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본 일본의 역사(12)

일제 시기 우리 동포들은 살길을 찾아 조선반도로부터 동아시아 각지에 대량적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의 해외침략은 유럽의 원거리식민지와는 달리 인접하는 동아시아지역에 동심원상으로, 도넛형으로 확대되었다. 조선인의 이주도 종주국을 포함한 동일한 지역내에 진행되었다. 그 때문에 조선독립운동은 이주지의 반일혁명운동과의 국제적 연대밑에서 전개되게 되었다. 공동의 적인 일제를 반대하여 연대하여 싸우기는 하였으나 적지 않게 서로 간의 차질도 있었다. 특히 해외조선독립운동에서의 민족주의와 국제주의간에서 갈등이 있었고 심각한 후과도 초래하였다. 이에 대해서 해당 시기의 대표적인 운동가, 사변을 통해서 보기로 한다. 

▲ 신채호 [사진 : 필자제공]
▲ 신채호 [사진 : 필자제공]

1. 신채호와 무정부주의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에 걸친 애국계몽운동가, 독립운동가이며 역사가였던 신채호는 당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였다고 말해도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는 1910년 4월 강제《병합》을 앞두고 해외에 망명하였다. 울라지보스또크, 상해, 베이징 등지에서 조선인, 중국인운동가들과 연대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상해임정의 외교노선을 비판하고 결별한 후 22년 말에 의열단의 강령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였다. 《조선혁명선언》은 《문화통치》하의 자치운동이나 문화운동, 해외에서의 외교론, 준비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민중에 의한 직접폭력혁명을 주장하였다. 그 후 25년에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하였다. 민족과 국가의식이 누구보다도 강하였던 그가 무정부주의운동에 몸을 바친 것은 오늘까지 수수께끼로 되고 있다.

25년 1월 2일부의 《동아일보》에 기고한 《랑객의 신년만필》은 이 시기의 그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그는 우선 《옛날의 도덕과 오늘의 주의란 것의 그 표준》은 무엇인가고 자문하고

“리해문제를 위하여 석가도 나고 공자도 나고 예수도 나고 맑스도 나고 크로포트낀도 났다.

(중략) 그의 제자들도 스승의 정의를 잘 리해하여 자가의 리를 구함으로 중국의 석가가 인도와 다르며 일본의 공자가 중국과 다르며 맑스도 카우쓰키의 맑스와 레닌의 맑스와 중국이나 일본의 맑스가 다 다르다, 우리 조선사람만 매양 리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랴 함으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랴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랴 한다”

고 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무산계급의 일본인을 조선인으로 본다함은 몰상식한 언론인가 하니 일본인이 아무리 무산계급일지라도 그래도 그 뒤에 일본제국이 있어 위험이 있을가 보호하며 (중략)조선에 리식한 자는 조선인의 생활을 위협하는 식민의 선봉이니 무산자의 일본인을 환영함이 곧 식민의 선봉을 환영함이 아니냐”

라고 말하여 안이한 계급론적인 연대,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를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민족정신을 주체의 문제로서 추구한 결과 국가주의를 부정하는 무정부의에로 이르게 된 것이었다. 그가 무정부주의를 선택하게 한 계기의 하나가 상해임정의 권력다툼을 보고 사람들의 역량을 독립운동에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무정부주의가 적절하다고 생각한 것이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는 권력악을 부정한 것이고 맑스주의를 선택하지 않았던 이유도 이러한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에 있어서 국가주의의 부정, 무정부주의의 선택은 결코 민족의 관점을 포기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실이 민족적인 이해대립의 구조로 되고 있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의 민중혁명도 민족적인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말한다면 제국주의세계에 대한 피억압제민족의 공통의 이해를 발견함으로써 국제주의에 통하는 민족주의가 명시된 것이다. 민중의 민족주의라는 이 시기의 그의 사상의 기조와 무정부주의의 국제운동에 연대하는 것은 신채호에 있어서는 모순되지는 않았다. 

▲ 홍범도 [사진 : 필자제공]
▲ 홍범도 [사진 : 필자제공]

2. 홍범도와 국제주의

홍범도는 반일의병투쟁과 독립군활동을 통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준 명장으로 이름이 높다. 그는 1868년 평양 외성의 빈농가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지주의 고농으로 일을 하였으며 그 후 평양진위대에 복무하거나 종이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함경도에서 산포수로 있었다. 1907년 9월 의병탄압책의 일환으로 《총포 및 화약류취체령》이 공포되고 포수들의 총포를 회수하자 이에 항거하여 차도선들과 함께 포수들을 중심으로 반일의병대를 조직하였다. 

함경도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여 후치령전투, 삼수전투, 갑산전투 등 수차례에 걸쳐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 후 부대를 데리고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고 1910년 7월 울라지보스또크에서 13도의군을 창설하였으나 러시아의 탄압에 의하여 의병활동이 곤란하게 되니 교육, 실업진흥에 활로를 찾아 11년 권업회를 결성하고 부회장으로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간도로 옮기고 19년 간도국민회의 결성에 참가하여 대한독립군총사령으로 되었다. 국내의 삼수, 갑산에 진격하여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20년에 최진동, 김좌진부대와 연합하여 봉오골전투, 청산리전투에서 큰 규모의 일본군을 격파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 후 연해주로 이동하고 소련원동지방에서 백파도당을 지원하여 무장간섭을 감행한 일본군을 붉은 군대와 연합하여 원동빨찌산을 조직하고 이만전투(우쑤리강변)를 비롯한 여러 차례 격전을 전개하였다. 21년에 《흑하사변》을 겪었으며 22년에는 일본군이 철수하게 되자 소련의 조치로 반일무장단체가 해산되었다. 그 후 홍범도는 조선인집단농장의 책임자로 종사하고 27년에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당시 일제는 조중인민들사이에 이간을 조성시키던 수법대로 조소인민들사이에도 쐐기를 치는 이간정책을 부단히 실시하였다. 친일적인 조선청년들로 국경감시중대라는 것을 조직하고 소만국경선에 배치하였다. 또한 간도에 있는 조선사람들 중에서 첩자를 많이 양성하여 소련에 침투시킨듯한 여론을 내돌리면서 소련사람들안에 불안을 조성하였다.

37년 소련은 원동에 살던 조선사람들을 중앙아시아지역(까자흐스딴, 우즈베끼스딴)에 집단적으로 이주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대해서 소련은 자위를 위해 불가피하게 취해진 조치라고 설명하였다. 원동지역의 조선인들은 그것을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대의를 위해 소련옹호의 기발을 내리지 않았다. 

까자흐스딴의 크질오르다에 정착한 홍범도는 고려인극장에서 고려인 희곡작가 태장춘의 배려로 수위장을 맡았고 연금생활을 하였다. 극장의 극작가는 홍범도를 주제로 한 연극 《홍범도》를 만들고 42년에 본인이 보는 앞에서 초연을 하였다. 이듬해 10월 25일 홍범도는 노환으로 서거하였다. 

홍범도는 항일무장투쟁의 명장으로서 오늘까지 조선인민들속에서 널리 알려지고 있다. 함경도의 향토민요를 바탕으로 한 노래 《날으는 홍범도》는 오늘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크질오르다시에는 그의 묘와 기념비가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홍범도 거리가 있다. 

중앙아시아에 이주한 고려인들은 각자의 존립기반의 구축과 지위확보를 최대의 과제로 하여 소비에트체제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혼신의 노력을 하였다. 그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37~70년 사이에 까자흐스딴 고려인들 속에서 67명의 노력영웅을 낳았다. 

▲ 장지락 [사진 : 필자제공]
▲ 장지락 [사진 : 필자제공]

3. 중국혁명에서의 조선인의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

중국 동북지방과 중국관내에서 활동한 조선독립운동가들은 중국혁명에 이바지하는 것을 조선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국제주의의 책무로 인식하였다. 
20년대에는 중국 광주에 국공합작의 혁명정부가 수립되고 그 사관을 양성하는 황포군관학교가 있었다. 여기에는 중국인은 물론 피압박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요구하는 조선인, 월남인, 러시아인 등이 많이 있었다. 27년 장개석의 상해 반공쿠데타에 의하여 국공합작이 파탄되자 중국공산당은 광주봉기를 일으킨다. 이에는 조선인들도 많이 참가하였다. 《아리랑의 노래》의 주인공으로 알려지고 있는 김산(본명 장지락)도 광주봉기에 참가하다가 실패한 후 중국공산당이 있는 연안에 가서 군정학교 교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연안에 있으면서 언젠가는 조선인들의 공동체가 있는 간도에 가서 직접 조선독립운동에 관련하고 싶은 의향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그에게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비판하고나서 적구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일본관헌에 체포된 것을 가지고 그가 전향하고 간첩으로 되었다는 누명을 들씌우고 처형하고 말았다. 

중국 동북지방의 동만에서는 1932년 11월부터 35년 말까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내에서 반《민생단》투쟁의 좌경적 오류로 인하여 2000여 명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희생되었다. 그 원인은 만주성위나 동만특위, 각급 현당과 구당조직의 책임적 위치에 있었던 일부 좌경기회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이 패권주의, 출세주의의 정치적 야망에 있었다. 만주성당은 동만당지도부의 간부선발과 배치에서 종래의 조선인 중심주의로부터 중국인 중심주의에로 전환할 데 대한 비밀지령을 하달하였다. 그 이유는 소수민족이 다수민족을 지도할 수 없다, 조선혁명가들이 지난날 민족주의운동이나 종파에 관계하였던 사람들이어서 간부로 될 수 없다, 조선민족해방은 1국1당제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반《민생단》투쟁에서 희생된 수는 전장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수를 훨씬 능가하였다. 이것은 세계공산주의운동역사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희세의 비극이며 우매와 무지의 극치였다. 

▲ 김두용 [사진 : 필자제공]
▲ 김두용 [사진 : 필자제공]

4. 재일조선인운동가 김두용

김두용은 1903년 함남도 함흥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소학교 교장을 하고 있었다.  소학교를 졸업한 후 도일하고 금성(錦城)중학교, 구제3교, 도쿄제대 미학미술사학과(중퇴)로 진학하였다. 도쿄제대 재학 중에 신인회, 일본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에 소속하고 집필활동을 하였다. 또한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 도쿄지부의 후신인 무산자사의 잡지들에서도 집필을 하였다. 30년의 첫 검거 이후 몇 번에 걸쳐 검거 투옥되었다. 해방 후 재건된 일본공산당 중앙위원후보 및 조선인부 부책임자, 재일본조선인연맹의 기관지 《해방신문》의 주필로서 활동하였다. 47년에 북부조선에 귀국하여 48년 3월 북조선로동당 제2차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지금까지 해방 후 40년대 후반의 재일조선인운동에서 조선혁명과 일본혁명간의 관계에서 김천해(일본공산당 조선인부 부장 및 재일본조선연맹 고문)는 민족적인 입장을 중시하고, 김두용은 일본혁명을 중시하였다고 평가되어 왔다. 이러한 이해는 조선혁명과 일본혁명을 2원적으로 대립시키는 인식에 이어지는 것으로 된다고 할 수 있다. 물어야 할 중요한 점은 그들과 일본 공산당의 국제주의의 내실과 의미가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일본 공산당이 조선인 당원인 그들의 국제주의의의 뜻을 이어받아 공산당의 강령과 노선에서 진짜 국제주의가 실천되었는가 어떠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일본패전 직후의 일본 공산당과 김천해, 김두용의 3자 간에서는 일본혁명과 함께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식민지착취와 군국주의에 반대하여 그 권력의 핵인 천황제를 타도한다는 점에서 일치되고 있었다. 이 2가지의 과제의 결합은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입장에 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일본 공산당의 자세는 그 후 크게 변화하였다. 46년 2월의 제5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당면한 기본목표》의 항목 중에서 《조선의 완전한 독립》은 제외되고 같은 해 재일조선인운동에 관한 《8월 방침》(46년 8월)에서는 《각지에 있는 조선 인민의 세포나 후라쿠션은 될수록 일본공산당의 지역세포나 후라쿠션에 가입하고 일본 당원과 일체로 활동한다》는 것, 또한 《조련은 될수록 하부조직의 노골적인 민족적 편향을 억제하고 일본의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지향하는 공동투쟁의 일환으로서 그 민족적인 투쟁방향을 내놓을 것이 필요》하다고 명시하였다. 

김두용은 《8월 방침》이 나온 다음 해의 47년 《전위》에 쓴 2개의 논문에서 《우리들의 운동은 일방에서 조선의 민주주의민족전선에로, 타방에서는 일본의 민주주의혁명운동에로 쌍방에 다리를 걸고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이러한 생각을 완전히 청산해야 할 시기에 도달하였다》고 하여 일본의 민주주의혁명운동에 전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김두용의 조선혁명과 일본혁명과의 호상연동이라는 초기의 인식이 여기서는 양자택일식으로 운동론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김두용의 국제주의의 분열이 있고 그를 조건지은 일본공산당의 조선인식과도 관련되고 있고 일본 공산당의 전후혁명로선의 문제성도 나타나고 있다. 

김두용은 논문을 쓴 직후인 47년 6월에 북부조선에 귀국하였다. 이 귀국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 그러나 본래 민족적인 과제와 국제적인 과제를 혼연일체로 강조해온 그의 귀국이 일본이라는 땅에서 이제 활동의 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지난날 해외조선독립운동은 주위의 압력에 의하여 많은 우여곡절을 겪지않을 수 없었고 독립운동가들은 큰 고뇌를 체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은 이를 악물면서도 거주국 혁명에 이바지할 것을 국제주의의 책무라고 인식하여 민족적 이익과 국제적 이익을 바로 결합시키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주변의 큰 나라들의 혁명을 위하여 흘린 조선사람들의 피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현대수정주의가 대두하면서부터는 국제주의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별반 없어졌다. 
러시아 10월혁명 때로부터 100년이 넘었으나 그 결과 탄생한 소련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연해주의 조선인이 중앙 아시아에로 집단이주 당하여 80년을 넘었다. 이러한 사태는 당시의 국제주의의 내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해외조선독립운동에서의 국제주의실천의 경험은 진짜 국제주의는 대국에서가 아니라 소국에서만이 실천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반제국주의, 반식민지주의, 반패권주의의 국제적 연대를 어떻게 구축하는가, 조선의 경험은 그 물음에 응답할 수 있는 높은 질을 담보하고 있었다는데 큰 역사적인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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