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본 일본의 역사(13)

▲ 1945년 8월 16일 정치범 석방
▲ 1945년 8월 16일 정치범 석방

1. 전후처리에 있어서의 국제공약의 양면성(식민지지배책임을 불문)

1) 조선해방, ≪신탁통치≫의 합의는 있었는가

1941년 8월에 체결된 영미공동선언(대서양헌장)에서는 민족자결의 원칙(영토불확대, 모든 극민은 정치체제선택의 자유, 강탈된 주권과 자치권의 회복), 평화의 원칙(경제적번영, 사회보장 등의 면에서 국제협력)을 확인하였다. 이에 소련도 곧 찬의를 표시하여 42년 1월에 작성된 연합국 공동선언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영미공동선언은 처음부터 제한성이 있었다. 영국의 처칠은 직후인 2월 영국 하원에서 영미공동선언은 영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답변하여 스스로 선언의 기만성을 노출하였다. 

1943년 12월 1일 카이로선언이 발표되었다. 선언의 전반에는 일본의 침략책임과 처벌, 영토불확대의 원칙이 규정되고 후반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개시 이후에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상에서의 모든 섬들의 박탈, 만주 및 팽호열도의 중국에로의 반환, 조선의 독립이 규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요구하였다. 

카이로선언의 조선조항은 ≪전기의 3대국(영국, 미국, 중국)은 조선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머지않아 조선을 자유독립하도록 하는 결의를 가진다≫고 규정하였다. 이 조선조항의 원안은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의 측근인 하리・홉킨스가 기초하였다. 원안에는 ≪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에≫라고 되고 있었으나 루즈벨트가 ≪적당한 시기에≫라고 고쳐 쓰고 또한 이를 처칠이 ≪머지않아(in due course)≫라고 수정하였다. 말하자면 ≪적당한 코스를 거쳐≫라는 뜻으로서 ≪신탁통치≫를 의미하였다. 

43년 11월 28일 테헤란회담(제1차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조선문제에 대하여 ≪완전독립을 획득하기 전에 거의 40년간의 훈련 기간을 둘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였으나 스딸린은 이에 대하여 침묵하였다. 

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해방된 유럽에 관한 선언≫과 함께 비밀협정이 합의되었다. 비밀협정에서는 소련의 대일참전과 사할린, 쓰시마 열도의 소련귀속이 결정되었다. 얄타회담에서는 또한 조선문제에 관한 비공식대화가 있었다. 주소미국대사 아베렐・하리만의 회상에 의하면 루즈벨트는 ≪조선에 대하여 소련, 미국, 중국의 대표로 구성된 신탁통치를 하는 의도≫를 말하고 필리핀의 자치정부를 준비하는데 거의 40년 걸렸으나 ≪조선의 경우는 20년부터 30년으로 될 것이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스딸린은 혹시 조선인이 자기들 자신의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면 어째서 신탁통치와 같은 것이 필요하는가고 묻고 계속하여 조선문제의 처리에는 동맹국의 일원인 영국도 참가할 것, 후견제(後見制)는 기간이 짧은 것이 좋다, 조선에 외국군대가 주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답하였다. 

▲ 미군의 남조선 진주 [사진 : 필자 제공]
▲ 미군의 남조선 진주 [사진 : 필자 제공]

38도선을 경계로 하는 45년의 미소분할점령은 얄타에서의 비밀협정 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패전 직전에 미국측이 제기한 미소교섭에서 어수선하게 결정된 것이다. 미국은 일본본토상륙작전과 만주・조선에 대한 침공작전에 요하는 인원의 손실은 심대한 것으로 된다고 예측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만주・조선에서의 군사행동과 그에 따른 손실을 소련군에 넘겨씌우려고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포츠담회담이 한창 진행하던 때에 원폭실험이 성공하였다는 정보에 접하야 이것이야말로 소련과 합의한 외교적인 약정을 모두 허사로 하고 태평양전쟁을 단기간에 종식하고 동아시아의 전후처리의 문제에 대한 소련의 참가를 배제할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미국은 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연이어 원폭을 투하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지체없이 8일에 얄타협정에서의 미국과의 비밀요해사항에 기초해서 대일참전하여 9일, 10일에는 태평양함대가 조선의 웅기, 라진, 청진에까지 육박하였다. 

▲ 쏘련군의 북조선 진주 [사진 : 필자 제공]
▲ 쏘련군의 북조선 진주 [사진 : 필자 제공]

이에 당황한 미국은 10일 밤부터 11일 미명까지 국무・육군・해군의 3성 조정위원회(SWNCC)의 회의를 열고, 일반명령의 일부로서 조선에서 북위 38도선을 경계선으로 하는 미소양군의 분할점령이라는 내용의 문안을 기초하였다. 14일 트루멘은 이를 ≪일반명령 제1호≫로 결정하고 소련에 통고하였다. 스딸린은 의외로 이 안을 그대로 접수하여 진격을 북부 조선에서 정지하였다. 스딸린은 미국과의 협조관계를 우선하여 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결국, 소련은 북조선지역, 사할린, 쓰시마열도를 점령하였다. 38도선은 미국이 서울을 점령할 목적으로 하여 편의상 설정한 것이었다. 국제적으로는 38도선은 다만 미소양군에 의한 일본군 무장해제담당의 잠정적인 경계선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전후의 미국의 세계전략 냉전정책에 의하여 항구적인 분할선으로 변화하였던 것이다. 

2) 일본의 패전

1945년 7월 26일에 발표된 포츠담선언은 일본의 무조건항복과 일본의 민주화・비군사화 등을 요구하였다. 이때 일본이 즉시 선언을 접수하였더라면 히로시마・나가사끼의 원폭과 소련의 대일참전은 없었을 것이었다. 일본은 겨우 8월 14일의 어전회의에서 수락하고 항복할 것을 결정하였다. 9월 2일 항복문서에 조인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하였다. 

일본의 전후처리는 일련의 국제공약에 따라 실시하기로 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을 단독점령한 미국은 냉전에로의 이행에 따라 일본의 비군사화・민주화와 전쟁・식민지책임을 추구하는 것보다 일본을 반공진영에 편입시킬 것을 우선하였다. 

일본의 점령정책은 극동위원회(FFC)에서 작성된 정책에 기초하여 연합국군 최고사령관(SCAP)이 관리하기로 되었다. 워싱톤에 둔 극동위원회에는 연합국 중 13개국이 들어갔다. 그중에서 미국・영국・중국・소련의 4개국에 극동위원회의 정책결정에 대한 거부권이 부여되고 그 위에 미국은 다른 3개국이 거부권을 발동하여도 그를 배제하여 자기의 의사를 관철할 수 있는 ≪긴급중간지령권≫이라고 불리우는 권한이 인정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양자를 행사함으로써 미국은 사실상 정책의 실권을 쥐고 단독점령하였다. 소련은 이에 대하여 저항을 표시하였고 미국・영국・소련으로 구성되는 연합국 대일이사회를 설치한 것도 그 소산이었다. 결국, 소련은 발칸반도・동유럽의 관리에서 저들의 우월권을 인정받을 대신에 미국의 일본관리의 우월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타협하였다. 

2. 제4차 조선전쟁・동북아시아전쟁

1) 인민위원회의 조직, 미소의 분할점령

45년 8월 14일 일본정부는 포츠담선언의 수락을 조선총독부에 전달하였다. 15일 아침 총독부 정무총감과 여운형 사이에서 회담이 진행되었다. 정무총감은 여운형에게 일본항복 후의 치안문제와 일본인의 생명재산에 대한 보호를 요청하였다. 여운형은 전국의 정치범・경제범의 즉시 석방, 치안유지와 건국운동을 위한 정치활동에 간섭하지 않는다 등 5가지 조건을 전제로 하여 요청을 수락하였다. 여운형은 즉시 그날에 집회와 라디오방송을 통해서 인민들의 단결과 유혈의 방지를 호소하였다. 

15일과 16일에는 전국각지에서 정치범・경제범이 석방되었다(남쪽에서만 하여도 약 1만 6천 명). 17일에는 건국준비위원회의 발족(위원장 여운형)을 정식으로 전국에 발표하였다. 8월 말까지 조직된 건준지부(인민위원회)의 수는 남북을 합쳐서 145개 지부에 달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일제 시기 국내에서 비타협적 저항운동의 연장선 위에서 과도기의 치안유지와 자주적인 독립국가의 건설을 준비하는 단체였다. 미군의 남조선 진주를 며칠 앞선 9월 6일 건준은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인민들은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이하였다. 

지방군 총수의 절반 이상에 설치된 인민위원회는 민중이 직접 정치에 참여한 조선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일이었고 식민지기의 신간회 지부, 나아가서 그 이후의 제 운동과 지역적, 인적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조선인민공화국수립의 선언은 미국의 진주가 긴박한 속에서 부득이한 ≪비상조치≫로서 취해졌으나 이것은 인민위원회의 역량 위에서 만들어졌고 그 의도는 긴급하게 조선 민족의 자주적인 건국을 표명하는데 있었다. 인민공화국의 각료명부는 좌우 양진영에 의한 연합정권을 표명한 것이고 정강과 시정방침은 제국주의의 잔재와 봉건주의의 청산을 겨냥한 인민민주주의혁명의 이상을 표출한 것이었다.

혹시 미군정청의 탄압이 없더라면 그야말로 수개월 동안에 조선반도 전역에서 승리를 차지하였을 것이다. 남조선빨찌산투쟁의 목표는 인민위원회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 전역은 물론 재일조선인들도 인민공화국을 지지하였다. 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은 식민지 시기의 독립운동으로부터 해방 후의 인민위원회운동이 결실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인민위원회운동을 축으로 한 해방전후사의 역사상 구축이 가능하고 그에 대한 평가야말로 해방전후사의 문제를 생각할 적에 본질적인 요소로 된다고 생각한다. 

9월 8일 오끼나와(沖繩)에 주둔하고 있었던 미국 제24군단이 남조선에 진주하고 곧 군정을 실시하였다. 설치된 군정청은 조선총독부의 직위체계를 그대로 남기고 총독부의 조선인 관리나 우익인사들을 등용하였다.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나 그 후신단체인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 46년 2월 15알 결성) 등에 대표되는 사회주의자나 민족주의자의 자주적인 움직임을 일체 부정하고 맹렬하게 탄압하였다. 미군의 이 적대적 행동은 남조선 진주에 앞서 서울의 조선총독이나 조선군 사령관과의 무선연락에 성공하고 오끼나와와 서울간에서 교신이 홍수와 같이 쌍방으로부터 흘러간 사정과 관련된다. 

조선군 사령관은 ≪조선에서는 지금 혼란상태를 악용하고 평화와 질서를 문란시키려고 음모를 노리고 있는 공산주의자와 독립을 선동하는 자가 횡행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러한 일본측의 메시지의 영향을 받은 미국 제24군단 하지사령관은 9월 4일 부대의 오끼나와 출발에 앞서 장병들에 대하여 조선은 ≪합중국의 적≫이며 따라서 ≪항복의 제 규정과 조건이 적용된다≫는 통고를 하였다. 

8월 9일, 10일 소련태평양함대는 웅기, 라진, 청진의 일본군을 공격, 점령하여 그 후 20일 이후에 본부대가 북조선에 진주하였다. 북조선에 진주한 소련군은 조선 인민에 대하여 동유럽제국보다 훨씬 큰 자유재량권을 인정하였다. 북조선에서는 조선 인민의 손에 의하여 민주기지 창설을 위한 시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북조선지역의 확보가 주되는 관심이었다. 미국이 남조선에서 강력한 군정을 펴고 인민공화국을 탄압하고 있는데 대하여 적극적으로 항의하는 정치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묵인하였다. 소련은 남쪽과 떼여놓고 북쪽만의 권력을 구축해가는 코스를 추진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놀았다. 

2) 모스크바 3상회의와 미소공동위원회

45년 12월 16일부터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 3개국의 외무대신회의가 시작하였다. 회의에서는 일본의 관리문제나 조선반도문제가 의제에 올랐다. 27일에 ≪모스크바협정≫(조선에 관한 모스크바3상회의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처음 미국측이 제의한 안은 10년을 기간으로 하는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소련측은 먼저 조선임시정부를 설립하고 임시정부와 미소공동위워회가 협의하여 5년간의 ≪신탁통치≫협정안을 작성한다는 대안을 제의하였다. 소련안을 골자로 하여 협정이 체결되었다.

소련안은 실질적으로는 임시정부의 활동을 도와주는 ≪후견제≫(後見制)였다. 12월 16일의 최초의 회의에서 소련외상 몰로토프는 미국무장관 번즈에게 얄타에서 루즈벨트와 스딸린사이에서의 이야기는 신탁통치에 대한 의견의 교환에 지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고 조선의 신탁통치에 대해서 미소간에는 어떠한 합의도 없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북의 조선사회민주당의 기관지인 ≪조선사회민주당≫에서 다음과 같은 주목할 수 있는 기사가 있다.

≪서방의 일부 역사학자는 전쟁 시기에 이미 소미간에서 전후 조선에 신탁통치를 실시할데 대해 <동의>와 <합의>가 있은 것처럼 설명하고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전후에 진행된 모스크바3상회의에서의 제안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소련이 전후 조선에 대해 구상한 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을 지체없이 독립국가로 발전시키는 것이었고 그것을 유관국가들이 적극 지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스딸린이 루즈벨트의 신탁통치안에 침묵을 지킨 것은 <동의>의 표시가 아니라 외교적인 <반대의사>의 표시였고 조선문제처리에 영국의 참가를 주장한 것은 조선의 독립에 대한 보다 공고한 국제적 담보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강문환 <누가 38도선을 그었는가>≪조선사회민주당≫1989년 제1호,56폐지).

모스크바협정에서 강조된 것은 신탁통치가 아니라 제3조에 명시되고 있는 조선인에 의한 과도적인 임시정부를 어떻게 발전시키는가 하는 문제였다. 임시정부를 수립한 이후 이 정부가 미소공동위원화와 협의한 후 비로소 관계 4개국이 합동하여 5년을 한도로 하는 4개국 신탁통치에 관한 협정문을 작성하기로 되고 있었다. 따라서 모스크바협정의 이 조문은 경우에 따라 신탁통치는 필요하지 않는다는 신축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모스크바협정에 의하여 연합국으로부터 통일조선의 독립까지의 과정을 결정할 위임을 받은 미소공동위원회는 제1차 위원회를 46년 3월부터 5월까지, 제2차 위원회를 47년 5월부터 10월까지 진행하였다. 그러나 공동위원회는 조선인의 어느 단체를 모스크바협정에 기초한 조선임시정부의 수립에 관한 협의의 대상으로 하는가에 대해서 분규하여 실질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미국은 일방적으로 공동위원회를 파탄시키고 국제협약에 위반하여 조선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여 미국 주도의 유엔임시조선위원단(47년 11월 14일 유엔 제2차 총회에서 채택) 아래서 남조선 단독선거(48년 5월 10일)를 강행하여 계획대로 반공친미적인 이승만정권의 대한민국을 발족시켰다(48년 8월 15일).
이에 대하여 북조선에서는 전국적인 민주선거를 통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48년 9월 9일). 조선반도에 2개의 정권이 출현하게 됨으로써 38도선은 국경아닌 ≪국경선≫으로 바꾸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 이 시점에서의 민중의 의식에서 남북의 차이는 그다지 없었다. 민중의식은 식민지하에서의 민족해방투쟁이 배양해온 사상의 연장선 위에 있었고, 그 건국구상의 최대공약수는 토지개혁과 진보적 민주주의를 기초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넓게 결집한 공동전선의 체제였다. 또한 남쪽의 이승만정권의 기반은 약하고 정세는 유동적이고 남북재협상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49년 6월 남북의 정당・사회단체에 의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결성되고 평화적 조국통일방침을 밝힌 선언서가 채택되었다. 50년 6월 조국전선과 공화국정부는 연달아 전조선적인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적인 최고입법기관을 창설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49년에 들어서서 38도선을 넘어서 본격적으로 남측이 북측을 공격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소규모의 충돌은 벌써 47년 이후 일어나고 있었으나 이 무렵에는 여단 규모의 병력이 투입되고 국지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라 전면전쟁으로 확대할 수 있는 ≪작은 전쟁≫으로 변하고 있었다. 

3) 일본점령정책

8월 28일 미군이 일본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으나 남조선의 직접통치와는 다른 일본정부의 존립을 전제로 한 간접통치였다. 정치범들에 대한 석방은 10월 10일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에서 해방직후에 석방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전시중에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체포된 저명한 철학자 미끼 기요시(三木淸)는 패전 후도 석방되지 않는 채 9월 26일에 옥사하고 말았다.
저명한 역사학자 하니 고로(羽仁五郞)는 자신의 체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유치장에 있었던 8월 15일,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패전하여 무조건 항복하였다. (중략)

내가 감옥안에 앉아서 젊은 청년들이 마중 나오리라 생각하여 하루종일 기다렸는데 저녁이 되어도 오지 않는다.

밤이 되어도, 그리고 다음 날이 되어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때 일본혁명의 유일한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것을 통절히 느꼈다.

지금까지 그렇게 쓸쓸한 느낌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니 고로≪자서전적 전후사≫1976년).

일본에서는 패전을 절호의 기회로 하여 자주적으로 사회변혁으로 전환하지 못하였다.

46년 5월에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이 개시되었다.
도쿄재판은 종래의 전쟁범죄 이외에 ≪평화에 대한 죄≫, ≪인도에 대한 죄≫를 포함한 새로운 전쟁범죄개념을 재판조례에 보태었다. 그러나 뉘른베르크재판에서 나치스도일칠란드의 죄를 ≪인도에 대한 죄≫를 적용하여 재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도쿄재판에서는 실질적으로 이를 적용하지 않았다. 48년 11월의 판결에서는 도죠 히데끼(東條英機) 이하 25명이 유죄가 되었으나, 천황의 책임은 추구되지 않고 대자본가, 고급관료의 죄도 묻지 않았다.
협력자의 육성이라는 미국의 냉전정책의 배려가 우선 되었다. 일본은 이에 대하여 그저 수동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천황 스스로가 죄를 면하기 위하여 연합국군 사령관 맥아더를 방문하고 면책을 노리는 이른바 ≪천황외교≫를 벌렸다. 미국의 대일전후구상을 적극적으로 역이용한 것이다. 도쿄재판은 ≪미일의 합작품≫이었다. 

또한 도쿄재판에서는 일본의 식민지지배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미국, 영국도 식민지지배국이었기 때문에 책임의 루가 자기들에게도 미치는 것을 두려워서 이를 피하였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진보적인 세력들은 전쟁책임에 대해서는 발언하였으나 식민지지배책임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다만 재일본조선인련맹(조련)만이 도쿄재판에 대하여 천황과 조선총독의 식민지지배책임을 추구할 것을 요구하였다. 

▲ 재일본조선인련맹 강제해산 [사진 : 필자 제공]
▲ 재일본조선인련맹 강제해산 [사진 : 필자 제공]

도쿄재판 이후 일본은 이른바 ≪역코스≫를 걸어간다.
탄압의 첫 대상은 조선인이었다. 48년 9월 8일 단체등규정령에 의하여 조련, 민청(재일본조선민주청년동맹)이 강제 해산되었고 조선학교가 강제폐쇄되였다(48년 제1차 강제폐쇄령, 49년 재2차 강제폐쇄령). 뒤이어 50년에 일본의 공산주의자를 비롯한 진보세력에 대한 ≪레드 퍼지≫가 감행되었다. 

4) 조선전쟁

49년경부터 남북간에서 여단급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었으나 1950년 6월 25일에 본격적인 내전이 발발하였다. 북의 조선인민군은 전전선에 걸쳐 남진하여 곧 서울을 점령하였으며 급속히 남단의 부산까지 육박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이 결석한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군의 이름으로 미군의 개입을 노리었다. 당시 지상군은 이미 전선에 투입되고 있었으나 미군은 형세역전을 노리고 인천상륙작전을 강행하여 그대로 38도선을 넘었다. 그후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여 조중연합군은 다시 38도선을 넘어 51년 1월 4일에 서울을 재점령하였으나 재차 전선은 38도선 부근에 되돌아오고 정전까지의 약 2년간 그대로 고착상태에 놓이었다. 

≪개전≫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외국세력에 의하여 분단된 남북조선간의 국가형성(분단된 조선의 통일)을 둘러싼 ≪내전≫의 성격을 가진 전쟁이었으나, 이에 미국, 중국이 참전함으로써 국제적인 제4차 조선전쟁, 동북아시아전쟁으로 되었다.

51년 7월 10일부터 시작한 정전회담은 포로문제에서 분규하였으나, 드디어 타협이 이루어지고 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5조63항으로 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협정은 제4조에서 정전협정의 발효 이후 2개월 이내에 정치회의를 열어 조선으로부터 모든 외국군대철거의 문제. 조선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제 문제를 교섭하여 해결할 것을 규정하였다. 정치회의는 54년 4월 아시아문제의 해결을 위한 제네바회의의 일환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남북쌍방의 주장은 대립한 채 아무런 성과없이 결렬하였다. 이로 인해서 정전협정체제는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조선전쟁이 남긴 것은 파괴와 수많은 죽임이었다. 군사경계선은 서부에서는 38도선의 아래에 들어가 개성지구, 옹진반도 등이 북측에 포함되었으나, 동부에서는 38도선의 우에 올라가 철원군의 남반, 양구군, 인제군, 고성군 등이 남측에 들어갔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파괴의 상처는 반도전체를 뒤덮었으나 특히 미군의 폭격에 의하여 북조선지역의 피해는 컸고 평양은 모조리 파괴되고 회진만 남았다. 사망자의 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남북을 합쳐서 150만 명, 또는 300만 명이라고 한다. 49년의 남북 총인구가 2,865만 명였으므로 10%를 넘었다. 

조선전쟁이 남긴 것은 또한 분단의식, 분단고정화, 이산가족이었다. 전쟁 이전에는 아직도 남북협상의 가능성이 있었고 민중의 의식도 그다지 이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은 이 가능성을 완전히 부스고 분단은 고정화되고 말았다. 좌익계의 인사는 인민군과 함께 북에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반공의식에 투철한 ≪월남자≫가 대량 발생하게 되어 남북간의 이데올로기분화는 더욱 현저화되었다. 분단은 가족까지 갈라놓고 1천만 명에 달하는 이산가족의 비극을 낳았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동서냉전을 격화시켜 미일안보조약체제・일본의 재군비강화를 촉진시켰으며 전쟁특수를 통해서 55년 이후의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의 조건을 창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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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에서 조선전쟁 종결에 이르는 8년 간의 역사는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제반모순을 배태시키고 사람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조건지었다. 따라서 해방 후의 역사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현 단계의 변혁운동의 기본과제를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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