 3.1운동체험에 비하여 일본의 경우 원점이라고 인식될만한 폭이 넓은 민중운동의 체험은 드물었다. 가령 일본의 민중운동의 획기를 이룬다고 하는 쌀폭동의 참가자는 거의 하층민에 국한되고 중・상층민이나 인테리는 무연하였다.

3.1운동은 지금도 조선인의 내셔널리즘의 원점으로 살아있다. 역사적인 3.1운동체험은 혈육으로 된 ≪민족적인 기억≫으로 해방 후도 전해지고 현재의 통일운동에 결부되고 살아있는 것이다. 말한다면 민족적 과제의 최대공약수였던 해방 전의 독립의 과제(≪3.1이념≫)와 해방 후의 통일의 과제(≪통일이념≫)는 항상 오버랩하고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3.1운동사는 현재의 생을 공유하는 우리들 모두의 동시대사이고 끊임없는 관찰을 요하는 ≪산 력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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